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아프간전의 데자뷔

[특집-아프간의 베트남 망령]
시공 달라도 너무나 닮은꼴…매파에 휘둘리는 오바마, 존슨 판박이

2009-11-05     윌리엄 P. 포크 | 시카고대 사학과 교수

미국 군대와 함께 아프가니스탄을 체험했던 영화감독 빙 웨스트는 <아프가니스탄 전투 순회>(1)란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미국에 광범위하게 퍼진 여론을 대변하고 있다. “탈레반과 그들 조직이 와해되도록 전투를 벌여 우리의 적에게 더 큰 피해를 입혀야 한다. 또한 우리는 전장에서 적들의 피해를 늘리기 위해 새로운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이러한 시각은 아프가니스탄과 이 나라 국민에 대한 무지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이런 생각이 마음에 드는 것과 상관없이, 탈레반은 주로 파슈툰족으로 구성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눈에 국가의 유일하고도 효율적인 정치·군사 기구를 대표한다. 이곳 사람들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영예의 규칙을 중시한다. 그들과 대립한다는 것은 모든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을 적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곧 승리하기 어려운 전투라는 이야기다.

나는 1962년 미국 정책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그때 처음으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국가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나는 깊은 협곡과 자갈투성이 산들을 목격했다. 자치적으로 운영되는 마을들은 종교와 관습을 공유하면서도 자급자족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던 소련은 10년에 걸친 격전과 1만5천여 명의 인력 손실을 겪고 나서야, 수많은 산들을 파괴하고 수천 명의 사람들을 쫓아낼지라도 자신들이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련은 병력을 대규모로 배치해 군사적으로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국토의 5분의 1 이상을 장악해본 적이 없었다. 결국 소련은 1989년 철수해야 했고, 무자헤딘에 맞선 이 전쟁은 소련을 사실상 파멸시켜버렸다.

강대국들, 아프간 지역에서 잇단 패퇴

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특별히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영국은 1842년에, 1878년부터 1880년까지, 그리고 1919년에 아프간 사람들과 싸웠고, 소련만큼이나 막대한 손실을 입은 후 손을 들고 말았다. 카불 주재 소련과 러시아 대사를 차례로 역임한 자미르 N. 카블로프의 말에 따르면, 미국은 과거 소련의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탈레반을 무력으로 진압하고자 했고, 탈레반 지도부를 와해시키고자 했으며, 탈레반이 주민들과 맺고 있던 관계를 끊고, 군사적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자신들이 선택한 정부와 대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의 실패는 이상하게도 미국이 베트남전에서 겪은 체험을 연상시킨다. 거기서 미국은 적의 지도부를 분열시키고, ‘과격주의자들’에 등을 돌릴 수 있는 ‘온건주의자들’을 찾아내려 노력했으나 실패를 맛보았던 것이다.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을 나머지 주민들과 단절시키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베트남 주민들은 미국의 군사적 편의주의에 따라 언제든지 마을에서 소개(疏開)할 수 있도록 ‘전략적 마을’(Strategic hamlets)(2)이라는 테두리로 묶였다.

그런 다음, 미국은 자신들이 옹립한 정부와 대화했다. 이러한 방식은 베트남에서 쉽게 진행될 수도 있었다. 베트남 국민이 공산주의와 그다지 공통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조하건대, 이슬람의 규칙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광범위하게 존중받는 가치들이다.

미 국방부 보고서인 <펜타곤 페이퍼tm>(3)는 “미국은 베트남의 반봉기에 대해 군사적·사회적·심리적·경제적·정치적 이론을 동원해 다각도의 해석을 시도했으나 애석하게도 적절한 결론을 얻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정책기획위원회 멤버였던 나는 1963년 미 육군대학 강연을 통해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패배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당시 나는 정치·행정·군사라는 세 측면에서 각각의 중요성에 따라 비율을 배정하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내가 볼 때 정치적 측면은 수행할 전투의 약 80%를 차지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공산주의적인 독립운동 단체 겸 정당인 베트민(월맹)은 호찌민의 지휘 아래 1940년대 말부터 이 영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예견한 것처럼 호찌민은 남베트남에서 실시된 선거를 포함한 자유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행정적 측면은 15%로 추산되었다. 1950년대 말에 베트민은 남부의 모든 행정기구를 파괴했고, 수많은 관료, 경찰, 대학교수, 박사들을 제거했다. 또 세금 징수, 우편 배달, 공공 서비스, 해가 진 후 남부 베트남 군대의 이동을 방해했다. 마지막으로 군사적 측면은 5%를 차지했다. 미국이 10년 동안 이 분야에 총력을 기울였을지라도 그 어느 것도 이 측면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결코 꺾이지 않을 탈레반 세력

