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는 관음증 환자다

2015-12-01     안치용
   
 


10월 23일 발매된 아이유의 새 앨범<CHAT-SHIRE> 수록곡들을 둘러싸고 한동안 ‘소아성애’ 논란이 일었다. 알만한 평론가들이 가세해 ‘표현의 자유’를 운운하며 언쟁을 벌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이유 노래를 아는 게 거의 없고, 아이유에 대해 관심도 없다. 게다가 ‘논란이래야 보나마나 하나마나한 말다툼일 텐데’하고 말았다. 그러다 철지난 모기에 시달리느라 잠들지 못한 어느 가을 밤, 수록곡 중 논란이 된 ‘제제’의 가사를 읽고 말았다.
실소가 나왔다. 대체 ‘제제’ 또는 ‘제제’에 대한 제재가 사회적 토론 대상이 돼야 하는지, 거기에 소아성애 코드가 왜 등장해야 하는지, 나아가 ‘표현의 자유’라는 거창한 주제는 왜 동원된 건지 전부 의문스러웠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이유의 ‘제제’는 용인되는 ‘표현의 자유’ 범위에 속한다. 굳이 시비를 걸어야 한다면 아이유의 ‘제제’에서 나타난 표현의 수준이다. “스스로 작사했다”고 한 ‘제제’의 표현수준은 아이유임을 감안하면 그나마 예상보다 높은 것이었다.
사실 ‘제제’ 사태의 본질은 아이유나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음란성을 상업적으로 구조화 하는가’다. 달리 말해, 아이유 가사의 롤리타적 성격보다는 아이유 자체를 롤리타로서 체계적으로 수용한 우리 사회의 상업적 음란성이 이번 논란의 본질이다.
먼저 보도를 참고해 사건을 정리해 보자. <CHAT-SHIRE> 발매 당일 아이유는 자신과 동갑인 23세 팬 100명을 초대해 쇼케이스를 열었다. 그 자리에서 “제제라는 캐릭터만 봤을 때는 모순점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굉장히 매력적이고 섹시하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다음날 다른 행사에서는 ‘제제’를 거론하며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으면서 제제라는 캐릭터가 정말 좋았다. 사랑스러웠다. 좋은 이유 중 하나가 모순점이다. 어떤 때는 천사 같이 굴지만 장난기가 넘쳐서 못된 장난을 치는 아이로 묘사된다. 그런 점이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논란의 시작은 11월 5일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한국어판을 펴낸 출판사 동녘이 아이유의 ‘제제’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동녘은 페이스북에서 “아이유님,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며 “학대로 인한 아픔을 가지고 있는 다섯 살 제제를 성적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표현의 자유도 대중들의 공감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유는 바로 사과했다. “맹세코 다섯 살 어린아이를 성적 대상화하려는 의도로 가사를 쓰지 않았다”는 해명이다. 또 “제 가사가 충분히 불쾌한 내용으로 들릴 수 있다는 것, 그 결과 많은 분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드리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도 했다.
그 다음은 소위 평론가들의 가세와 언론의 중계, 온라인상의 논란 확대였다. 어느 신문은 “다섯 살 남자아이 ‘제제’는 왜 망사스타킹을 신고 있나”라는 제하의 기사를 썼고, 영국 가디언도 ‘아이유 사태’를 보도했다. 심지어 아이유의 ‘제제’ 음원 폐기를 요청하는 온라인 서명 운동까지 등장하며 논란이 과열됐다. 동녘이 “해석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한 점에 사과를 드립니다"며 며칠 만에 아이유에 겨눈 비난의 칼을 내려놓으면서 당사자 간 논쟁은 일단 종결됐다. 떠들썩한 논란도 점차 수그러들었다.

