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로의 엑소더스에 맞서는 중국 농민들
2015-10-30 마르틴 뷜라르
중국은 약 30년 만에 기아문제 해결에 성공했다. 비록 경작지의 비중이 줄긴 했으나(현재 경작지의 비중은 중국 9%, 프랑스 49%), 나름 뿌듯한 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혜택을 본 지역은 동북부 대평원과 남동부와 중부의 광활한 개척지 뿐이고, 그 외 지역에 사는 농민들은 여전히 살림살이가 어렵다. 많은 농민들이 생계를 위해 관광이나 운송 등의 부업이나 도시로 내몰리고 있다. 중국 정부가 약속한 ‘신사회주의 농촌’ 프로젝트는 아직 제자리걸음이다.
이는 빠져 있고 손은 거칠어진 농부, 고된 농사일로 몸이 망가졌으나 건강을 돌볼 여력이 없다. 흙으로 지어 부서지기 쉬운 우중충한 집들, 식량이라고는 달랑 감자 몇 개…. 19세기 이야기가 아니다. 21세기 중국의 농촌 풍경이다!
2012년 12월, 시진핑 주석이 베이징에서 차로 3시간 걸리는 허베이성의 루오투오완을 방문했을 때, 국영 TV에 의해 전파를 타고 중국 전역에 비친 농촌의 모습이다. 중국 정부의 새로운 농촌 지역 프로젝트가 무색할 정도로 방치된 농촌 지역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마오쩌둥이 사회주의 구축을 위해 “폭풍처럼 힘차고 열심히 일어나는 농민 수억명”이라고 칭찬하던 시절은 오랜 옛날이 돼버렸다.
요즘 농민들의 항의 건수가 계속 늘고 있다.(1) 농민들은 중국 공산당원들과 지방 간부들이 자신들을 착취하고 있으며, 대지와 강을 오염시킨 공장주들을 눈감아 주고 있다고 항의한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시진핑 주석은 부임 9개월 만에 ‘신 사회주의 농촌’이라는 현대화 계획의 추진을 위해 농촌지역의 시찰에 나섰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반이 흘렀다. 그러나 ‘신 사회주의 농촌’ 계획은 루오투오완 지역까지 미치지 못했다. 그 때 만난 주민들은 그대로다. 하지만 최근 시진핑 주석의 재방문 소식에 주민들의 얼굴은 금방 밝아진다. “마치 마오쩌둥 지도자를 만난 것 같았어요.” 나이 지긋한 여성이 말한다. “덕분에 우리 마을이 중국 전역에 알려졌다니까요.” 다른 여성이 한술 더 뜬다. 마오쩌둥이 방문하면서 샤오샨 마을이 관광지로 유명해진 것처럼, 이들은 시진핑 주석의 방문으로 인해 이 마을이 관광지로 뜨기를 기대하고 있다.
이미 돌길과 흙길 대신 넓은 도로가 깔렸고, 마을공기가 한층 맑아졌다. 아스팔트 도로 끝에 있는 작은 고지대 마을에 들어서니 새로 지은 주택들이 보인다. 건장한 남자들이 건축일을 하느라 여념이 없다. 정부가 보조금을 약속한 것이다. 저지대 마을에서는 지방 정부가 염화비닐(PVC)로 된 흰색 창문 설치만 허가하고 있다.
고지대나 저지대나 연령은 고령층 중에서도 초고령층, 성별은 여성이 대부분이다. 남성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일하러 갔다. 이장의 말에 의하면, 남아있는 주민들의 대부분은 최저연금을 받고 있는데 매월 약 11위안(약 16유로)에 불과하다. 따라서 아무리 나이가 들었어도 주민들은 계속 땅을 경작하고 있다. 도시에서 일하는 자식들이 맡긴 손주들을 돌보기도 한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한 왕씨 부인이 그런 경우다. 왕씨 부인은 몇 묘(2) 안되는 밭을 경작하고, 돼지 세 마리를 기르는 동시에 손주들을 돌보며 용돈을 받고 있다. 주민들 모두 자녀와 남편, 형제가 보내주는 돈으로 생활한다. 이들이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건 1년에 한 번 정도다.
“사실 왔다간 후에 도로 깔린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어요. 뼈 빠지게 일해야 하는 건 여전해요.”
