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비아의 바다에 대한 열망

2015-11-02     세드릭 구베르뇌르
한 세기 이상 이어온 해묵은 갈등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이 몇 주 안에 나올 예정이다. 1879-1883년 태평양 전쟁에서의 패배로 칠레에 해안접근권을 내준 볼리비아는 이후 사면이 육지로 둘러싸인 내륙국이 됐다. 아시아 지역과의 교역을 용이하게 해줄 통행로의 신설과 관련한 경제적 쟁점은 오늘날 정치적 고찰보다 더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볼리비아 수도 라파스 근교 해발 4천 미터 높이의 고산도시 엘알토에 새벽이 밝았다. 쌀쌀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후안 카피오나와 산드로 티(1)는 화물차에 시동을 걸었다. 칠레 연안으로 떠날 채비를 하는 것은 두 화물 기사에게는 매달 반복되는 일상이다. 가는 노선도 만만치 않다. 알티플라노 고원(해발 3,650m)과 안데스 산맥,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건조하다는 아타카마 사막을 거쳐 가는 힘든 여정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이 험난한 여정을 뚫고 가서 각각 45톤의 화물을 싣고 돌아온다. 카피오나는 “국경이 없다면 훨씬 수월할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국경을 넘기 위해 한참동안 줄을 선 뒤 끝없는 검문과 행정 절차를 거치는 지겨운 과정이 또 다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의 칼럼니스트 에드워드 루스는 최근의 한 기사에서 여러 가지를 시사하는 모순어법(2)의 사례를 제시한다. 그 중 첫 번째가 ‘깨끗한 석탄’이라는 표현이고, 두 번째는 바로 ‘볼리비아 해군’(3)이라는 말이다. 대부분의 볼리비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카피오나 역시 이 글을 봤다면 아마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볼리비아의 국경이 바다와 접해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1825년 독립 당시에는 400km의 연안 지대가 볼리비아의 소유였다. 하지만 얼마 후 이는 곧 칠레에 귀속된다. 그때부터 볼리비아는 남미 대륙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접하지 않은 나라가 됐다. 파라과이만 하더라도 파라나 강을 통해 대서양으로 이어진다. 2014년 볼리비아 정부가 발간한 해양 자료집 <바다의 서(書)>(4)에서는 내륙국이라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국가의 개발이 저해되고 있으며, 특히 수출가가 올라가고 칠레에 귀속된 영토의 자원을 빼앗기는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초래됐다고 설명한다.
 
미국의 경제학자 제프리 삭스(5)가 진행한 연구에서도 내륙국이라는 상황은 성장률을 0.7포인트 낮추는 요인이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6) 몰다비아,‧니제르,‧아프가니스탄,‧네팔 등 모든 대륙을 통틀어 제일 가난한 국가들은 모두 내륙국이며, 볼리비아도 그 중 하나다. 하지만 그 가운데 전쟁으로 연안 지역을 빼앗긴 나라는 볼리비아가 유일하다.(7) 그러므로 볼리비아에서는 내륙국이라는 사실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보다 현재 상황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크다.
 
두 사람의 화물차는 엘알토를 떠나 남쪽으로 향한다. 트럭은 신형은 아니었다. 앞 쪽의 양쪽 차문에선 핀란드 운송업자의 상호명과 주소지가 눈에 띄었다. 수명이 다 된 퇴물 중고차였던 것이다. 27세의 카피오나는 6년 전부터 이 일을 해왔다. 그는 화물을 싣기 위해 수시로 칠레에 가며, 간혹 적재한 화물을 브라질 국경으로까지 몰고 가야 할 때도 있다. 그는 바다가 “아름답고 끝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 부족으로” 바다에서 수영을 하거나 해변에서 놀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취재차 만났던 여느 볼리비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카피오나 또한 “언젠가 연안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다시금 볼리비아 국기가 나부끼는 날”이 오길 꿈꾼다.
 
