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해야할 인도네시아의 1965년 학살극

2015-12-01     레나 뷰어스트롬

1965년 10월 1일 인도네시아 정부군이 공산당원이나 공산당원으로 의심된다는 이유로, 민간인 수십만 명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지금, 학살의 생존자와 가족들이 진상 규명을 위한 투쟁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 공포작전의 주범 중 그 누구도 법의 심판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2014년 집권한 조코 위도도 정권은, 진정한 의미의 진상 조사에 나서기를 주저하고 있다.


거대한 대도시 자카르타의 남부 어느 후미진 박물관. 2015년 8월 17일 인도네시아 독립기념일을 하루 앞두고,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먼지가 뽀얗게 낀 유리 진열관 앞으로 몰려들었다. 진열관 안에는 빛바랜 사진, 개인 물품, 피 묻은 옷가지 몇 점이 전시돼 있었다. 1965년 9월 30일에서 10월 1일로 넘어가는 심야에 피살된 ‘호국 영웅’, 즉 장성 6명과 중위 1명이 남긴 유품이었다. 설명문에는 “공산당에게 암살됐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이 공식적인 역사는 실제 그날 밤 일어난 어떤 잔혹한 학살극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학살의 진정한 주모자를 놓고 여전히 의혹이 짙은 데도 공공의 적은 너무도 빨리 지목됐다.
10월 2일부터 군 최고사령관 모하마드 수하르토 장군은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의 쿠데타 시도를 맹렬히 비난하며, ‘공산당 박멸’을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수개월에 걸쳐 인도네시아인 수십만 명이 살해됐고, 1백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재판도 거치지 않고 마구잡이로 감옥에 끌려갔다. 그들 중 대다수는 공산당원으로 의심을 받거나, 동료나 이웃에게 밀고를 당한 민간인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공산당원으로 둔갑된 희생자들

83세의 쿠스넨다르는 자신도 그 중 한 명이라고 소개했다. 50년이란 세월이 흘렀어도,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당시 사건은 그의 뇌리에 생생히 박혀있었다. “1965년 저는 산업부에서 일하는 공무원이었습니다. 노동조합과 만나는 일이 잦았지요. 조합 미팅에도 가끔 참석했습니다. 하지만 조합원은 아니었습니다. 공산당원은 더더욱 아니었지요.” 그는 당시 누가 왜 자신을 밀고한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10월 10일 오후 4시, 경찰들이 집에 들이닥쳐 막무가내로 그를 연행해갔다. “처음에는 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다시 자카르타의 군 시설로 이송됐어요. 사람들이 30명쯤 있는 감방에 던져졌습니다. 벽에 핏자국이 묻어 있던 게 지금도 기억이 뚜렷합니다.” 끌려온 사람들 모두 자기가 왜 끌려왔는지 모르고 있었다. “물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처형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떠돌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지요.” 감옥으로 이송된 쿠스넨다르는 곧이어 ‘심문’을 받았다. “군인 3명이 저를 다른 방으로 끌고 가더군요. 그들은 제가 PKI 어느 분과 소속인지 물었습니다. 저는 오해라고, 저는 공산당원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저를 마구 패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3시간 내리 죽도록 패더니, 내용도 알 수 없는 서류에 서명을 하게 하고 감방으로 돌려보내더군요.”
쿠스넨다르는 노역장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곧이어 다른 500명의 사람들과 함께 최종적으로 인도네시아의 수도에서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말루쿠 제도에 속한 바루섬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됐다. 1965년 학살극 이후 이 열대의 감옥을 거쳐 간 ‘정치범’은 10여 년 간 무려 1만 명에 달했다. 정치범이라는 명목으로 끌려온 사람들은 대개 사무원이나 농민이었고, 지식인도 상당수 섞여 있었다. 그곳에서 쿠스넨다르는 작가 프라무디아 아난타 토르도 만났다. 밤마다 피로에 찌든 동료 수감자들과 나눈 이야기는 작가의 대표작 <바루의 콰르텟>(1)이 돼 세상의 빛을 보았다. 수감자들에게는 식량이 배급되지 않았기에, 그들은 밤에 병영으로 되돌아온다는 조건 하에 낮 동안 식량을 찾아 자유롭게 섬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굶주림이나 열대병으로 목숨을 잃는 자들이 속출했다.
“제 인생에서 자그마치 10년을 그 섬에서 보냈습니다.” 쿠스넨다르가 말했다. “1978년 저는 마침내 석방됐습니다. 자카르타에 있는 가족들과 재회했지요. 하지만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기까지 말도 못하게 힘든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군이 그의 신분증에 ‘재소자 출신’이라는 소인을 찍는 바람에 그는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하고, 국가의 행정 서비스조차 이용할 수 없었다. 결국 상인, 환경미화원 등 온갖 저숙련 일자리를 전전해야만 했다. “바루섬에서 보낸 과거는 묻어두어야만 했습니다. 저는 침묵했지요. 어쩌면 운이 따라주었다고도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살아남았으니까요.”

