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에 걸친 로베스피에르 비방의 역사

2015-11-02     막심 카르뱅
   
▲ <로베스피에르의 냉정과 열정>, 1988~9 - 제라르 프로망제르
절대 권력의 타파를 꿈꾸었던 프랑스 혁명 초기, 당시 혁명의 정당성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아니, 어쩌면 ‘거의 대부분’이 맞을지 모른다. 초창기 혁명이 계몽사상을 구체화한 것은 사실이나, 그 이후의 변화는 극명하게 갈린다. 일각에서는 대중영합주의와 극단주의 등 반민주적인 악습의 총체라고 일컫는 로베스피에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의 과감했던 모든 계획이 믿기지 않을 법도 하다.

두 경우와 유사한 사례는 수없이 많다. 한 유명 잡지는 ‘청렴가’로 알려진 로베스피에르를 ‘사이코패스 율법주의자’, ‘참수광’으로 묘사했다(히스토리아 2011년 9월호). 프랑스3 채널의 한 다큐멘터리(2012년 3월3일, 7일 방영)는 그를 ‘방데(1)의 학살자’로 칭하기도 했다. 소위 B급 역사에 정통한 희극작가 로랑 도이치는 그의 베스트셀러 <메트로놈(라퐁 출판사, 2009년)>에서 무덤을 신성모독하는 로베스피에르를 상상했고, 샤를로트 코르데(2)에 지나치게 심취한 수필가 미셸 옹프레는 그의 저술에서 ‘로베스피에르 일당’들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스페인의 스타 저널리스트 페드로 J. 라미레즈는 로베스피에르가 꾸민 ‘민주주의에 대항한 쿠데타’를 소개하는 데 상당한 지면을 할애했다.(3) 사회학자 미셸 비비오르카는 IS(이슬람국가)를 로베스피에르 치하의 프랑스에 비유하기를 서슴지 않는다.(4) 프란츠-올리비에 지스베르는 수시로 ‘사회적 원한’, 또는 ‘르펜주의의 전조’를 연상시키는 ‘청렴가’의 귀환에 대해 우려를 표한다. 그 밖의 또 다른 많은 이들에게,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기억은 그를 더럽히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지워야만 하는 것이다. 마르세유와 벨포르 시청은 로베스피에르의 이름을 딴 광장 이름을 폐지했다. 은폐와 비방과 뭉뚱그림 속에서 이렇게 ‘담나티오 메모리아이’(5)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토록 대중적인 사자(死者) 연구는 사실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역사학자 마크 벨리사와 야닉 보스크는 로베스피에르가 살아있을 때 암흑의 서사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6) 로베스피에르가 아라스 삼부회 대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을 때호사가들은 그의 이름을 재미삼아 꼬아 발음하고 “빈민층의 편에 서서 말하겠다”는 그의 고집을 조롱했다. 미라보 백작은 젊은 연설가 로베스피에르가 “자기가 하는 말은 뭐든 사실인 줄 안다”며 조소했다. 그 다음 로베스피에르를 괴롭힌 것은 지롱드파였다. 내무부장관 롤랑은 로베스피에르에 적대적인 언론사에 자금을 지원했고, 대의원 장-밥티스트 루베는 “독재를 모의했다”며 그를 고발했다.

