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좌파는 오른쪽을 사랑한다

극우파 뺨치는 무늬만 좌파, 신자유주의적 노동당
대안 부재 리더십 결핍…제3의 ‘카디마당’ 급부상

2009-11-05     지브 스턴헬 | 역사학자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조지 미첼 중동특사를 통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평화회담 재개를 촉구했으나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져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식민지화 작업의 중단을 거부하는 바람에 팔레스타인 당국과의 진지한 협상은 막혀 있다. 여기에 침체 국면에 놓인 좌파 노동당마저 우파 쪽의 신자유주의적 정책 및 영토 정복정책과 결탁하면서, 팔레스타인과의 협상을 가로막고 있다.


이스라엘 좌파 노동당의 진정한 비극은 이스라엘 사회 전반에서 감지되는 좌파의 무능함에 있다. 좌파가 무능하단 소리를 듣는 것은 2009년 2월 총선에서 패배한 까닭도 있지만, 현재 좌파의 사정이 1977년 좌파가 역사적 참패를 당한 이후 처음으로 우파가 집권했을 당시와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는 점에서다. 무엇보다도 무능한 좌파 세력의 이념적 구조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신식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두 수렁에 빠진 좌파를 구해내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인들은 이런 좌파를 두고, 지금 중병 환자나 혹은 임종을 앞둔 환자를 떠올리고 있다.

좌파가 이처럼 나락으로 추락한 것은 권력 남용이나 혹은 전반적인 사회 변화 탓이 아니다. 지난 1967년 6월 중동전쟁의 승리뿐 아니라, 역사적 돌파구로 평가된 1993년의 오슬로협정(1) 같은 호기를 이스라엘 정치권력의 전환점으로 삼지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오슬로 협정 당시, 이스라엘 좌파는 체제 순응주의와 보수주의 성향은 물론 지적·도덕적 약점까지 노출시켰다.

유대 민족주의 운동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제한적 이민개방 정책을 실시해 그들을 식민지화하고, 마침내 그들의 독립을 저지하겠다는 목표를 일사천리로 추진했다. 이와 관련해, 1929년 노동운동의 신봉자인 베를 카츠넬손은 “시온주의는 정복 시도다”라며 “특히 군사적 측면에서 그같은 정복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2)

노동당 정권, 식민정책 몰두

이런 정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대 민족주의 운동단체는 자기 조상의 영토에 대한 유대인의 역사적 권리를 상기시켰다. 19세기 말부터, 모든 시오니즘 운동 단체들은 유럽의 유대인들이 와해 직전에 처했다고 평가했다. 제2차 세계대전은 이들의 판단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1930년대 초반부터 정권을 잡은 노동당은 1948~49년에 발발한 중동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지난 반세기 동안 철저히 전쟁 준비를 해왔다.

이윽고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 사태를 어떻게 보고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중동의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이 정복한 땅을 교섭카드로 활용하려 한 이집트의 판단 착오가 빚은 결과일까? 혹은 그 반대로 이스라엘의 독립전쟁을 가장한 정복 정책이 부른 지당한 결과일까? 이 전쟁을 1949년 휴전협정 때문에 미처 완수하지 못한 작업을 계속 추진할 기회로 삼아야 할까? 혹은 그 반대로 1949년 체결된 휴전협정 노선 속에서도 시오니즘이 유대인의 생존이 달린 건국을 목표로 영토정복과 식민지화를 이룩했기 때문에, 이제 아랍 세계를 향해 휴전 중단을 선포할 기회로 삼아야 할까? 어쨌든 이 전쟁 이후, 영토가 생긴 유대인들은 여타 국민들처럼 평범한 국민이 됐다.

이제 유대인들도 자기 나라를 건국한 평범한 국민이며, 국토의 최종 국경선을 1967년 중동전쟁 이후 정복한 가자지구에 친 ‘녹색 라인’으로 규정한다는 대단히 혁신적인 법적 조항을 만들기 위해서는, 좌파는 단지 민족주의의 문화와 정치적 배타주의만을 고취할 것이 아니라 보편적인 가치도 함양해야 했다. 하지만 극소수를 제외한 노동당의 정치 엘리트들은 이런 보편적 조항을 승인할 대비조차 못하고 있었다.

