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우리의 운명은 수치화됐다

2015-11-02     댄 보우크
미국 생명보험사 뉴욕라이프(New York Life)의 1903년 사진을 보면, 빳빳한 흰 블라우스를 입은 여성들이 눈에 띄는 색인카드 파일들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고, 검은 정장 차림의 남성들은 책상 위에 쌓인 서류더미를 검토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사진은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보험업계의 일면을 상기시켜준다. 그것은 보험사들이 그들의 현금 보유고에 필적하는 규모와 가치를 지닌, 방대한 개인정보를 관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최근 일련의 사이버공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건강보험사 데이터베이스에 있던 개인정보를 도난당했다. 이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개인정보에 관한 문제를 환기시켜주었다. 하지만, 보험사들이 개인정보를 축적해온 것은 이 사건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다. 이를 면밀히 살펴보면 ‘빅 데이터’의 중요한 전조 현상이 드러난다.

앞서 언급한, 사진 속 뉴욕라이프 직원들이 정리하던 카드들은 광범위한 신체검사로 확보한 의료정보, 신용정보회사 또는 수사기관에서 사들인 신상정보 및 재무상태, 보험신청자에게 직접 또는 보험설계사를 통해 얻은 정보, MIB(1)로부터 얻은 정보 등을 한데 엮는 마스터 색인이 됐다. 미국 유명 생명보험사들이 MIB를 만든 목적은 보험신청자의 모든 장애 관련 정보, 특정 질환, 결핵 가족력, 비만 이력, 질병 위험지역 거주 경험 등 보험신청자의 건강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항들을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장애 관련 정보는 1881년 멜빌 듀이(2)가 처음 개발한 시스템을 이용해 카드상자에 담긴 채 전국으로 운반됐다. 회사 의료책임자들은 파일에 접근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직원들이 MIB카드를 지켰다. 일부 기업들은 이 카드를 특수 금고에 보관하기도 했다. 만약 의료책임자가 자신의 의료진들과 파일에 관한 이야기를 할 경우, MIB 벌금에 처할 수 있었다. 이는 개인정보에 대한 원칙적 우려 때문이 아니라, 개인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것을 임원들이 기피했기 때문이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보험사들이 보유한 카드와 이 속에 흐르던 거대한 힘의 존재를 알았다면, 심각한 문제가 뒤따랐을 것이다.

이 카드들이 왜 그토록 중요했을까? 그 이유는 19세기 후반 생명보험이 대중상품화 되면서, 가입신청자 심사 절차가 상당 부분 자동화됐다는 것이다. 자동화한 카드 파일은 회계업무부터 컴퓨터의 출현까지 크게 기여한 비즈니스 기술이라 할 수 있다. 뉴욕라이프는 이 카드 파일에 대한 열정 뿐 아니라, 보험가입자의 선별 및 구분을 간소화하는 방법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도 혁신적인 기업이었다. 대중상품화의 핵심은 개인들을 보다 철저하게 수량화하는 데 있었다. 뉴욕라이프의 의사와 공인회계사(당시 명칭은 보험계리사)들은 개개인을 등급이 매겨진 ‘리스크’로 전환할 수치계산법 개발을 위해 협력했다. 그 결과, 개개인들의 ‘리스크 요인’에 값을 부여하고 수량화해 개인의 운명을 예측하는 단일 점수를 생성하는 소름 끼치는 산술을 만들었다. 이 점수는 가입신청자가 표준보험증권을 받을 수 있을지, 또는 거부당해 대안을 찾아야할지, 아니면 1천만 명이 넘는 미국 내 보험가입자 그룹에 낄 기회를 아예 놓치게 될 지를 결정했다.

