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 어른대는 국가, 열등감 투사된 환상

[한국판 창간 1주년 특집] 국가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2009-10-06     변성찬|영화평론가

“민족국가가 새로운 것이고 역사적인 것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면, 민족국가가 정치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민족들은 언제나 기억할 수 없는 과거로부터 나타난다.”(베네틱트 앤더슨, <상상의 공동체>)

한국 영화 속에서 ‘국가’의 재현 시도는, 한국 사회 전체의 ‘민족주의적 감성’의 부침과 일정한 상응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세기말(1997년)에 있었던 ‘국제통화기금(IMF) 체제’라는 국가적(민족적) 굴욕의 체험과 2002년에 있었던 성공적인 ‘월드컵’이라는 국가적(민족적) 자긍심의 체험은, 국가를 재현하는 한국 영화들의 상황적·정서적 배경이 되고 있다. IMF 직후 등장한 일련의 영화들(1999년의 <쉬리>(강제규), 2000년의 <공동경비구역 JSA>(박찬욱), 그리고 2002년의 <2009 로스트 메모리즈>(이시명) 등)이 그 굴욕감이라는 비극적 정조를 띠고 있다면, 월드컵 이후 등장한 일련의 영화들(2005년의 <천군>(민준기), 2007년의 <신기전>(김유진) 등)은 그 자긍심을 신화적 과거를 배경으로 하는 상상적 놀이(이른바 ‘퓨전사극’이라는 장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후자의 자긍심 또는 상상적 대리만족은 오로지 ‘신화적 과거’로의 회귀를 통해 가능했다는 점에서, 전자의 굴욕감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미완의 국가, 영화 속 대리만족

한국 영화에서 재현되는 국가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미완의 국가’ 또는 ‘불완전한 국가’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미완’이라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아직 근대적인 ‘민족국가’(통일국가)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고, ‘불완전’하다는 것은 그럼으로써 대한민국은 한 국가로서의 ‘주권’을 온전히 행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를 재현하는 한국 영화들은 하나같이 이 ‘미완’과 ‘불완전’이라는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결여의 느낌을 그 정서적 추동력으로 삼고 있다. 국가의 문제(완전한 민족국가로서의 정체성 문제)를 재현하고자 하는 한국 영화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것이 강한 ‘장르적 욕망’ 또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대한 욕망’과 결합돼 있다는 것이다. 흔히 그 영화들은 많은 물량의 투자를 필요로 하는 ‘액션’ 또는 ‘공상과학’(SF) 등과 같은 남성적 장르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국가를 재현하는 한국 영화들은 미완의/불완전한 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라는 자의식과 할리우드를 모델로 하는 영화적(장르적) 욕망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만들어지고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그 장르들은 미완의/불완전한 국가라는 (무)의식에서 비롯되는 결여의 느낌을 고통스럽게 반복하거나 상상적으로 만족시키는 무대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 영화들이 보여주는 일종의 ‘시간여행’이다. 텍스트 안팎을 가로지르는 과거로의 시간여행.

먼저, 텍스트 내적 시간여행을 보여주는 일련의 영화들이 있다. 백문임이 ‘민족-국가를 서사화하는 한국 영화’라고 부른 일련의 영화들이 그것이다(‘최근 한국 영화의 트라우마 상태’, <한국 영화의 미학과 역사적 상상력>). 그중에서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유상욱·1999),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천군>은 영화의 서사 자체가 일종의 ‘시간여행’으로 구성돼 있다. 앞의 두 영화는 미완의/불완전한 민족국가를 낳은 원초적 순간인 일본 식민지 시대로 돌아가 그 고통과 원한을 반복하고 있으며, <천군>은 일본의 침략을 물리친 임진왜란 시기로 돌아가 그 고통과 원한에 대한 상상의 복수를 감행한다. 흥미로운 것은, 백문임의 지적처럼, 이 영화들이 “가상의 현재와 미래를 상정하고서 과거로 떠나는 대체 역사의 내러티브를 취하면서 결국 변화하지 않은 현재를 재확인”하는 데 머문다는 것이다. 그 현재란 말할 것도 없이 ‘미완의/불완전한 민족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다. 조선이 식민화되는 원초적인 순간으로 돌아간 <한반도>(강우석·2006)는 웅변적인 어조로 그 ‘변화하지 않은 현재’의 비극성을 재현해낸다. 그 ‘변화하지 않은 현재’는 세기말에 있었던 IMF 체제라는 또 하나의 ‘외상적 체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IMF의 상처, 그리고 쉬리와 JSA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출발점으로 일컬어지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성공’은 IMF 체제라는 외상적 체험과 그것에서 비롯된 ‘민족주의’ 열풍과 무관하지 않다. <쉬리> 신화는 당대의 사회 분위기와 맞물린 ‘쉬리 신드롬’ 현상으로 해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평론가 김경욱의 다음과 같은 말은 그러한 정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쉬리>가 <서편제>의 흥행 기록을 넘어섰을 때, 제작사인 강제규필름은 서울극장 3관에서 신기록 수립을 자축하는 행사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여자 주연배우였던 김윤진은 ‘우리 영화 기록 경신에 이어 <타이타닉>의 기록도 깰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그러자 언론에서 일제히 <쉬리>가 <타이타닉>의 기록을 경신할 수 있을지 점치는 기사를 싣기 시작했고, <쉬리> 관람은 곧 애국이라는 도식이 더욱 거세게 번져나갔다. IMF 경제위기를 ‘금 모으기 운동’으로 극복하려 했던 국민은 이런 논리에 크게 공감했다. 민족주의 기제가 작동한 것이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현상은 그 영화들이 보여주는 텍스트 외적인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국가를 재현하는 한국 영화들을 발표된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그 영화들이 재현하는 시간적 배경이 점점 더 과거로 향하고 있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본격적인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포문을 연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가 ‘현재’를 그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천만 관객 시대를 열며 2004년을 화려하게 장식한 두 편의 영화 <실미도>(강우석)와 <태극기 휘날리며>(강제규)는 각각 1970년대와 5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물’이었고, 2005년의 <천군>은 임진왜란이 있었던 조선 중기로, 2008년의 <신기전>은 세종 30년이라는 조선 전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퓨전사극’이었다.

