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이후의 튀니지 여성들
제인 엘아비디네 벤 알리 정권이 2011년 몰락했지만, 여성들 간 삶의 여건 차이는 사회적 불평등과 지역 간격차로 양분된 튀니지의 정치판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튀니지 여성들은 이미지를 먹고 산다. 초대 튀니지 대통령 하비브 부르기바는 아랍국가들 중 유일하게 여성해방을 선언했다. 1956년 도입된 개인지위법(CSP)이 일부다처제 및 일방적인 이혼과 강제결혼을 금지하고 이혼할 권리를 인정함으로써, 튀니지 여성들은 이슬람세계에서 예외적인 여성들로 거듭났다. 튀니지 여성들은 1959년부터는 투표권을, 1973년부터는 낙태권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많은 여성들이 장관에 올랐다. 전 대통령 벤 알리는 세계 각국에 이런 ‘모든’ 튀니지 여성들의 이미지를 선전했다.
하지만 2011년 1월 벤 알리의 독재정권은 몰락했고, 이후 튀니지 정부는 자국 여성의 ‘동일한’ 이미지가 아닌 ‘서로 다른’ 이미지를 수용해야 했다. 또한 CSP법과 이 법의 적용 사이에 크게 벌어진 틈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했다. 수도 튀니스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는 의사, 변호사, 경영인 등 나름 사회적 성공을 거둔 여성들이 있다. 그들은 폭력과 빈곤,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사는 문맹여성들의 생존을 위해 투쟁 중이다. 4년 전에 비해 변한 것이 많지는 않은 듯하만, 튀니지 사람들은 정치활동과 표현의 자유를 쟁취했다. 이제 사람들은 숨 막히던 분위기에서 벗어났고, 자유로운 발언이 가능하다. 이것만 해도 상당한 변화다. 모든 사람들, 특히 여성들이 정치적 발언을 하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다.
시민사회의 핵심 인물이자 사회학자인 카디야 쉐리프는 “드디어 우리는 튀니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됐다.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게 됐다. 이런 자유는 역효과를 내기도 한다. 우리의 기득권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무엇인지는 알 수 있게 됐다”는 말로, 반계몽적이거나 마초적인 발언을 맞받아쳤다. 2014년 1월 신규채택한 헌법에 ‘남녀평등’ 대신에 ‘남녀 간 상호보안성’이란 단어가 명시될 뻔 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또한 이슬람 정당인 에나흐다당 국회의원이었던 하비브 엘루즈(현재는 탈당한 상태)가 TV에서 내뱉은 구시대적 발언, 즉 여성의 할례를 ‘성형수술’처럼 말했던 것도 사람들은 기억한다.
이런 무개념한 발언에 뒤이어, 이슬람 정당이 합법화되고 이슬람 극단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들은 위험해 보이는 상황에 저항했다. 2014년 12월 대선 때, 여성들은 몬세프 마르주키와 베지 카이드 에셉시 중 후자를 선택했다. 내재된 불안과 지하드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더 잘 지켜줄 사람이 에셉시라고 판단해 압도적인 표를 준 것이다. 여론조사기관 시그마에 의하면, 에셉시를 지지한 유권자는 전체의 56%, 여성의 75%로 나타났다.
국제인권연맹의 명예회장 겸 기자인 수하르 벨하센은 “여성들이 튀니지에서 전례 없이 이슈화되고 있다. 여성들은 투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했다. 헌법을 고치는 데는 성공했지만, 사람들의 정신을 바꾸지는 못했다”고 토로한다. 의대교수인 엠마므니프는 “대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전혀 현대화가 진척되지 않은 지역들을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소외지역의 발전에 깊이 관여하고 있는 므니프 교수는 “부르기바 정권 이후 튀니지에는 종교성보다는 보수성이 강한 문화 밖에 없었다. 따라서 다른 문화를 찾아나서야 했다”고 말한다. 가부장제도로 회귀하는 추세는 아니다. 하지만 세력 간의 마찰이 비공개적 또는 공개적으로 종종 발생한다. 하나는 튀니스와 수도권 북부를 중심으로 한 정교분리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전통과 이슬람 종교를 중시하는 세력으로 후자는 부르기바 정권과 벤 알리 정권 때 숨죽이고 있다가 다시금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튀니스에서 불과 110km 떨어진 베자 지역은 튀니스와는 딴판이다. 튀니스 북서부에 위치한 베자는 황새가 서식하는 농업지대다. 베자의 지속가능한 발전연합 회장인 호스티 압델 카림은 “여기 여자들은 죽어라 일하는데, 남자들은 집이나 카페에서 빈둥거린다. 튀니지에서 정작 소외된 이들은 시골여성이다”라고 지적한다. 게다가, 튀니지 국민의 34%가 시골에 거주하고 있다. 카림은 “튀니스에서 여성문제를 운운하는 이들은 아무 것도 모른다. 물을 길어 나르고, 장작을 날라야 하는 시골여성의 삶이 어떤 것인지 상상도 못할 것이다”고 덧붙였다.
