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리 부는 사나이’는 지금도 살아 있다

[초점] 유엔 ‘아동권리협약’ 20주년
웃음잃은 아이들의 얼굴엔 슬픔과 분노만 가득
이름뿐인 ‘국제사회의 아동 보호’, 인류의 과제

2009-11-05     클레르 브리세 | 프랑스 대통령 자문위원

실종, 과도한 노동, 교육의 부재, 자포자기, 온갖 종류의 폭력…. 전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그들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는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상황이 심각한데도 우려의 목소리는 간헐적이다. 그럼에도 20년 전 유엔에서 채택돼 미국과 소말리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가 비준한 아동권리협약은 몇 가지 소중한 진전을 의미한다.


1989년 11월 20일, 뉴욕 유엔본부에서 10년에 걸친 힘겨운 협상 끝에 ‘아동권리협약’이 만장일치로 통과될 무렵은 세계적으로 어린이들이 가장 비관적인 상황에 처해 있을 때였다. 1960년대 말부터 1980년대 말까지 근 20년 동안 어린이 문제에는 상당한 진전이 있었지만 80년대 말부터 약간 퇴조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국제아동기구인 유니세프(UNICEF·유엔아동기금)의 제임스 그랜트 의장이 경고했다. <<원문 보기>>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이 최빈국들에 강요한 구조조정 계획안의 여파로 건강과 교육 분야의 예산이 원천적으로 줄어들었다. 제3세계 국가들이 짊어진 전체 채무액은 1조 달러라는 상징적 한계를 초과했고, 개발보조금은 선진국들의 국내총생산의 0.35%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최빈국들의 평균소득은 몇 년 새 25%나 추락했다.

협약은 이처럼 나빠진 상황을 상쇄하려는 의도로 채택됐다. 1400만 명의 5살 이하 어린이들이 치료 방법이 잘 알려진 질병이나 영양실조로 사망하고 있다. 10억 명의 의료기관 접근이 구조적으로 차단됐으며, 이들 중 절반 이상은 성년에 이르지 못한 연령층이다. 이들을 보살피려면 100만 명의 보건 담당 인력이 더 필요한 실정이다.

협약 체결 20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는 협약의 기초와 필요성을 동시에 재검토하고 현실적인 효과를 분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작업은 까다롭고 난해하다. 어떤 주제는 주관적이고 정치적이다. 프랑스에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기념일이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프랑스 정부는 9월 이 협약이 제대로 준수되는지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아동의 보호자’라는 기구를 폐지할 뜻을 발표했다. 물론 폐지 반대가 격렬해 다른 형태로나마 가까스로 명맥은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갈수록 무감각해지는 ‘어린이 보호’

1980년대 말은 미성년의 특별한 권리라는 개념이 막 태동할 무렵이었다. 분명, 서구 사회에서는 학대라든가 살인 같은 명백한 범법 행위로부터 미성년을 보호하려는 목적을 가진 다양한 논의들이 있어왔다. 범죄를 저지른 미성년자를 처벌할 때는 교육적 차원에서 성인보다 가볍게 형량을 매기려는 법률들도 존재한다. 또한 가족과 관련한 법률, 특별히 부모의 이혼과 미성년자의 재산 보호를 다루는 것에서 상당한 개선이 있었다. 그럼에도 미성년 어린이들에 대한 법률은 여전히 미비하고 구체적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1989년의 뉴욕협약(아동의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은 통일성이 부족하고 편차가 큰 각국의 법률에 근본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에 근거해 하나의 핵심 원칙을 밝혔던 것이다. 즉, 차후 미성년과 관련된 결정을 결정할 때는 그것이 개인적이건 전체적이건, 성인들의 특권을 다소간 침해할 소지가 있더라도 미성년이라는 ‘특권적 상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핵심 원칙을 필두로 결의문 조문은 다음의 세 가지 유형의 조치를 밝히고 있다. 각국은 어린이들에게 특히 건강이나 영양, 교육처럼 생존과 발달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모든 공공 행정과 개인들은 국가나 제도의 폭력과 가족 내의 모든 폭력으로부터 이들을 보호해야 한다. 모든 행정과 사법제도는 미성년과 관련된 결정을 할 때 미성년의 관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렇게 요약하면 이 복잡한 텍스트들은 비교적 간단해 보이나 그 함축적 의미는 무한하다. 우선 선진국이나 후진국이나 비준 과정을 거쳐야 한다. 즉, 의회가 이 협약을 채택해야 하고, 입법화 과정도 거쳐야 한다는 의미다. 오늘날 이 협약은 전세계적으로 거의 모든 나라가 비준을 마쳐, 국제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인정받는 협약이 되었다. 유일하게 두 나라가 예외인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인 미국, 그리고 소말리아다. 미국 정부는 이 문제로 끊임없이 도마 위에 오르는 것에 질려서 의회 표결에 부치겠다는 뜻을 밝히긴 한 상태다. 소말리아는 이 협약을 비준할 수 있는 기구, 즉 의회 소집이 불가능한 정치적 상황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이 협약이 확실한 변화를 가져왔는가? 물론 부정하기 힘든 진보가 있었다. 사망률만 봐도 분명하다. 5살 이하 어린이의 영양실조나 감염과 연관된 사망이 1989년 1400만 건이던 것이 1천만 건 이하로 낮아졌다. 교육 중에서도 여아 교육이 특히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지역에서 놀라울 정도로 개선되었다.