1977년 이후 몇몇 지식인들이 당 재건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정치 입문을 시도했지만, 억압에 못 이겨 뜻을 접거나 혹은 1982년 첫 레바논전쟁 여파로 그만둬야 했다. 좌파운동 지도자들은 아무런 대책도 내놓지 못한 채, 19세기 초반 반세기 동안 좌파 이론가인 아론 데이비드 고든과 베를 카츠넬손이 다져놓은 길을 따라가는 데 만족했다.

1967과 1977년 사이, 그리고 1990년대에 노동당 정부 내에서 토론들이 벌어졌지만, 이는 단 한 번도 낡은 영토정복의 교리를 개정할 목적 때문에, 혹은 국가의 미래 토대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또는 이스라엘 영토에 대한 유대인의 역사적 권리 때문에 벌어진 토론이 아니었다. 이는 모든 국민이 스스로의 운명에 주인이 되게 하자는 자연권에 대한 토론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주인 의식을 함양하는 토론만이 아랍 지역의 허점을 비집고 탄생된 이스라엘의 탄생을 호도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모든 유대인은 스스로의 운명에 주인이 돼야 한다는 원칙 때문에 이스라엘 국민 사이에는 초강력의 힘에 직면해서도 불가항력인 경우를 제외하곤 절대 영토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신념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 1967년과 1977년 연이어 집권에 성공한 노동당 정부는 아랍세계에 대한 식민지화를 시작했다. 이들은 법망을 교묘히 피해가며 갖은 구실로 아랍인들의 토지를 빼앗고,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에 불평등한 법률을 제정했다. 이 법률들은 아직도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 오슬로 평화협정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이 집권한 1992~96년과 1999~2001년에도 영토에 대한 기본 사항은 바뀐 게 아무것도 없다. 그 반대로, 노동당 정부는 점령지로 이주한 이스라엘 농장주들이 우파와 연대해 오슬로협정 때 요르단 서쪽, 팔레스타인 일부 지역의 영토권을 아랍인들에게 인정한 것은 “배반 행위”라며 분노하자 이를 피하는 데 급급했다. 노동당 정부는 이들의 분노를 잠재우고자 이들의 영토정복을 지속적으로 도왔다.


도덕적·지적 무능 드러내

노동당은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무능했다. 노동당이 오슬로협정을 발판 삼아 당을 궤도에 올려놓지 못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당시 오슬로협정의 이스라엘 쪽 서명자는 1967년 6월 제3차 중동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1995년 한 종교적 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이츠하크 라빈 총리였다. 오슬로협정 이후, 라빈 총리는 반세기 동안 당대의 통념을 뛰어넘은 유일한 정치 지도자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종식되려면 양쪽 국민이 서로의 국가를 인정해야만 된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20년이란 세월과 1982년에 발발한 레바논전쟁이 필요했다.

라빈 총리는 그런 사실을 인식했으나 목숨을 잃었다. 그가 생존했다면 그릇되게 이해되고 잘못 시행된 오슬로협정을 아마 제대로 지켰을 것이다. 그는 3천 년 전의 기록인 인류 최초의 책 함무라비법전에 언급된 이스라엘 영토소유권에 대한 논거를 빌미로 끊임없이 영토소유권이나 들먹이기에는 너무나 똑똑하고 실용적인 사람이었다.

노동당 내 우파 정파에 가까운 베테랑 언론인 요엘 마커스는 얼마 전 “오바마 대통령, 성경을 살펴봐라!”라고 외쳤다. 이스라엘의 식민지화 정책을 달가워하지 않는 미국의 시각에도 불구하고, 에후드 바라크 현 국방부 장관과 그의 측근들은 여전히 본국 출신의 식민지 개척자들에 맞설 뾰족한 대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매번 식민지 개척자들이 영토 철수를 거론하며 위협을 할 때마다 물러섰다. 그들은 결국 미국의 압력에 대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노동당은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과 네오콘들을 앨라배마의 복음주의자들과 요르단 서쪽에 위치한 유대인 정착촌의 식민지 개척자들만큼이나 좋아했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2009년 총선에서 노동당의 참패를 정치적 이유로 보지 않고 도덕·지적인 이유로 보는 까닭이다. 또한 좌파 유권자들은 노동당이 아이디어 부재로 존재 이유마저 상실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노동당이 할 수 있는 일이 기껏 무력 사용 및 역사에 호소하는 것뿐이라면, 이 역시 시온주의자인 현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가 직접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지난겨울 가자지구 군사작전을 주도해 승리로 이끈 뒤 그 결실을 챙기려던 노동당 출신 국방부 장관 바라크는 그 선택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2009년 2월 총선에서 바라크가 당수였던 노동당은 우파인 리쿠드당에 대패했다- 역자) .

