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푸드점의 탈육체화된 고기 흉내

2015-11-02     파스칼 라르들리에
패스트푸드 체인점이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한다. 자연제품만을 취급하며 환경보호와 동물보호를 위해 노력한다고. 그러나 패스트푸드점의 햄버거 패티는 탈육체화된 비현실적인 형태로 고기 흉내만을 내고 있다. 케첩에 파묻히고 핏물은 모두 빠져 고유의 색이 사라진 햄버거 패티는 선진국과 고기의 모호한 관계를 상징한다.
 
고기가 보통 음식인가? 고기는 엔다이브(치커리의 일종), 국수, 아몬드 페이스트 등에는 결코 부여할 수 없는 상징적 비중이 있다. 농담이 아니다. 말 하자면 고기는 완전무결한 식품인 것이다. 어원 ‘Vivenda’는 ‘삶에 쓰이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서구인과 고기와의 관계는 여러 인류학적 본성의 모호함들로 인해 어그러져 복잡하고 불확실해졌다.
 
먼저 고기는 우리의 육식성, 즉 포식자를 떠올리게 한다. 자연이 문화 속으로 난입한 셈이다. 고기(Viande), 침입(Viol), 폭력(Violence). 세 단어는 서로 닮았으며 의미상으로도 가깝다. 이 ‘동물로부터 나온 음식’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담고 있다. 고기를 삼키며 “우리는 죽는 순간의 고통을 이해한다”라고 했던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고기가 열정과 반감, 식욕과 식욕부진을 야기한다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가 아니다.
 
또한 많은 종교인과 철학자가 고기와 충동을 상징적으로 동일시했다. 채식주의는 언제나 순수한 형태를 요구하며, 모든 금욕(사순절 등)은 항상 고기를 가장 먼저 금한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붉은 고기를 먹는 것은 대리로 얻는 즐거움인 동시에 먼 곳에서 발생한 폭력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우리가 육식동물이며 썩은 고기를 먹고 살 수 없기 때문에 살생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 민감한 작업은 도시와 도덕의 영역 뒤편에서 일종의 감상벽과 위선이라는 이름으로 도시의 경계지역에 내쳐졌다.
 
클로드 피슐러는 ‘육류산업’에 당연히 어려움이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며 “문자 그대로 보여줄 수 없고,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다”(1)라고 말했다. 도살장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Slaughterhouse(살육의 집)’도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살육이 계속되어 왔는지 다시금 일깨워준다. 살생작업은 산업화, 분업화, 기계화됐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은 여전히 우리가 먹는 고기에 들러붙어 사라지지 않는다. 2003년에 소비자의 89%가 직접 도살해야 한다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은 반려동물을 ‘과도하게 의인화’하고 있다. 가축들은 마침내 스스로 쓸모 있어지기 위해, 즉 소비 가능해지기 위해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주어진) 시간을 사는데, 과도한 의인화는 이러한 부득이한 삶을 사는 수백만의 불쌍한 가축들을 부인하기 위함이다. 이 같은 비논리 앞에 1970년대 호르몬 송아지 고기 사건이나 광우병 같은 위기가 발생했다. 그러나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여전히 주된 서구 트렌드는 고기를 탈육체화한 비현실적인 형태로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꾸준하게도 기나긴 의미론적, 원근법적 치환을 거쳐 ‘잡아먹어야 할 동물’을 ‘탈동물화’시켰다. 고기는 성별이 사라지고, 이름이 바뀌고(암소 열에 여덟은 그냥 ‘소고기’라 불리지 않던가), 가죽이 벗겨지고, 잘려 더는 동물의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2) 흰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마트 고기는 카트를 채운 다른 식품과 마찬가지로 이름없는 상품에 불과하다. 상당히 은밀하게 제거되고 부정되고 있다.
 
30년 전 프랑스를 침공한 패스트푸드는 고기와의 관계에 관한 표현들을 극한에 치닫게 했다. 모호한 고기와의 관계는 정신분열증처럼 되어,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게 되고, 우리 안에는 두 개의 인식장치가 작동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맥도날드는 주 고객층인 어린이에게 ‘본래 의미가 제거된 고기(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를 선보이고 있다. 탈육체화된 비현실적인 형태로 고기 흉내를 내고 있으며, 무엇보다 어원적이고 이중적으로 표현하자면 ‘카니발’스럽다. 유희적이고 변장한 상태이기도 하거니와 이 단어가 ‘고기가 사라지다, 고기를 빼다’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 '카르네 레바레(Carne levare)'에서 왔기 때문이다.
 