무엇보다 어린이의 권리가 정치적 이슈가 되었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어린이와 관련된 가혹한 범죄 행위는 국제 여론에서 자연적 재앙만큼이나 비중 있게 다루어진다. 미성년자에 대한 성 착취 같은 경우 추문의 대상이 된다. 프랑스와 독일을 포함한 수십 개 국가가 미성년 성 착취 고객을 예전보다 가혹하게 추적해 처벌할 수 있게 하는 ‘영토외 적용법’을 채택했다.

‘법적 장치’보다 중요한 것은 실천

게다가 경제위기의 시기임에도 노예 상태나 다름없는 어린이 노동으로 만들어진 제품들은 점점 국제사회에서 용인되지 않고 있다. 몇몇 다국적기업들은 어린이 노동으로 만들어진 상품을 판매하지 않기로 했다. 협약이 채택되는 기간에 수많은 국가기구나 단체들이 생겨나서 이 주제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 분야의 ‘전사’들이 벌인 정치적 활동이 진보를 이끄는 강력한 축이다.

국제 여론이 실제로 어린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지만, 어린이의 권리가 침해받는 것을 환기시키는 일은 꾸준한 노력을 요구한다. 여기에 어린이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실제로 권리침해는 상시로 일어나고 있고, 대부분 정부의 정치적 결정이나 국제 교역 시스템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가장 의미심장한 예로 영양실조의 문제를 보자.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사이트에서 ‘강대국들의 연회에 영양실조라?’(La malnutrition au banquet des puissants?)라는 기사를 참조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예도 있다. 전세계적으로 2억6천만 명의 어린이들이 무료 진료소나 오지 보건소에서 제공할 수 있는 정도의 가장 기초적인 의료 서비스에도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2억 명의 어린이들이 노동을 착취당하고 있다. 그중 절반 이상이 건강이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받는 열악한 조건에서 노동에 투입되고 있다.

이 아이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70% 이상이 농업 분야의 노동에 투입된다. 통상적인 생각과 달리, 농업은 가장 위험한 분야 중 하나다. 농기구에 대한 보호 장비도 없으며, 성인보다 취약한 이들의 신체 조건을 감안하면 살충제 흡입은 심각한 문제다. 아직 발육 중인 골격을 생각할 때 과중한 짐도 문제가 된다. 은·철·귀금속 광산, 섬유 분야, 전기제품 부속품 제조, 화약 제조 분야 등에도 어린이 노동이 대규모로 투입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은 학교에 전혀 가지 못하거나 간헐적으로 가는 것이 고작이고, 혹은 너무 이른 나이에 학교를 그만둔다. 교육학자들에 따르면 초등 교육에서 오랜 중단 기간이 없다 해도, 4년 이하의 교육만을 받으면 결국 이미 습득한 지식마저 모두 잃게 되는 ‘기능적 문맹’에 이른다.

또 이처럼 노동에 투입되는 어린이들 중 대다수가 홈리스 신세로 거리를 전전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온갖 종류의 폭력과 갈취, 마약에 노출돼 있다. 심지어 남아메리카에서는 경찰이 어린이들을 도로에서 내쫓으려고 폭력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희생되는 경우도 흔하다. 전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어린이들이 거리에서 폭력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죽어가는 아이들’은 인류의 미래

세상에서 가장 질 나쁜 폭력은 어른들이 자신의 뒤를 잇는 다음 세대에 가하는 폭력이다. 이 폭력은 역사가 그러하듯이 가정, 사회계층 등 경계를 가르지 않는다. 빅토르 위고는 그의 시집 <관조>에서 “이 아이들이 단 한 아이도 웃지 않은 채 모두 어디로 갔는가?”라고 묻는다.

그들은 웃지 않는다. 그건 확실하다. 그들을 때리고 모욕을 주는 부모. 그들을 죽이는 성적 착취. 개인의 폭력, 국가의 폭력. 30여 국가가 아직도 미성년에게 사형이나 돌로 치거나 채찍으로 때리고, 심지어 사지를 절단하는 형벌을 내리고 있다.

무력 분쟁 지역에서는 굳이 폭탄에 맞아 숨지는 어린이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부상당하거나 사지를 잃은 어린이들이 부지기수다. 이런 전쟁은 간접적으로 물, 의약품, 의료 서비스, 식량이 부족해 죽어가는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한다. 전쟁은 어린이들이 사랑하는 부모나 가족, 교사를 앗아가거나 이들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학교나 무료 진료소를 빼앗아감으로써 어린이들의 진로를 황폐화해버린다.

또한 전쟁은 어린이들을 난민으로 만든다. 거대한 난민수용소 인구의 60%가 어린이인데, 경제적 지원이 모자라 유엔의 난민고등판무관실과 세계식량계획(WFP)이 이들에 대한 하루 배급량을 줄여야 할 판이다.

이뿐이 아니다. 전쟁은 마지막 단계로서 어린이들을 병사로 둔갑시킨다. 게릴라군뿐 아니라 정부군까지도 병사가 부족해지면 이들을 납치해 상상하기 힘든 폭력을 자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동권리협약’이 무슨 소용이냐고 따져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실제적 효과와 권력에 대한 영향력 면에서 당연한 질문이고, 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회의주의자들이 보기에 이 세계는 어느 때보다도 가장 허약한 권리가 침해받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론 폭력을 줄이고 규제할 법적 기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신봉하는 자들은 이 협약에서 진보의 놀라운 수단을 기대할 것이다.

글·클레르 브리세 Claire Brisset
프랑스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인구 및 가족 정책 고등심의회’의 위원이며, 정부 지원 아래 청소년 인권 및 보호를 위한 옴부즈맨 활동을 벌이는 민간기구인 ‘아동의 보호자’라는 기구의 전 의장이었다.

번역·이진홍 memosia@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 주요 역·저서로 <진보와 그의 적들>(2003), <자살>(200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