따라서 생명보험사들의 카드 파일은 작곡가 찰스 아이브스(3)가 칭한 ‘필수적인 상품’에 접근할 권한을 할당하는 제도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대안이 거의 없던 시절, 생명보험은 미국인들에게 일종의 저축이자 투자였다. 더욱이 개인과 가정의 토지·유산 의존도가 점점 낮아지고 임금이나 사업수익으로 생활을 영위하게 되면서, 생명보험은 세대간 안정을 가져다주는 새로운 방법이 되었다. 또한 새로운 기회의 열쇠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미국인 농부가 서부의 땅을 구입할 융자금이 필요할때, 가장 요긴한 것이 생명보험증서였다. 당시 미국 노동자의 자녀들은 어린 나이에 사망하는 일이 흔했다. 그래서 많은 노동자들에게 생명보험의 의미는, 아이들의 시신을 묻어야 하는 극빈자의 공포로부터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존엄성을 지켜주는 보루였던 것이다.

한편 일반인들이 보험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보험 마케팅에 내재된 불평등과 싸우기도 했다. 1880년대 대형 보험사들이 흑인에게 백인과 같은 보험료를 청구하면서 보험금은 훨씬 적게 지불하는 식으로 흑인을 차별한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이에 대한 조직적인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북부 주의회들을 통해 차별방지법을 관철시켰다. 이러한 입법 투쟁들은 미국의 인종차별 금지 및 인권투쟁의 역사에서 자주 언급되지는 않지만, 중요한 부분임은 분명하다. 또한 이 투쟁들은 생명보험사들에 보험업을 둘러싼 험난한 정치문제들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됐다. 따라서 생명보험사들 MIB에 대한 역풍을 우려해 카드 파일을 엄중 감시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05년, 결국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 원인은 보험사들의 데이터 사재기가 아니었다. 미국의 정치적·경제적 상황과 생명보험사의 수익수준을 고려했을 때, 보험사들이 지나치게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의혹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사건은 보험왕 제임스 헤이즌 하이드가 호화스러운 무도회를 열면서 시작됐다. 하이드의 부친은 맨손으로 시작해 에퀴터블 생명보험을 자산 가치 2억 5천만 달러(2014년 기준 수천억 달러) 이상의 기업으로 일군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들인 하이드는 당시가 대 호황이었다고는 해도, 지나치게 호화스러운 사교모임을 주최했다. 18세기 베르사유를 연상케 하는 화려한 차림의 사교계 인사들은 셰리 호텔(Sherry’s Hotel)에 모였다. 셰리 호텔은 빛나는 바닥과 프랑스 조각상들을 갖추고, 오렌지 나무 화분들로 완비된 프랑스식 정원을 갖춘 최고급 호텔로, 사교계 인사들은 이곳에서 유명 프랑스 여배우의 공연을 관람했다. 무도회가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퀴터블 생명보험의 일부 임원들은 하이드로부터 회사의 경영권 및 자산을 빼앗기 위해 이 호화 무도회를 구실로 삼았다. 세상을 들썩이게 한 이 스캔들로 인해, 뉴욕 주는 에퀴터블 생명보험은 물론 뉴욕라이프 등 상위 5개 보험사들에 대해 장기간에 걸쳐 굴욕적인 수사를 펼쳤다. 신문의 1면 기사들은 회사보유고를 이용해 그 시대 대규모산업 통합의 자금줄이었던 금융계에서 영향력을 높이려했던 재정위원회들의 술책을 세상에 알렸다.신문은 이어 반복되는 부당경영 사례, 정치적 간섭, 과도한 임원 급여를 보도했다. 또한 엄청난 수익을 거두면서 소비자에게 혼란을 주도록 복잡하게 계산된 보험상품들을 폭로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에게 섬뜩할 만큼 낯익은 이야기다.

