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근은 식민 정책의 무기였다
2015-10-30 마이크 데이비스
영국의 작가 찰스 디킨스가 묘사한 노동자들의 황폐한 집이 역사의 기억 속에 각인된 반면, 1876년부터 1899년까지 굶주리던 아이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천만 명 이상의 가난한 농부들이 잔혹한 방법으로, 그리고 이 시기 경제사의 상투적인 설명과 상당히 모순되는 이유와 조건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즉 서유럽에서는 사라졌던 기근이, 같은 반 세기 동안 식민지 전역에서는 맹위를 떨쳤던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네이처>등 과학잡지 구독자들은 1876년부터 1879년도에 발생한 대가뭄이 당시 전 세계 인류의 대재앙이었음을 알 것이다. 인도네시아 자바, 필리핀, 뉴칼레도니아, 조선, 브라질, 남아프리카, 북아프리카에서 발생한 가뭄과 기근에 대해 특필해왔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기후혼란이 열대계절풍 지역 전역과 중국 북부, 아프리카 마그레브 지역에 걸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에 대해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다.
사망자 수는 아주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1845년부터 1847년까지 아일랜드 기근으로 사망한 백만 명보다 10배 이상이라는 참담한 계산이 나온다. 한 영국기자는 프랑스의 스당전투와 미국의 오스터리츠 전투부터 남북전쟁 중 가장 참혹했던 앤티텀 전투까지 재래식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모두 합쳐도, 인도 남부의 가뭄에 희생된 사람 수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 추산했다.(1) 이는 인류역사상 가장 유혈이 낭자했던 내전인 태평천국운동(1851~1864) (2)으로 인한 사망자 수(2~3천만 명으로 추정)와 맞먹는다.
그러나 1876년부터 1879년까지 발생한 대가뭄은,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 후반에 세 차례에 걸쳐 일어난 생존위기 중 서막에 불과했다. 1889년부터 1891년까지 새로운 가뭄이 찾아와 인도와 조선, 브라질, 러시아에 기근이 확산됐다. 에티오피아와 수단에서는 기근으로 인해 전체 인구의 약 1/3이 사망하면서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그리고 1896년부터 1902년까지는, 열대계절풍으로 인한 가뭄으로 열대지역 전역과 중국 북부지역에 피해가 되풀이됐다. 또한 말라리아‧페스트‧이질‧천연두‧콜레라 등 파괴적인 전염병이 돌아, 기근으로 쇠약해졌던 지역 주민들 중 수백만 명이 사망했다. 이후 일본과 미국을 모방하는,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은 이 위기 앞에서 탐욕이 발동했다.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하고 공유지를 점령하며, 새로운 광물자원과 농산물을 독점할 기회로 삼은 것이다. 식민 모국에는 영광스럽던 제국시대의 마지막 섬광으로 기억될 이 위기는, 아프리카나 아시아에는 거대한 화형대에서 치솟는 불길한 불빛이었다. 가뭄에 기근, 전염병까지 세 가지 재앙이 겹쳐 발생한 사망자의 수는 3천만 명을 넘어섰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특히 영국령 인도에서 기찻길과 곡물창고 앞에서 굶어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철도와 근대 곡물시장의 효과에 대해 어떻게 흡족해할 수 있는가? 또한 중국의 경우, 기근 예방과 관련된 인구정책을 위해 필요한 국가의 개입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는 사실이, 영국과 다른 열강에 의해 강요된 근대화로 인한 중국의 강제 ‘개방’과긴밀한 연관이 있다는 의혹에 대해 어떻게 해명할 것인가?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세계사의 정체된 물속에 좌초된 ‘기근의 나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노동력과 자원이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세계경제의 동력으로 흡수되던 특정 시기(1870~1914)에 열대지역 사람들의 숙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3) 이 수백만 명의 죽음은 ‘근대세계체제’와 무관하지 않다. 또한 경제 및 정치 구조에 통합되는 과정 속에 있다. 자유 경쟁자본주의가 황금기를 맞이할 때, 이들은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사실 이들 중 다수가 애덤 스미스, 제러미 벤담, 그리고 존스튜어트 밀의 사상을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발생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다. 한편, 20세기 경제학자 중 빅토리아 시대의 대기근(적어도 인도에서 일어난 기근의 경우)이 근대 자본주의 역사의 한 페이지였다는 사실을 이해한 듯한 유일한 사람이 칼 폴라니(Karl Polanyi)다. 그는 1944년 저서 <거대한 전환(La Grande Transformation)>에서 “지난 50여 년동안 발생한 기근의 실질적 원인은 지역의 소득 붕괴와 결합된 곡물 자유시장이다”라고 주장했다. ‘수백만 명의 죽음’은 요컨대 일종의 정치적 선택이었다. 이러한 대량학살의 출현에 있어, 시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풍자 시를 인용하자면, ‘기근을 만들어낼 뛰어난 기술’(4)이 필요했다. 희생자들은 기근으로 인해 점차 쇠약해지고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기 오래 전에 이미 완전히 패배했던 것이다.