마찬가지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서구 연합군이 정치와 문화 분야에서 미치는 영향력은 미약하다. 아프간 사람들은 예외 없이 그리고 오래전부터 외세의 침략을 증오하고 있다. 미국은 미 의회의 요구에 따라 행정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리스트를 작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수는 극히 적었고, 일시적인 것들이었다.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탈레반들은 북베트남을 본받아 미국의 모든 조치를 원상태로 되돌릴 것이다.

<뉴욕타임스>의 리처드 오펠 주니어 특파원은 2009년 8월 23일자 기사에서 칸네신 지역의 실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그곳 책임자 중에는 자문가 그룹은 물론 자신의 업무 수행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그 어떤 의사, 교사, 기타 직종 종사자도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와 반대로 도둑을 일삼는 경찰,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는 중’이라고 주장하는 몇몇 병사만이 그곳에 머물고 있을 따름이라는 것이다. 비록 일부 지역의 상황이 그보다 나을지라도, 또 다른 지역들의 상황은 훨씬 열악한 형편이다. 미국 등 서구 연합군이 개입하는 아프가니스탄 내 국가 재건 활동 비율은 기껏해야 8%다. 이는 베트남과 관련해 내가 추산한 수치의 절반을 간신히 넘어서는 정도인 셈이다.

미군의 군사 개입 문제가 남아 있다. 미군은 월등한 군사력을 앞세워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으나, 그때마다 적군은 더욱 잘 무장한 후 다시 나타나기 위해 몸을 숨길 따름이다. 결정적 ‘승리’의 가능성은 10%를 넘어서지 않으며, 아무리 관대하게 평가하더라도 서방 군대가 기울이는 노력의 중요성은 3%를 넘어서지 않는다.

남베트남의 옛 정부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주요한 지점에서 서로 일치한다. 국민이 그들을 증오하고, 그들을 두려워한다는 점이다. 사이공 당국의 부패는 주지의 사실이었다. 관료들이 국민을 위한 공공기금과 양식을 빼돌렸을 뿐만 아니라, 북부의 적들에게 미국이 제공한 군사장비와 무기를 팔아넘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모든 위험한 임무는 미군의 몫이었다. 베트남에서 내가 지휘한 부처 간 위원회 소속의 한 대령은 미군의 계획이 남베트남군에 알려지면 미군이 적들의 계략에 걸려들 가능성이 높았다고 우려했다.

미국이 내세운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권력자들은 마약 밀매에 광범위하게 연루돼 있고, 경찰, 군대, 공공 서비스 분야에서 일자리를 사고팔며 돈벌이를 한다. 사법부는 뇌물 정도에 따라 판결을 내리며 탈레반에게 군수품을 제공하기까지 했다. 권력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거래 대상이다. 하미드 카르자이의 재선은 하나의 우화에 가깝다. 개표가 이뤄지기도 전에 결과가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권한도 수도 카불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한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이 베트남과 닮지 않은 부분도 있다. 베트남과 달리, 아프가니스탄에는 악명 높은 전쟁 지도자들이 다수 있다. 그들은 국민에게 증오의 대상인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다. 예컨대 카르자이는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수천 명의 탈레반을 살상한 우즈베키스탄인 출신의 라시드 도스툼(4)을 터키에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미래의 모습은 어떨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확신한다.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은 앞으로 ‘몇 년 동안’ 더 아프가니스탄에서 병력을 유지할 것이라 천명했다. 하지만 독일과 노르웨이는 자신들이 주둔하는 이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중이다.

천문학적 손실, 미국에 부메랑 될 듯

이라크전쟁의 전례에 비춰볼 때, 아프가니스탄에서 치르는 전쟁의 총비용은 3조에서 6조 달러 사이의 천문학적인 액수로 추산된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 이상이다. 이렇게 무모한 전쟁을 계속 끌고 간다면, 오바마는 국내 정치 프로그램을 실현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질 것이다.

