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닛케이진’, 일본의 정체성을 뒤흔들다
브라질 이민자 후손, 조상의 나라에서 ‘3D’ 전전
외모 같은데 언어·문화는 이질적… 정체성 흔들
‘닛케이진’, 즉 20세기 초에 라틴아메리카, 특히 브라질로 이민을 떠난 일본인 후손이 1980년대 말 다시 일본열도로 돌아왔으나 생각한 것과 달리 일본은 엘도라도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 이들은 일본어가 어설프고 라틴 문화에 익숙하다는 이유로 차별을 받기까지 한다. 사실 이들을 일본으로 불러들인 건 일본 정부였다. 일본 정부는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고 노령화가 심각한 사회에 젊은 피를 수혈하려 이들을 불러들인 것이다. 이 닛케이진들은 자신들을 제대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일본을 강타한 경제위기 폭풍에 특히 몸살을 앓는 이들이 있다.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이다. 외국인 노동자 가운데서도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더 취약한 상황이다. 주로 자동차·건설·전자·식품산업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은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3D’ 노동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단순 노동직을 연결해주는 직업소개소를 통해 모집된 이들은 잉여 인력으로서 해고 제1순위다.
1990년에는 닛케이진들을 위한 새로운 특별법이 마련되었다. 일본이 엄청난 경기 호황을 누리고 노동시장이 노령화되던 당시 닛케이진들은 비숙련노동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마침 브라질에 경제위기가 불어닥치자 닛케이진들은 나은 조건에서 일할 수 있다는 꿈을 품고 일본으로 오게 된 것이다. 이들에게 일본은 어떻게 보면 ‘고국’이기도 했다. 1990년대에 4천 명 정도이던 닛케이진들은 현재 60만 명에 이른다. 닛케이진들은 2002년에서 2008년까지 경기회복이라는 이점을 누렸고 일부는 가족을 일본으로 불러들이기도 했다. 특히 브라질 대도시에는 이들을 고용하는 전문 회사들이 생겨났다.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최대 디아스포라(이산)를 형성하며 브라질에 100만 명 이상이 있고 일본에 30만 명이 있다.
1908년 첫 브라질 이민
1908년 6월 18일부터 일본인은 브라질로 이민을 떠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이민자들은 ‘카사토마루’라는 선박을 타고 고베 항구를 출발해 52일 동안 항해해 상파울루 근처의 상투스 항구에 들어왔다. 일본 정부가 용선료를 지급한 첫 선박에는 일본인 이민자 780명이 타고 있었다. 당시 현지 언론은 이들을 가리켜 ‘질서를 잘 지키고 깔끔하다’고 표현했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는 아직도 일본의 흔적을 잘 느낄 수 있다. 일본계 브라질인 80%가 상파울루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절 근대화 정책에 따라 일본인은 브라질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당시 일본은 문호를 개방하고 대규모로 개혁을 단행했지만 인구의 상당수가 급격하고 강제적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실업자 신세로 전락한 채 내일에 대한 불안감으로 몸을 떨었다.
상황에 따라 브라질로 영원히 이민을 떠난 일본인 가족들은 커피나 목화 대농장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브라질 도시에 둥지를 튼 일본인 이민자들은 자본이 거의 들지 않고 가족을 모두 동원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그래서 하게 된 일이 세탁소, 과일 및 채소 장사였다.
2차 대전 중 갖은 차별 당해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본인조합은 금지되고,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차별을 받고, 일본어 사용도 금지되었다. 브라질의 일본계 차별 정책은 미국의 차별 정책보다는 그 정도가 낫긴 했지만(일본계 미국인들은 수용소에 갇혀 지내기까지 했다), 그래도 일본계에 대한 차별 정책으로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일본을 그리워하며 민족주의를 품게 되었고 정체성에 혼란을 겪게 되었다. 브라질이 일본과 외교 관계를 재개한 건 1952년에 이르러서였고, 이후 일본인들은 1973년까지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1950년대부터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특별한 브라질인들로 살아왔으며 자신들을 1세대, 2세대, 3세대, 4세대 등으로 불러왔다.
일본계 브라질인들이 다시 선조의 국가인 일본으로 귀향하게 된 건 1980년대부터였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이들 행렬은 ‘기코쿠’(고국으로의 귀환)라고 불렸다. 하지만 아무리 일본계라 해도 이들은 일본과 거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아왔으며 라틴적인 행동을 고수하고 있었던 탓에 상당히 문명화된 일본 사회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더구나 일자리를 찾아 자리잡은 곳도 도카이 지방(아이치·시즈오카)이나 간토 지방(구마·사이타마)이었다. 이들은 조부모가 사용하던 일본어를 들은 적은 있어도 사용할 기회가 없었기에 일본어에 능통하지도 않았다. 일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다 보니 무시를 받기 일쑤였다. 또한 일본을 떠나 한창 노동력이 필요하던 전후 일본 재건 사업에 참여하지 않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취급을 받았다. 1997년 10월 아이치현 고마키시에서 젊은 닛케이진이 단지 일본어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일본 청소년들에게 맞아 죽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닛케이진은 언제든 해고당할 수 있는 비정규직에 종사하는 일이 많아 장기적으로 일본 사회와 관계를 유지하기가 힘들었고, 결국 자신들끼리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폐쇄적으로 살게 됐다. 이들은 해고 대상 1순위일 뿐만 아니라 의료보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재취업 가능성도 없이 변변한 집도 구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돌아온 조국서 다시 차별
노령화 문제를 해결하고 노동시장에 젊은 피를 수혈하려 이민이 추진됐지만, 이민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계획도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일본계 브라질인들은 ‘일본적인’이라는 인종적·사회문화적 정체성의 관계에 혼란을 주는 존재로 취급받고 있다. 닛케이진은 보통 일본인과는 행동 방식이 다르고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하지만 외모는 일본인이며 일본인 조상을 두었다. 하지만 일본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외국인들이 점점 늘어나는 상황에서 일본어를 잘 못하는 닛케이진들은 더욱 곤란한 처지다. 결국 닛케이진은 일본 사회를 혼란스럽고 불편하게 하며 일본의 정체성까지 위협하는 존재가 돼버린 것이다. 비단 이들의 존재가 아니어도 일본의 정체성은 변화를 맞고 있다. 단일민족이라 믿고 살아온 일본인의 생각은 오래전부터 역사학자들의 주장으로 깨지고 있으며, 일본 도시들은 나날이 국제화돼 외국인 이민자들이 둥지를 틀고 자녀를 기르며 일본 학교에 보내고 있다.
전반적으로, 일본 엘리트들이 원하는 ‘국제화’ 전략은 모순적이다. 국경은 확실하게 개방됐으나 법이 경직돼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똑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외국인 이민자들이 저지르면 일본 사회의 조화를 깨뜨린다고 비난하며 이들에게 더욱 엄격한 법을 적용한다. 이런 점에서 일본은 분명 아직도 폐쇄적인 사회다.
글·크리스티앙 케슬러 Christian Kessler
역사학자이며 일본 도쿄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번역·이주영 ombre2@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한불상공회의소 격월간지 <꼬레 아페르> 전속 번역. 번역서로는 <여성의 우월성에 관하여>(200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