볼리비아 최북단의 판도주(州) 상공회의소 대표이자 기업 경영인인 부친 리사르도처럼 카피오나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에모 모랄레스 대통령의 입장을 지지한다. 볼리비아 국민이라면 즉각적으로 답이 나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랄레스 대통령은 칠레로부터 태평양 통행로를 확보하고자 2011년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 2014년 10월 국민 다수의 지지로 3선에 성공한 모랄레스 대통령의 이 같은 결정에 대해 거의 모든 국민이 만장일치로 찬성의 뜻을 나타낸다. 이는 곧 해양 영토 복권의 문제가 모든 계파 갈등을 초월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전 세계에 소송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다니는 순회 대사도 바로 보수 진영의 카를로스 메사 전 대통령(2003~2005)이다. 볼리비아는 최근 사회주의 계열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의 재선에 기대를 걸고 있다. 바첼레트 대통령의 지난 임기(2006~2010) 중 이 해묵은 갈등을 풀기 위한 회담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수출입을 위해 칠레로 가는 볼리비아인들
 
정오 무렵 광업 도시 오루로를 출발한 두 대의 트럭은 길을 돌아 서쪽으로 향했다. 알티플라노 고원은 점점 더 건조해졌고, 저 멀리 지평선에서는 눈덮인 산봉우리가 눈에 들어왔다. 콜럼버스가 미대륙을 발견하기 이전 시절의 인디오 분묘 ‘출파’도 여기저기 있었으며, 그 사이에서는 라마가 풀을 뜯고 있었다. 협곡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컨테이너는 군데군데 포장조차 안 되어 있는 이 길이 얼마나 위험한 도로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남미인프라 통합구상의 지원으로 포장공사가 시작되긴 했다. 이는 태평양까지 이어지는 통행로 확보를 위한 국토개발계획의 일환으로, 대부분 브라질 자산가 계층의 발상으로 구상된 계획이었다.(8) 트레일러가
길게 늘어진 화물 차량도 눈에 띄었다. 근사한 신형차를 싣고 가는 이 차량 위에는 컨테이너에 실려 바다를 건너온 한국과 일본의 자동차들이 있었다. 가파른 비포장도로는 볼리비아 무역의 사활을 책임지는 하나의 주축이었다.
 
오후가 끝나갈 무렵, 일행은 볼리비아의 작은 국경마을 피시가에 도착했다. 카피아노와 동료는 어김없이 이곳에 정차했다. 칠레의 기름 값은 (리터 당 0.8유로, 한화 약 1,035원)볼리비아의 두 배에 달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이들은 아직 닫혀 있는 차단막 앞에 차를 세웠다. 다음날 아침 8시(칠레 시간 9시)에 세관이 열리면 제일 먼저 이를 통과하기 위해서다. 잠시 후 두 사람 뒤에는 화물차와 관광버스가 길게 늘어섰다. 족히 몇백 미터는 되어 보인다. 일행 중 하나가 말하길 “이건 아무 것도 아니다. (2013년 11월경) 칠레 세관 파업 때는 국경에서 수천 명이 며칠동안 꼼짝 못하고 발이 묶여있었다”고 한다. 볼리비아 교역위원회에 따르면, 연간 150만 톤에 이르는 수출량의 40%는 이웃 국가인 칠레의 항구를 통해 나간다.
 
다음날 아침 마테 차를 마신 두 사람은 국경 초소까지 차를 몰고 갔다. 차량은 여기에서 검문검색을 받는다. 손에 서류를 든 채, 이들은 이민국 창구로 이어지는 행렬에 줄을 섰다. 놀라운 것은 업무전용 창구가 없다는 점이다. 볼리비아의 화물운송업자들은 두 나라를 오가는 관광 차량 탑승객 수백 명과 뒤섞여 있었다. 휴가에서 돌아오는 가족 단위의 칠레 여행객과 칠레로 가는 볼리비아 근로자, 서양의 배낭여행객, 그리고 간간히 눈에 띄는 프랑스 기자들까지 한데 섞여있는 가운데 화물 운송업자들도 함께 줄을 서 있었다.
 
