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의 시기에 한국외교는 어디로?

2015-11-02     은용수
함석헌 선생의 말처럼 1945년, 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국제정치맥락에서 보자면, 1990년 냉전의 종식 역시 “도둑처럼” 뜻밖에 왔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함석헌을 비롯해 박헌영, 김구 등 독립운동가들이 일본의 패망을 예상하지 못한 것처럼, 소련의 붕괴나 냉전체제의 종식을 예측한 국제정치학자들은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오히려 실상은 그 반대였다. 당시 냉전이라는 ‘양극체제’의 안정성을 주창하는 목소리가 국제정치학계에서는 대세였다. 물론 냉전의 종식은 ‘뜻밖의 사건’이 아니라는 해석도 있지만,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예측의 성공여부가 아니라 냉전체제가 무너지고 곧이어 ‘새로운’ 패러다임의 모색이 시작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렇게 25년이 흘렀다. 그리고 지금, 일상의 시간은 서로의 안부를 물을 틈도 주지 않는 듯 빠르게 흐른다. 물론 정치의 시간 역시 빠르다. 흔히 정치는 무관심이나 망각을 동반하기에 그것의 시간은 더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고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국제)정치의 시간은 넋 놓고 안부를 묻지 않기엔 너무도 묵직하다. 1990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시작된 새로운 국제정치질서의 형성은 세계화, 민주화, 정보화, 지역화, 상호의존성의 증가 등으로 묘사되는 다양하고 복잡한 현상을 담고 빠르게 ‘전환’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던 원치 않던, 우리네 삶은 그 ‘전환의 시간’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문득 의문이 든다. 과연 한국은 새로운 질서에서 어떤 ‘전환’을 준비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새로운’ 질서를 살아가고 있긴 한 것일까? ‘탈냉전기’에도 ‘냉전적’ 질서가 변함없이 한반도를 감싸고 있는 현실은 한국이 새로운 환경을 아직까지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냉전의 종식, 뒤이은 유럽의 통합, 그리고 자유로운 소통의 시대가 열렸지만 우리는 여전히 고전적이고 군사적인 대결구도에서 남북 간 갈등을 일상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물론 혹자는 날카롭게 되물을 것이다. “분단과 남북대결이 오롯이 한국의 책임인 것인가? 나아가 한국이 처한 지정학적 조건에서 우리가 질서의 ‘전환’을 꿈꾸는 것은 과도한 이상주의가 아닌가?”라며 반문할 수 있다.

