진정한 해방의 정치 영화를 꿈꾸며
영화는 그 고유한 특성으로 인해, 정신분석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정신분석과 영화는 공통점을 지닌다. 우선 ‘힐링’에 관여한다는 것, 그리고 그 힐링의 정치성 논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성해방이 인간해방의 필요조건’이라는 정치적 전제를 지니며, 영화도 그러한 프로이트의 견해를 사실상 공유하고 있다.
정신분석과 영화의 ‘힐링’, 같음과 다름
그런데 프로이트의 위대한 문명비판서인 <문명 속의 불만>을 읽으면 인간해방을 부르짖었던 프로이트의 문명‧사회 비판의 결론이 생각보다 진보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맥이 빠진다. 그 이유는 ‘죽음충동’ 개념의 도입과 무관하지 않다. 잘 알려져 있듯, 프로이트는 후기에 죽음충동 개념을 도입했다. 프로이트의 후기 저서나 글들을 편견 없이 읽으면, 그의 죽음충동 개념은 실상 생물학적 또는 자연철학적 관점에서 설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기체는 무기물의 상태, 즉 죽음 또는 ‘열반의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경향을 지닌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나 이견이 없다. 문제는 프로이트가 자연철학적 관점의 죽음충동 개념을 현실 즉 ‘임상’과 ‘문화 및 정치, 사회’에 적용할 때 생기는 논리적 비약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프로이트의 이론적 난제를 발견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신경증 치료를 위해 성억압, 그리고 삶의 충동(에로스)을 해방시켜야 한다. 그러나 역시 프로이트에 의하면, 그 해방 역시 ‘천상의 권력’인 죽음충동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그렇다면 억압된 에로스의 해방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프로이트의 문제 설정의 오류는 라캉이나 지젝에 와서 아무 맥락없이 “죽음충동이 우리를 해방시켜준다”는 무책임한 이론으로 반전되었다. 그와 반대로, 들뢰즈는 죽음충동 개념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탈주로’의 실체를 알 길이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문화를 개인의 충동과 지나치게 대립적으로 설정한 것 또한, 프로이트가 범한 오류다. 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문화와 개인의 사랑(성)을 대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문화 속의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로 개인(남녀)간의 사랑을 꼽는다. 문화와 개인의 충동만족이 양립할 수 있는 ‘나름대로 평등한’ 사회를 그는 경험하거나 상상할 수 없었기에,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에서,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프로이트의 진정한 딜레마는, 그의 자유주의적(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임상 및 문화 이론에서 탈출구 없는 염세적인 이론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사랑으로의 도피’라는 낭만적인 처방도 사회적 차원에서의 해방을 위해서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집단치료에 대한 프로이트의 질문은, 오늘날 다른 방식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즉, 그 질문은 ‘신자유주의로 인해 사람들이 받은 상처, 집단적‧정신적‧물리적 외상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로 수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성 억압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은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을 파괴와 좌절로 이끄는 원인은 미래에 대한 불안, 비인간적인 대우로 인한 극도의 모욕감, 자존감의 하락 등이다. 병든 사회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병들 때 이들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병든 사회 자체를 치료하는 일이다. 사회적 안정망으로서의 복지국가, ‘자상한, 좋은 엄마와 같은 국가’, 피케티가 말하는 사회적 국가가 절실하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고전적 신경증’과 구분되는 오늘날의 신경증 또는 나르시시즘적 성격장애의 특징을 살펴보자. 현대인은 성충동, 공격적 충동에 대한 억압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이는 ‘좋은 아버지’, 즉 ‘정당한 권위’의 부재로 인한 것이다.
