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의 혁명가 벤 바르카의 부활

2015-12-01     오마르 벤젤룬

대단한 파급력의 관념론자, 억척스런 일벌레, 지지자들의 구심점이었던 카리스마적 존재, 메디 벤 바르카는 그렇게 쉽게 사라질 수 없었다. 적어도 지지자들의 신념 속에서는 말이다. 벤 바르카는 20세기를 충격에 빠뜨렸던 정치범죄의 희생양이 된 채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 죽음이 반제국주의 운동의 선봉장이었던, 흠잡을 데 없는 그의 인생까지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프랑스 식민정권이 ‘위험한 선동자’라 규정했던 벤 바르카는 1965년 10월 29일 파리에서 납치됐지만 그의 흔적은 오늘날까지도 아랍왕국의 정치판에 뚜렷이 남아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모로코의 유일한 야당세력이었던 모로코 좌파는 오랜 시간 ‘민주주의 혁명’ 지지자들과 ‘혁명적 선택’ 지지자들로 양분돼있었다. 벤 바르카는 두 기조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했지만, 양 진영에서는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대립하기도 했다. 가말 압델 나세르, 마오쩌둥, 아흐마드 빈 벨라, 케네스 카운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와(1) 어깨를 나란히 했던 벤 바르카의 정치적·사상적 계승자라 자처하는 모로코 사회주의자들에게 벤 바르카와 관련된 모든 상황은 상징적인 쟁점으로 남아있다. 벤 바르카의 가족과 변호사 모리스 뷔탱이 수십 년 간 망명생활 끝에 잠시 귀국했을 때, 벤 바르카의 아들 바시르 바르카가 아버지의 실종에 대해 발언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진보주의의 힘과 모든 해방운동의 결합을 호소했던 벤 바르카의 연설을 다시 들어보면 그의 영향력이 어떻게 지금도 지속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1957년 튀니스에서 열린 아프리카 인민 회의에서도 그의 연설은 많은 참석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를 계기로 벤 바르카는 대중연설가 및 세계주의를 주창하는 견인차로서의 역할을 화려하게 시작한다. 벤 바르카는 1920년 라바트 회교도 거주지 메디나에서 태어났다. 총명한 학생으로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경제학에도 심취했다. 1944년 이후 모로코 독립당 이스티크랄의 진정한 지도자이자 중요한 민족주의 지도자로서의 행보를 내딛는다.
1951년 식민당국에 의해 아틀라스 산맥 남부로 유배됐다가 1954년 석방된 벤 바르카는 독립투쟁에서 농지개혁을 열렬히 부르짖으며 하층민과 농촌의 수호자가 된 적도 있다. 하지만 1956년 이후 그는 정부에 남기를 거부하고 귀족정치로 변해가고 있는 집권체제에 반대하며 자문의회 의장직을 내놓은 채 독립당에서 나와 국민연합(UNFP)당의 전신인 신독립당을 창당한다. 내란음모 혐의를 받고 첫 망명길에 올랐던 그는 새로 왕위에 오른 하산 2세의 요청으로 1962년 영예롭게 귀국하지만, 6개월 후 테러의 피해자가 돼 다시 외국으로 떠나게 된다. 그리고 알제리와의 ‘모래 전쟁’이후(2) 알제리에 지나치게 우호적인 입장을 취했다는 이유로 1964년 10월 궐석 판결에 의해 사형을 선고 받는다.
프랑스 정보기관 요원과 배후세력의 지원에 힘입어 두 명의 프랑스 경찰이 대낮에 파리의 리프 레스토랑 앞에서 벤 바르카를 납치했다. 이들이 벤 바르카를 납치한 이유는 바르카가 모로코 정부인사들이 ‘왕궁의 골칫거리’라고 여긴 반체제인사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벤 바르카가 꾸준한 노력 끝에 ‘결집, 협력, 해방’이라는 3대 목표를 완성시키며 제 3세계의 결집을 이루어낸 중심축이었기 때문이다.
벤 바르카는 민족주의 틀에서 벗어나 세계적인 시각으로 모로코 독립운동을 확대하려 했다. 벤 바르카는 지칠 줄 모르는 혁명의 전도사로 전 세계를 누비며, 수차례의 암살위기를 넘기고 한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바삐 이동해왔다. 하루는 카이로에서 신식민주의를 규정하며 비난하는 연설을 하고, 그 다음날 모스크바와 베이징으로 가서 중국과 소련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바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돌아가 이집트 나세르주의 지지자들과 시리아 바트당 지지자들의 화해를 주도했다. ‘아시아 아프리카 인민연대기구’가 라틴 아메리카까지 확산되도록 남미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것은 그의 주요임무 중 하나였다.
1965년 알제에서 이뤄진 긴 회의 끝에 체 게바라는 벤 바르카에게 대륙회의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겼고, 1966년 1월 쿠바에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인민연대회의’가 열린다.(3) 회의를 준비했던 주요인사 벤 바르카가 없었기에 그 영향이 널리 퍼지지는 못했으나, 냉전시대의 한 가운데 열린 이 반제국주의 회의는 제3세계주의 역사에서 상징적인 지표로 남아 있다.