꼼꼼히 이뤄지는 검문은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사실 볼리비아는 세계 최대의 코카인 생산국에 속한다. 마약 카르텔 수하의 마약 운반책들은 짐을 옮기는 ‘노새(Mules)’에 빗대어 ‘뮬’이라고도 칭한다. 힘없고 돈 없는 이들은 조직의 지시에 따라 운좋게 국경 초소를 넘어가려고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지루한 출입국 절차에 익숙해진 카피아노 일행은 묵묵히 이 순간을 버텨냈다. 세 시간 후, 마침내 두 사람은 다시 트럭에 오를 수 있었다. “간혹 더 늦어질 때도 있다”고 한다. 차에 올라 탄 카피아노는 주머니에서 땅콩 한 봉지를 꺼냈다. 이어 그는 “경찰이 이건 못 봤을 것”이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취약한 생태계의 세균 감염을 차단하기 위해 칠레는 자국으로 오는 여행객들이 식료품을 들고 오는 것을 금하고 있다. 특히 샌드위치는 엄격히 반입이 금지된다. 볼리비아의 화물운송업자들로서는 가혹한 금지 조항이다. 칠레에서는 지극히 수수한 식사도 볼리비아의 5배나 비싸기 때문이다.(9)이제 트럭은 아타카마 사막의 가파른 도로를 올라간 뒤, 다시 내리막길을 타고 가다 태평양에 다다른다. 기복이 심한 도로 구간도 4.3km 이상 걸쳐 있다. 느지막한 오후, 일행은 알토 오스피시오에 차를 세웠다. 이키케에서 10km 가량 떨어진 소도시였다. 국경을 면세통과하는 모든 화물차는 이곳에 머문다. 카피아노는 저 멀리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어깨를 들썩인다. 그는 칠레에서 용무를 마친 뒤 가능한 빨리 볼리비아로 돌아가야 한다. 새로운 화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우리는 면세지대 조프리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시카고 보이즈’(10)의 부추김으로 1975년에 조성된 조프리 면세지대는 남미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도심 안에서도 진정한 도심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이곳은 아시아 지역의 수입품이 무관세로 유통되기 때문에 칠레 국민들도 저 먼 산티아고에서부터 약 1,800km를 달려와 쇼핑을 할 만큼 인기 있는 곳이다. 카피아노 일행은 트레일러 가운데 하나에 중국산 오토바이 88대를 적재하고, 또 다른 트레일러에는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상자 수백 개를 쌓아올린다. 차곡차곡 쌓아 올린 화물 위로 덮개를 씌운 두 사람은 다음날 다시 아리카 항으로 올라가서 화물 적재량의 무게를 잰다. 그러고나서 다시 아타카마 사막과 안데스 산맥을 가로질러 볼리비아로 돌아간다. 볼리비아에서는 브라질과의 국경인 코비하까지 올라가는데, 이곳이 바로 상품이 인도될 최종 목적지다.(11) 이후 두 사람은 볼리비아의 경제적 수도인 산타크루스데라시에라로 내려가서 또 다른 화물을 싣고 라파스로 돌아간다.
 
