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디즘의 기원
‘지하드’라는 단어에는 ‘영적 성숙을 위한 노력으로서의 위선자와 이교도에 대한 전사’의 의미가 담겨있다. 오늘날 극단적 폭력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수단으로 ‘지하드’의 이름을 제창하는 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광범위하게 유포된 와화비파 살리피즘과 무슬림 형제단이라는 두 개의 뿌리에서 비롯된, 엄격한 이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영적 정복’이라는 야망을 추종하고 있다.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개념인 ‘지하드’는 하나의 총체적인 이념이다. 이슬람과 유럽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여러 이미지와 상징, 개념을 지적으로 짜맞추어 교묘하게 왜곡한 이 개념의 위탁자들은 ‘신자’들에게 이승에서 뿐만 아니라, 저승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과 정체성,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즉 “자아보다 더 거대한 어떤 것에 소속돼있다”는 확실성을 주는 세계관을 주입하는 것이다. 신에 의해서 진정한 종교를 정착하고 전 세계를 지배할 이슬람 왕국인 칼리프의 보호아래 세계의 정복에 앞서, 신자들의 공동체인 ‘움마’를 재통합하고, 구원을 성취하는 임무를 신에게 부여받은 ‘엘리트 집단’에 속한다는 믿음을 상정한 것이다. 지하드 이념의 주요 지류들의 변천과 기원을 추적해보면, 생드니에서 카라치까지의 이들 활동의 효용과 흡인력을 알 수 있다.
1차 대전의 환멸 속에 뿌리내려
다른 여타의 극단주의 이념처럼, 지하디즘 역시 1차 세계대전이 야기한 환멸 속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오스만 제국의 해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의 칼리프제 폐지, 서방세계의 지배 확립, 새로운 형태의 사회화의 대두가 몇몇 이슬람 세계에 대 혼란을 야기했다. 이러한 가운데, 지식인 투사들(율법학자, 신학자)인 몇몇 ‘울레마’들은 이 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 이슬람에 있다고 보았다. 다소 결실을 맺은 몇 몇 프로젝트가 양차 대전 사이에 나타났다. 그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단연 무슬림 형제단이었다. YMCA를 모방한 무슬림 형제단 신도회는 1928년 이집트에서 생겨났다. 설립자인 하산 알-반나는 이슬람이 최고이자 최종적인 권위를 가지고 이슬람 사회에 전적으로 군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슬람이야말로 “교리이고 의식이며, 조국이고 국적이며, 종교이자 국가이며, 정신이자 행동이며 코란이자 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하층민 사회부터 이슬람화한 후, 모든 율법과 신학학교를 거쳐 권력을 장악하고 이슬람 국가를 설립한다”는, 목적론적인 전략을 구상했다. 이슬람 법체계에 속한 국가들은 단 하나의 법인 ‘사리아’의 패권을 보장하고 협력 프로그램으로 서서히 통합작업에 착수해, 최종적으로 국경을 폐지하고 칼리프 국가를 제창한다는 생각이었다.
무슬림 형제단의 설립자는 설립하고자 하는 이슬람 국가의 구조나 원칙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는 공허한 형식이나 슬로건에 만족했다. 그럼에도, 그의 저작물들과 형제단 협회 수장으로서 한 일들에 남겨진 흔적을 볼 때, 그는 엘리트주의, 계획주의, 권위주의를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알-반나는 일련의 민주주의적 원칙들, 특히 자유, 정교 분리, 다당제와 권력의 분립에는 반대한다고 명백하게 말했다. 그는 내적, 외적인 도전에 맞서려면, 움마는 단 하나의 법인 사리아, 단 하나의 정당인 무슬림 형제단, 단 하나의 수장인 칼리프에 의해 통치돼야 한다고 보았다.
비교적 단순한 논리와 회원들의 열정 덕택에, 형제단은 이집트와 다른 아랍권에서 점차로 골수 지지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신의 국가를 건설하고, 구원을 얻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조건인 권력을 쟁취한다”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실패를 계기로 1940년대 말부터는 단호한 의지로 무장한 소수가, 보다 ‘급진적인’, 다시 말해 폭력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후 10년 간 카이로에 막 안착한 군사정권의 전례 없는 박해로 인해, 상황은 극적으로 가속화됐다.