‘공산당원’이라는 이름으로 학살된 1백만 명

1965년 10월 1일부터 이듬해 봄까지 인도네시아에서 살해된 사람은 최소 50만 명에서 1백만 명까지 추정된다. 10월 초 수마트라 섬에서 시작된 공산당원 추정자들을 상대로 한 체포·암살 작전은 이내 자바섬 중부로까지 확대됐다. 전통적으로 PKI가 정치 기반으로 삼고 있던 지역들에 폭동 진압을 이유로 인도네시아군 특공대가 급파됐다. 자카르타에서도 정부와 군대 내에 대대적인 숙청 작업이 거행됐다. 12월 정부의 탄압은 발리섬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까지 점차 확대됐다. 군이 제공한 목록을 바탕으로 군인, 경찰, 민병대가 전격 체포 작전에 나섰다. 붙들린 죄수들은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일부는 밤사이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 재판 없이 즉결 처형됐다. 대부분의 희생자들은 구덩이에 묻히거나 강물에 던져져서 시신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미국중앙정보국(CIA)이 “20세기 자행된 최악의 집단범죄 중 하나”라고 표현한 이 대학살극은 32년 간의 독재와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조용히 은폐된 채 오늘날까지 여전히 짙은 역사의 안개 속에 가려져 있다. 사스키아 위에링가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1965년 학살 사건은 ‘신질서’ 체제의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하르토 장군은 PKI를 해체한 덕에 수카르노 대통령의 권력 기반을 크게 뒤흔들 수 있었다. 수카르노 대통령은 친공산주의 성향을 지닌 인물로, 인도네시아를 집권하기 전에는 비동맹운동의 주역으로도 활약했다.” 인도네시아의 정치 쿠데타는 미국과 서유럽의 입장에서는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덕분에 그들은 냉전의 한복판에서 소비에트 연합과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공산주의 물결의 해체를 지켜볼 수 있었다. 많은 학자들은 미국이 무선 교신 장비와 공산당원 목록을 제공하며(4) 수하르토 장군을 지원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미국은 지금까지도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역사 왜곡과 진실 은폐, 이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