칠레에 바다를 빼앗긴 볼리비아의 역사
 
세계은행의 설명에 의하면, 이러한 악순환 때문에 볼리비아의 수출품은 칠레의 수출품보다 55% 비싸다. 볼리비아는 남미 지역에서 물류비용이 제일 높다. 간혹 평균치의 31%를 상회할 때도 있다.(12) 볼리비아 당국은 이런 수치만 믿고 자국의 발전이 뒤쳐진 것에 대해 연안 지대가 없기 때문이라며 책임을 전가하기도 한다. <바다의 서>에 따르면, “볼리비아의 인적자원개발 문제나 경제적·사회적 성장 둔화 문제가 반드시 내륙국이라는 지리적 위치 때문만은 아니다. 다만 본의 아니게 강제적으로 내륙국이 된 볼리비아의 상황 때문에 개발 잠재력이 심히 제한되고 있다는 점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난 7월 8일 볼리비아에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다를 생각하라”고 말하면서 양국 간 대화를 장려했다. 칠레는 “조건 없이, 즉각 볼리비아와 수교를 맺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입장을 표명했고, 모랄레스 대통령은 바첼레트 대통령에게 함께 바티칸에 가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증하는 가운데 볼리비아의 독자적인 태평양 출구 확보를 위한 최종 결의안을 도출해내자”고 권유했다. 교황 방문 이후 모랄레스 대통령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두고 ‘동맹’이라 말하면서 “바다를 둘러 싼 양국 간 분쟁에 대한 교황의 지지”를 내세웠다. 경쟁국 아르헨티나 태생의 교황이 이 문제를 중재하는 것에 대해 칠레가 과연 고운 시선으로 볼 지는 미지수다.
 
사실 칠레로 가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키케에서 만난 78세의 호르세 소리아 키로가는 운동선수 출신의 지역 내 유력 정치인이다. 반세기 전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독재정권 시절 옥고를 치렀으나, 1990년 민주주의 체제 수립 후 의석을 되찾았다. 볼리비아의 요구에 대해 언급하자 그는 이성을 잃었다. 그는 특유의 저음으로 “파리 한복판에 독일 쪽 통행로가 뚫리면 수용할 수 있겠느냐”며 분개했다. 과연 적절한 비유였을까? 어쨌든 칠레 입장에서 이 문제는 여야 불문하고 매우 민감한 사안임을 알 수 있었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유럽의 국경은 여러 전쟁이 만들어놓은 결과다. 유럽인들이 이 국경선을 다시 긋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73년에서 1990년까지 집권했던 칠레의 독재자) 또한 갈등의 해법을 모색한 바 있다. 그는 우고 반세르(1971년에서 1978년까지 볼리비아에서 집권한 독재자)에게 아리카 북부에 통행로를 내는 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페루가 반대하고 나섰다. 아리카 쪽에 통행로가 나면 페루는 칠레와 국경을 맞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경을 다시 긋는 작업이 불가능한 것이다.” 1978년 이 협상이 결렬된 후, 볼리비아와 칠레는 더 이상 수교를 맺지 않았다. 1970년에도 이미 칠레와 볼리비아는 칠레 쪽에 볼리비아의 통행로를 설치하는 것을 두고 논의한 바 있었다. 하지만 반세르 장군이 집권한 이후 협상은 그대로 중지됐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봤을 때 칠레가 합병한 지역은 분명 볼리비아 영토였다. 1559년 스페인 왕실이 제정한 행정구획 ‘차르카스 왕립 재판소’가 관할하던 지역은 현재의 볼리비아 영토를 비롯하여 북부의 로아강과 남부의 살라도강 사이 연안 지대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남미 해방의 주역인 시몬 볼리바르(1783~1830)가 자신의 이름을 따서 설립한 국가에 해안 통행로를 내어주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애초에 페루령이었던 이키케는 태평양 전쟁 중 칠레령이 됐다. 이에 따라 이키케에는 1879년 5월 21일 정박지에서 일어났던 전투를 기념하는 유적지가 여러 곳 존재한다. 해상전이 벌어졌던 그 날, 칠레의 중형 군함 에스메랄다호는 페루의 순양함 우아스카르호에 격침됐다. 항구에는 지역 내 구리 광산을 소유한 콜라우아시사(社)의 재정 기부로 만든 에스메랄다호 복제판이 대중 앞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해군박물관에는 난파선의 잔해와 선원들의 제복, 배의 모형 등이 전시되어 있었으며, 자국 군대의 전략에 대해서도 상세한 설명이 수록됐다.
 
