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로 치닫는 성장

2015-12-01     장 가드레

올 12월 파리에서 개최되는 기후변화대응국제회의에서는, 지구온난화 제한과 무한경제성장이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 심도 있는 토론이 펼쳐질 것이다. 선진국들은 양립불가론성에 무게를 두고, 기후변화협약의 목표 달성을 어렵게 만들 것이다. 인간의 발전을 위한, 다른 경로의 가치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선진국과 신흥국에서 수십 년 전부터 관찰됐던 ‘성장률 하락 추세’(1)에 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미국의 폴 크루그먼과 래리 서머스 등 유명 경제학자들은 조심스럽게 ‘성장 없는 세계’를 예언하기도 했다. 적어도 선진국의 경우 그렇다는 것이다. 이들은 ‘백 년에 한 번 오는 침체’(2)가 도래했다는 그럴싸한 이유를 댄다.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 또한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의 해결책으로, 성장세 회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 것일까? 성장세 회복이 선진국이 직면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3)라고 말하며, 역시 프랑스 경제학자인 다니엘 코엔은 “성장의존도에서 벗어나자”(4)고 제안한다.

몇 마리 제비가 봄을 만들 수는 없다. 이들 경제학자들 중 어느 한 명도 중요한 사실, 즉 이미 고갈되고 있는 대부분의 성장 천연자원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이들의 주장 자체가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한편 석유생산정점 연구전문가 마티유 오자노와 화석 및 광물자원 전문가 필립 비우익스는 천연자원의 고갈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한 바 있다.(5)

그러나 머릿속에 성장제일주의가 뿌리박힌 정치지도자들은 기후변화 투쟁에 대한 열띤 연설 중에도, “최우선 과제는 성장”임을 강조한다. 금년 8월,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이제르 지역 사스나주(Sassenage)에서 한 연설에서, “프랑스에서 열릴 국제기후변화회의는 모범사례로 남아야 한다. 또한 에너지 전환과 기후문제는 성장을 위한 도전이다. 우리는 성장을 지지하고, 성장 촉진을 원한다. 우리가 에너지 전환 도구(대체 에너지)를 사용한다면, 성장은 즉시 이루어진다”고 강조했다. 올랑드 대통령은 2분 동안 ‘성장’이란 단어를 14번 반복했다. 특히, 올랑드 대통령은 “나의 목표는 실업률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물론 감세도 성장에 도달하는 방법이다. 소비와 신뢰성이 회복되면 성장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것이 성장과 연관된다. 성장은 감세로, 감세는 성장으로 이어진다”(6)하고 토로했다.

모든 것을 성장과 연관 지으면서, 어떻게 프랑스에서 모범적인 기후변화 회의를 개최하겠다는 것일까? 하지만 이러한 모순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녹색성장’을 신생종교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이들은 녹색성장이 성장을 촉진시키고, 성장이 녹색성장을 용이하게 한다고 믿는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환경문제에 있어서 경제성장은 문제가 아니라 해답”이라고 하며, 성장에 대한 신조를 피력한 바 있다.(7)

분명한 것은 기후변화를 비롯한 생태위기에 직면하면, 대규모 투자는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재생에너지 건물단열, 에너지 효율성, 생태농업, 지속가능한 이동성 등을 위한 투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팽창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되는 특정 분야에만 집중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문제는 외면한다. 즉 기후변화, 생물 다양성, 인체 보건 등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과 그에 따라 어떤 활동과 생산을 얼마나 감소시켜야 하는지 등 필수적인 문제를 방치한다. 또한, 기후온난화를 막기 위해 화석연료개발을 얼마나 자제해야하는지에 대해서도 논의하지 않는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화석연료의 60~80%를 개발하지 않고 방치해야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화석연료의 개발을 중단할 경우, 현재 화석연료로 인해 대부분 촉발된 세계 경제성장률에 미칠 영향과 나아가 크든 작든 경제성장이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의 임계치, 즉 현재 요구되는 온실 가스방출 감소율과 양립할 수 있는지 등의 문제도 등한시되고 있다.