신자유주의가 호명하는 민족의 역설

분명 IMF는 한국 사회의 집단적 외상이었으며, 그것은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낳았다. 일제의 식민통치와 분단 경험, 그 과정에서 서사화된 한민족의 민족적(인종적) 단일성이라는 신화는 한국 사회에서 민족이 단군 이래 내려오는 ‘원초적인 혈연 공동체’로 여겨지는 경향을 만들어왔으며, 한국인들은 민족 공동체라는 개념에 거의 본능적인 애착심을 보이고 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징후적인 ‘기억의 범람’은 이러한 한국적 특수성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세기말에 있었던 IMF 관리체제라는 집단적인 외상적 체험과 그에 따른 정체성의 위기는 그러한 경향을 강화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징후적으로 이뤄져온 대중문화의 ‘복고 열풍’은 근본적으로 IMF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가속화하는 ‘세계화’ 추세 속에서 지배체제가 당면한 새로운 ‘정체성 전략’상의 곤란과 관련이 있다. ‘세계화 전략(이념)’이란 ‘민족-국가’의 이름으로 자본의 ‘탈민족적 이해’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근본적 자기모순과 자가당착에 직면한다. 이러한 자가당착은 ‘정체성의 혼란’을 그만큼 가중시키고 있으며, 그럴수록 민족적 정체성을 더 먼 ‘기원’(origin)으로부터 ‘상상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욕망을 낳고 있는 것이다(그 욕망을 좀더 극단적으로 실현하는 것은 한국 영화가 아니라 일련의 TV 사극들이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점은, 그 시간적 배경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영화들이 품고 있는 정조가 비극성에서 희극성으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쉬리>에서 <한반도>까지가 일종의 무거운 ‘비극’이었다면, <천군>과 <신기전>은 가벼운(또는 유쾌한) ‘퓨전희극’이었다.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비극성’에는 남한과 북한 사이의 일종의 불가능한 ‘형제애’에 대한 확인과 호소가 있다. 이 영화들은 북한이라는 ‘못난 형’과 남한이라는 ‘잘난 동생’의 비극적인 만남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못난 형’이 ‘가문의 영광’을 위해 ‘잘난 동생’에게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천군>은 현대사의 외상적인 순간 너머의 과거로 돌아감으로써 남한과 북한 군인들의 성공적인 ‘연대’(형제애)를 재현해내고, 그럼으로써 한 편의 퓨전사극(또는 코믹사극)이 된다. <신기전>은 ‘신기전’이라는 강력한 신무기를 개발해 외적을 물리치는 데 성공하는 ‘위대한 순간’을 상상적으로 재현함으로써, ‘현재’를 배경으로 하는 <유령>(민병천·1999)이 이뤄내지 못했던 ‘비원’(悲願)을 이뤄낸다. 그런데 그 ‘희극’의 정점에 있는 한 편의 영화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2007년에 떠들썩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디워>일 것이다.

<디워>의 애국주의, 그 돌발적 필연

   
▲ 영화 <디워> 포스터
2007년 여름, 한국은 ‘<디워> 논란’으로 뜨거웠다. 논쟁의 핵심에는 영화 <디워>의 노골적 ‘애국주의 마케팅’ 문제가 있었다. 심형래 감독은 착한 이무기가 여의주를 물고 비상하는 마지막 시퀀스에 곧바로 자신의 스틸 사진들과 영상편지를 담은 에필로그를 이어붙이는 과감한 실험을 감행한다. 한국(정확하게는 ‘조선’)의 전래 민담에서 연원한 이무기가 등장할 뿐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미국 배우들이 연기하는 미국의 영웅 이야기가 되어버린 본편과, 한국 영화의 세계화를 위해 고난과 역경을 딛고 우뚝 일어선 한국의 한 위대한 영웅에 대한 휴먼 다큐멘터리인 에필로그, 이 두 편의 영화를 하나의 작품으로 엮어내는 과감한 혁신. 본편의 마지막 시퀀스 배경음악이자 에필로그의 전주곡인 민족의 노래 <아리랑>은, 그 두 편의 이질적 텍스트를 하나로 엮어내는 역할을 하기 위해 ‘동원’된다. 심형래 감독 본인은 비충무로 출신의 설움을 호소한 바 있지만, 그의 애국주의 마케팅 전략은 충무로가 만들어내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그것을 가장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디워>는 오로지 그 노골성으로 인해 한 편의 ‘희극’이 되었다. <디워>는 <쉬리>와 <공동경비구역 JSA>의 ‘비극’에 대한 ‘희극적 반복’일 뿐이다.

글·변성찬
영화평론가. <씨네21> 등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인디포럼작가회의(http://indieforum.org/)에 ‘변성찬의 영화성찬’ 코너를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