이곳에서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전투 당시 이미 구식이었던 칠레의 군함은 페루의 순양함을 이길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페루 쪽이 기동력도 더 빠르고 전투력도 뛰어났기 때문이다. 에스메랄다호에서 선원들과 함께 전사한 아르투로 프라트 함장은 칠레에서 영웅으로 꼽히며, 많은 거리와 장소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 그를 나타낸 동상도 여럿이고, 1만 페소짜리 지폐에도 그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해양박물관에서는 우아스카르호의 함장 미구엘 그라우가 적장의 미망인에게 보낸 애도의 편지를 전시함으로써 페루의 장교인 그에게도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진 뒤 6주 후, 이키케는 칠레의 손에 들어간다.
 
칠레가 함락한 다른 두 항구, 아리카와 안토파가 스타에서도 영웅담은 이어진다. 페루와의 경계 가까이에 위치한 아리카항은 바위곶이 굽어보는 항구였다. 요새 하나가 지키고 있던 이 항구는 1880년 6월 7일 칠레 군대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이곳에는 1975년 피노체트 장군이 개관한 박물관이 있는데, 운영은 칠레 군대에서 맡고 있다. 군대행진곡이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이곳은 아리카항 함락을 축하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장소가 됐다. 저멀리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커다란 칠레 국기가 나부끼는 게 눈에 띄었고, 무명용사의 무덤은 물론 인근 탄광에서 군대에 제공한 대형 구리 벽화도 있었다. 여기에서도 역시 칠레는 적군의 용맹을 치하했다. 페루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프란시스코 볼로네지 대령의 이름을 딴 거리가 도심 한 복판에 있기 때문이다. 칠레의 애국심에서 적군에 대한 피해의식은 느껴지지 않았다. 해양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양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진 이유 중 하나가 “칠레 국민의 영토 확장 의지”였다고 한다. 과거 볼리비아 항구였던 안토파가스타항에 위치한 지역 박물관에서는 이 분쟁에 대해 “과도하게 세금을 징수하는 볼리비아 정부에 맞서 칠레 국민 다수를 위해 개척자들이 벌인 항거”라고 소개한다.(13) 박물관의 설명 표지판에 따르면 “위기 상황은 1879년 2월 14일 칠레 군대가 안토파가스타 항구를 차지하는 데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했다”고 한다. 부두에 있던 표지판에도 “이곳을 지나는 이들이여, 바다는 칠레의 피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쓰여있었다.
 
국제사법재판소에 문제 해결을 기대하는 볼리비아
 
안데스 산맥 건너편의 볼리비아 사람들은 “바다는 우리 것이다. 영해의 수복은 권리가 아닌 의무이다”라고 표지판에 반박의 문구를 내걸고 있다. 매년 3월 23일, 볼리비아에서는 온 국민이 ‘바다의 날’을 기념한다. 에두아르도 아바로아 중령이 이끌던 칼라마 전투에서 볼리비아의 패배로 이곳이 함락된 날이다. 그의 이름을 딴 장소가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국방부 창문 아래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국방부 건물 그 자체에도 영유권 주장에 대한 정부의 의지를 표명하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내걸려 있다. 바다의 날에는 모든 기관 대표가 기념비 주위에 모여 엄숙하게 행사를 거행한다. 지난 3월 23일에도 모랄레스 대통령은 정부 인사와 경찰, 군대가 모두 모인 앞에서 “바다 없이는 볼리비아도 없다”며 거듭 강조했다. 이 자리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볼리비아 ‘해군’도 참석했는데, 실제 해상 훈련을 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들은 티티카카 호수 주위를 정찰한다(페루나 아르헨티나의 배 위에서 해상 훈련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하는 상호 협정이 있긴 하다). 초등학생들은 시민교육 수업을 받을 때 ‘바다의 찬가’를 부르며, ‘화약 전쟁(전투를 두고 볼리비아에서 칭하는 용어)’은 부당한 전쟁이었다고 배운다. 영국 제국주의와 공모한 칠레가 사육제 다음날 볼리비아를 기습 공격하여 영토를 훼손했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칠레 쪽 교과서에서는 불안정한 볼리비아 정부의 세금 징수로부터 안토파가스타 지역의 칠레인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14)
 