이러한 위기의 시기에, ‘사에드 코트브’라는 파란만장한 지식인이 형제단에 합류했다. 그는 가말 압둘 나세르 대통령의 엄혹한 감옥 속에서 이념적 전환을 달성하는데, 이것은 아랍-이슬람 세계의 정치와 종교에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 코트브는 그가 살고 있는 세계가 실제로 무지와 무신앙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다. 이후 “극히 소수가 돼버린 진정한 신자, 선택받은 자들은 신앙 없는 불충한 사회로부터 영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벗어나서 대탈출을 성취해야한다”고 설파했다. 이 ‘선택받은 자들’은 굳건한 정신적, 시간적 기본 방침을 정한 후, 총체적 지하드라는 범주 안에서 ‘불충한 세계’를 정복하러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칼리프라는 개념의 열렬한 신봉자인 인도-파키스탄인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영향으로 코트브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신자들을 서구의 물질주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이슬람 율법과 이슬람 국가를 설립함으로써 신의 절대적 존엄성을 확립하라”고 부추긴다. 이슬람의 역사상 낯설지 않은, 이 배타적인 사상은 현재 지하드의 정치적 초석이 된다. 이 사상은 1960년대에 유행하면서 일련의 급진 단체들이 채택했으나, 구조적 장애로 인해 사상의 유포에 제동이 걸린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상의 주창자들의 출신이었다. 즉 주창자들이 정치, 종교 영역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백 년 간 율법의 전통적인 수탁자들인 움마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한 지식인이며 이슬람 투사계층이었다. 1960~1970년대 내내 몇몇 지하드 단체들(샤바브 무함마드, 알-지하드, 알-타크피르, 알-히즈라)이 고전적인 텍스트, 특히 13세기 율법 신학자인 이븐 테이미이아와 그의 제자인 이븐 카이임 알-자이지이아의 저작물들을 앞 다투어 사용함으로써 이 출신상의 약점을 극복하려 애썼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지하드의 신학적 논리 무장
그러나 1979년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지하드가 ‘와하비즘(Wahabism)’이라는, 보다 확고한 율법적 신학적 논리로 무장하는 계기를 선사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오일머니 덕택에, 와하비즘은 이슬람 진영에 새로운 교리로 뿌리내릴 수 있었다. 18세기 중반 아라비아 중부에서 태동한 와하비즘은 수니파의 4대 주요학파 중 하나인 ‘한발리즘(Hanbalism)’의 변형이다. 설립자였던 무함마드 이븐 압델 와하브(1703~1792)는 타협과 후퇴를 몰랐던, 완강한 인물로, 자신에게 유일한 진정한 종교, 즉 예언자와 그의 경건한 조상들인 ‘알 살라프 알 살리’에 대한 신앙을 강제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양보하지 않았다.오늘날 이 전통을 지칭하는 또 다른 호칭인 ‘살리피즘(Salifism)'이라는 용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1744년 그는 자신의 이론적 기초아래 하나의 정치적 실체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1818년 최초의 사우디 국가가 설립된다.
제자들로부터 거의 맹목적인 추종을 받았던 이븐 압델와하브는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은 ‘순수한’ 종교를 복원하는 것”이라 설파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이슬람의 근본적인 개념, 신성한 단일성인 ‘알-타위드’를 (다시) 찾아야 한다고 했다. 알-타위드 역시 오늘날 많은 지하드 운동 집단의 명칭으로 쓰이는 용어다. 이 신성한 단일성은 단 한 가지 조건 하에서만 가능하다. 한발리즘과 부합하게 그 교리를 엄격하게 지키고 수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교리를 준수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위선자. 낙오자, 이단, 나아가서 불신자로 간주된다. 성자 숭배, 교리집에 없는 순례, 예지적인 관행 등 수피주의(Sūfism, 이슬람 신비주의)적인 많은 관행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물리쳐야 할 우상숭배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적이지 않은, 특히 (자신들의 기준에서) 실증주의적인 법에 의해 통치하는 정부나 개인은 배교자(믿음을 배반한 자)와 동일시된다.