“진실을 말하는 정치만이 유일한 정치다”

이후, 1965년 당시 모로코 정보기관 책임자로서 벤 바르카를 살해한 혐의로 프랑스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모하메드 우프키르 장군과, 장군의 보좌관이자 1972년 쿠데타 시도 이후 장군을 살해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아메드 들리미가 연이어 실종됐다. 그러자 벤 바르카의 실종에 모종의 음모가 있었다는 설에 무게가 실렸다. 프랑스 영토에서 이루어진 벤 바르카의 납치, 그리고 고문받다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벤 바르카에게 순교자의 이미지를 선사했다. 그리고 다수의 정보기관이 연루됐다는 사실(특히, 1966년 드러난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개입)은 벤 바르카가, 주도권을 가진 식민지배 강국들의 대항자였다는 이미지까지 부여했다. 독재권력의 희생자들을 보호하던 벤 바르카의 모습은 모로코 정치사에 있어 수많은 순간, 특히 그의 지지자들의 갑작스런 체포나 숙청의 순간에 많은 이들을 결집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기회주의에 편승한 종교 세력들이 하산 2세 국왕이 벤 바르카의 제자였다는 점을 내세우며 고인의 명성을 가로채려던 사이,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이슬람주의자들은 벤 바르카가 무신론자였다는 이유로 그를 끝없이 비난했다. 기존 질서에 대한 논쟁이 진보주의자들보다 체제유지주의자들 사이에서 더 많이 거론되는 모로코 상황에서, 실종된 유명인사의 모습은 이념의 구분 없이 ‘반체제’ 세계를 연합하는 주요한 상징으로 남아있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아랍의 봄’ 혁명에 이어 2011년 초반에 일어난 민중 시위에서도 많은 당파 사람들이 벤 바르카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진실을 말하는 정치만이 유일한 정치다”라는 벤 바르카의 구호는 지금까지도 많은 연설자들에게 영감을 주고있다. 이 전통파괴자의 기억은 식민정권 저항세대, ‘부정출발’한 독립세대, ‘납탄 시대(1960~1980년대 하산 2세 국왕이 정치적 반대자들과 민주주의 행동가들에게 폭력과 탄압을 일삼았던 사회정치적 혼란기-역주)’세대, ‘아랍의 봄’ 세대 등 여러 세대 사이의 간극까지 메우고 있다.
벤 바르카의 실종은 그의 명성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했지만 동시에 그의 영원한 적들에게 그를 지속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좌파는 여러 정부를 거치며 부패에 젖어버렸고, 현지 엘리트 사이에서는 체제유지주의가 부상하고 신자유주의 사상이 확산됐다. 보수주의자들이 수정주의를 체계적으로 장려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명실상부한 모로코 야당의 옛 지도자가 독립을 위한 ‘국가운동’ 참여자의 숙청을 기획했다거나, 체코슬로바키아와 이스라엘의 정보기관을 위해 일했다는 등의 다양한 형태의 선전을 반복했다. 또한 천년의 역사를 가진 이슬람교 군주제 국가에서는 바르카를 ‘공산주의 공화주의자’라 부르며 폄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험담이 벤 바르카의 명성에 흠집을 내지는 못한다. 그는 아직도 ‘식민지로서의 모로코가 아닌, 독립과 사회주의를 통해 빛을 볼 수 있었던 모로코’를 대표하기 때문이다.