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식 '보편주의' 향한 중국의 야망

2015-10-30     안 청

중국이 눈부신 발전과 더불어 세계적인 경제대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듯하다. 이러한 가운데, 사람들은 중국이 주장하는 보편성과 새로운 세계성의 능력에 대해 자문하고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보편성’에는 보편적인 것만 빼고 모든 것을 아우른다는 역설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그래서 중국의 관점에서 보편성을 거론한다는 것은, 이러한 역설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셈이다.

지난 2천 년 간, ‘중국(中國)’은 스스로를 ‘세계의 중심’이라 여겼다. 나아가 자국이 곧 세계라 여기는 독특한 발상을 보였다. 20세기 초반까지, 중국은 스스로를 기꺼이 ‘천자(Tian zi)’가 지배하는 ‘천하(Tian xia)'라 칭했다. 중국의 규범집에 등장하는 수많은 문구들은 “중국은 세계다, 즉 문화 확산의 중심지다”라는 생각을 강조하고 있다. 공자의 <예기>엔 천자가 지구의 형상을 한 정방형의 광장 한복판에 앉아, 봉건 제후들을 맞이하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광장 외곽에는 ‘오랑캐들’이 앉아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 종족이 아닌 의례, 즉 문명화된 풍속에 대한 무지로 오랑캐를 구분했다. 물론 문명인은 중국인이었다. 이러한 묘사에 얼마나 상징성이 담겨있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지난 2천 년 간 제국주의 사상과 공존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206년부터 서기 220년까지 존속했던 한 왕조가 유라시아 대륙의 극동 지역에 팍스 시니카를 퍼뜨렸다. 반면, 유럽 대륙에서는 팍스 로마나가 기승을 부렸다. 당시 중국 전역에는 이미 “한 왕조가 천하를 통일한다”란 정치적 슬로건이 나돌았다. 이 왕조가 중국의 첫 황제인 진시황이 통일시킨 중국 영토를 4세기 간 유지시키며, 중국문화(한문화)와 문자(한문), 그리고 현재 중국의 ‘지배민족’으로 분류되는 민족(한족)에 그 이름을 붙였고, 중국 정체성의 틀이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

이러한 상징적인 힘의 확산은 지형적인 측면에서 동아시아 전체, 특히 중화권의 여러 국가들(한국, 일본, 베트남 등)을 중화시켰다. 이들 국가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그리고 여러 역사적 맥락에서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 구체적으로 문자체계, 정부구조, 관료모델, 사회계층 등의 개념을 중국에서 차용했다. 또한 중국에서 태동했거나 중국에 동화된 종교를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이들 국가의 국민들은 인도에서 유입된 불교를 7, 8세기부터 중국종교로 인식했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은 중화권이 침략을 받거나 ‘오랑캐’에 의해 점령될 경우,  이들 오랑캐들이 결국 중국문화를 수용할 것이라 생각했다. 이 생각은 몽골 왕조인 원(1264~1368)과 만주 왕조인 청(1644~1911)에 의해 역사적으로 입증됐다. 중국은 19세기 중반에 와서야 비로소 다른 국가와 동등한 관계에서 외교사절을 파견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중국은 조공제도를 운용했었고, 주변국은 조공국으로서 중국에 충성을 맹세했었다. 

사실 중국은 아편전쟁(1)을 필두로 서구 열강의 공격을 받고서야, 비로소 중국도 다른 국가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국가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중국의 문화가 곧 세계의 문화”라 하던 중국의 세도가 시련을 맞이한 셈이다. 1898년 원 왕조 말기, 중국의 지식층은 제국역사상 처음으로 일본 메이지 시대(1868~1912)를 모델로 한 입헌군주제를 도입해 정치개혁을 시도한다. 하지만 캉유웨이가 이끄는 대다수 지식층은 유교사상과 전통에 뿌리를 둔 보편적인 유토피아에 의존한 개혁주의를 주도했다. 