또 다른 측면인 공허한 이데올로기, 즉 경제·사회적 정책도 매한가지다. 사실 1930년(4)에 창립된 옛 마파이당, 즉 이스라엘 노동당이 자신의 ‘형제들’인 유럽의 사회당과 비견할 만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미 마파이당은 창립 당시부터 국가가 최우선이었다. 이 당은 프랑스 정치가 레옹 블룸과 독일 정치가 루돌프 힐퍼딩(5)이 이끌던 사회당이나 혹은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오토 바우어가 이끌던 사회민주주의당과 동떨어졌을 뿐 아니라, 심지어 1931년 사회당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영국 노동당과도 구별되는 특별한 당이었다.

마르크스주의를 배척한 좌파

마파이당은 마르크스주의를 계속 배척했고, 심지어 가장 온건한 마르크스주의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들은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의 문제에 대해서도 오직 국가 건설의 요구사항에 부합하는지를 놓고 판단했다. 국방부 장관 바라크의 위대한 롤모델은, 그의 전임자 시몬 페레스가 그랬듯, 미국의 네오콘들이 자신들과 같은 편이라고 간주하는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였다.(6) 그리고 노동당 지도자들은 놀랍게도 자유시장 경제가 개인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라며 신자유주의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수용했다. 신자유주의의 근본적 목표는 자본을 국가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란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물론, 모든 노동당원들이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원칙들을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신자유주의 관행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자유의 토대가 되는 유권자 수에 따라 사회정의를 계산하지 않는다. 실제로 좌파 전체는 당 창립 당시부터 자신들의 정치문화 속에 뿌리 박힌, 국가의 가치가 최우선한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한 ‘썩은 부산물’을 챙기고 있다. 모든 이스라엘인들은 3세대에 걸쳐 국가와 문화의 정체성이 물질적 이익보다 우선한다고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국가의 중요성이 무척 강조되는 현대사에서, 이스라엘 사회가 이런 현상을 처음 겪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사회단체들이 국가와 문화, 종교적 가치를 내세워 자신들과 계층의 이익에 상충되는 투표를 하고 있다.(7) 이 경우도, 이스라엘은 건국자들이 공동으로 제정·공포한 법률을 자국의 모든 식민 개척자들에게,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 무엇이건 간에, 지키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겐 역사와 종교는 물론 최고의 정치 목표 자체가 곧 유대국가 건설이기 때문이다.

일단, 국가의 단합을 앞세우면 사회적 하위계층을 상대로 삶의 질을 개선하려면 자유시장 경제와 민영화, 규제 완화 그리고 소득세 감세가 꼭 필요하다고 설득하는 작업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말에 설득당한 대부분의 이스라엘인들은 노동은 여타 상품과 같은 가치를 지닌 것이며, ‘노동 유연성’이 곧 성공의 비밀이라고 믿고 있다.

이런 고전적인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직면한 노동당은 무능함을 드러냈다. 노동당은 시장자본주의의 글로벌 위기에 대처할 능력을 갖지 못한 채, 신념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습관적으로 자신들에게 계속 투표하는 노년층과 사기가 저하된 유권자들을 공략하는 데 나섰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 유권자들의 수도 줄어들었다. 2009년 2월, 그 수는 투표율 대비 10%가 감소하며 노동당의 의원 당선자는 13명에 그쳤다.

젊은이들은 노동당을 떠나고 있다. 이전에 히스타드루트(시온주의자들의 노조)와 마파이당이 장악했던 인력시장은 오래전에 이미 팔레스타인과 중국 혹은 타이인들의 차지가 됐다. 대학 내의 노동투쟁 운동도 미미해졌다.