(4) 이제는 모로코 정권에서도 벤 부르카를 금기시 하지 않는다. 모하메드 6세 국왕은 “벤 바르카의 가족만큼이나 나도 바르카의 사건에 관심이 많다”고 말하며 부친의 집권체제하에 저질러진 비리를 조사하겠다는 목적으로 ‘공정과 화해 위원회’를 신설하기도 했다. 피해자들과 과도기시대의 정의에 대한 명예회복 과정에서 모로코 당국은 대도시 도로에 벤 바르카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언론, 방송에서 벤 바르카의 업적을 언급하거나 그를 추앙하는 것을 더 이상 금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에도 한계가 있다. 대중에게 허락된 우상의 행보는 1961년까지다. 납치가 자행되기 전 치열했던 4년 간의 대립기는 언급할 수 없다. 식민주의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그리고 1956~1959년 자문회의 의장을 지냈던 정부인사로서의 지위를 인용하는 것은 자유이나, 그의 실종은 국가기밀로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정부가 수차례 집권했음에도 교과서에 벤 바르카는는 없다. 대신 이븐 타이미야 등 체제유지주의 사상가들로 가득하다.
“메디 벤 바르카, 그의 죽음은 오랜 생명을 가질 것이며, 그의 죽음은 승리할 것이다.” 반식민주의 작가이자 활동가인 다니엘 게랭은 이렇게 말했다.(5) 50년이 지난 지금, 납치에 대한 진실이 규명되길 기다리는 이들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프랑스 법무부의 가장 오래된 형사결정에 매달리고 있다. 프랑수아 미테랑 전 대통령의 표현에 따르면 ‘끔찍한 비밀’이 숨겨진 이 사건을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은 “용납할 수 없고, 참을 수 없으며 허용할 수 없다”고(6) 평가했고, 이 때문에 프랑스와 모로코의 관계가 몇 년간 경색되기도 했다. 메디 벤 바르카의 존재는 오늘날에도 진보주의 사상을 쇄신하기 위한 활력의 원천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근본주의와 신자유주의라는 치명적인 두 이념에 의해 쇠약해진 바로 이 나라에서 말이다.


글·오마르 벤젤룬 Omar Benjelloun
모로코 라바트, 프랑스 마르세유 변호사협회 소속 변호사. 모로코 좌파의 주요 인물인 아메드 벤젤룬의 아들이자 1975년 살해된 오마르의 조카.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차례대로 1960년대 이집트, 중국, 알제리, 잠비아의 지도자,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쿠바 정부의 장관을 지낸 혁명가
(2) 1963년 10월 15일에서 11월 5일 사이, 양국의 군대는 틴두프 지방과 콜롱 베샤르 지방의 영유권을 두고 맞섰으나, 식민지 시대에 결정된 국경에 합의하며 휴전했다.
(3) 르네 갈리소 ‘메디 벤 바르카와 3대륙 회의’기사 참고,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5.10
(4) 메디 벤 바르카, ‘혁명적 선택’, 1962년 UNFP 회의에서 발표한 보고서
(5) 다니엘 게랭, ‘벤 바르카 그리고 그를 죽인 암살자들’, Plon, Paris, 1989
(6) 1966년 1월 25일 Mutualité에서의 연설 및 1966년 1월 19일 내각회의 발언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