지난 3월, 모랄레스 대통령은 앞으로 중학교에서 <바다의 서>를 읽는 게 의무화될 것이라고 밝혔다.(15) 라파스 가톨릭대의 경제학교수 곤살로 샤베스 알바레스는 “칠레가 우리의 바다를 훔쳐간 사실에 대해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한다”고 설명했다. “볼리비아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러한 확신이 깊게 자리하고 있다. 서민들의 경우에는 특히 더 그렇다. 따라서 칠레가 현재 칠레 항구에서 우리 기업들에게 특혜를 주느냐 마느냐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 볼리비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독립적인 연안 접근권이다.” 안데스 산맥에서 태평양으로 내려가는 통로를 확보하거나 칠레 연안으로 이어지는 한 면이 트이길 바라는 것이다. 지리적 여건 상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걸까? 하지만 선례가 존재한다. 냉전 시기에 동독을 관통하여 서독의 서베를린으로 이어지는 도로도 하나 있었고, 기니 만에서도 카빈다주(州)의 앙골라 쪽 해안은 앙골라의 다른 영토와 분리된다. 목적은 단 하나, 콩고민주공화국이 바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볼리비아의 독립적인 연안 접근권에 대해 칠레는 볼리비아가 실질적으로 태평양 접근권을 갖고 있다며 반박한다. 칠레 외교부에서는 <신화와 현실>이라는 자료집을 통해 “전 세계 국가들 중 20% 이상이 바다와 맞닿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 <신화와 현실>은 볼리비아가 낸 <바다의 서>에 대한 반격으로 2014년 6월 칠레 쪽에서 내놓은 자료집이다. “그 중에서도 볼리비아는 바다에 접근할 수 있는 특혜를 누리고 있다. 1904년 체결된 평화우호협정에 의거하여 볼리비아는 칠레 영토를 통해 태평양에 접근할 수 있는 막대한 자유 권한을 영구히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볼리비아는 세관 자치권과특혜 관세도 누리고 있고, 물류 보관을 위한   편의서비스도 제공받는다. 칠레 영토 내에서의 이러한 특혜와 권리를 통해 볼리비아는 태평양으로 이어질 수 있는 폭넓은 접근권을 누리고 있다.”(16) 가령 이키케 항에서 “컨테이너 다섯 개 중 하나가 볼리비아 것”이라는 게 항만 당국의 설명이다. 특수법인(法人) 이키케 항만회사의 담당자는 “볼리비아 상품의 물류 보관비용도 다른 상품들에 비해 70% 이상 저렴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언변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볼리비아의 “배은망덕함에 화가 치민다”고 말했다. 안토파가스타항과 아리카항에서 볼리비아의 수입 물류 보관비용은 1년간 무료다. 수출품의 경우, 60일 간 비용이 면제된다. 모든 상품들은 볼리비아 세관이 감독하며, 이어 특혜 관세로 하역이 이뤄진다. 다른 나라의 상품들은 톤 당 1.98 달러 세율이 적용되지만 볼리비아만 톤 당 0.85 달러 세율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고위험 화물 보관에도 특혜 관세가 적용된다. 볼리비아의 화물에는 5일에 1톤 당 1.04 달러가 적용되는 반면, 다른 국가의 상품들은 111.15 달러나 되기 때문이다.
 