일견 맞는 말이다. 한반도 분단의 원인은 국내보다는 국제적 차원에서 찾는 것이 더욱 타당한 측면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25년이 흘렀다. 한반도의 대결구도를 만들었던 냉전체제가 무너진 뒤 흐른 25년의 세월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변화’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아닐까? 그렇다하더라도 다시금 날카로운 비판이 제기 될 수 있다.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은 변하지 않았고, 게다가 냉전 종식 후 중국의 급속한 성장으로 미-중 간의 경쟁구도가 새롭게 등장했으니, ‘전환의 시간’은 한국을 비켜간 것이라고 몽니 낼 수도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주문으로 종종 이어진다. 국제정치는 냉혹한 것이며, 따라서 새로움을 꿈꾸는 전환보다는 ‘현재’의 (경쟁 및 대결적) 구도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해결에 한국외교력을 집중시켜야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일까? 한국의 외교정책에 관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논의 혹은 논쟁의 대부분은 바로 미-중 간의 세력경쟁에서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른바 “전략적 딜레마”로 흔히 표현되는 이 질문은 수많은 언론기사, 정책제안서, 학술논문 그리고 대학 및 대중강의를 통해 지속적으로 ‘재생산’되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연한 것 같은 이 질문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전환적 사고를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난다. 우선, 질문을 ‘해체’해보자. 이 질문은 무정부적 국제정치체제 속에서 미-중간의 경쟁/대결을 ‘주어진’ 현실로 혹은 변형 불가능한 구도나 질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전제 하에서, 즉 그렇게 고정된 질서 ‘내부’에서 국가행위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혹은 할 수 있는가)를 묻는 형식이다. 이렇게 구성된 질문에서 행위자의 역할은 ‘이미’ 상당히 제약 받게 되며, 따라서 선택의 범위도 매우 협소해질 수밖에 없다. 한미동맹 강화, 친중외교, 그리고 이른바 “연미화중”(聯美和中) 전략이 그것이다. 주지하듯, 이렇게 셋으로 구분되는 정책방향이 한국외교와 관련하여 현재 진행 중인 논의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해체’된 질문 속으로 다시 들어가 ‘전환의 시간’이라는 맥락에서 질문을 ‘재구성’해보자. 동북아시아의 지역질서는 늘 고정되어 변형된 적이 없는가? 동북아시아의 현 (대결적) 질서는 바람직한 것인가? 그 질서는 시공간을 넘어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한국을 포함한) 행위자들이 물리적, 담론적 차원에서 상호작용하면서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인가? 그 질서를 형성하는 혹은 그 질서를 수용하는 행위자는 국가(정부)로 국한되어 있는 것인가? 시민으로서, 특히 학문과 여론 형성에 큰 역할을 담당하는 지성인으로서, 우리들은 그 질서의 ‘유지와 재생산’의 과정에서 어떤 기능과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이처럼 해체되고 재구성된 ‘성찰적’ 질문들을 통해 우리는 현 질서가 결코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며, 고정돼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인지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질서형성의 과정에서 우리 스스로가 ‘구성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각과 성찰은 ‘실천’을 촉발하게 되며 이는 전환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질서 형성의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식 및 담론의 생산자와 소비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긴 역사의 호흡을 통해 켜켜이 통찰의 나이테를 쌓아올린 비판이론에 따르면 언어, 담론, 지식, 권력, 질서, 그리고 체제 간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호의존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거칠게 요약하여 예를 들자면, 만약 현 질서가 ‘대결적’이라면 그것은 대결적 언어, 이와 관련된 이론과 지식이 생산되고, 이것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수용되고 확산되면서 다시 재생산되고 나아가 강화되면서 대결적 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 ‘미-중간의 세력경쟁에서 한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수많은 언론보도, 정책브리핑, 학술논문과 저서, 나아가 대중강연과 교내강의를 통해 ‘재생산’되면서 단순한 질문을 넘어 일종의 담론이 된다. 그리고 이처럼 형성된 담론은 강력한 ‘수행성’을 발휘한다. 주류 담론은 곧 사회적 상식(common sense)으로 작동하게 되어 특정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에 정당성을 부여하여 보증하는 역할을 한다. 이는 주류담론(이른바 ‘상식’)과 배치되는 언행은 비정상적이고 부적절하며 타당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인지되어 결국 배제되거나 주변화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셸 푸코와 자크 데리다가 일찍이 갈파했듯 상식적(혹은 정상적)이라는 개념은 필연적으로 ‘경계만들기’와 ‘구별짓기’를 동반하는 “양자택일”의 시스템이며, 여기서 비주류는 비정상적이 것이 되어 선택받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한국외교의 ‘선택’을 묻는 질문은 단순히 질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 존재, 그리고 행위를 제약하는 강력한 ‘실재’(real)가 되어 결과적으로 한국외교의 실행적 범위를 협소하게 가둬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담론이 언어를 넘어 발휘하는 ‘수행적’ 기능과 제약에 대한 심도 있는 고민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한국의 물질적 역량의 한계, 지정학적 위치와 조건을 무시할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물질만큼(혹은 일부 국제정치이론에 따르면 물질이상으로) 관념이 중요하다. 나아가 만약 물질적 차원에서 주어진 제약을 변형할 수 없다면, 최소한 관념적 차원에서 형성된 ‘담론적 제약’에서는 해방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만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새로운 질문’의 도출이며 이를 통한 새로운 언어와 담론의 형성이다. 현 질서의 ‘내부’에서 만들어진 질문에 조응하는 선택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 ‘밖’에서 새로운 질문을 도출하고 그 질문을 추동하는 지식을 생산하며 확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해진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성찰’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빛을 발휘한다.

(국제)정치의 현실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행위자로서 나의 언어가, 질문이, 의제(agenda)가 현재의 대결적, 패권적, 차별적, 배타적질서 ‘내부’에 편입되어 그 내부의 문제에만 천착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그 결과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현 질서의 재생산과 지속에 공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성찰이 ‘지속’되면 기존의 질서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질서 ‘밖’을 향하고 있는 비판적 언어와 지식의 생산을 추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대안적 담론’에 관한 논쟁으로 이어져서 다시 한 번 행위자의 성찰을 유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성찰의 상호작용과정’은 대안적인 사회규범과 제도가 만들어지는 단초가 되어 결과적으로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의 형성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된다.

