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탐내던 코르시카의 불편한 운명
2015-11-02 도미니크 프랑세스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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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눈 거인>, 기슬렌느 에스캉드의 ‘해도’시리즈 중, 2015 |
코르시카 장기개발계획, 일명 ‘파뒥’(1)이 코르시카 의회에서 표결에 부쳐질 예정이다. 이 계획은 산림법과 해안법에 관한 시행령을 지역 특성에 맞게 조정한 개발안으로, 코르시카인과 자연 간의 관계를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코르시카의 특수한 사회 형태에 대해 재조명할 기회를 선사한다.
코르시카를 말할 때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것은 섬의 아름다움과 보존 문제다. 코르시카는 스페인 발레아스 제도나 다른 지중해 섬에 비해, 대중관광이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피해가 훨씬 덜하다. 포르투갈 철학자 조제 질은 그의 저서에서 “코르시카에는 예술품처럼 완벽하게 작동하는 독특하고 정교한 ‘장치'가 있는 듯하다”(2)고 기술했다. 1975년 8월에 발생한 알레리아 사건(3)의 결과로, 코르시카 민족해방전선(FLNC)이 창설됐다. 이전에도 이탈리아 화학회사 몬테디손(Montedison S.P.A.)이 폐기물인 붉은 진흙 덩어리를 코르시카 곶에 투기한 사건이 일어나자, 프랑스 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지만 코르시카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때 처음으로 비밀 결사조직도 생겼다.
장기개발계획 ‘파뒥’을 입안한 코르시카 지방정부는 보고서에 “파뒥의 목표는 도시개발 정책의 기본법을 존중하고 코르시카의 균형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한편, 환경보존과 경제‧사회‧문화‧관광 분야의 장기적인 개발 전략을 세우는 것”이라고 명시했다. 도시개발 정책과 대비되는 파뒥에 코르시카 섬의 아름다운 풍광과 1,047km에 달하는 해안선, 농업지역(4)의 운명이 달려있다.
부동산, 대중관광, 휴양산업 등의 개발계획은 몇몇 정치가들과 기업인들에게는 하늘이 내린 선물이자, 돈을 세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소중한 자연을 훼손할 수밖에 없는 개발계획은 지금도 수많은 코르시카인들이 지닌 땅에 대한 생각과 신념에 대치되는 것이다. 조제 질은 “바닷가, 산꼭대기, 계곡에 사는 코르시카인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자연과 인간을 구분하지 않는 코르시카인 코르시카의 전통 사회는 시장이나 돈거래와는 거리가 멀다. 많은 계곡 마을에서 본격적으로 현금이 사용된 것은 1차 대전 이후일 정도다. 지중해에서 차지하는 지정학적 중요성 때문에 코르시카는 오래 전부터 패권을 노리는 지역 열강들의 각축장이 돼왔다. 하지만 코르시카는 점령하거나 지배하기 쉬운 곳이 아니다. 2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가 35개나 되고, 1786년에는 마을의 수가 380개나 되었다. 코르시카인들은 비위생적이고 약탈이 횡횡하는 해안가보다 산을 선호했다. 도시화로 사람들이 빠져나가자, 뒤늦게 해안에 정착했지만 코르시카 문화는 여전히 마을 중심이며 중앙정부를 외부 세력으로 여기고 있다.