이러한 개혁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시대의 전환기에 중국의 보편성에 반발하며 국가 정체성을 공고히 했다. 반면 중국은 1898년에 추진한 개혁주의 운동이 실패하면서 진정한 국민국가의 수립을 용인하지 않는 전통규범에 계속 의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정치구조의 공백이 생겼다. 이 공백은 20세기 혁명으로도, 문화주의적 선택으로도 메울 수 없었다.

중국의 문화적 선택에는 ‘현대화를 추구하는 사회 속에서의 유교의 생존’이란 본질적인 문제가 전면에 깔려 있다. 1911년이 되서야 비로소 자취를 감춘 유교사상은 지난 2천 년 간 제국주의에 사상적, 제도적 토대를 제공했다. 따라서 1919년 5·4 운동(반봉건·반제국주의 운동)때, 유교의 유산은 중국의 현대화를 가로막는 병폐의 원천이자, 주요 척결 대상이 된다. 사람들은 “공자를 처단하라! 공자센터를 없애라!”라고 외쳤다. 이후 유교의 유산은 1966~1976년 문화혁명기 때, 정확히는 린뱌오와 공자에 대한 반대 캠페인이 절정에 달한 1974년 집중적으로 파괴됐다. 

그렇게 파괴됐던 유교사상이 1970년대 말 부활했다. 부활한 유교사상이 마치 일본과 아시아의 4마리 용(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의 경제도약의 동력이 될 듯 여겨지고, 권위주의적인 일부 지도자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시아의 가치’에 대한 주요 담론이 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유교적 가치 앞세운 중국 보편주의 담론
 

1980년대부터 유교의 가치에 대한 열기가 중국을 강타했다. 이를 통해 중국은 문화혁명과 마오쩌둥 시대에서 벗어났다.(2) 이 기간,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하나는 1984년 공산당 고위 관료들의 주도로 베이징에 공자재단이 들어선 것이다. 다른 하나는 1989년 6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난 민주화 학생 시위에 대한 유혈 진압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몇 개월 후, 동유럽에서는 소비에트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됐다.  

중국 지도자들은 소련 모델을 원치 않았다. 따라서 이들은 경제발전을 보장할 목적으로 정치적·사회적 안정에 필수적인 신권위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그리고 통합과 중국문화 연속성의 상징을 대변하는 ‘신유교’ 사상을 설파하며 권위주의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1990년 초반, 덩샤오핑은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했다. 그는 중국 모델로 싱가포르의 유교적인 권위주의 지도자 리콴유(3)를 거론하며 “부자가 됩시다!”란 슬로건을 내세웠다.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유교적’ 가치, 즉 가족사랑, 위계존중, 교육열, 일중독, 절약정신 등을 마치 아시아 경제발전 모델의 성공 요인인 양 소개하며 문화주의적 논거를 들먹였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발전의 장애물로 여겼던 막스 베버나 칼 마르크스가 동아시아에서 발전요소로 둔갑한 셈이다. 이는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유교사상이 과도한 이기주의와 개인주의, 쾌락주의 등의 서구 현대사회의 문제의 예방책이 될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현재도 중국의 공식 담론에선 유교적 가치에 대한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유교사상의 범세계화에 대한 꿈

 