흉작과 물 부족이, 때로는 지난 몇 세기 동안 전례가 없을 정도의 비극적인 수치에 도달했을지라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의 잉여자원으로 가뭄 희생자를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1899년 에티오피아의 경우를 제외하고, 절대적 결핍은 거의 없다. 사실 이재민들의 생사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새로 등장한 상품시장과 그에 의해 장려된 가격 투기이고, 다른 하나는 민중의 항의에 크든 작든 영향을 받은 국가의 의지이다. 흉작을 벌충할 능력과 잉여자원을 반영하는 기근 대처정책의 방식은 경우에 따라 완전히 달랐다. 상반된 두 가지 경우를 소개한다. 리턴(Lytton) 백작과 후임인 엘긴(Elgin) 백작, 커즌(Curzon) 후작 등 총독에 의해 통치된 영국령 인도에서는, 기근이라는 잔혹한 대량학살이 한창일 때 상당량의 곡물이 영국으로 수출됐다. 이는 자유무역 학설과 제국의 냉혹하고 이기적인 이해타산으로 정당화됐다. 한편, 에티오피아 황제인 메넬리크 2세(MenelikⅡ)의 경우가 있다. 자연재해와 사회재난에 맞선 진정한 성서적 의미의 화합으로, 메넬리크 2세는 약소한 자원을 가지고 에티오피아 민중을 살리기 위해 영웅적으로 투쟁했다.
대기근은 신제국주의적 침탈을 도왔다
조금 달리 보면, ‘기근으로 인한 죽음’은 근대사에서 가장 잔혹한 세 개의 톱니바퀴로 점철됐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이들은 연이은 전 세계적 이상기후와 빅토리아 시대의 세계경제 메커니즘이 전례 없이 맞물리며 발생한 희생자이다. 1870년대까지, 기상관측을 위한 국제 네트워크의 부재와 발달부진으로 인해 과학계는 가뭄이 세계적 규모로 일어날 가능성을 예측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1870년대 초까지는 아시아 농촌이 지구 반대편까지 영향을 주고받기에는 세계경제로 충분히 통합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1870년대에, 세계 곡물시장을 매개로 가격변동과 기후를 연결하는 새로운 악순환 사례가 무수히 발생했다. 리버풀 밀 가격과 마드라스 열대 계절풍이 수많은 인류의 생사를 좌우하는 거대한 방정식의 변수로 등장했다.
1877년과 1878년간 기근으로 사망한 인도와 브라질, 모로코 농민의 대다수는 이미 그 이전인 1873년에 시작된 세계경제 위기(19세기의 ‘대불황’)와 빈곤으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고, 이 재앙에도 취약했다. 마찬가지로, 중국 청나라에서는 영국 마약밀매업자들로 인해 무역적자가 늘어났다. 이는 가뭄과 홍수 대비책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구축한 곡창제도를 쇠퇴시켰다. 반면 브라질 북동부지역을 강타한 가뭄은 후배지의 농민들을 넘어뜨렸고, 이들이 신생 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의 영향에 대처할 힘을 앗아갔다.
역사적 파국으로 치닫던 세 번째 톱니바퀴는 근대 제국주의다. 질 디아스(Jill Dias)가 19세기 포르투갈이 앙골라를 지배했던 상황에 대해 밝혔듯이, 식민지 확장의 주기성은 자연재해, 전염병의 주기성과 일치한다는 기이한 규칙을 지닌다.(5) 대가뭄은 신제국주의적 영토침탈을 승인하는 녹색 신호였다. 1877년 아프리카 남부에서 발생한 가뭄으로 카나번은 남아프리카 원주민 줄루 왕족의 독립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크리스피는 1889년부터 1891년까지 발생한 에티오피아 기근을 이용해 ‘아프리카의 뿔’이라 불리는 북동부 지역에 신 로마제국을 건설하려는 꿈을 이루려 했다. 기욤 2세(Guillaume Ⅱ)시대의 독일도, 1890년대 말 홍수와 가뭄으로 황폐해진 산둥성(Shantoung)을 수탈했다. 이는 침략을 통해 중국 북부에서 세력범위를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같은 시기, 미국도 아기날도(Aguinaldo)가 이끈 필리핀 공화국의 저항을 진압하는 데 가뭄으로 발생한 기근과 질병을 무기로 삼았다.
그러나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 농민들은 신제국주의 질서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았다. 기근은 실상 생존권이 걸린 전쟁이다. 1870년도에 기근으로 인한 저항운동이 특히(아프리카 남부를 제외하고) 국지적인 봉기에 국한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틀림없이 대부분 인도의 세포이항쟁과 중국의 태평천국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국가가 행했던 폭정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1890년대에는 완전히 다른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중국의 의화단 운동과 조선의 동학농민혁명, 인도의 민족주의 투쟁, 브라질의 카누도스 전쟁, 남동부 아프리카에의 수많은 봉기에서 기근과 가뭄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향후 ‘제 3세계’에서 19세기 말에 맹위를 떨쳤던 천년지복설 운동에서 드러난 종말론적 폭력성은 격심한 생존 및 환경 위기에서 상당부분 유래된 것이다.
글·마이크 데이비스 Mike Davis
주요 저서로 <슬럼, 지구를 뒤덮다>(2006), <엘니뇨와 제국주의로 본 빈곤의 역사(1870~1900)>(2003) 등이 있다.
번역·김세미
(1) William Digby, <Prosperous> British India : A Revelation from Official Records, Londres, 1901.
(2) 만주왕조에 반해 홍수전이 이끈 구세주 사상의 민중반란은 중국 남부와 중부의 광활한 영토를 정복하고 난징을 (짓밟히기 전까지) 수도로 삼았다.
(3) W. Arthur Lewis, Growth and Fluctuations, 1870~1913, Londres, 1978.
(4) Bertolt Brecht, 시 1913~1956, Londres, 1976.
(5) Jill Dias, <Famine and disease in the history of Angola, c. 1830~1930>, Journal of African History, vol. 22, n°3,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