베일을 쓴 여성과 쓰지 않은 여성들 간의 갈등
베자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완두콩 밭. 다섯 명의 여성들이 몸을 숙인 채 밭일을 하고 있다. 30세의 모니아는 노부모에 실업자인 오빠까지 부양하고 있다. 한 달에 며칠씩 일당 10디나르(약 4.8유로)를 받고 일하며,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저녁 8시에 잠든다. 모니아는 “정말 힘들다. 문맹인 내가 밭일 말고 할 수 있는 게 없다. 일도 항상 있는 게 아니다. 밭주인도 형편이 어려워 몇 주만 일하거나 아예 쉬기도 한다”며 체념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베자에서 고등학교 체육교사이자 시골여성들을 위한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이착 가르비는 모니아의 삶은 베자 여성들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이곳 여성들은 몇 푼 벌겠다고 무슨 일이든 한다. 밭일, 소젖 짜기, 가축 돌보기, 트럭뒤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가축을 모는 일 등. 그러나 남성들은 푼돈을 받고 이런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여성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여성들이 특히 일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나마 일을 할 때 여성들은 자율성을 얻기 때문이다.”
섬유는 튀니지 국내 총생산의 19%를 차지한다. 이 섬유회사들의 본거지는 모나스티르 내륙지역인데, 이 지역에 거주하는 여성들도 섬유회사에서 일할 기회가 거의 없다. 공장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이다. 크사르 헬랄과 크시베에서는 최근 몇 년 간 7천5백 명이 직장을 잃었다. 이 중 86%가 여성이었다. 자크 브뤼누어 글로벌은 벨기에 섬유그룹이다. 이 기업은 스웨덴 의류회사 헤네스 앤드 모리츠(H&M)와 스페인 의류회사 자라(Zara)에 섬유를 납품하고 있다. 자크 브뤼누어 글로벌의 고용주는 10~20년 일한 노동자들을 하루아침에 해고하곤 했다. 해고 노동자들 중 여성들은 교육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해 재취업도 할 수 없다. 이들은 몇 푼 안 되는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간다. 그 중 42세의 한 여성은 “나는 두 아이의 엄마다. 게다가 직업병까지 얻었다. 나는 더 이상 쓸모없는 사람 취급을 받고 있고, 사회보장보험 혜택도 받지 못한다”며 한탄한다. 네 아이의 엄마라는 또 한 여성은 “재취업은 했지만, 불법노동이다. 급여가 3개월에 한번 꼴로 나와서 사장에게 따졌더니, 그는 오히려 내게 화를 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벨기에 사장한테는 말 한 마디 못하고 착취당하더니, 내가 튀니지 사장이라고 항의하는 것 아니냐?”
공식통계에 의하면 일자리를 가진 여성은 1/4에 불과하다. 2014년도 실업률은 남성 12.7%, 여성 22.5%였다. 대졸여성 실업률은 더욱 높다. 남성 21.2%, 여성은 40%에 달한다. 2만 5천 명이 거주하는 크시베의 대체적인 인식은 “재스민 혁명 이후 모든 게 나빠졌다”는 것이다. 크시베의 여성들은 튀니스 여성들에 대해 반감을 표한다. 28세의 회계사 이브티헤네는 “마르사(튀니스 북부의 멋진 해변도시)에 사는 부르주아 여성들은 잘난 척해서 싫다”고 한다. 그의 친구인 프랑스어 교사 네주아도 “그들은 이기적이다”라고 맞장구친다. 이 두 여성 중 한 명은 베일을 썼고 다른 한 명은 쓰지 않았다. 이들은 평등한 재산상속에 대해서는 ‘마르사의 부르주아 여성들’과 뜻을 함께했다. 이들은 아들과 딸의 재산상속 비율을 2:1로 하는 것은 공평치 않다고 했다. 하지만 코란에 명시된 내용이기 때문에,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법률을 제정할 수가 없다.
여성문제 상담소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네주아는 “우리 조사에 의하면, 여성의 1/2이 물리적인 폭력을 겪고 있다”며 여성에 대한 폭력이 늘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명했다.
남부는 풍요롭진 않지만, 이곳 여성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을 좋아한다. 여성들은 “이곳 남성들은 일을 열심히 한다”고 하며 웃었다. 자르지스와 메데닌, 제르바의 여성들은 베일과 긴 치마를 착용한다. 여성들은 모두 이슬람 스카프를 자유롭게 착용한다. 벤 알리 정권 때는 경찰이 강제로 스카프를 벗겼었다. 여성들은 당시의 고통을 회상했다. 경찰은 이슬람 가족을 괴롭히거나, 하루에 최대 8번까지 이들을 검문해 경찰서로 연행했다. 이런 만행은 총선 때 심판을 받았다. 이 지역에서 반기를 든 것이다. 튀니지 전체가 에나흐다당에 등을 돌렸지만, 남부의 보수층은 주저 없이 이 이슬람 정당에 표를 던졌다.