패스트푸드는 고기에 내재된 비극과 정반대인 풍자적 아바타(맥도날드 마스코트도 로날드 광대 아닌가)를 통해 폭식을 조장한다. 이 변질된 모조품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근원적 본성마저 저버렸다. 고기도 없고 이름, 형태, 맛도 없으며, 싸구려 아바타와 핏빛 설탕(케첩) 아래 숨겨지고 파묻혔다.
 
흔적도 없이 지워진 패스트푸드 속 동물은 부재 상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이다. 너겟, 햄버거, 어니언링 등 이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외 없이 프랑스어보다 영어가 선호되어 더더욱 오해의 소지가 없다. 아니 오히려 전부 사기이다. 북미의 대형 식품가공업체들이 추구하는 맛의 기준, 다시 말해 모든 식품을 착색하고 달게 만드는 추세에 발맞추기 위해 고기를 변질시키고 구조를 파괴하고 다시 압축하고 착색하고 변장시킨다.
 
이름을 잃어버린 고기는 게임, 옷, 서프라이즈 이벤트, 미디어문화 행사(영화 홍보 등)에 계속해서 등장하고 시나리오화된다. 그러나 이곳에서 고기는 부수현상일 뿐이고 부차적이고 대수롭지 않은 존재에 불과하다. 어느 간단한 조사에서 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맥도날드에 가고 싶어 하는 이유가 선물, 프렌치프라이즈, 케첩 순으로 드러났다. 겹겹이 쌓인 햄버거 속의 고기는 광대 같은 존재이다. 층층이 쌓인 각종 토핑, 소스, 기타 속재료들은 고기를 돋보이게 하기 보다는 꽁꽁 감춰버린다.
 
평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고기의 색(붉은 고기 또는 흰 고기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다)은 또다시 제거되고 거짓 색이 입혀진다. 다른 경쟁자들과 마찬가지로 맥도날드도 본래 비극적이고 폭력적이었던 세상을 유아적이고 무력해질 때까지 완화하고 비개성화시켰다.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패스트푸드점에서는 “입이 웃는다 (la bouche rit).” 그러나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다르다(역자주: 정육점을 뜻하는 프랑스어, la boucherie와 발음이 같음).
 
롤랑 바르트는 유명한 글에서 고기를 희곡처럼 표현했다. “비프 스테이크는 포도주와 동일한 피의 신화에 속한다. 고기의 심장이자 순수 상태의 고기이며 누구든 비프 스테이크를 먹으면 황소의 힘을 얻는다”(3)라고. 정육점 고기에는 정력적이고 강한 성질의 흔적이 남아있다. 각 부위만의 독특함이 있고 크기와 무게도 정상적이다. 동물, 정육점, 고객 간에 개성화된 관계의 산물이다. 후추와 겨자를 곁들인 핏빛 고기는 내재된 힘을 통해 비극적 세계를 품었다가 드러낸다. 우리도 고기를 먹을 때 포크와 나이프라는, 도구로 가장한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가. 포크와 나이프는 그 형상 때문에 과거에도 존재했고 현재에도 남아있는 무기를 회상하게 한다.
 
햄버거 패티와 프렌치프라이즈는 고기와 채소가 아니라 맥도날드다
 
우리는 패스트푸드를 먹으며 비극에서 유희로, 정력적 세계에서 유아적이고 퇴행적인 세계로 건너간다. 머릿속에서는 전체가 부분을, 규격화가 개성화를, 단맛이 짠맛을 대체한다. 저서 <식도락의 정신분석학>에서 햄버거에 관한 날카로운 해석에 전념했던 지젤 아뤼 레비디는 우리가 패스트푸드점에서 먹는 것은 “가족끼리의 외식도, 가족끼리 먹는 최상의 음식도 아니다. 외부세상이나 내부에서 온 것이 아닌, 반제품일 뿐이다. 햄버거 패티와 프렌치프라이즈는 고기와 채소가 아니라 그냥 맥도날드다”(4)라고 단정지었다.
 
보다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패스트푸드의 과장된 표현은 역시나 미국에서 들어온 광범위하고 강력한 풍조의 일환이다. 이는 ‘정치적으로 정당한’ 표현을 사용하자는 풍조로 전 사회계층에 영향을 미친 바 있다. 거부감을 주지 않기 위해 사용한 곡언법 및 번역표현에 의해 새로운 자격을 얻은 음식과 고기가 패스트푸드점에 있다. 완화되고 공감할만하고 물렁하고 부드럽고 달달하고 규격화되고 대체가능해져, 우리가 생각하는 대중소비의 욕망에 부합하는 음식과 고기가 바로 패스트푸드점에 있는 것이다.
 