시진핑 방문에 대한 왕씨 부인의 반응은 비교적 담담했다. 왕씨 부인은 누가 들을까 두려웠던지 따로 조용히 이야기한다. 실상 허베이의 농민들은 가난하다. 작은 땅에서 맨손으로 일을 한다. 그 중에는 중세시대처럼 쟁기에 가죽 끈을 매달아 머리로 끌며 밭을 가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다른 마을 입구에서 만난, 비교적 젊은 여성들은 고향을 떠날 생각이 없다. 여성들은 벤치에 앉아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때까지 수다를 떤다. 한 여성은 딱 달라붙는 블라우스에 미니 스커트, 검은색 스타킹 차림이고, 다른 여성은 탤런트처럼 빨간 반바지와 레이스 달린 상의 차림이다. 두 여성은 고향만한 곳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제가 도시에 가면 뭘 할 수 있겠어요? 여기가 편해요.” 첫 번째 여성이 말했다. 두 번째 여성은 산나물을 캐서 돈을 번다고 한다. “가격을 꽤 잘 쳐줘요. 운 좋게 귀한 나물을 캐는 날에는 60~70위안까지 벌 수 있어요.” 농민가구의 평균 월수입은 페루와 비슷하다. 7백 위안을 넘지 못한다.
마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드물게, 고급 특산물 생산으로 고소득을 올리는 가구도 있다. ‘원숭이 왕의 차’라 불리며 2004년부터 최고 품종 인증을 받은 자스민 차가 그런 특산물에 속한다. 타이핑은 소형 버스만 다니는 안후이성의 작은 마을에 살며, 후앙산의 가파른 비탈길에 피는 귀한 자스민 차로 고소득을 올리고 있다.
“일은 여전히 힘들어요. 그런데 이 차가 최고 품종으로 선정되고서 변화가 생겼죠.” 며칠 전 차 수확을 끝낸 칸 퀸링 부인이 말했다. 퀸링 부인은 도시에 있는 아들에게 전기기사 일을 그만두고 미래가 보장된 자스민 차 수확을 권할까 생각 중이다. 이 ‘마법의 찻잎’은 1992년 1kg당 160위안이었으나 2014년에는 6천 위안으로 훌쩍 뛰었다. 하지만 올해는 시진핑 주석이 추진하는 청렴정책 때문에 가격이 주춤했다고 퀸링 부인은 말한다. 청렴정책에 따라 공무원들에게는 뇌물이나 고급차가 금지된다. 그래서 고급차 주문이 줄어든 것이다. 그 동안 차로 짭짤한 수입을 올린 가구들은 낮은 목조주택 대신 흰 타일로 단층집을 지을 것이다. 목조주택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생활의 편의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에서다.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 덕택에 돈을 버는 ‘차기’ 같은 마을도 있다. 안후이성에 있는 이 마을은 후앙산에서 차로 두 시간 걸린다. 후앙산을 보러온 관광객들이 이 마을에 몰려든다. 차기 마을에는 말머리 모양의 지붕을 갖춘 독특한 집들이 있다. 이 집들을 보려고, 베이징 화가들과 프랑스인 인류학자 쥘리앵 미네가 다녀갔다. 명나라 시대에 생긴 이 마을은 화려한 언덕 가운데 자리잡고 있고, 세월의 흔적으로 반들반들해진 돌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강가에 가면 항상 마을여성들이 빨래 방망이 를 두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찰들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차기 마을은 이제 관광특구가 되었다. 하지만 이 마을에 가는 길이 편하지는 않기 때문에, 관광객이 그리 많지는 않다. 그래서 주민들 은 농사와 장사를 병행하고 있다.
“관광업을 하고 있어요.” 활기 넘치는 모습의 자위에훙 부인이 자랑스러운 듯 말한다. 남편과 함께 일하는 자위에훙 부인은 시어머니와 함께 살던 낡은 집을 팔고 번쩍이는 새 이층집을 샀다. 부인은 “우리가 만든 모텔은 아직 정식허가가 나지 않았어요. 그에 관해서는 지방자치단체와 조율하는 중이에요”라고 설명한다. 수도시설이 완비된 방 여섯 개짜리 모텔이다. 그럼에도 모텔숙박업과 농사(쌀, 차, 옥수수)로는 수입이 충분치 않다. “상하이에서 일하는 딸들이 보내주는 돈이 저희의 주수입이에요.”