열월(7) 9일, 로베스피에르의 실각은 그의 적들을 달래기에 충분치 않았다. 열월파와 반혁명파는 보복을 열망했다. 처음에는 팸플릿, 다음에는 공식 보고서 속에서도 이미 실각한 로베스피에르는 해괴한 계획에 연루되었다. 신정정치체제 수립을 위한 음모, ‘국가학살’ 가속화를 위한 ‘7겹 단두대’ 제작 계획, 희생자들의 피를 모아 파리 밖으로 배출하기 위한 ‘피의 상하수도관’, 과격 공화파의 신발제작을 위해 행해졌다고 전해지는 ‘인체가죽 무두질’ 등의 괴담이 나왔다. 또한 로베스피에르의 어린 시절, 평소 습관, 성격에 대한 괴소문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진정한 악마’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비난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멈출 줄 몰랐다. 그는 신사가 되기에는 너무나 창백한, 핏기 없는 얼굴로 타인의 피를 먹이로 삼았다. 그는 힘없는 지방 사람들의 대변인이기도 했지만 악마적 천재였다. 또한 네로 황제보다도 위험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어떤 이들에게는 너무 강경한 것이 죄였던 강경파이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배반자에다 위선자다. 한쪽에서는 순수한 영혼, 금욕생활자, 심지어 숫총각으로 묘사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도리어 난봉꾼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어눌한 웅변가 또는 매력적인 선동가로,고위성직자를 꿈꾼 자 또는 종교의 파괴자로, 질서에 집착한 편집광 또는 무정부상태의 주창자로, 어떤 식으로 로베스피에르가 묘사되든, 중요한 것은 항상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경쟁적으로 펼쳐지는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비방은 결국 대중의 상상 속으로 침투하여 시간의 흐름과 함께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키웠다. 몇몇 낭만파 작가들, 로베스피에르의 과격함을 용서할 수 없었던 1830년대 부르주아 역사가들, 영감이 풍부한 작가였지만 역사가로서는 다소 모호했던 미슐레, 그리고 로베스피에르를 위선자 취급하며, 그보다 천박하지만 에너지 넘쳤던 당통을 더 좋아했던 소르본느 대학의 혁명기 역사학 연구 선구자인 알퐁스 올라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글을 썼다.

20세기에 들어 문학적인 색채를 조금 뺀 혁명기 역사학이 발전하면서 이런 진부한 이야기는 수명을 다한 듯 했으나, 1960년대에 들어 프랑수아 퓌레에 의해 이야기가 되살아났고 보다 우아해졌다. ‘회개한’ 공산주의자 퓌레는 영향력 있는 자유주의 저술가로 변신해 ‘혁명적 교리문답’을 비판하며 ‘혁명 다시 읽기’를 제안했다. 1789년 혁명은 계몽된 엘리트들이 이끈 좋은 혁명이었고, 1793년의 ‘일탈’은 갑자기 정치에 대중이 난입했던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공포정치와 전체주의의 역사적 상징

이 새로운 서사구조 속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저주의 마법에 걸린 듯 길을 잃고 방황하며 날뛰는 혁명의 상징이 된다. 퓌레는 그를 자코뱅파가 만들어 놓은 위험한 정치적 ‘도구’와 ‘여론’을 활용할 줄 알았던 ‘숙련공’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정치가로서의 면모 뒤에 병리적 요소가 숨어 있다. 퓌레가 그린 로베스피에르는 음모에 대한 집착, 민주적 공약 남발, 유토피아적 궤변에 휩쓸려 결국 공포정치와 전체주의의 길을 걷게 되면서 무너진다. 이 이미지는 그간 전통적으로 다양한 로베스피에르 반대파가 채택했던 이미지들의 혼합이지만 퓌레는 영민하고도 섬세하게 이 이미지에 새로운 요소를 부여했다.

정치적 저의가 다분한 퓌레의 로베스피에르 재해석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반전체주의파의 결집과 프랑스의 자유주의화, 사회주의화 경향 속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1983년에는 안제이 바이다 감독의 영화 <당통>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영화 <당통>은 국민의회 시절의 파리와 야루젤스키 휘하의 폴란드를 묵직한 비유로 엮어내며 스탈린주의의 논리를 드러내는 장치로 로베스피에르라는 인물을 활용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이미지는 1989년 혁명 200주년을 맞아 양면적 의미의 혁명 기념에 독보적 존재로 활용되었고, 그로부터 영감을 충분히 받지 못한 학자들의 손을 거쳐 교양 있는 대중 사이에까지 뿌리내렸다.