이런 방식의 전쟁 참여는 린든 존슨에게 베트남이 그랬던 것처럼, 오바마 정부에 치명적일 수 있다. 그러나 오바마는 아프가니스탄을 테러리즘의 진원지로 규정하면서 ‘노선을 유지’하기로 결심했다. 이건 틀린 생각이다. 테러리즘을 활성화시키는 것은 바로 미국의 군사 행동이다. 특히 파키스탄, 소말리아, 이라크에서 미국이 군사작전을 확대한 뒤부터 더욱 그렇다. 미군의 군화 소리가 위험을 증대시키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은 교통과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더없이 불편한 아프가니스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9·11 테러처럼, 테러리스트들은 어디서나 작전을 펼칠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거두는 미국의 ‘승리’가 테러리스트들을 저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활동을 독려하는 구실을 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 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테러리즘 분야에 대한 미국의 오랜 경험에도 불구하고, 테러 행위의 특성과 원인들은 늘 미국의 생각을 벗어나고 있다. 약자들의 무기인 테러리즘은 부정을 뜯어고칠 수 있는 별다른 승부수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유용하다. 이런 식의 테러 시나리오는 라틴아메리카, 아일랜드, 스페인,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팔레스타인, 터키, 남아프리카, 케냐, 인도, 카슈미르, 아프가니스탄, 버마, 스리랑카, 타이, 말레이시아, 중국, 러시아 등 세상의 도처에서 200년 전부터 반복되고 있다. 그들의 목표가 우리 눈에 정당해 보이냐 아니냐에 따라, 테러리스트들은 ‘자유의 투사들’이란 호칭을 획득하기도 한다. 따라서 두 표현 사이의 차이는 그들이 구사하는 행동 방식보다 그들이 내건 목적에 대한 우리의 평가가 좌우한다.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다르다

탈레반과 알카에다는 서로 다른 논리를 따른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식별되지 않는다. 우선, 탈레반은 국가적 정치기구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통적인 리더십과 민족성에 기반한 진정한 의미의 망명 정부를 구성하고 있다. 반면 알카에다는 세계 각지에 정착한 사람들이 일정한 관계를 이루면서 중앙의 명령 없이 독자적으로 행동한다. 오사마 빈라덴은 그들의 군사지휘관이 아니라 정신적 지주다. 탈레반과 알카에다 모두 주로 서구 제국주의의 폭력적이고 붕괴된 유산을 물려받았을지라도,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완전히 다르다.

미국의 무력 사용은 미국 사회, 그리고 미국의 정치와 사법제도에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 신보수주의자들과 장군들의 주장과는 달리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40년 동안의 전쟁은 테러리스트들을 결코 물리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미국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들을 무화할 수도 있다.

따라서 미국은 자국의 국방정책을 단순한 몇 가지 원칙들에 따라 추진해야 할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테러리스트 그룹들이 더는 강해지지 않도록 하는 정책을 마련하고, 2009년 6월 오바마 대통령이 이집트에서 한 연설을 토대로 아프가니스탄에서 국민적 화해를 도모하는 타협의 길이 그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에 대해서는 경계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제안하는 ‘승리’의 수단들은 항상 실패를 거듭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글·윌리엄 P. 포크 William P. Polk
미국 정책기획위원회(Policy Planning Council)의 옛 멤버. 시카고대학 사학과 교수이자 아들라이 스티븐슨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무장투쟁, 테러리즘, 게릴라 전쟁의 역사. 미국혁명에서 이라크까지>(Violent Politics. A History of Insurgency, Terrorism & Guerrilla War, From the Revolution to Iraq·Haper·New York·2008), <이란 이해하기>(Understanding Iran·Macmillan·New York·2009)의 저자로 유명하다.

번역·이상빈 malraux21@ilemonde.com
파리8
대학 불문학 박사. 역·저서로 <현대 프랑스 문화사전>과 <나폴레옹의 학자들> 등이 있다. 


<각주>

(1) ‘close-in firefight Afghanistan July 09’, www.youtube.com.

(2) 1961년 미국과 남베트남이 마련한 ‘전략적 마을’ 프로그램은 인구를 소개해 적들에 맞서는 전략이었다.

(3) ‘미국과 베트남의 관계(1945~67): 국방부가 실시한 연구’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지칭하기 위해 통상 사용하는 표현이다.

(4) 도스툼은 특히 탈레반 체제가 전복되었던 2000년 당시 이 나라의 북부 감옥에 수감 중이던 수천 명의 탈레반들이 살육되도록 방치했다는 비난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