오늘날의 권위는 허용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억압하는, ‘억압적 탈승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죄의식의 부재, 정확히 말하면 ‘죄의식의 내용 역전’이라는 현상을 동반한다. 즉 충동만족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다. 이는 충동만족을 가능하게 하는 권위에의 복종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이 때 죄의식의 정체는, 적나라한 충동만족을 권하는 권위에 복종하지 못해 생긴 죄의식인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는 자신의 존재를 지탱해줄 권위로부터 버림받아 자신이 파괴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멜라니 클라인이 말한 ‘멸절의 불안’이다. <베테랑>에서 유아인은 성과를 원하는 재벌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못해 죄의식과 불안을 느낀다. 버림받고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 실제로 영화에서 아버지는 그렇게 아들을 협박한다. 그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불안과 분노를 타자에게 투사해 타자를 공격한다. 재벌이라는 점만 제외하고, 이 영화에서 유아인은 현대인의 보편적인 병리를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사회가 이만큼 허용적이 되었는데, 왜 개인은 더 병드는가? 통제와 함께 사회적 안전망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헨리 로웬펠드(Henry Lowenfeld)와 옐라 로웬펠드(Yela Lowenfeld)는 이러한 사회에서 개인의 초자아는 현실의 부모가 아닌, 환상 속의 부모 이마고(Imago)(1)를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자아가 미처 통합되지 못한, 생후 초기의 유아는 잔인한 초자아로 인해 불안과 고통을 느낀다. 현실의 부모와 사회는 적어도 충동 만족에 대해서는 허용적이지만, 개인의 환상 속 부모 이마고를 반영하는 초자아는 폭력적이다. 이 ‘폭력적인 초자아’의 존재로 인해, 현대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불안과 우울, 무가치함, 절망에 시달리며 심각한 경우에는 자살에 이른다. 또는 유아인처럼 폭력적인 초자아에 복수하기 위해 자신의 공격성을 타인에게 투사해 폭력 등의 반사회적 행위를 일으키기도 한다. 이는 프로이트가 예상하지 못했던 현대사회의 고유 특징이다.
로웬펠드의 이러한 분석은 물론 타당성이 있으며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만 한다. 현실의 허용적인 부모와 사회가 겉으로는 허용적으로 보이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병폐가 만연한 대한민국 사회는 돈을 무기 삼아 더욱 억압적인 초자아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덧붙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프로이트가 미처 하지 못했던 분석과 처방을 완결시킬 수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병든 사회로 인해 병들어 있는 많은 사람들이 ‘나는 완전히 자유롭고 허용적인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믿는다는 사실, 그리고 이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이론적, 심리적 근거를 전혀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충동만족(물질적 이득, 성충동, 공격성 충족)만을 목표로 삼는 오늘날과 같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건강한 자아를 갖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운 좋게 훌륭한 부모를 만난 아이들은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사회 속에서 어렵게 삶을 지탱하고 있는 부모에게 “아무리 어려워도 아이에게 훌륭한 부모가 되라”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부모 역시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한 인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같이 ‘거짓 해방’된 사회에서 성충동은 자연스럽게 폭력성을 동반한다. 영화 <베테랑>에서 유아인은 여성과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한다. 정당한 권위와 정의가 부재한 사회에는 성은 존재해도 사랑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베테랑>의 유아인에게 여성은 쾌락의 도구일 뿐이다. 그는 임신한 유인영을 폭력으로 떼어놓으려 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성폭력 문화는 권위주의의 산물인 동시에, 자본과 권력만이 도덕의 기준이 돼버린 오늘날의 성해방은 사랑의 부재로 귀결된다. 왜 오늘날 성은 해방되었음에도 더욱 병리적인 모습을 띠는가? 왜 개인의 자아가 건강하게 발달하지 못하는가? 이는 앞서 언급했듯 좋은 아버지, 즉 정당한 사회적 권위의 부재 때문이다. <베테랑>에서 재벌 아버지는 정당한 권위의 담지자가 아니다. 폭력, 자본, 쾌락만을 추구하는 무자비한 아버지다. 현대사회에서 진정으로 해방된 것은 성이 아니라 폭력과 악이다. 적나라한 성 이면의 폭력. 정확히 자본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오늘날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가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시대이다. 이 사회는 권력 그 자체를 정의라고 여길 만큼 부패했다. 정당한 권위와 규범이 사라지면 악과 선이 뒤바뀌는 극단적 절망의 시대가 도래한다. 이토록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가나 심리치료자들은 개인의 문제를 사회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인문사회학자들은 자유주의와 완전경쟁시장을 여전히 옹호한다.