2010~2012년 볼리비아 항만 서비스 국장을 역임한 다니엘 아그라몽 레친에게 볼리비아가 누리는 이 특혜에 대해 말했더니 그는 펄쩍 뛰며 손사래를 친다. “칠레의 아리카항과 안토파가스타항은 2004년 이후 민영화됐다. 따라서 칠레는 제3국에 대한 의무를 일방적으로 민영화한 셈이다. 국제관계에서 이는 분명 유례가 없는 일이다. 칠레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증거다. 따라서 볼리비아의 독립적인 접근권을 확보하지 못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 민간 기업은 매년 요율을 인상한다. 2010년 말 아리카항에서는 요율이 두 배로 올랐다. 이는 볼리비아에 대한 모욕이다. 육지에 고립되어 있는 우리의 처지를 이용하는 행태이기 때문이다.” 안토파가스타항의 기업들과 접촉을 해보았으나, 이들은 시설 견학은 허용해도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일절 주지 않았다.
 
그런데 칠레의 한 항만 책임자는 볼리비아의 통행로 설치를 반대하는 칠레의 입장에 대해 익명으로 또 다른 설명을 내놓았다. 칠레 측에서 볼리비아의 통행로가 ‘코카인 반입로’로 변질되지 않을까를 우려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볼리비아는 미국이 앞장서고 있는 마약 근절 정책에 등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다.(17) 2008년 이후로는 미국과의 수교도 단절됐다. 칠레 입장에서는 이 같은 행보가 좋게 보일 리 없다. 우리의 소식통에 따르면 “주권을 상실한다는 것은 곧 관리감독권의 상실을 의미”하며, “칠레는 마약밀매에 취약해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칠레는 이 통행로와 해상 출구의 잠재적 부존자원은 물론 연안으로부터 200해리(약370km)에 이르는 범위 안의 자원까지도 잃게 될 것이다.”(18)
 
볼리비아는 이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이 분쟁을 해결해주길 기대한다. 볼리비아의 알바로 가르시아 리네라 부통령은 “1904년 조약 체결 이후, 우리는 평화로운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다 취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성과는 없었다”고 결론 짓는다. 그리고 이어 “국제법을 준수하는 우리는 헤이그 법정이 우리에게 정당한 판결을 내려 주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듯 낙관적인 전망을 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2014년 1월, 6년간의 소송 이후 국제사법재판소에서 태평양 전쟁으로 칠레에 병합된 해양 지대를 페루에게 되돌려주라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칠레의 입장은 단호하다. 심지어 바첼레트 대통령조차 이 문제는 헤이그 법정의 관할이 아니라며 반박했다. 이에 대해 볼리비아는 해안 진입로의 설치가 모두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고 설득한다. “칠레와 볼리비아의 분쟁 해결은 역내 통합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이는 칠레에도 득이 될 것이다. 우리의 힘과 자원, 페루 및 브라질과 맺고 있는 우리의 기반 시설이 혜택으로 더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문제에는 브라질도 깊게 관여돼 있다. 브라질 최고의 교역 상대국이 중국인데, 이 남미의 강국 또한 태평양 진입로가 없어 힘든 상황이기 때문이다. 볼리비아 화물 트럭들이 칠레 항구에서 브라질까지 빈번히 오가고 있는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브라질 서부 내륙의 경우, 칠레나 페루, 볼리비아 등을 통해 아시아와 교역하는 편이 브라질 항구나 저 멀리 파나마 운하를 이용하는 것보다 더 수월하다. 볼리비아의 해양 영토 반환 문제에 대해 브라질은 공식적인 지지 입장 표명을 자제하고 있지만, 볼리비아가 내륙국이라는 지리적 입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이는 브라질로서도 반가운 일일 것이다.
 
