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와인이 아니다!

2015-10-30     조너선 노시터
와인은 농산물인가 상품인가? 프랑스를 비롯해 이탈리아, 아르헨티나 와인양조업자들은 첨가물이나 화학적 아로마, 살충제 없이 자연 그대로의 와인만 생산한다. 그들은 입맛의 균일화에 대항해 포도나무 품종의 변형과도 맞서 싸우고 있다.
 
1960년대 이후, 사람들은 완전히 변형된 와인의 진실을 알지 못한 채 그걸 마시고 있다. 와인 중 대다수는 와인이 아니라 ‘포도과즙을 주재료로 삼아 만든 알코올 음료’라고 불려야 할 것이다. 와인의 풍미는 온전히 양분 흡수력, 포도나무 뿌리가 지면과 지하를 뚫고 들어가 그곳에서 양분을 빨아들이는 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때 무기염과 여타 흡수 가능한 물질들이 발효되면서 아로마와 풍미로 탈바꿈한다. 토양을 중시하여 인공 비료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포도나무 뿌리는 지하 수 미터까지 뚫고 들어갈 수 있으며, 끝이 서로 맞닿은 잔뿌리들은 최대 5㎞까지 확장될 수 있다. 현재 전 세계 99%의 포도재배지에서 사용되는 화학농법의 경우, 포도나무 뿌리가 0.5m 이상으로 침투할 수 없다. 부식토의 소멸로 단단해지고 침투불가능해져 정체 상태가 된 토양은 결국 죽음에 이른다.
 
포도재배 상황을 이해하려면 1945년, 그리고 당시 일부 군수산업의 포도농사로의 변경을 되짚어 보아야 한다. 마셜 플랜의 비호 아래, 그리고 독일산업을 재부흥시키겠다는 희망과 근대성의 미명 하에 유럽에는 제초제와 살균제, 살충제, 살진균제등이 퍼져나갔다. 포도나무에 60년 이상 화학적 농법을 시행한 결과는 참혹했다. 클로드와 리디아 부르기뇽 같은 프랑스의 위대한 농학자들이 널리 밝힌 것과 마찬가지로, 토양에 살충제를 살포한 것은  비료로 대체할 수 없는, 토양 내 양분의 핵심을 이루는 미생물과 균류를 소멸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들은 미생물학을 연구하면서, 집약농업이 어떻게 토양을 완전히 고갈시키고, 양분의 영양학적 가치를 저하시켰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농부들은 그 영향력이 익히 알려진 바이엘, 노바티스, 신젠타 혹은 몬산토 같은 소수의 다국적기업에 의지하는 농업경영자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토양의 침식뿐 아니라 시골의 사회조직 쇠퇴에도 일조했다.
 
1960년대 이후로, 보르도의 대형 와이너리와 샹파뉴의 유명 브랜드, 부르기뇽과 프로방스의 수많은 소규모 포도재배업자들은 화학농법을 사용한 재배로 테루아가 지닌 잠재력에 비해 아무런 특성도, 생기도 없는 무미건조한 와인, 소위 ‘좀비와인’을 내놓게 되었다. 때문에 이들은 와인의 숙성 단계에서 인공적 아로마와 풍미, 구조를 재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파인애플에서부터 자몽에 이르기까지 사전에 선별한 ‘향’으로 실험실에서 효모균을 키워내는 ‘프랑켄슈타인 축제’가 시작되었다. 생물학적 및 미각적 차원으로 볼 때 죽어 있는 이 인공 음료들에게 생명 비슷한 것이라도 회복시켜주고자, 수천 가지의 기법 및 기술적 개입을 동원했던 것이다. 몇십 년 만에 재배업자들은 지난 8천 년 간 와인의 본래 모습을 잊어버렸다. 하지만 와인은 그리스 로마 시대에서부터 모든 농업의 핵심을, 즉 모든 문명에 결정적 요인인 농업 그 자체를 상징해왔다. 즉 “와인이 가는 곳에 세계가 간다”는 것이다.
 