2005년 당대표 예비선거에서 노동운동가 아미르 페레츠에게 패한 시몬 페레스 전 노동당 당수는 탈당해 중도 성향의 카디마당에 합류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당을 이끌며 총리까지 했던 당수가 하루아침에 반대 진영에 합류하는 모습을 지켜본 많은 유권자들은, 전략적인 아이디어도 목표도 존재하지 않는 당을 위해 투표나 강성 투쟁을 할 필요가 없다는 참담한 결론을 내렸다. 그럼에도 2006년 3월까지만 해도, 노동당은 투표율 대비 15%의 지지율을 보이며 19명의 의원을 당선시켜, 페레츠를 에후드 올메르트 정부의 국방부 장관으로 만들었다. 에후드 올메르트 전 총리는 중도 성향의 리쿠드당을 탈당해 뇌졸중으로 사망한 우파 성향의 아리엘 샤론 총리를 계승했던 정치인이다.

그래도 싹트는 희망의 정치

‘이제는 평화’라는 시민단체에서 활동한 페레츠는 노동당이 단 한 번도 침투하지 못했던 현 가자지구 맞은편의 소도시 스데롯에 거주하면서, 새로 단장한 사회민주주의의 희망이 되고 있다. 오랜 세월 메나헴 베긴을 필두로 아리엘 샤론까지 이스라엘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영웅들에게 농락당했던, 1950년대 초반 이스라엘에 정착한 북아프리카 이민자들과 이들의 후손은 페레츠에게서 자신들의 희망을 읽고 있다.

에후드 올메르트 전 총리는 좀더 균형 잡힌 경제정책 수행을 이유로 핵심 부서인 재무부 장관직 임명을 거절했지만, 좌파인 그에게 국방부 장관직을 위임했다. 하지만 몇 주 후에 발발한 제2차 레바논전쟁 때 그는 경질됐다. 한편, 그동안 사업가로 성공한 에후드 바라크 현 국방부 장관은 텔아비브 북쪽에 위치한 자신의 거실에서 활동하는 것을 텔아비브 남쪽 빈민 지역이나 혹은 그의 지역구인 지방 소도시들에서 거주하는 것보다 훨씬 편안해하고 있다.

그럼에도 2009년 노동당의 참패는 미래에 대한 긍정적 측면도 있다. 노동당 참패는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수치스럽게 여기는 가자지구 전쟁 승리 이후, 갑부 출신의 군인 바라크가 주도한 노동당의 참패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력한 경쟁자인 장성 출신 샤울 모파즈를 밀어내고 카디마당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는 여성 당수 치피 리브니가 부각되는 것도 긍정적이다. 유권자들이 성숙했다는 징표가 쌓이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강자들이 자동적으로 정치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에는 여전히 고민거리가 있다. 리더십 부족으로 인해 활로를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디어와 리더십을 갖춘 국가 지도자들의 부재 탓에 사회민주주의의 앞날을 확실히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리더십 문제가 오직 이스라엘인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시간상 쫓기고 있는 그들에게는 세계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시급한 과제일 수밖에 없다.

글·지브 스턴헬 Zeev Sternhell
역사학자. 폴리오판 역사 시리즈물인 저서 <이스라엘의 기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갈리마르·파리·2004)의 저자.

번역·조은섭 chosub@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로 알리앙스프랑세즈에서 강의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 <착각>(2004) 등이 있다. 


<각주>

(1) 오슬로협정은 1993년 9월 13일 이스라엘의 라빈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 아라파트 의장이 합의했다. 이 협정으로 이스라엘은 PLO를 합법적 팔레스타인 정부로 인정하고, PLO도 이스라엘의 존재 근거를 인정해 공존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2) 지브 스턴헬의 저서 <이스라엘의 기원: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p.312.

(3) 이스라엘 일간 <하레츠> 참조, 텔아비브, 2009년 7월 17일자.

(4) 다비드 벤 구리온과 골다 메이어가 창립한 노동당, 마파이당은 1968년까지 집권했다.

(5) 오스트리아 출신의 독일 사회주의자.

(6) Irwin Stelzer의 저서 <The Neocon reader>, 뉴욕, GrovePress, 2004.

(7) 미국의 경우, Thomas Franck의 저서 <왜 가난한 자들은 우파를 지지할까?>(Agone·마르세유·2008)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