대륙에서 보면 매우 파편화된 ‘모자이크 섬’인 코르시카는 오늘날 세계화와 더불어 해체 위협을 받고 있다. 시사주간지 <엑스프레스>의 크리스토프 바르비에 편집장은 코르시카에서 부동산을 소유하려면 5년 이상 거주를 의무화한 규정을 비난하며 “살고 있는 집의 가격이 폭등하면, 이사갈 때가 됐다는 뜻”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5) 코르시카에 대한 시각이 오늘날 ‘무지’와 ‘무시’라면, 과거에는 ‘무지’와 ‘당황스러움’이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정부는 공유지를 가구별로 분할하기 위해 조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가구 수를 화덕의 수로 계산하는 조사 기준이 코르시카의 생활방식과 맞지 않아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섬 중앙에 있는 르 니올로 지역 마을들을 조사하던 조사원은 이렇게 고충을 털어놓았다. “여기서는 두세 가구가 화덕 하나를 같이 쓰는 경우가 많다. 집은 따로, 굴뚝은 하나다.”(6) 이러한 상황에서 ‘공유지’를 개인 소유의 여러 '사유지'로 나누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와 사유재산 개념은 코르시카의 촌락사회 생활방식과 맞지 않는다. 민족학자 제라르 랑클뤼에 의하면 “계곡, 마을, 가정에서는 가정과 마을의 자급자족을 이상적인 주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생존 방식이 아니라 달성해야 할 가치이며 이상이다.” 농업과 목축 사회에서는 자원을 개발할 때 논의 기구를 통해 공동으로 결정한다. 가정과 마을의 통합을 보장해주는 가장 훌륭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랑클뤼는 이를 ‘지속적으로 쇄신되는 마을의 사회적, 문화적 장치'라고 정의했다.(7) 그러므로 코르시카인들은 국가가 공유지를 분할하고, 가축을 이동시키고, 공동 방목권에 손대려 했을 때 그리고 사실상 ‘공동'의 것을 법적 ‘공동'의 것으로 변경하려 했을 때 이것을 어떻게 나눠야할지 난감해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를 희생시키면서 개인의 이익을 중시하고, 도시화와 지역경제발전을 지향하는 파뒥의 첫 번째 안은 코르시카 전체를 깨어나게 했다. 결국 2009년 6월 15일 의회 투표에서 의원 과반수가 모이지 않아 표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파 정부가 추진하는 무분별한 개발 시도에 코르시카 좌파와 민족주의자들이 연합했으며, 일반 시민들까지들고 일어나는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환경보호단체 유 레반테(U Levante)는 처음에는 파뒥의 정책 방향에 동의해 협조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지금은 “정책이 계속 바뀌고, 개발 지도가 명확하지 않다. 모든 것이 불확실해 갈등의 소지가 있다”고 평가한다. 예를 들어 ‘어부들의 오두막’ 건축 계획 때문에 짚으
로 만든 오두막이 우후죽순 서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2010년부터 좌파가 과반수를 차지하는 코르시카 의회는 파뒥 안을 표결할 예정이다.
우파 정부의 무분별한 개발에 대한 불만
파뒥 안을 담당하고 있는 마리아 귀디셀리 좌파전선 의원은 “행정자치 원칙을 존중해야하고, 이를 위해서는 지역 의원과 시장들이 파뒥 안에 맞게 지역도시개발 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믿고 맡겨야 한다”고 밝혔다. 경관 보존에 관한 개정안을 채택한 바 있으며, 코르시카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코르시카 리베라 당은 “현재로서 최선의 합리적인 태도는 계획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개선하는 것”이라고 계획에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파뒥 안은 10만 5천 헥타르를 농업전략 지역으로 지정하고 있다. 농업과 목축업 활성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돼지를 키우는 앙투안 포기올리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좋은 계획이지만 젊은이들이 농업과 목축업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고품질의 소시지를 생산하는 코르시카 종을 자연 방식으로 기르고 밤을 사료로 쓰고 있다.
2014년 보코냐노 시 시장으로 선출된 아실 마르티네티는 시의회와 협의 없이 결정하던 관례를 폐지한 인물이다. 목축업과 숙박업을 하고 있으며,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 마르티네티 시장은 2007년 농업생산자 단체를 결성했다. 코르시카 최대 도시 아작시오 인근의 그라보나, 푸뤼넬리, 크뤼지뉘 3개 계곡의 농부들, 목축업자들, 밤나무 재배자들이 회원들이다. “우리 30여 명의 생산자들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전통기술을 지키는 동시에, 이웃 국가의 노하우에 개방적이다”고 마르티네티 시장은 강조한다.