하지만 이 모든 비방과 공세 속에서도 여전히 로베스피에르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사람들도 끊임없이 있었다. 1908년 역사학자 알베르 마티에스에 의해 설립된 로베스피에르 연구학회(SER)는 12권에 달하는 <로베스피에르 전집> 출판을 진두지휘했다. 학계 밖에서도 관심이 높았다. 소더비 경매에 나온 로베스피에르의 친필원고를 구입하기 위해 2011년 5월 SER이 시작한 후원회원 모집에는 수천 명이 몰렸다. 인터넷에서는 반순응주의적 역사학자이자 로베스피에르의 적극 옹호자로 알려진 앙리 기예맹의 혁명에 대한 강의가 큰 인기를 끌었다. 서점에서도 같은 경향이 나타났다. <로베스피에르여, 돌아오라!>(8)라는 짧지만 무겁고 격렬한 로베스피에르 옹호론이 3천 부 이상 판매되었다. 보다 학술적인 내용을 담은 책 <로베스피에르, 교차된 초상>(9)은 재판까지 찍게 되어 출판사도 놀랄 정도였다. 우연인지 시대의 운명인지는 몰라도 출판사들은 필립 부오나로티의 <평등을 위한 음모>(10)나 장 조레스의 명저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11) 등 로베스피에르 관련 고전 작품까지 재출판했다.

무엇보다 대학교수 에르베 뢰베르(12) 덕에 최근 독자들은 새롭게 참고할 만한 로베스피에르의 인물상을 갖게 되었다. 그의 저술 속 로베스피에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흉포한 독재자와는 퍽 거리가 멀다. 그는 정말 야심가였을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받아들일 때 항상 망설였고, 입헌의회의 의원이었을 때는 입법의회 출마를 거부하고 “신선하고 힘있는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자”며 동료들의 불출마를 촉구하기까지 했다. 그는 정말 인류의 적이었을까? 그는 유대인들의 온전한 시민권 인정을 위해 목소리를 냈고, 식민지 제도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정말 폭군이었을까? 그는 너무나 일찍, 오로지 혼자서 보통선거를 주장했고 청원권과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웠다. 한순간도 시민의 편에서 군부와 위정자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정말 전체주의자에 중앙집권주의자였을까? 권력분배에 대한 이론을 세우고, ‘통치에 대한 구시대 정부의 과도한 집착’을 비판한 사람이 바로 로베스피에르였다. 그는 정말 살인광이었을까? 그는 오랫동안 사형제 폐지와 형벌의 완화를 주장했다. 혁명의 적들을 처단할 마음을 먹고도 그는 “희생자를 늘리지 말 것”을 요구했고, “방황하는 자들은 너그러이 용서하고 피는 아낄 것”을 주장했다. 그런 그가 국가의 존폐위기에서 공포정치에 가담했을지언정 책임은 그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가장 잔혹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 모든 혐오는 로베스피에르를 향하는가? 어쩌면 그의 이름과 그의 행동 속에 어떤 완고하고도 불편한 원칙이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철학자 조르주 라비카가 회상하듯,(13) 그는 항상 민중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자 했고 자본가들에 대해 어떤 우위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가 두려워했던 것은 혁명으로 인해 전복된 구시대의‘봉건적 특권계급’이 새롭게 등장한 ‘돈의 특권계급’로 대체되는 것이었다. 이 생각이 그의 모든 행동의 발로였다. 정치권에서 그는 선거권을 돈으로 거래하는 정액지대투표권 제도를 반대했고, 주권이 민중에 있다는 외연적 개념을 지지했다. 사회적 측면에서는 자연권인 생존권을 침해하는 경우 소유권을 제한하고 상업의 자유에도 제동을 걸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처럼 ‘대중의 입장’을 위해 싸우면서 로베스피에르는 최고조에 달한 과격 대중혁명의 상징이 되었다. 환유에 의해 그의 이름은 대중의 정치화, 전례 없는 대중의 참여와 사회적 관여를 뜻하는 동의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복위된 왕정은 혁명기 시대가 남긴 로베스피에르의 유령을 쫓으려 애쓴다. 이런 상황에서 로베스피에르를 소환하는 것은 혁명이 끝나지 않았다는 의미이자, 1793년 헌법 논의 과정에서 등장한 강력한 민주사회 공화국 수립 계획을 다시 꺼내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신봉자로 재평가 움직임