이 새로운 암흑시대에, 약 30년 전 반기를 든 소수 포도재배업자들의 등장과 함께 한 줄기 빛이 드리워졌다. 자연주의 와인을 장려하는 이 포도재배업자들은 십 년 전부터 대중운동 차원에서 심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며 정치적인 현상을 일으켜왔다. 저항의 움직임은 시칠리아에서부터 안달루시아를 거쳐, 샹파뉴와 모젤에 이르기까지 과감하고 아름다운 방식으로 조직되는 중이다. 우리는 이들 가운데 알자스의 장-피에르 프릭(Jean-Pierre Frick)과 루아르의 올리비에 쿠쟁(Olivier Cousin) 혹은 피에몬테의 스테파노 벨로티(Stefano Bellotti) 등토양의 건강과 후대에 물려줄 테루아에 대한 존중을 위해 오랫동안 투쟁해온 사람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제 이들은 대부분 쇠퇴해가는 다른 직업(사진가, 기자, 고등학교 교사 등)으로부터 탈주한 신농민(Néo-paysan)으로 구성된 포도재배업자 수천명의 지원사격을 받고 있다. 다양한 출신의 자연농법 포도재배업자들로 구성된 이 단체들은 몰락해가는 신자유주의 논리에 조소를 날리는, 농민-도시인의 진정한 문화적, 정치적 운동을 조직하고 있다.
 
“인류학적 생태학 없이는 환경 생태학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들의 주장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그러니 비료 및 살충제를 사용하지 않은 토양에서 와인을 생산하도록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것이다. 유럽연합이 (농화학 분야 로비의 공모하에) 제정한, 숙성 단계에서 30여 가지의 합성 첨가물을 허용하는 우스꽝스러운 ‘친환경’ 규정들을 준수하는 것 역시 충분치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완전한 자연주의 와인’에는 기껏해야 아황산염 몇 방울을 제외하고는 포도즙만 들어 있을 뿐이다.
 
누가 슈퍼마켓 와인을 마시는가
 
진정한 혁명은 문화적 혁명이자 정치적 혁명이다. 농업의 경우, 혁명은 일모작에서 탈피하고 동물과 곤충, 다종의 식물계 간에 생물다양성을 되찾는 것에서 시작된다. 농업지식을 전승 또는 획득하는 일은 선조들의 경험과 기술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테루아의 현황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땅에서 나는 과실의 종류와 원산지를 알고 이해하는 일이 새로움을 창조하는 데 방해될 리 없다.
 
하나의 와인은 한 지역의 기후 및 지리 조건을 반영한다. 그렇지만 재배자마다 이를 해석하는 방식이 다르듯, 오늘날 사람들의 실질적인 요구에 부응하는 와인을 만들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미적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거와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포도재배는 점점 예술의 영역에 가까워지고 있다. 예술과 마찬가지로 지속가능한, 그렇기에 진정성을 갖춘 전위적 행위는 기존의 재배업종사자들뿐 아니라, 이제 막 포도재배를 시작한 사람들에게서도 발생한다. 대를 이어 농사를 지어온 티에리 퓌즐라나, 전쟁 사진작가 출신의 신참 농업인 에밀 에레디아, 고객관리담당자로 일하다가 15년 전 가족과 함께 귀농한 브뤼노 뒤쉔, 모두 이 혁명의 주체인 것이다. 뒤센은 콜리우르에서 가장 생기가 넘치며 복합적이고도 독특한 매력을 지닌 와인을 생산한다.
 