위에링가 교수에 의하면, 30년이 넘는 독재정권 하에서, 수하르토 행정부는 끊임없이 ‘공산주의 위협’에 대한 흑색선전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그 결과 인도네시아 사회 내에는 공산주의 위협에 대한 뿌리 깊은 공포가 오래도록 자리 잡게 된다. 가령 1965년 10월 이후 라디오와 신문들은 줄기차게 장성 6인의 암살 사건에 대해 온갖 허황된 이야기를 꾸며댔다.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이 꾸며낸 이야기가 진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경이다. 위에링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공산당의 여성운동원 조직인 거와니(Gerwani)가 장군들을 납치해 유혹하고 거세했다는 흑색선전이 난무했습니다. 물론 부검을 통해 거세 사실은 거짓임이 드러났지요. 그러나 이 허황된 이야기는 일파만파로 퍼져나갔습니다. 믿음이 신실한 나라에서는 교활한 데다 신을 믿지 않으며 성적으로 타락하기까지 한 공산당의 이미지는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1984년부터 아리핀 C. 노어의 영화 <Pengkhianatan (반역) G30S/PKI>이 매년 9월 30일 공영 TV채널에서 반복 방영됐다. 그리고 교과 수업으로까지 채택되는 등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공식적인 역사담론으로 널리 선전되고 있다. 인권수호단체 콘트라S에서 일하는 티오리아 프리티는 말한다. “모든 인도네시아 청소년이 그 영상들을 보고 자랐습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인도네시아인은 그들이 만든 역사를 진실로 믿고 있지요. 정치계가 적극 나서지 않는 한 전 국민에게 진정한 역사의 진실을 알리기란 사실상 불가능할 것입니다.”
1998년 유혈 사태 속에 수하르토 정권이 막을 내렸다.(5) 인도네시아는 재건의 길을 걸었다. 1965년 학살 사건의 희생자와 가족, 그리고 후손들에게 모든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고 대학 입학과 행정 서비스 이용까지 전격 금지시킨 조치가 마침내 해제됐다. 그러나, 여전히 그 날의 학살사건은 금기시된 채 남아 있다. “물론 이 사건에 대해 진상조사를 하려는 시도가 수차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부 끝을 보지는 못했지요. 많은 정부 인사가 수하르토와 연관돼 있을 뿐더러, 심지어 일부는 학살사건에 직접 가담까지 했으니까요. 나흐다툴 울라마(이 당의 산하 청년조직 ‘안소르’는 직접 학살에 참여했다)를 비롯한 많은 유력 이슬람 정당들은 여전히 이 사건을 재조사하는 데 맹렬히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차츰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신질서’ 체제의 희생자들이 함께 단체를 조직하는가 하면, 진보 언론도 그들의 이야기를 재조명하기 시작했다. 2012년 인권위원회는 검찰총장의 사무실에 두툼한 문서 한 건을 제출했다. 희생자 349명과 6개 지역 학살 목격자들의 성명을 기초로 위원회는 인도네시아 정부가 ‘현행 인권을 위반’했다고 판단하며,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학살 책임자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우기 위해 특별 재판소를 설치할 것을 권유했다.
같은 해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액트 오브 킬링>이 유럽과 북미 지역에서 개봉됐다. 감독은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카메라 앞에 재현해 보이는 전 민병대원들의 모습을 2시간 넘게 뒤쫒는다. 변호사 누르샤흐바니 칸차중카나는 말했다. “이 영화는 전기충격과도 같았습니다. 그 해 우리는 국가가 나설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직접 나서서 몇몇 단체와 함께 시민 재판을 조직해 진상 규명과 재판을 하기로 했습니다.”
시민 재판을 주관한 이 변호사는 학자와 자원봉사자로 팀을 꾸려 최대한 많은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지난 11월 헤이그에 제출된 고소장은 현재 상설민중재판소(PPT) 부재판소장 겸 UNESCO 국제자문위원회 의원인 헬렌 자비스, 전 UN 인권위원회 위원을 역임한 법률가 시즈 플린터맨 등의 인사들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검토 중에 있다. 최종 판결은 2016년 쯤으로 예정돼 있다.