1980년대, 일부 지식층의 의지 표명을 위한 전유물이었던 ‘유교적 가치’에 대한 담론이 현재 영어권을 강타하고 있다. 특히 미국에 깊이 뿌리내린 이 담론은 보편적이거나 보편화할 수 있는 가치, 또는 세계화된 신(新)휴머니즘을 지속 수용할 수 있는 유교적 가치를 미국인들에게 설파하고 있다. 즉 오래전 중국의 보편성을 미국사회에 주도적으로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말 서구의 식민열강들에 의해 파괴됐던 “중국은 세계다”라는 보편성은 향수처럼 회귀하고 있다. 나아가 ‘위대한 중국’의 지배적인 사상으로 무섭게 자리매김하고 있다. 국제적인 규모의 포럼과 심포지엄, 각종 정기간행물을 통해 ‘유교적 윤리와 세계화’, ‘천하 철학’에 대한 담론을 끊임없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유교사상의 범세계화에 대한 꿈은 또 다른 꿈, 정확히 헤게모니에 대한 꿈과 맞물려 돌아간다. 중국의 야망은 ‘아시아’ 담론을 주도하며 ‘위대한 중국’ 건설의 꿈도 실현하고, 아시아의 맹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내세울 보편성은 유럽의 보편성과는 차별화돼야만 했다. 따라서 중국은 문화주의적인 구실이나 ‘아시아의 가치’, 또는 ‘유교적인 가치’를 앞세워 ‘인권 챔피언’인 유럽에 맞서고 있다. 중국은 실패한 마오쩌둥 사상을 상쇄시키고 사회, 특히 젊은 층을 통제할 목적으로 유교사상을 재가동시켰다. 이는 개인의 욕망을 통제해 조화로운 발전을 꾀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유교사상은 집단을 개인보다 우선시한다. 따라서 유교사상은 중국정권의 우선 과제 중에서도 최우선 과제인 ‘사회 안정’을 보장할 수 있다. 후진타오 중국 주석(2003~2013)이 ‘조화로운 사회주의 사회’를 슬로건으로 내세운 이유다.

베이징의 전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와 대만, 서울, 싱가포르의 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유교사상으로 위장된 중국의 신권위주의를 중국 정부의 포석으로 인식한다. 즉 서구를 배제한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구현할 대체재, 자국을 경제적으로 현대화하기 위한 중국 정부의 포석으로 보고 있다. 유교사상은 마치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포스트서구화’ 쯤으로 여겨지며, 중국민주화를 가로막는 아주 유용한 구실도 되고 있다. 결국 베이징 지도자들의 속셈은 유교사상이라는 돌로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려는 것이다.

우선 그들의 속셈은 1989년 6월 천안문 학살 사건 이후, 자신들의 정치적·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마오쩌둥의 유토피아 건설이 실패한 이후, 유토피아 사회주의를 앞세워 새로운 사회 프로젝트와 사회통합 요인을 주창하며 사회전체를 결집하려 애쓰고 있다. 다음으로, 그들은 중국이 세계 초강국이 되리라는 확신을 국민들에게 심어주어, 국가정체성을 함양하고 미화하려고 한다. 이를 반증하듯, 전 세계적으로 확산 중인 공자 연구소는 “중국은 반만 년 역사의 문화와 전통을 지키는 위대한 국민의 국가다”를 단골 슬로건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는 중국의 공식 담론이기도 하지만, 40년 전 유교유산과 문화유산의 파괴에 앞장섰던 홍위병들의 슬로건과도 일치한다. 그런 이들이 유산에 대한 전문지식도 없이 위와 같은 슬로건을 앞세우고 있다.

마지막으로 짐작할 수 있는 그들의 속셈은, 전통을 들먹이며 현대화로 방향을 선회하려는 것이다. 최근까지만 해도, 중국은 동부권의 개발도상국들과 마찬가지로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 갈등하던 중이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중국의 ‘장구한 문화’가 보충적 논거, 즉 중국의 비약적인 발전에 필요한 소프트 파워(Soft power, 정보 과학, 문화, 예술 등이 행사하는 영향력-역주)로 전락한 셈이다.

 

 
글·안 청 Anne Cheng
현대 프랑스를 대표하는 중국 학자로,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재임 중이다.
 
번역·조은섭 chosub@hanmail.net
파리 7대학 언어학 박사. 알리앙스 프랑세즈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독해 등을 가르치고 있다.
 
 
(1) 제1차 아편전쟁은 중국과 영국 간에 1839년에 일어나 1842년까지 이어졌다. 이어 발발한 제2차 아편전쟁은 영국을 비롯한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러시아가 개입했다.
(2) ‘공자 또는 영원한 회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참조, 2012년 9월.
(3) 리콴유(1923-2015)는 1959년부터 1990년까지 싱가포르 총리를 역임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