코르시카 <FR 3-비아 스텔라 TV> 채널의 공동 창립자이며 기자인 삼피에로 산귀네티는 “농업과 목축업이 활성화되면, 식량 공급이 원활해져 코르시카의 식량자급율이 높아질 것이다. 또한 관광객들에게도 유통과정이 짧은 신선한 식품을 제공할 수 있어, 섬의 현실과 문화를 잘 보여줄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지난 6월 25일 코르시카 의회 정기회의를 끝내면서 공산당 소속이며 좌파전선 대표를 맡고 있는 도미니크 부키니는 과거 파뒥 안이 통과되지 못한 것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다른 지역, 특히 내륙 지역을 희생시키며 특정 해안에만 집중된 부동산 경제를 종식시켜야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분열과 자연 파괴를 막을 수 있는 개발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민족주의 운동이 정치적으로 중요한 세력으로 떠오르면서, 파벌주의의 한 요소인 양당주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민족주의자들이 의회 다수당을 만들 열쇠를 쥐게 된 것일까? 코르시카 민족해방전선은 초반에, 즉 해방운동의 이상이 변질되기 전에 폭발물을 사용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토지 투기를 막는데 성공했다. 또한 코르테 대학교의 부활에도 프랑스 정부와의 힘겨루기가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비밀조직이 무기와 이별을 고한 지 1년이 지난 지금,(8) 코르시카 의회에 진출한 여러 민족주의 성향의 그룹이 어떤 성향을 보일 것인지는 지켜봐야 할 것이다.
12월에 있을 지방선거에서 몇몇 민족주의 세력은 의장석을 노릴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현 좌파 다수당에 그들의 힘이 영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를 보낼 것이다. 중도 민족주의 성향의 페무 마 코르시카 당 의원들은 불신임 투표를 통해 6월 25일에 코르시카 행정부의 회계 결산 승인을 거부했다. 산귀네티 기자는 “파뒥 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하면, 정치적으로 파벌주의가 강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파벌주의가 흔들리면 코르시카 인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특히 정부가 관여될 때는 더욱 그러한 이데올로기가 퍼지며 유예기간을 얻는다. 그러면 코르시카인들은 다시 파벌과 파벌의 수장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1980년대까지 계속 감소했던 코르시카 인구는 이후 강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1982년 24만 명이었던 것이 2012년에는 31만4천 명으로 증가했다. 현재 코르시카는 불안정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불확실성, 과거의 망령, 돈이 끼어들면 균형은 쉽게 깨질 것이다.
글·도미니크 프랑세스케티 Dominique Franceschett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친구들> 전 회장
번역·임명주 mydogtulip156@daum.net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PADDUC, Plan d'aménagement et de développement durable de la Corse, 코르시카 장기개발계획
(2) José Gil, <La Corse entre la liberté et la terreur(자유와 폭정 사이에 있는 코르시카)>, La Différence, Paris, 1991.
(3) 1975년 8월 21일 알레리아에서 코르시카 민족주의자들이 알제리에서 이주한 프랑스 인이 운영하는 와이너리를 점거한 사건. 다음 날 프랑스 본토에서 파병된 천여 명의 군인이 점거자들을 공격했다. 그 와중에 군인 두 명이 사망했으며, 점거중이던 코르시카 인 여러 명이 부상을 당했다.
(4) 농업지역은 코르시카 영토의 19%를 차지한다. 프랑스의 경우 전체 평균 49%다.
(5) 라디오 <유럽 1>, 2013년 8월 10일
(6) Gérard Lenclud, 'Des feux introuvables(찾을 수 없는 화덕)', <Etudes rurales>, n°76, Paris, 1979.
(7) Gérard Lenclud, <En Corse, une société en mosaïque(코르시카, 모자이크 사회>, Editions de la Maison des sciences de l’homme, coll. <Ethnologie de la France(프랑스 민족학)>, Paris, 2012.
(8) Pierre Poggioli, 'Corse, l’adieu aux armes(코르시카, 무기여 잘 있거라)', <Le Monde diplomatique>, 2014.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