바로 이것이 19세기와 20세기 초 정치적 논쟁에 로베스피에르가 빠지지 않았던 이유라고 역사학자 장-뉘마 뒤캉주는 지적한다.(14) 열월 이후 그라쿠스 바뵈프는 민주주의를 되살리기 위해서 “로베스피에르주의를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 혁명의 폭도였던 알베르 라폰느레는 ‘신념 있는 정치가’ 로베스피에르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2월 혁명당 행동대원 루이 블랑은 장편 <혁명의 역사> 집필로 그에게 경의를 바쳤다. 두 세대가 더 지난 후, 위대한 장 조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곳 1893년 6월의 태양 아래, 나는 로베스피에르와 함께 있다. 그리고 그가 곁에 있기에 나는 자코뱅파와 함께한다. 그렇다. 이 시점에서 혁명의 위대함이 그에게 있기에 나는 그와 함께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평등이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고 자유도 없다고 여러 차례 말하곤 했다. 그는 정치는 직업이 될 수 없다고 단언했고, 행정직위의 겸직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대표자에 대한 관리 강화를 역설했다. 그는 ‘소유권이 인간의 존속을 통제하는’ 권리를 부정했고, 공익보다 큰 사적 이익을 인정하지 않았다. 계엄령으로 민중봉기에 맞서려는 이들에게는 “악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서 왜 민중이 굶어 죽었는지 알아보라”며 응수했고, 왕족들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 지롱드파에게는 “자유가 무장한 선교사들의 손으로 전파될 수는 없음”을 상기시켰다.

물론, 마티에스가 이미 100년 전에 지적했듯 로베스피에르를 우상화하며 “그를 위해 향을 피우는” 것도, “언제나 무조건 로베스피에르가 옳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로 상징되는 혁명가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글·막심 카르뱅 Maxim Carvin
 
번역·김혜경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졸.
 
(1) Vendée, 프랑스 혁명정부의 징집령에 대항해 봉기했다가 투쟁 끝에 대부분 학살당한 농민군의 초기 중심지(역주)
(2) Marie-Anne Charlotte de Corday d'Armont, (1768~1793) 정치가 장-폴마라를 암살한 후 단두대에서 처형된 여성으로, 빼어난 미모 때문에 ‘암살천사’라는 별명으로 알려짐(역주)
(3) 페드로 J. 라미레즈, <쿠데타>, Vendémiaire, 파리, 2014.
(4) Ouest-France 2015년 6월 10일자.
(5) Damnatio memoriae, '기록말살의 형벌'을 뜻하는 라틴어(역주)
(6) M. 벨리사 & Y. 보스크, <로베스피에르, 허구의 탄생>, Ellipses, 파리, 2013.
(7) 테르미도르, 프랑스 혁명력의 제 11월로 현재의 7월말에 해당(역주)
(8) 알렉시스 코르비에르 & 로랑 마페이스, <로베스피에르여, 돌아오라!>, Bruno Leprince, 파리, 2012.
(9) 미셸 비야르 & 필립 부르댕, <로베스피에르, 교차된 초상>, Armand Colin,
파리, 2012.
(10) 필립 부오나로티, <드 바뵈프가 말한 평등을 위한 음모>, La Ville brûle, 몽트뢰유, 2014.
(11) 장 조레스,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 총 4권, Editions sociales, 파리, 2014-2015.
(12) 에르베 뢰베르, <로베스피에르>, Fayard, 파리, 2014.
(13) 조르주 라비카, <로베스피에르, 철학의 정치>, La Fabrique, 2013 (1990). 플로랑스 고티에의 <인권혁명과 시민의 승리와 죽음(Syllepse, 파리, 2014)>도 함께 볼 것.
(14) 장-뉘마 뒤캉주, <프랑스 혁명과 세계의 역사>, Armand Colin, 파리,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