자위에홍 부인의 시누이 예후인진 부인은 올케처럼 고정 수입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올케가 말하는 동안, 예후인진 부인은 뜨개질을 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평일에는 허페이의 의류공장에서 일한다. “공장일은 힘들어요. 그래도 수입은 괜찮은 편이예요. 매달 3천 위안(445유로)은 버니까요.” 덕분에 딸을 대도시의 고등학교에 보낼 수 있다. 안후이성에서 최고의 고등학교로 대학에 합격할 가능성이 크다고 자랑한다. 도시에서 괜찮은 직장을 얻으려면 대학 졸업장이 필요하다.
예후인진 부인은 주중에는 공장 기숙사에서 잔다.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는 딸은 주말마다 온다. 남편은 고향에서 중학교 임시교사로 일하며 부모님과 아들을 부양한다. 남편은 토요일마다 집에 온다. 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날은 1년에 고작 두 번, 봄 축제와 여름 방학 때다. 합쳐서 15일이 안 된다. 이렇게, 농촌주민들은 생계를 위해 가족과 떨어져 산다. 농촌은 수입도 빈약하고, 공공 교육시설도 열악하다. 따라서 부모 중 한 명, 또는 둘 다 도시로 일하러 떠날 수 밖에 없는 실정이다. 1979년 개혁 이후 도시로 떠나야 했던 중국인의 수는 무려 2억 4700만 명이다. 이들 대부분은 도시에서 어렵게 살아간다. 농촌에서 상경한 사람들은 보통 도시 원주민들에 비해 사회적 지위와 생활 여건(주택, 교육, 건강)이 열악하다. 그래서 도시에 갔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상당수다.
우중충한 두부 공장에서 만난 두 청년이 그런 경우다. 두 청년이 관광객들을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만나자 강가 반대편으로 데려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 최근 문을 연 자신들의 카페를 보여주었다. 와이파이가 터지는 최신형 카페로 에스프레소나 스무디를 주문할 수 있다.
“이 카페를 연 이유는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닙니다. 젊은이들에게 만남의 공간을 마련해주고 싶었어요.” 29세의 쟈츠가 말한다. 부근에 사는 35세 이하의 청년층은 기껏해야 열 명 남짓이다.
나중에 쟈츠를 다시 만났다. 그는 도시 어린이들을 위한 고급 야영장 두 군데서 일하고 있었는데, 나름 만족스러워했다. 베이징에 사는 어느 기업가가 세운 야영장이라고 한다. 서양 브랜드의 옷을 입고 있는 쟈츠는 베이징을 떠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고향이 살기에는 더 좋아요. 인구가 적어서 단란하니까요. 도시에 갔어도 고향으로 되돌아오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제가 선구자인가 싶다니까요.”
전자상거래에 눈을 뜬 젊은 농민들
여기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후안 마을. 28세의 주야유 부인은 무릎이 찢어지고 반짝이는 장식이 달린 청바지 차림이다. 부인은 어린 아들을 데리고 귀향했다. “허페이에서 고향에 돌아온 지 4년 됐어요.” 컴퓨터 공학을 전공한 주야유 부인은 외국계 기업에서 일했다. 나름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들을 고향의 부모님께 맡기기보다 직접 키우고 싶어 돌아왔다. 그러나 고향마을에는 전공을 살릴 만한 일자리가 없기 때문에, 알리바바가 보유한 중국 최대규모의 온라인 상거래 사이트 ‘타오바오’에서 쇼핑몰을 운영하려고 한다. 그래서 도시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에 와서 살 집을 마련했다. 1층에 거실과 서양식 주방도 있는 집이다. 중국식도 결합된 형태로 집 밖에 있는 아궁이에서 어머니가 식사준비를 하고, 안마당에는 닭들이 활개치고 다닌다. 2층에는 사무실이 있다. 컴퓨터를 비롯한 전문설비를 들일 것이다. 주야유 부인은 온라인 쇼핑몰에서 여성의류를 판매 한다. 공장을 선택해 견본을 주문하고, 자신이 모델이 되어 촬영한 사진을 올린다. 2014년 12월부터는 상품을 다양화했다. 달걀, 닭고기, 차 등 친환경식품으로 도시 중산층을 공략 중인데 잘 되고 있다.