현실의 이름을 바꾸기, 단어의 의미 바꾸기, 말과사물의 균형을 유지하는 기본적이고 관례적인 타당함 무너뜨리기 등의 작업이 시적인 이름을 갖지못할 때 임의적 형태가 만들어지지 않는가? 전체주의의 첫 번째 반응도 그러하지 않은가? 전체주의는 현실을 세상의 새로운 비전(사실상 그들만의 비전)에 일치시키기 위해 항상 의미론적 쿠데타로 시작해 새로운 이름을 갖다 붙인다. 패스트푸드의 나쁜 습관 중 하나도 바로 그들의 가치·표현체계에 맞추기 위해 완곡법이나 우언법을 거듭 사용하여 사물의 이름을 새로 지어버리는 것이다. 프랑스와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두고 외교적 줄다리기를 할 당시 미국이 프렌치프라이즈에 ‘프리덤프라이즈(Freedom fries)’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공개적 망신을 당한 이 사건은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이다. 비루한 애국심을 넘어서는 상징적 폭력의 표현이며, 신난 카메라 앞에서 프랑스 와인을 도랑에 쏟아버렸던, 같은 시기에 일어난 와인 처형식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성도 즐거움도 없고, 규격화된 세상
 
사회적 유대가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함께 식사하기,’ ‘같이 먹기’를 의미하는 ‘커멘살리티(Commensality)’가 상징적 표현에서 유래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문화라는 고차원적 명분을 위해 생리적인 요구를 멀리하면서 나온 표현이라는 것이다. ‘같이 먹는 것,’ ‘함께 먹는 것’을 배우는 것이 곧 사회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규칙·관습·흐름을 따르고, 충동을 억제하고, 받기 전에 먼저 주고, 미묘하게 다른 천여 종류의 식기들을 손님과 함께 즐기고,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며 그 가치를 기념한다. 이런 의미에서 패스트푸드는 안타깝게도 공생 원리와 개성교육·사회교육적 관습의 쇠퇴에 일조한다. 보편적인 퇴행의 결과, 모두가 같은 음식을 선 채로 아무 때나 손으로 먹는다. 음식과의 관계는 강박적이고 본능적이다. 생리적이고 원시사회적 규칙, 간단한 식이요법 상식(맛을 추구하는 것은 역행하거나 엘리트적인 것으로 보일 것이다)은 공공연하게 무시된다.
 
패스트푸드 광고는 즐거움, 가족, 공생, 최상의 지상낙원이란 표현을 들먹인다. 그러나 누구든 패스트푸드점에 한 번이라도 발을 들이는 순간, 현실은 저런 표현들의 정반대편에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곳에는 기쁨이란 없는 기능적인 세상이 있을 뿐이다. 개성도 없고, 규격화되어 있으며, 이(離)사회적이고 우울하며, 그곳의 장소와 시스템에 내재된 폭력을 억눌러 막기 위해 로봇 같은 경비가 지켜보는 세상만 있을 뿐이다.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위생에 대한 집착, 평화롭고 유희적인 일터이자 소비공간이라는 유혹적인 광고가 패스트푸드의 끔찍한 이면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낙원이란 당치도 않으며 이미 기자, 사회학자, 법조계가 수많은 조사를 통해 이 실태를 정식으로 알리고 고발한 바 있다.
 
이것이 바로 패스트푸드라는 세계이다. 기쁨이란 없는 규격화된 세상이며, 식품가공업에 테일러리즘을 적용한 선두주자이고, 니체의 <우상적 황혼>과 같은 분위기에서 클로드 피슐러가 언급한 ‘정체불명의 음식’을 파는 곳이다.(5) 물론 은유법에도 한계가 있겠지만,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음식세계가 열린 듯하다.
 
 
글·파스칼 라르들리에 Pascal Lardellier
부르고뉴 대학 커뮤니케이션학 교수. 주요 저서로 <음식의 위험, 의식, 그리고 기쁨>(EMS, 코르멜-르-로얄, 2013년) 등이 있다.
 
번역·이보미
 
(1)<먹는 이와 동물>, Autrement, 172호, 파리, 1997년 6월
(2)가축의 머리, 다리, 귀, 위 등의 부위 등을 공공연하게 볼 수 있는 가축 부산물 판매점이 수요 감소 및 각종 유럽연합 지침 때문에 사라지고 있다. 인류학적 관점에서 이는 부수적 사건이기보다는 시사하는 바가 있다.
(3)롤랑바르트, <신화>, Seuil, 파리, 1957년
(4)지젤 아뤼 레비디, <식도락의 정신분석학>, Payot, 파리, 2003년 <세계 치킨 페스티발>, 미국, 2005 - 수자나 라브
(5)크로드 피슐러, <L'homnivore>, Odile Jacob, 파리, 20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