제제, 맥심, 그리고 위안부

마침 아이유의 ‘제제’를 두고 대학생들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모두에 적시한 것과 동일하게, ‘제제’는 당연히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음원 폐기 같은 ‘제제’에 대한 제재는 군사정권이나 탈레반 정권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라는 생각이었다. 심지어 음원 폐지를 운위하는 또래들에게서 어버이연합의 ‘미러링’을 목도했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더 대담하게는, 여성에 대한 납치·폭력을 미화했다고 지탄받은 맥심의 2015년 9월호 표지나 2004년 이승연의 위안부 누드 화보도 표현의 자유로 용인돼야 한다는 견해가 있었다.
언론·출판의 자유 혹은 표현의 자유는 소중한 기본권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자유가 무한정하지 않다는 데에 모두가 동의한다. 예컨대 소수자 비하 등 (만약 존재한다면) 공동체의 민주적 통합을 저해하고 보편적인 도덕 가치를 훼손하는 내용은 불가하다. 이때 불가의 기준이 엄격해야 함은 물론이다. 대중문화 또는 대중예술에 국한해, 또 아이유의 ‘제제’와 연관지어 이야기하자면 롤리타란 용어의 존재는 사회적 금기와 무관하게 표현의 영역에서 롤리타적인 것의 용인을 의미한다. 제제라고 달라질 게 있을까. 공중파를 포함한 TV에서, 벗은 거보다 더 선정적인 ‘싱싱한’ 걸그룹이 엉덩이를 흔들고 있는 판에, 제제의 선정성 운운은 모순적이고 위선적이다.
아이유의 ‘제제’는, 노골적인 ‘섹스 안무’가 만연한 어린 걸그룹보다도 어린 ‘소아’이며 여성의 성상품화와 다른 영역의 성상품화이므로 제재해야 마땅하다는 반론이 존재한다. 허용되는 성상품화와 허용되지 않는 성상품화가 구분된다는 논리가 우스꽝스럽지만 현실이긴 하다. 어린 여성의 성상품화는 상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유통되지만 무성이라고 할 소아를 성상품화하는 것까지는 이율배반적이고 천박한 우리네 도덕관념에서도 수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유의 ‘제제’는, 비판자들의 논리를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소아성애적 표현의 영역에 속하지 소아의 성상품화가 아니다.(말미에 간단하게 언급하겠지만, 오히려 비판자들이 아이유를 소아성애적으로 상품화했다.) 소아성애와 관련된 개인적이거나 상업적 행위는 법에 의해 엄격하게 처벌받아야 한다는 데 이론이 없다. 예컨대 소아성애를 다룬 포르노나 소아의 매매춘은 재론할 필요 없이 엄격한 제재의 대상이다. “포르노는 되고 매매춘은 되는데 소아는 안 된다는 게 원천적으로 말이 되느냐”는 반론은 성립하지 않는다. 보편적 도덕가치라는 게 실재하느냐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지만, 마지노선은 설정할 수 있다. 소아성애의 금지가 그 선에 해당한다.
아이유의 ‘제제’에 소아성애적 표현이 드러났는지는 동녘의 말마따나 ‘해석’의 방식에 달려있고, 백번 양보해 그렇다 하더라도 소아성애적 ‘표현’은 명시적이고 저열하게 그 행위를 미화하거나 확장하지 않는 한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 그렇다고 아이유의 ‘제제’를 비난할 자유가 없는 건 아니다. 아이유가 ‘그딴 식’으로 제제를 활용할 수 있고, 동시에 그런 아이유의 ‘제제’를 비난할 수 있지만 아이유의 ‘제제’를 제재하자는 선동은 파시스트문법에 속한다. 아이유는 자신만의 ‘제제’를 만들어 대중문화 속으로 유통시킬 자유가 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아이유를 비난하거나 아이유의 음악을 듣지 않거나, 아이유 앨범을 사지 말라고 개인적 의견을 표명할 자유는 있다. 하지만 아이유의 ‘제제’를 살해할 자유는 없다. 그런 선동은 일종의 ‘대중문화 혹은 대중예술의 국정화’라고 해도 과하지 않다.
그렇다면 19금 성인남성 잡지 맥심의 2015년 9월 표지에 대한 비난은 마찬가지로 일종의 ‘국정화 코드’로 간주될 수 있는가? 내 대답은 ‘그렇다’이다. 성상품화와 포르노적인 것이 대중문화 및 예술에 있어 표현의 기본기로 작동하는 작금의 세태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과 납치에 성적 터치를 가한 일개 성인잡지 표지에 그런 난리법석이라니. 여성에 대한 폭력과 납치, 성폭력은 범죄이지만(저급이든 고급이든), 특정한 예술표현에 동원된다면 하등 문제될 게 없지 않을까. 여성에 대한 성폭력과 납치를 미화해서 사회적으로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논리는 탈레반국가에 가서나 할 법한 소리다. 조폭영화, 도박영화 등은 더 이상 제작되지 말아야 할까? 표현을 엄격하게 특정한 목적에 복무시키는 탈레반들이 여성에 대해 훨씬 더 폭력적이고 억압적이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다.
폭력과 권력에 기반한 억압적이고 비대칭적인 남녀관계의 타파는 희망스러운 과업이며, 그러한 관계의 표현은, 때로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플러스 혹은 마이너스의 양태로 리얼리즘을 구현한다. 문제는 표현이 아니라 현실이며, 가능하다면 표현에는 자유가 현실에는 혁명이 관철돼야 한다.
그렇다면, 2004년을 떠들썩하게 만든 탤런트 이승연의 일본군 위안부 누드집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응 또한 과도한 것일까? 노골적인 성애를 바탕에 깔고 그 위에 권력과 폭력을 담지한 남자, 복종과 피학을 체화한 여자라는 남녀관계를 구축한 유사 포르노물에 일본군 위안부는 분명 적합한 소재일 수 있다. ‘원론적으로’ 표현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의 한계는 도덕적이고 공동체적인 가치 외에도 다양한 것들에 의해 설정될 수 있다. 그중 하나가 위안부 문제처럼, 당대 현실을 공유하는 사람들 간에 존재하는 ‘고통’의 사회적 맥락이다. 타인의 고통을 조롱하는 표현의 자유란 없다. 주목의 욕망에 분별을 잃어버린, 한때 잘 나갔던 탤런트의 일탈은 표현의 자유라는 말로 면죄부를 얻을 수 없다.
아이유의 ‘제제’에 대해 동녘은 “표현의 자유는 대중의 공감 하에 이뤄지는 것”이라고, 어느 신문에서 인용한 한 사회학과 교수는 “상상력이나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제제’는 사회가 용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일견 타당한 얘기처럼 들리지만, 난점은 대중의 공감이나 사회의 용인범위가 자의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의 공감역과 사회의 용인범위를 대변하고 설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사실상 권력의 문제다. 다양한 토론의 장과 다원주의적 의사결정 구조가 전제돼야 한다. 대중과 사회의 공감과 용인이란 말은 공허하며, 이러한 전제 없이는 현실적으로 표현의 자유의 범위를 설정할 수 없으며, 그래도 설정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국정화의 위험을 드러낼 수 있다. 표현의 자유는 사회적 비용을 치르더라도 가능한 폭넓게 두어야 하며, 그 제한은 극도로 엄격해야 한다. 적어도 그 사회가 인간이 존중되는 의미 있는 미래를 일궈가려면 말이다.