중국에서는 온라인 구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14년 기준 시장 규모는 12조 위안(1조 7250억 유로)을 기록, 이전 해에 비해 20% 이상 성장했다.(3) 고속전철, 도로 등 교통망이 빠르게 구축되면서 상품을 신속하게 배송할 수 있게 됐다. 주야유 부인이 온라인 쇼핑몰 사업으로 올리는 수익은 현재 6~7천 위안(약 890~1037유로) 정도로 허페이의 외국계 기업에서 받던 급여의 두 배다. 남편, 친구들과 함께 인근 영화관, 노래방에 놀러다니기 위해 자가용을 마련할 정도다.
환경오염, 도시 생활환경, 경제성장 둔화로 인해농촌지역 재건운동이 또 다시 필요해졌다. 이러한 움직임을 1990년대에 주도한 인물은 웬티에준 교수다. 베이징 렌민 대학 농업 경제학과의 학장이자 정부 환경보호 위원회 회원이며, 농업은행의 자문위원을 겸하고 있는 웬티에준 교수는 사회의 흐름에 따라 적극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 베이징 외곽에 위치한 세련된 마을에서 만난 웬티에준 교수는 야구캡을 쓰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마치 미국인 교수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웬티에준 교수는 “땅을 지키려는 농민들을 위해 일하는 보수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유쾌하게 농담을 한다. 실제로 웬티에준 교수는 신자유주의와 거리를 두고 싶어 한다. “중국과 미국은 역사도, 국가 현실도 다릅니다. 그런데 왜 중국 농장이 미국방식을 추구해야 합니까?” 웬티에준 교수가 반문한다. “옛날부터 농민들은 농사만 짓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해왔지요.”
2012년에 ‘건축 분야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상을 받은 건축가 왕슈는 웬티에준 교수와 방향은 다르지만 생각의 중심은 비슷하다. 농촌에서 글을 배운 사람들이 사라지면, 전통문화와 함께 수천 명의 마을 주민들이 사라진다. 왕슈는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농촌문화와 도시문화가 어우려져 풍부한 시너지 효과를 내는 ‘마을과 도시 융합형’을 꿈꾼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방향을 바꿔야 한다. 즉 수직적 관계와 사회 계급이 아닌, 수평적 관계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 수평적 관계야말로 농촌문화의 핵심이 아닌가. 왕슈는 농촌지역에 건축학교를 세울 계획을 가지고 있다.(4)
파리 코뮌을 모델로 한 비샨 코뮌의 꿈
이보다 과감한 개혁을 꿈꾸는 베이징 출신 예술가가 있다. 안후이성에 위치한 비샨의 명왕조 마을에 사는 우닝은 “마오쩌둥 식 코뮌이 아니라, 파리 코뮌에서 영감을 받은 비샨 코뮌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우닝은 그래픽 디자이너, 디자이너, 현대예술 대형전시회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또한 잡지 <톈난(Tian Nan)>을 창간했으며, 국내외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예술가 우닝은 모험을 선택한다. 그 정도 명성이면 전시회만 열어도 국내외에서 풍족한 수입을 거둘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만의 영역에 갇힌, 좁은 시각으로 살기를 원치 않는다. 우닝은 “중국의 지도층은 서구식 정책을 도입했습니다. 유럽식 공산주의에 이어 최근에는 미국식 자유주의를 도입했죠. 그러나 이 두 가지 정책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이제 중국 지식인들은 발전의 의미를 새로운 시각으로 창조해야 합니다.” 우닝의 말은, 소수의 도시민들 뿐 아니라 누구나 문화를 누릴 수 있는 발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샨에서 만난 우닝은 이틀 뒤에 있을 결혼식 준비에 한창이다. 하지만 바쁜 가운데 시간을 내서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난징에서 가장 유명한 출판사 대표와 함께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멋진 사찰에 설립한 출판사로 초대했다. 고객은 주민보다 관광객이 많지만 마을의 상징이 되어있다. 최근 우닝이 건설한 노동자 학교는 와이파이가 연결되는 현대적인 카페, 농촌의 비영리 공예품 가게, 농촌 문제를 테마로 추억의 물품, 사진 등이 전시된 회의실이 결합된 형태다.