보편성에 입각한 타 지역과의 수평적 연대 필요

다시금 강조하자면 관념, 언어, 지식, 담론이 전부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현 질서에 균열을 내고 이것이 새로운 질서의 형성으로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행위자의 ‘물질적’ 역량을 무시할 수 없다. 물질적 역량은 담론의 형성, 특히 그것의 확산을 ‘효과적으로’ 이뤄내기 위한 중요한 조건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나 동북아시아에서의 상대적 힘의 열세는 한국이 비판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있어 제약이 되는 요인임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 제약을 극복하거나 혹은 완화시키기 위한 방법은 존재한다. 바로 연대이다. 즉 다른 여러 국제정치 행위자(국가 및 비국가 행위자)와의 넓은 연대를 통해 한 국가의 물질적 한계는 충분히 보완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다. ‘연대’를 위해서는 ‘보편’을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즉 새롭게 형성하고자 하는 질서는 특정한 나라에 국한된 이익이 아닌 전 지구적, 보편적 이익을 위한 것으로 설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좀 더 구체적인 제안을 해보자. 한국외교는 현재의 대결적, 국가 중심적 질서를 넘어 ‘열린 공동체’ 건설을 아시아 지역에서 우선 추구하고 이를 발판으로 하여 타 지역과의 ‘수평적’ 연대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영역은 바로 한반도의 평화통일 이슈일 것이다. 한국의 ‘부족한’ 물질적 역량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은 한국이 주도적이고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슈이며, 나아가 기존의 대결적 동아시아 질서를 평화적으로 ‘변형’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출발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즉 평화, 평등, 자유가 중심이 되는 아시아의 ‘열린’ 공동체 건설을 통해 새로운 질서 형성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한국 ‘외교’가 우선적으로 집중할 필요가 있는 부분은 바로 한반도의 평화 ‘통일’ 문제이며, 이러한 차원에서 외교와 통일을 분리하여 접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리고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한반도 통일의 목적이다. 새로운 질서 형성을 위한 연대를 추동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통일이 ‘모두’의 평화와 이익에 잘 조응하는 것으로 설정되어야만 한다. 달리 말해 국제사회가 한반도의 통일이 전 지구적 차원에서의 평등과 평화, 그리고 자유 증진에 실질적 공헌이 될 수 있음을 인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런 차원에서, 현재 한국사회의 통일담론에서 흡수통일 관련 논의는 물론이거니와 경제적 관점에서 통일의 타당성을 주창하는 논의(예컨대 통일 “대박론”이나 통일을 통한 “경제영토의 확장”) 역시 지양되어야 한다. 한국외교는 한반도의 통일의 문제를 민족통합의 문제가 아닌 ‘보편적’ 외교의 문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으며,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통일’교육은 ‘평화’교육이란 언어로 다시 치환되어 평화, 조화, 연대와 관련된 보편적 담론형성으로 이어질 필요가 있다. 더불어 지식과 담론의 문제를 국내적 차원에서의 교육과 문화의 문제로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외교의 영역으로 적극 끌어들일 필요가 있다.

동북아시아의 지정학적 조건, 미중간의 대결구도에서 새로운 질서와 평화적 전화를 모색하는 일. 이는 당장은 ‘비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고, 현실가능성이 떨어진다고 비난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시금 같은 질문을 또 해보자. 동북아시아의 지역 질서는 늘 고정되어 변형된 적이 없는가? 동북아시아의 현 (대결적) 질서는 바람직한 것인가? 그 질서는 시공간을 넘어 ‘주어진’ 것인가, 아니면 (한국을 포함한) 행위자들이 물리적, 담론적 차원에서 상호작용하면서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인가? 그질서를 형성하는 혹은 그 질서를 수용하는 행위자는 국가(정부)로 국한되어 있는 것인가? 특히 우리 자신은 그 질서의 유지와 재생산의 과정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 매우 자연스러운 것 같은 질서와 매우 당연한 것 같은 질문을 ‘해체’한 뒤 재구성하여 ‘대안적 실천’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바로 이러한 성찰적 질문으로부터 나온다.

자, 그렇다면 이제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자. 나는 과연 전환의 시대에 새로운 질서를 고민하고 있었는가? 한국을 지나치게 ‘규율’했던 냉전담론에 균열이 생기고 21세기 한국외교에 새로운 공간이 마련되는 계기가 생성될 수 있도록 우리, 함께, 지금, 그리고 바로 여기서 묻고 답해보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함석헌 선생의 말은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보다 큰 공명이 있으므로.
 
 
글·은용수
영국 워릭대학교에서 국제관계이론 및 외교정책을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출판사 ‘라우틀리지(Routledge)’의 저서 시리즈 책임 편집장으로서 아시아의 성장이 세계 정치·외교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 저서 시리즈 ‘아시아에서의 국제정치 이론과 실제'의 책임 편집을 맡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Why and How Should We Go for a Multicausal Analysis in the Study of Foreign Policy?(Meta) theoretical Rationales and Methodological Rules’ ‘Review of International Studies(2012).’ ‘What is ‘vintage’ in IR?’ PS: Political Science and Politics (201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