음란한 상업화? 상업화한 음란성?

출판시장의 어려움을 감안할 때, 동녘의 이번 행동은 이해할 수 있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가 다시 잘 팔리고 있다니 다행스럽다. 동녘이 “아이유님,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라고 할 때까지는 ‘책 좀 팔려나 보다’는 생각에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 입장을 번복하고 사과하는 지경에 이르자 사태는 단순히 노이즈마케팅으로 끝나지 않고 지극히 ‘소아성애적’으로 바뀌고 말았다. 결국 동녘이 “아이유님, 제제는 그런 아이가 아니다”란 말은 “아이유님, 당신은 그런 아이가 아니냐?”로 전환된다. 당대 대표적으로 성상품화한 어린 여가수의 롤리타적 코드를 사회적으로 끄집어낸 셈이다. (사과를 통해) 표현의 자유라는 고담준론을 버리는 순간, 제제를 이용해 아이유 자체의 상업화한 음란성을 사회적으로 다시 까발리게 되고 스스로 음란한 장사치로 전락하게 된다. 동녘이 펼쳐놓은 장에서 사회 각계가 참여하는 ‘음란한 상업화’와 공개적 관음증이 성황을 이룬 건 우리 모두가 목격한 바다. 짐작했다시피, 애초에 진짜 관심사는 표현의 자유가 아니었다.

글·안치용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관심이 많다. 토마토CSR리서치센터장과 지속가능청년협동조합 바람 이사장을 겸직하고 있으며, 청소년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news)의 멘토링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