<베테랑>에서 유아인은 개인차원에서 치료되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다. 그의 병리적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가족과 사회의 문제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유아인의 아버지는 우리 사회의 부패한 사회적 권력의 상징인 ‘재벌 아버지’이다. ‘서민’의 아이들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노력해도 성공은 고사하고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지 않는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병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기주의가 극도로 만연한 한국사회에서 개인은 안정감과 자존감,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없다. 정상적인 성충동과 공격성이 신자유주의 시대에 와서 폭력과 융합한다. 어떤 이에게는 그것만이 허물어져 가는 자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멜라니 클라인에 의하면 성도착증, 또는 성중독은 파괴 불안에 휩싸인 연약한 자아의 병적 자기보호 방식 중 하나다. 투사적 동일화, 즉 자신의 존재를 파괴한(파괴하는) 존재(현실, 또는 환상 속 부모의 이마고)를 공격하거나 병리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려고 하는 것이다.
진보적인 <설국열차>에 진보성이 없는 이유
프로이트가 <문화 속의 불만>에서 “문화가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욱 억압을 느낀다”고 토로했듯이, 필자가 말하는 ‘영화 속의 불만’은 영화가 충동을 마음껏 해방시켜 주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억압을 느낀다는 것에 있다. 영화는 (성)해방의 장소로서의 기능을 오래 전에 상실해버렸다. 그렇다면 오늘날 영화의 기능은 무엇인가? 영화가 ‘억압적 탈승화’로 기능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해방의 정치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제작과 보급 등 구조적 측면에서 자본에 종속되는 영화의 한계 때문에, 영화가 진보적이기는 어차피 어렵다”는 자위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영화산업 때문에 영화가 보수적이 된다는 것은 어쩌면 합리화일 수도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 즉 작가, 감독, 배우가 진정한 진보를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설국열차>는 분명히 진보적인 주제의 영화다. 하지만 왜 그 영화를 보고 진보적 영화보다는 한 편의 코미디를 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일까? ‘지나치게 진보적이어서’ 현실감이 전혀 안 느껴지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나 냉소적이고 목적성 없는 주인공의 개그맨 같은 태도 때문일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눈에는 덜 진보적으로 비칠 듯한 영화, <엘리시움>이 차라리 내 눈에는 더 진보적으로 느껴졌다. 그것은 <설국열차>에는 없는 현실감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필자는 우리나라에서는 영화가 그나마 진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분야, 예컨대 학문은 더 보수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사상이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있고, 일부 ‘공산주의자’라고 불리는 진보가 활동하고 있지만, 현실적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한 채 혁명과 공산주의만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매우 진부하며, 오히려 관념적이고 보수적인 이론으로 느껴진다. 학문적 담론이 진정한 진보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가 우리에게 나아갈 길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나마 영화는 ‘표현의 자유’라는 고유 특성으로 인해 덜 보수적이라고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코미디 영화나 조폭 영화를 넘어서 보다 진지하고도 재미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일인가? 꼭 좁은 의미의 정치영화가 아니더라도, 사회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은 결국 영화인들의 의지와 연구, 결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영화산업이 자본의 지배에서 자유롭지 않다 해도, 일말의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시네마 천국>의 토토처럼 영화를 보면서 진정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던 시대가 그립다.
글·홍준기
독일 브레멘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프로이트 라깡정신분석연구소(www.freud-lacan.co.kr)의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라캉과 현대 철학>,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 <라캉과 현대철학> 등이 있다. 역서로는 <라캉과 정신분석 임상: 구조와 도착증>, <강박증: 의무의 감옥> 등이 있다.
(1) 융의 「리비도의 변형과 상징」(1911)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이마고(Imago)'는 철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미지(Image)'와 관련이 깊은 단어다. 하지만, 단순한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의 반영이 아니라 상상 속의 표상이다. 예를 들어 실제로는 온화한 아버지에 대해, 환자는 상상 속에서 ‘무서운 아버지’라는 이마고를 만들어낼 수 있다. 라캉은 가족의 세 가지 콤플렉스를 특수한 이마고와 연결지었으며, 1946년에 이마고 개념을 공식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