이 재판의 피고는 인도네시아, 즉 ‘국가’다. “저희는 개인의 범죄를 심판하려는 게 아닙니다. 국가가 학살의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희생자들의 명예를 복권하고 진실을 규명하고 죄인들을 처벌하기 위한 조처를 마련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칸차중카나 변호사는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킴으로써 인도네시아 정부에 압박을 가하기를 원하고 있다. “물론 수하르토 정권은 이미 종식됐습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간 수하르토 정권의 망상증이 다시 사회 전반에 확산되고 있답니다. 이슬람수호전선(FPI)과 같은 과격 이슬람 단체가 예전처럼 무신론을 위협하는 군사 흑색선전에 나서고 있습니다. 그들은 번번이 희생자 단체를 괴롭히며 집회를 방해하지만, 경찰은 무대응으로만 일관할 뿐입니다. 이 모든 상황은 1965년 학살 사건이 현재에도 얼마나 예민한 문제로 남아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부의 이중적 태도 역시 그런 사실을 여실히 뒷받침한다. 2015년 5월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신질서’ 체제에서 자행된 범죄와 관련해 국민화해위원회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보수 이슬람 정당은 물론 인권보호단체들의 분노까지 샀다. 인권보호단체들은 “정의 없이는 화해도 있을 수 없다”고 반기를 들었다. “이후 정부는 진상조사도 화해위원회의 임무에 포함시키겠다고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프리티가 말했다.
인권위원회의 일원이자 앞으로 진상조사위원회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은 로히샤툴 아스위다흐는 좀 더 상황을 낙관적으로 인식한다. “우리는 정부와 여러 차례 회의를 가졌습니다. 분위기는 비교적 긍정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진상 규명과 피해자 복권 조치라는 해결책을 도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죄인을 재판정에 세우는 문제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희생자들은 우리에게 사법적 절차의 문을 열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살 책임자들은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된지 오래입니다. 도대체 누구를 재판정에 세운단 말입니까? 현장에서 활동했던 요원들이요? 명령을 내린 자는 그냥 두고, 명령을 이행한 자만 처벌하는 것이 정의란 말입니까?” 이러한 의견에 대해 칸차중카나 변호사는 반박했다. “50년 동안 살인마들은 활개치며 살아왔지만 희생자들은 죄인처럼 살아야 했습니다. 1965년 사건은 이미 끝난 과거사가 결코 아닙니다. 지금까지도 처벌이 이뤄지지 않은 미청산 과거입니다.”
2006년부터 매주 목요일이면 시위대가 자카르타 대통령궁 앞에 정렬한다. 세대를 초월한 60여 명의 사람들이 광장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검은 옷을 차려 입고 짙은 색 우산을 뒤흔든다. 그들은 모두 법의 심판을 받지 못한 만행의 희생자들이다. 파푸아인(6), 1998년 정부 탄압 때 실종된 공산당원과 피살 대학생의 유가족,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패인 1965년 학살의 생존자들. 바닥에는 실종자 사진과 플래카드가 놓여 있다. 한 노인이 1965년이라는 문구가 찍힌 표지판 옆에다 가짜 해골들을 쌓는다. 그들은 박자에 맞추어 대통령에 대한 호소문을 연호한다. 행동하라, 하루 빨리!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사라진다! 쿠스넨다르는 문득 자신이 죽기 전에 명예가 회복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다. “이미 많은 목격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시간과 술래잡기를 벌이고 있습니다.”


글·레나 뷰어스트롬 Lena Bjurström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특파원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1) Pramoedya Ananta Toer, <This Earth of Mankind(1975)>, <Child of All Nations(1979)>, <Footsteps(1985)>, <House of Glass(1988)>, 펭귄 북스, 런던, 1996~1997.
(2) ‘The coup that backfired’, <CIA Research Study>, 워싱턴 DC, 1968년 12월, 2007년 5월 비밀 해제.
(3) ‘Noam Chomsky, ‘인도네시아, 미국의 트럼프게임(L'Indonésie, atout maître du jeu américain)’,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8년 6월..
(4) Peter Dale Scott, 'The united States and the overthrow of Sukarno, 1965~1967', <Pacific Affairs>, 제58호, 밴쿠버, 1985년, Brad Simpson, 'It's our act of killing, too', <The Nation>, 뉴욕, 2014년 2월 28일.
(5) 이 독재자는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며 수백명의 희생자를 낸 뒤 1998년 5월 21일 마침내 하야했다. 솔로몬 케인, 로랑 파시쿠세, ‘어떻게 수하르토 장군은 하야를 할 수밖에 없었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1998년 6월.
(6) 필립 파토 셀레리에, ‘독립운동에 나선 소수민족 파푸아인’,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5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