40년 전,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Pier Paolo Pasolini)는 파시즘적 도시계획에 관한 RAI(이탈리아방송협회)와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소위 민주사회라 하는, 과도한 소비사회’가 생각하고 창조할자유를 사라지게 하는 데 그 어떤 독재정부보다 수천 배는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 파졸리니는 1960년대 이탈리아 문화의 점진적 쇠퇴는 무엇보다도 농민과 시골의 사회조직이 종말을 맞이한 것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오늘날 그가 이 신농민들의 혁명을 목격한다면 과연 뭐라고 말할까? 급진적이고 자유로우며 대체로 깊은 조예를 갖춘 이 새로운 재배업자들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농업적 논의를 완전히 재검토하는 중이다. 이들은 우리 영화 제작자를 비롯한 예술가들이 허영심의 유혹과 밥벌이의 미끼에 넘어가 포기한 반순응주의자의 역할을 맡아 농촌의 삶에 다시금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탈리아 중부 마르케 주의 은행가 출신 포도재배업자 코라도 도토리는 친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일은 부유한 엘리트 계층뿐 아니라 사회 전 계층으로 퍼져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조부의 고향인 쿠프라몬타나에 아내와 함께 정착한 그는 동네의 가난한 주민들이 와인을 슈퍼마켓에서 사는 모습을 목격했다. 전에 살던 밀라노의 보보족에게나 가능한 가격에 파는 와인은 그다지 ‘친환경적’이지 않을 터였다. 그래서 도토리는 베르디키오(담백하고 쌉쌀한 맛의 이탈리아산 와인-역주) 품종의 테레 실바테(Terre Silvate)를 병당 6유로에, 누르(Nur)를 11유로에 판매하며, 그의 가족이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이윤을 남긴다. 또한 여유가 없는 이웃을 위해 벌크와인(병에 담겨 있지 않은 와인-역주)과 순도 100퍼센트의 자연주의 와인을 리터 당 2.5유로에 판매한다.
 
문화적, 정치적 생태학 없이는 환경적 생태학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 인식이야말로, 전 세계에서 폭발적으로 성장 중인 이 운동을 차별화하는 요소이다. 프랑스의 경우 ‘자연주의’ 포도재배업자들의 수가 2000년대 초 1백여 명에 불과했던 반면, 오늘날에는 1천 명 이상이다. 파리에서 자연주의 와인만 취급하는 장소는 10년 전 단 두 군데 였지만, 오늘날에는 230여 곳 이상이다. 같은 기간 자연주의 와인만 수입하는 일본 업체는 1개에서 12개로, 미국 업체는 세 배로 증가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농촌에서 탄생한 윤리가 도시에 전해졌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자연주의 와인 관련 판매업체, 수입업체, 요식업체 들의 마진은 일반적으로 관행 네트워크에서 거두어들이는 마진의 절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농업적 저항은 문화적 반항이 되고 있다. 파리 11지구에 위치한 레스토랑 오두자미(Aux Deux Amis)의 고객층은 전형적인 보보족과는 거리가 먼 유쾌하고 투쟁적인 소비자들이다. 이런 분위기는 마르세이유 최고 번화가에 위치한 플뤼벨 라비뉴(Plus belle la vigne)나 재즈음악가 출신 데 이비드 릴리가 운영하는 뉴욕의 챔버스스트리트 와인스(Chambers Street Wines)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운동의 이상적인 참여 형태를 보여주는 인물은 레오나르도 비뇰리이다. 로마 외곽지역 이발사의 아들인 비뇰리는 몬테베르데 누오보에 위치한 자신의 허름한 동네에 다체자레(Da Cesare)라는 소규모 대중식당을 차렸고, 이 식당은 그람시적인 윤리관(마르크스주의 형성에 기여한 이탈리아의 정치이론가를 뜻함-역주)뿐 아니라, 훌륭한 맛의 요리로도 로마에서 가장 주목받는 곳이 되었다. “우리에게 이 땅의 가장 신선하고 즐거운 소식을 최대한 민주적인 가격에 선사하려고 고생하는 포도재배업자를 이용하려 한다면, 내가 일개 은행가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글·조너선 노시터 Jonathan Nossiter
영화감독, 「Sunday(1997)」, 「Signs & Wonders(2000)」, 「Rio Sex Comedy(2010)」 등의 영화와 「Resident Alien(1990)」, 「Mondovino(2004)」,「Résistance naturelle(2014)」 등의 다큐멘터리를 제작. 2015년 10월 Stock 출판사에서 출간된 『Insurrection culturelle』의 저자.
 
번역·박나리 
연세대 불문학 및 국문학 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