경제학자 미셸 우송(8)은 지금부터 2050년까지 1인당 세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예측 가능케 하는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세계 GDP의 이산화탄소 강도’(9)의 감소 속도를 토대로 짠 이 프로그램은, IPCC 소속 전문가들의 다양한 시나리오와도 호환 가능한 것이다. 그는 “2010년부터 2050년 사이에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량 감소속도를 2배로 감소시키겠다는 IPCC의 당초 목표를 달성시키려면, 세계 GDP의 이산화탄소 강도의 감소 속도는 지난 20년 간 관찰된 것보다 2배 빨라져야한다. 그래야만 연간 이산화탄소의 강도를 –3%대로 유지할 수 있다. 반면, 연간 1인당 세계 평균 GDP성장률은 0.6%대로 떨어져야 한다. 205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85% 줄이겠다는 야심찬 목표는 무모해 보인다”는 결론을 내렸다. 결국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대폭 감축시키려면, 이산화탄소 강도의 급격한 감소, 그리고 1인당 세계평균 GDP의 절대적인 하락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만일 화석연료‧광물‧경작기‧산림‧물 등 자원의 유한성과 호환 가능한 성장, 그리고 기후 위험에 대한 엄격한 규제 또는 바다와 생물 다양성의 손상과 호환 가능한 성장을 병치한다면 ‘녹색성장’은 신화가 된다. 그렇다면 녹색성장에 대한 숭배를 멈출 수 있을까? 생태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침체를 받아들여야 할까?

성장 신봉자들은 “미래는 단지 과거의 부활일 뿐”이라는 생각에 갇혀있다. 이들은 생산품을 대대적인 광고와 제품수명 노후화 자동프로그램, 그리고 대출인생을 통해 소비시킴으로써 ‘경기를 부양’시키겠다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못한다. 또한 이들은 “지속적이며 충분한 성장 없이 고용 창출도, 실업률 하락도 없다”는 논지를 반복한다. 자유성장주의의 이데올로기적인 삼각구도, 즉 “경쟁이 성장을 일으키고, 성장이 고용을 창출하며, 이는 실업률 하락으로 이어진다”는 슬픈 속단이다.

하지만 이 구도가 지속적으로 정책 결정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이다. 실상 신자본주의 신봉자들은 실업을 징계 장치로 이용하는 것을 대단히 좋아한다. 이들은 실업을 노동자 요구 저지, 노동 강도 강화, 비정규직 양산 등에 활용한다. 만일 녹색환경 속에서의 복지 ‘부양’이 자유성장주의의 실적보다 실업률 하락을 위해 훨씬 효율적이라고 설득하지 못하면, 어떤 포스트 성장(녹색성장) 프로젝트도 성공할 수 없다. 그러나 성장은 끊임없이 생산성 수익에 의존하는 현재 경제모델 속에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동일한 노동량으로 생산량을 높이는 방법밖에 없다. 이러한 모델 속에서는, 성장이 생산성 수익보다 낮거나 정체될 경우 노동량이 감소한다. 노동량이 감소하면 개인당 평균 노동시간을 조정하지 않으면 일자리가 줄어든다. 물론 중단기적 실업 타파에 효율적인 노동시간의 감축 및 분배를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는 생산성 지상주의를 벗어날 수 없다.

생산성지상주의를 탈피하려면, ‘영광의 30년(1945-1975)’ 즉, 경제부흥기나 포드주의의 산물인 ‘생산성에 기대던 낡은 수익분배’방식을 품질과 지속가능성에 의존한 수익분배방식으로 바꿔야한다. 즉 생산과 소비 시스템은 ‘질(사람, 사회적 관계, 물건, 생물권 등에 대한)’을 중시하는 방식을 따르고, 사회적·생태적 공공재산은 인간과 정치활동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한마디로, 양은 줄이되 질은 높여야한다. 또한 지금과 같은 전환기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불평등의 해소다. 모두가 새로운 소비패턴에 접근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는 서민층이 생태적 요인으로 인한 피해의식을 갖지 않게 한다는 측면에서 최우선과제다.