주 정부 차원의 대처는 종종 엉뚱한 결과를 낳곤 한다. 예를 들어 생명보험사들은 흑백 차별금지법에 대해 법률규정은 준수했지만, 상당수의 보험사들이 내심 반발했고, 흑인 대상의 보험영업을 중지했다. 결국 흑인차별정책이 남부에 굳게 자리 잡던 그 시기에, 국가 전반에 걸친 차별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1905년의 위기 상황에 대한 뉴욕 주의 대처도,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남겼다. 뉴욕 주 의회는 거대 보험사들을 통제하기 위해 청문회를 열었다. 이후 보험사가 정보를 활용하고 고객과 소통하는 방법에 있어,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나빠진 평판과 엄격해진 규제에 대해, 보험사들은 획기적인 방식으로 대응했고 이는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었다. 상위 5개 보험사들 중 하나였던 메트로폴리탄 생명보험은 ‘리스크의 선별과 보험영업, 그 이상을 추구하는 회사’로 대대적인 이미지 변신을 했다. 메트로폴리탄 생명보험의 임원들은 법인 보험사들에 의해 마련된 일종의 ‘신 사회주의’를 거창하게 언급하며, 보험사 직원과 고객 모두의 건강과 복지 증진을 위해 일련의 실험을 선언했다. 우선 고객들 중 병약한 노동자를 대상으로, 방문 간호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리고 생명연장연구소(Life Extension Institute)와 연계해, 부유층 고객들에게 매년 (생명보험 신체검사를 본떠 만든) 건강검진 서비스를 제공했다. 또한 보험설계사들로 하여금 건강의 중요성을 설파하도록 하고,질병의 원인을 설명하거나 ‘삶의 방식’을 기술한 소책자를 고객들에게 배포했다. 이러한 개혁의 기저에는 경제학자 어빙 피셔(4)에 의해 알려진 이념이 깔려 있다. “죽음은 완전한 우연이나 필연적 운명의 결과물이 아니라, 통제될 수 있고 거부할 수 있는 힘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죽음의 현대적 개념’을 설명한 피셔는 사망위험을 예측하던 생명보험사들로 하여금 생명을 연장하는 수단을 만들도록 독려했다. 그 결과, 보험사들은 리스크에 등급을 매기는 수치계산법·건강검진·인간 생명의 달러화 환산 등 전례 없이 개인을 수량화하는 작업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거의 매일 리스크 평가 대상이 됐고, 이를 매우 즐겼다. 그들은 자신들의 체중과 신장을 통해 기대수명을 산출하는 체중계 위에 올랐으며, 단순한 질병에의 위험을 자체 질병 종(種)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강검진을 정기적으로 받았다. 또한 위생과 보건에 대한 공공 및 민간 지출 증가를 정당화하는 국가 인구의 달러 가치 평가를 즐겼다. 이제 리스크에 대한 사고와 계산은 사람들의 행동, 정치, 심지어 그들이 자신을 생각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생명보험사들의 작업이 1930년대 사회보장제도의 초석이 됐을 때, 일부 미국인들은 자신의 사회보장번호를 남자는 이두박근, 여자는 허벅지에 문신으로 새길 만큼 기꺼이 새로운 지위, 수량화된 경제시민으로서의 지위를 받아들였다.

카드 파일 상자를 기반으로, 개인의 미래를 예측하는 19세기 시스템은, 20세기에 도입된 새로운 시스템에 자리를 내주었다. 리스크를 예측했던 개인정보 카드들은 리스크 관리를 위한 카드들과 나란히 놓여있다. 20세기 이후 개개인은 더 철저히 수량화되고, 면밀한 조사와 추적의 대상이 됐다. 수천 년 전 다윗 왕은 동시대인들에게 자신의 날수를 헤아려 지혜를 찾으라고 했다.(5) 20세기 초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날수를 잘 세며 살았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센 것은 아니다. 21세기에 사는 우리처럼, 삶이 데이터에 의해 움직일 때 대기업들이 운전석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또한 섬뜩할 만큼 낯익은 이야기다.

 
 
 
글·댄 보우크 Dan Bouk
<How Our Days Became Numbered : Risk and the Rise of the Statistical Individua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5)의 저자
 
번역·오정은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졸

 

(1) Medical Information Bureau, 의료정보국, 비밀 보험 교환소

(2) Melvil Dewey, 미국 도서관학의 개척자로 도서관 문헌 분류법 중 대표적인 십진분류법을 만들었다. (역주)

(3) Charles Ives, 미국의 작곡가. <교향곡 제3번(캠프 미팅 The Camp Meeting)>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4) Irving Fisher, 미국의 경제학자, 통계학자. 클라크(Clark, J.B.)의 한계이론에서 출발하여 수리경제학의 체계를 수립했다.

(5) 시편 90편 12절 (역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