수도 튀니스의 사람들은 몬세프 마르주키(2011.12~2014.12. 튀니지 대통령)의 이름만 언급해도 반감을 드러내거나 분노한다. 그가 이슬람주의자들에게 관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부 사람들은 그를 대환영한다. 청바지차림에 보라색 두건을 쓴 40대 여성 나피사도 마르주키를 ‘정직한 의사’라고 평하며 그리움을 표현했다. 초등학교 교사이며 이혼한 경력이 있는 나피사는 지금 살고 있는 곳을 좋아한다. 나피사는 “사막처럼 뜨거운 날씨에, 교통시설도 없어 불편하지만 그래도 여기 사는 게 좋다. 가족이 있고, 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족하다”고 말했다.
엘메이 마을에서 가까운 제르바에 누르 엘후다가 살고 있다. 엘후다의 집에서 엘후다 사촌의 결혼파티가 열렸다. 성인 여성들과 소녀들은 모두 전통의상을 차려입고 베일을 썼다. 30세의 페르다우스는 “혁명 전 나는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지금은 남편의 직조공장에서 일하고 있고, 곧 공장주가 될 것이다!”라고 외치며 크게 웃었다. 2011년까지만 해도, 정부를 두려워했던 남자들은 이제 아내가 눈에 띄게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여성들이 스카프를 착용하거나, 단체에 가입해 투쟁하는 것은 금지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페르다우스는 “지금은 내가 모든 권리를 쥐고 있다!”고 단언한다. 40대인 엘후다도 시민단체에 가입해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고, 남편을 대신해 가정을 이끌어가고 있다. 인터넷 교육을 받은 그는 인터넷을 활용해 여성들에게 자녀들과 친해지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다른 모든 엄마들이 그렇듯, 이곳의 엄마들도 자신의 아들이 지하드의 유혹에 빠질까 걱정하고 있다. 각 지역은 이슬람국가 조직에 병력을 파견하고 있다. 페르다우스는 “친하게 지내던 청년 4명이 시리아로 떠났는데, 그 중 한 명이 죽었다. 이슬람 극우세력도 아니고, 정상적인 청년들이었는데 이해할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벤 알리 정권 24년 간 한 번도 투표한 적이 없는 베스마 제발리는 현재 제르바의 에나흐다당 국회의원이 됐다. 대학에서 인적자원 관리를 전공한 활동적인 여성 제발리는 “수도 튀니스 여성들의 고정관념이 짜증난다. 튀니스 여성들은 베일을 안 쓰면 민주적인 여성, 베일을 쓰면 뒤떨어진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우리는 베일을 쓰지만 민주적인 여성들이다. 베일을 쓰는지 쓰지 않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베일은 종교적인 의상에 불과하다”라고 강조한다. 튀니스의 여성들이 튀니지 여성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제발리는 말한다. “튀니지 여성 대표라는 여성이 샴페인 잔을 들고 건배를 제안하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소수의 일부에 불과하고, 당신이 술을 마시든 동거를 하든 당신 마음이다.”
그럼에도, 투사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다
수도인 튀니스에 사는 사람들은 에나흐다당을 종종 살라피스트, 즉 근본이슬람주의자들과 동일시하고 있다. 튀니스 사람들 중 이슬람 정당(에나흐다당)의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에나흐다당은 거짓말쟁이며, 이중적 언어를 쓰고 있다”고 비난한다. 반(反)계몽주의에 대한 처방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튀니스 사람들은 모두 벤 알리 정권 이후 암울해진 교육부문을 긴급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여성가족부 장관 사미라 마아리는 “내가 최우선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아이들이다! 현재 90%의 유치원이 사설이다. 이 유치원들은 주로 이슬람 단체나 코란학교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감시나 통제를 받지 않고 있다”고 주장한다. 초·중·고등학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문을 대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 전직 대통령 마르주키는 “1970년대 정부의 노력으로 지금의 교육수준에 도달했지만, 현재 가장 우려스러운 것은 튀니지 대학들의 황폐화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가운데, 많은 이들이 전통적인 사회모델이 지속될지 우려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국무장관 네일라 샤아반 하무다는 “여성들은 이슬람의 요구에 부합한 삶의 방식을 발전시켜왔다. 나는 이 방식이 유행이나 비참한 실상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가도 사라지지 않는 깊은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살라피스트로의 일탈 위험이 있다는 핑계로 이런 삶의 방식을 근절시키는 것이 옳을까? 튀니스에 사는 사람들은 그렇다고 답한다. 튀니스 외의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이런 삶의 방식이 반(反)생산적이라고 여긴다. 그것이 야기하는 경직된 생활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재 튀니지 전 지역의 여성들은 결국 하나가 된다. “우리는 투사다.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모토 앞에서는 말이다.
글 플로랑스 보제 | <르몽드>기자
정신의학자와 저널리스트를 넘나들다가 2000년 <르몽드>에 정식으로 입사, 11년 간 튀니지 등 마그레브 지역을 취재한 후, 최근에는 개발 도상국가들의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다.
번역 | 조은섭 chosub@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