녹색경제는 첨단기술과 맞서는 ‘로우 테크놀로지'를 선호한다. 그리고 인간과 자연, 노동과 훨씬 친화적이다. 그러나 생산지상주의 경제에 비해 혁신성 또한 결코 뒤지지 않는다. 녹색경제는 생산지상주의 경제보다 더 많은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좋은 노동조건 속에서 친환경적인 건강한 제품을 첨단기술농업과 같은 양으로 생산하려면, 훨씬 많은 일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일한 양의 농작물을 재배하려면, 유기농업은 화학농업보다 30-40%의 인력을 더 필요로 한다.

녹색경제로의 ‘대전환’은 비현실적일까? 그렇지 않다. 세계 곳곳에서 이러한 전환이 이미 시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녹색경제는 아직도 낡은 성장지상주의 경제에 매달리는 성장 신봉자들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확산되는 중이다. 최근 발간된 많은 저서와 다큐멘터리 속에서(10) 거론된 인도, 중남미, 아프리카, 미국, 유럽의 많은 사례들과 네트워크 알테르나티바(Alternativa)와 이 네트워크를 창설한 바스크 지방의 단체, 비지(Bizi, 바스크 만세!)가 전하는 현지 체험들이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시민들은 정치지도자들과 함께 또는 그들을 배제한 채 종종 ‘경쟁-성장-고용창출-실업률 하락’이라는 삼각구도 논리에 분노하거나 또는 이 논리를 일반화하곤 하는데, 그것은 이들의 몫일 수밖에 없다.

글·장 가드레 Jean Gadrey
프랑스 릴르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를 지낸 진보경제 학자로서 <르몽드>,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 등에 정기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글을 기고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불평등을 끝내자(En finir avec les inégalités)>(2006), <빈곤과 불평등(Pauvreté et inégalité)>(2006) 등이 있다.


번역·조은섭 chosub@hanmail.net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졸.


(1) http://alternatives-economiques.fr/blogs/gadrey 참고.
(2) Paul Krugman, ‘Secular stagnation, coalmines, bubbles, and Larry Summers’, The Conscience of a Liberal, 2013년 11월 16일, http://krugman.blogs.nytimes.com 참고.
(3) Thomas Piketty, ‘성장이 우리를 구할 수 있을까?(La croissance peut-elle nous sauver?), Libération, 파리, 2013년 9월 23일.
(4) 일간 <르몽드>, 2014년 1월 6일자 참고.
(5) Mathieu Auzanneau, < 검은 황금, 석유의 대역사(Or noir. La grande histoire du pétrole)>, La Découverte, coll. <Cahiers libres>, 파리, 2015년. Philippe Bihouix, <기술적으로 지속가능한 문명을 향해 가는 로우 테크놀로지 시대(L’Age des low tech. Vers une civilisation techniquement soutenable)>, Seuil, coll. <Anthropocène>, 파리, 2014년.
(6)‘이제르 주 사세나주의 연설 당시(Intervention lors de son déplacement à Sassenage en Isère)’, 2015년 8월 21일, www.elysee.fr 참고.
(7) 국립해양 대기청 연설, 실버 스프링 (메릴랜드), 2002년 2월 14일.
(8) Michel Husson, ‘기후변화에 대한 주판알 튕기기(Un abaque climatique)’, note n° 89 (PDF), 2015년 8월, http://hussonet.free.fr 참고.
(9) 이 용어는 GDP 단위당 이산화탄소의 배출강도를 의미함.
(10) www.associations-citoyennes.net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