여전히 농촌에서는 몸을 숙여 옥수수 씨를 뿌리거나 유채를 캐는 농민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여전히 여성들은 해가 뜨면 빨래터로 나와 방망이를 두드리며 큰 소리로 수다를 떤다. 하지만 예전에 비해 미래에 관심을 가지는 주민들이 많아졌다. 전직 교사인 야오린란도 그 중 한 명이다. 아침에 길에서 만난 야오린란은 바지와 푸른색 조끼 차림이었다. 그는 고대 문인들의 골목을 연상시키는 복잡한 마을길로 우리를 데려가더니, 개보수 중인 집으로 들어간다. 야오린란은 우닝의 갤러리에 자기 사진이 걸려있다는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군인 출신의 시인이자 목수를 겸하고 있는 퀴안시안을 만났다. 40여 종의 나무와 10여 종의 꽃이 있는 정원을 구상하는 퀴안시안은 노동자 학교에 다니고 있다. “내 나이 일흔 하나인데, 젊음을 되찾은 기분입니다.” 소박한 집에서 퀴안시안이 당면과 연근을 건네며 말한다.
한편, 왕슈창은 이런 농촌지역의 부흥을 오래 전부터 기다려왔다. 이곳에서는 ‘역사학자’라고 불리는 왕슈창에게는 대학졸업장이 없다. 평생 쌀농사를 지었지만, 비샨에 대한 지식은 매우 해박하다. 우닝이 마을에 오기 전에 왕슈창은 아이들을 위해 마을의 문화유산을 조사했고, 그와 관련해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 남아 있는 가장 멋진 집과 풍경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다. 현재 왕슈창의 스케치 작품이 출판돼 마을역사 학습을 위한 참고자료가 되어 있다. 왕슈창은 서점의 책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농민고객들을 맞는다. 난징 출신의 무용단과 연구원, 사업을 구상 중인 작은 기업의 사장이 마을을 방문하자 왕슈창은 기뻐했다. 많은 농가가 외지 손님들에게 방을 빌려주었다. “사람들이 와서 우리 마을을 구경하는 것을 보면 자부심이 생깁니다.” 근처 공장에서 일했던 마을 여성이 말한다. 우닝은 다음 단계를 위해 뜻을 함께하는 기업가들, 신사업 기금을 모으고 있다. 처음에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지원을 받았다. 하지만 우닝이 마을 입구에서 통행료를 걷는 시스템, 농사와 무관한 기념품 가게들이 늘어나는 것에 반대하자 지방자 치단체의 지원이 중단됐다.
비샨의 주민 모두가 보다 나은 삶과 높은 수익을 꿈꾸고 있는지, 이대로 살기를 원하는지는 알 수없다. 일부 주민은 이 마을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후앙쿤의 예를 들기도 한다. 원래 후앙쿤은 주민들이 떠나 폐허가 되다시피 했었는데, 개보수를 통해 옛모습을 일부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자 일부 주민들이 되돌아와 테마파크처럼 인위적인 관광특구가 된 마을에서 수익을 얻으려고 혈안이 돼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닝이 꿈꾸는 ‘비샨 코뮌’과는 거리가 멀다. 주민의 자발적인 상부상조, 이것이 우닝이 구상하는 마을의 모습이다. 만주식 전통을 유지하고, 권위적인 마오쩌둥 식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농촌지역에서 이처럼 혁신적인 사고를 하는 지식인들은 아직 드물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가 정부 관계자들에게 확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글·마르틴 뷜라르 Martine Bulard
한국 등 동아시아 담당. 주요 저서로 <용과 코끼리의 경주(la Course du dragon et de l’éléphant)(Fayard, 2008) <서구의 아픈 서구>(L’Occident malade de l’Occident)(Jack Dion와 공저 Fayard, 2010) 등이 있다.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졸. 번역서로는 <워크숍 매뉴얼>(2015) 등이 있다.
(1) 2013년도를 기준으로 집계된 항의 건수는 19만 건이 넘는다.
(2) 1묘는 0.66헥타르에 해당한다.
(3) Olivier Vérot의 2015년 5월 15일자 기사 <중국의 농촌 지역까지 확대되는 온라인 상거래 붐>을 참조할 것. www.ecommercemag.fr
(4) 프랑스 건축가 브뤼노 장 위베르와의 대화, <Cité de l'architecture>, 파리,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