남미 지역의 통합을 저해하는 갈등이 지속되는 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2014년 11월, 남미국가연합 사무총장인 에르네스토 삼페르콜롬비아 전 대통령은 “볼리비아와 칠레 사이 해양 갈등의 해결을 촉구”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이 양측 및 지역 모두에 이로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남미국가연합의 본부가 소재한) 에콰도르 주재 칠레 대사 가브리엘 아센시오 마니야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칠레는 남미국가연합이나 다른 그 어떤 다자 포럼도 이 문제에 개입할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다”(19)며 딱 잘라 말했다. 칠레의 이러한 불가 입장으로 보건대, 한 세기 반을 이끌어온 이 해묵은 분쟁에 대해 앞으로는 헤이그 법정이 나설 차례로 보인다. 물론 헤이그 법정이 최후의 수단은 아닐 것이다.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은 올해 말 이전에 나올 것으로 기대된다.
 
 
글·세드릭 구베르뇌르 Cédric Gouverneur
프리랜서 기자 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정식 특파원
 
번역·배영란
한국외대 통역대학원 졸업. <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 등의 역서가 있다.
 
(1) 본인의 희망으로 이름은 가명 처리한다.
(2)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를 함께 쓰는 어법.
(3) 에드워드 루스Edward Luce, ‘American socialism’s day in the sun’, <파이낸셜 타임스>, London, 2015년 6월 1일.
(4) 해상 복권 전략부(Diremar), <El Libro del Mar(The Book of the sea)>, La Paz, 2014, www.diremar.gob.bo
(5) 볼리비아에서 제프리 삭스는 꽤 유명하다. 프랑스의 경제학자 다니엘 코엔 Daniel Cohen과 함께 1985년 신자유주의 ‘충격요법’ 적용 시 볼리비아에 조언을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초 인플레이션을 줄이고자 시행된 이 같은 조치로 말미암아 2만 3,000명의 미성년 노동자가 해고되고 불평등이 증대됐으며, 코카인 재배가 발전했다.
(6) ‘Nature, nurture and growth’, <이코노미스트>, London, 1997년 6월 12일.
(7) 에리트레아의 할양은 1993년 에티오피아 측과의 협정에 따라 이뤄졌다.
(8) 르노 랑베르Renaud Lambert, ‘남미 통합의 꿈을 독점한 브라질’,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6월호.
(9) 세계은행 자료에 따르면 칠레의 2014년 1인당 GDP는 1만 5,840 달러였다.
(이는 남미 국가들 가운데 2위에 해당한다.) 반면 볼리비아의 1인당 GDP는 3,095달러로, 남미 지역 최하위 수준이다.
(10) 시카고 대학을 졸업한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을 지칭. 밀턴 프리드먼이 대표적이다.
(11) 브라질은 볼리비아 최대의 무역 파트너로, 양국 간의 교역 규모는 십년 만에 여섯 배 증가했다. (Rede Brasil Atual, 2015년 1월 22일)
(12) ‘Doing Business 2012’, 세계은행, 워싱턴 DC.
(13) 볼리비아 입장에서는 1877년 연안 지역을 휩쓸었던 지진과 해일 이후 재건 사업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외국 기업인에게 이 같은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14) Daniel Parodi Revoredo, ‘Lo que dicen de nosotros’, 페루 응용과학대학, Lima, 2015.
(15) Diremar, <El Libro del Mar>, op. cit.
(16) ‘Chile y la aspiracion maritima boliviana: mito y realidad’, 칠레 외교부, 2014년 6월, www.mitoyrealidad.cl
(17) 프랑수아 폴레François Polet, ‘무기는 합법, 마약은 불법?’,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4년 2월.
(18) 해양법에 따라 자국의 연안으로부터 200해리(약 370km)의 범위 내에 배타적 경제 수역이 설정되며, 이로써 해당 국가는 수산자원(어업)과 광물자원(석유, 가스) 등의 탐사와 개발에 관한 권리를 가진다. 유엔 해양법 협약, 1982.
(19) 가브리엘 아센시오 마니야 대사 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