진정한 유일신자가 되는 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신성한 교리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이다.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와화비스트(Wa habist)들은 신성한 텍스트를 엄격하게 해석할 것을 권고한다. 이슬람교의 법, 특히 체벌은 문자 그대로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진짜 종교와 가짜 종교를 구분하는 실질적, 상징적 경계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와화비스트들은 ‘충성과 단절’이라는 의미의 ‘알-왈라 와 알-바라’라는 원칙을 전개한다. 신자는 공동체의 다른 단원들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고 충실해야 한다. 반대로 비신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교리적으로 대화나 복종, 아니면 전쟁만이 가능하다. 이런 논리로 불경한 한 영토(이슬람을 신봉하지 않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이슬람은 신성한 힘을 쏟아, 지하드로 다시 출발하기 위해서 늦든 이르든 이슬람 지역으로의 대 탈출(히즈라)를 감행해야 한다.
알-반나의 요새로서 코트브에 이르는 길, 와화비즘의 교리, 소비에트에 대한 승리의 여정으로서 지하드는 결국 칼리프를 부활시키고 이슬람의 황금시대를 부활시키기 위한 이상적인 방책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인터넷 상에 떠도는 신앙 고백, 특히 이라크의 이슬람 국가 조직 책임자인 아부 오마르 알-바흐다디가 2007년 발표한 고백에서 엿볼 수 있듯, 이 이념은 최근 10년 간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주목할 만한 새로운 점이 있다면, 사우디와 이라크, 시리아의 갈등 상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 반 시아파적인 담화들이 많다는 점, 모든 형태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기록들과 메시아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는 점이다.
그들이 ‘유일하게 진정한 종교’라고 믿는 존재의 승리를 위해, 지하드는 1990년대 초반부터 경쟁적이고 보완적인 몇 가지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알-카에다는 (신자들의 공동체인) 자신들의 존재의 근거를 ‘움마’가 그치지 않는 내적, 외적 공격의 목표물이라는 주장에 둔다. 알-카에다에 의하면, 전 세계의 이슬람은 같은 신앙을 가진 동지가 조난 상황에 있을 때 구조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한다. 조직적인 이 연대의식의 최종 목표는 이슬람이 거주지에서 강대국들을 쫒아내고, 배교자들의 정권을 무너뜨려 칼리프를 복원하는 것이다. 신자공동체의 전위부대로 자차하는 알-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을 새로운 서사의 장으로 생각한다. 1998년 오사마 빈 라덴과 그의 참모들이 신자들의 지도자로서 텔레반 지도자인 몰라 오마르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서방 강대국들에 대한 지하드를 선포한다. 이후 일련의 테러가 이어졌으며 9.11도 그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것이다.
알카에다의 실패를 교훈삼아 새로운 전략 구사
알-카에다의 실패를 교훈 삼아 이라크 이슬람 국가 조직은 세계적으로 생각하고 국지적으로 행동하는 능력을 배양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조직의 지도부는 스스를 ‘새롭게 선택받은 집단’이라 자처하고 아랍 이슬람 세계의 중심에 플랫폼을 구축하고 재정적 자립을 이룬 다음, 전 세계에 전사들을 파병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2002년과 2004년 발표된 3단계 계획을 따른다. ‘잔혹한 관리 단계’는 신자 공동체가 거쳐야 할 가장 결정적이고 위험한 단계다. 직접적이고 쉬운 용어를 쓰자면, 이 ‘소논문’은 그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서 지하드가 국지적 차원에서, 혹은 국제적 차원에서 어떻게 상황과 사건들을 이용해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일단 정복이 되면 이 지역은 무자비한 폭력과 냉혹한 선전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서방의 노하우나 전쟁기술을 이용해 하나의 플랫폼이 된다. 이러한 전략이 부분적인 성공과 칼리프 국가의 선포, 그리고 2014년 6월 시나이, 리비아, 사헬, 튀니지, 사우디아라비아와 프랑스 등, 이슬람 세계와 전 세계 각 지역에 수많은 모방자들을 만들어냈다.
글·나빌 무린느 Nabil Mouline
국립 과학 연구소 연구원. 〈이슬람의 사제들. 사우디 아라비아의 정치권력과 종교 권력〉 (PUF.파리, 2011), 〈칼리프〉(플라마리옹, 출간 예정)의 저자
번역·이진홍 memosia@daum.net
파리 7대학에서 불문학 박사를 받은 뒤 한국외국어대에서 프랑스 문학 강의를 하고 있다. <진보와 그의 적들>, <자살> 등의 저·역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