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디부아르 학생단체들의 광기

‘무늬만 학생들’ 무차별 폭력에 대선 실시 불투명
정치권과 결탁한 생계·권력투쟁 탈법으로 얼룩

2009-11-05     블라디미르 카뇰라리 | 언론인

2005년 이후 수차례 연기됐던 코트디부아르 대선일이 2009년 11월 29일로 확정됐다. 하지만 유권자 신원 확인 작업 지체로 또다시 선거일이 연기될 소지가 있다. 무력 충돌과 폭력으로 얼룩진 5년을 보낸 뒤 2007년 코트디부아르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오긴 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여전히 격렬한 사회 갈등이 벌어지고 있다. 취약계층에 속해 있으면서 거리낄 것 하나 없는 청년 세력은 생계 투쟁과 권력 추구 사이에서 흔들리며 코트디부아르 위기 사태의 쟁점이자 해결의 열쇠로 떠오르고 있다.


코트디부아르인권연맹 대표 파트릭 구안은 “코트디부아르 학생 및 학교 연합이 선거 과정을 마비시킬 수 있다. 지금 민병대 해체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데 먼저 해체해야 할 건 이 학생단체”라고 주장한다.(1) 11월 29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가 무사히 치러지더라도,(2) 코트디부아르 학생연합이 연루된 새로운 폭력사태로 번질 가능성이 있다.

20년 가까이 이 단체는 코트디부아르의 정치 및 사회 무대에서 주요 역할을 수행해왔다. 로랑 그바그보 현 대통령을 지지하는 ‘애국 청년’들의 지도자 샤를 블레 구데는 1998∼2000년에 이 조직의 사무총장직을 맡았으며, 현 위기가 시작된 2002년 9월 이후부터는 거리 민병대가 저지른 폭력행위를 주도해왔다는 혐의로 유엔의 비난을 받고 있다.(3) 그에 앞서 1995∼98년에 이 조직을 이끌었던 기욤 소로는 무장반군의 수장으로, 2007년 와가두구 평화협정에 따라 총리가 되었다. 이 조직 출신의 또 다른 인물로는 나비게 코나테와 야요로 카라모코가 있다. 코나테는 대통령 소속 정당인 코트디부아르 인민전선(FPI)의 청년들을 지도하는 반면, 카라모코는 코트디부아르 국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2000년 대선에서 후보 자격을 박탈당한 야당 인사 알라산 드라만 와타라가 주도하는 공화주의자연합(RDR) 청년들을 이끌고 있다.(4)

코트디부아르 학생연합은 1990년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이 결정한 민주화 정책 시행 시기에 만들어진 조직체로, 여당인 코트디부아르민주당(PDCI) 계열 코트디부아르전체학생운동 조직에 맞서기 위해 창설됐다. 코코아의 시세 폭락으로 세계 최대 코코아 생산국인 코트디부아르가 극심한 타격을 입자 우려와 불안에 시달리던 청년들은 신생 야당의 첨병으로 나선다. 이를 깨달은 부아니 대통령은 ‘루바르’라고 불리던 변두리 불량배들의 지원을 받는다. 학교를 이탈한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루바르는 1980년대부터 나타났고, 코트디부아르 내에서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이들의 명성이 높아져갔다. 이들은 칼을 휘두르며 구역을 장악해갔고, 부아니 대통령은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존 포로로’ 조직에 손을 내밀었다. 주요 인물들이 속칭 ‘돈 받고 일하는 떠돌이’라고도 부르던 ‘치안봉사단’(VS)은 유례없는 질서 유지 업무를 담당하며, 민주당의 지원 행보에는 안전을 보장하고 야당에 대해서는 불화의 씨를 뿌렸다. 중앙 권력과 거리 세력 사이의 동맹에는 ‘아름다운’ 미래가 보장됐다.

‘불량’ 학생들의 정치권 개입

루바르들은 ‘누이시’라고 하는 고유의 언어체계를 갖고 있다. 통속적으로 사용되는 프랑스어를 기반으로 하는 누이시 언어는 지역 방언이나 영어를 차용하고,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단어들을 왜곡해서 표현하며, 고유명사를 동사로, 동사를 보통명사로 만들어버린다. 학생들은 ‘주글루’라는 음악을 즐기는데, 주글루는 사회적으로 추락한 자신들의 신세 한탄과 비참한 일상을 이야기하기 위해 만들진 음악이다.(5) 사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 입학 자격을 취득한 학생들은 자동으로 장학금을 받고 (대개는 프랑스에서) 학업을 연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 코코아 시세가 폭락하고 구조조정이 실시됨에 따라 장학금은 산발적으로 지급됐다. 대학 기숙사에서는 2인용 방에 8명이 자는 경우도 생겼다. 이들은 스스로를 ‘캄보디아 난민’이라 칭했다. 1980∼2009년의 빈곤율은 17%에서 50%로 증가했다.

이런 처지의 ‘캄보디아 난민’들을 옹호·지지하는 코트디부아르 학생연합은 대학교수들이 창당한 일선 야당 세력과 연대했고, 이들 교수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이 코트디부아르 인민전선을 세운 로랑 그바그보 현 대통령이다.(6) 이들은 생활환경 개선과 민주주의 쟁취를 위한 ‘투쟁의 희망’을 공유하고, 부아니 정부에 맞서 다 함께 싸워가며, 정부의 보복 위험에는 다 함께 노출되었다. 대학가는 폭력으로 얼룩지고, 원래는 자신들의 적이던 루바르들의 폭력을 그대로 답습한 학생연합 학생들은 점차 ‘루바르화’돼간다. 메르모즈대 기숙사에 공포를 조장했던 루바르 출신 대학생 티에리 제비에는 1991년 6월 13일, 민주당의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로 학생연합 소속 학생들이 던진 돌에 맞아 사망했다.

이로써 코트디부아르 학생연합 조직은 해체된다. 그 뒤 1997년 다시 합법화된 이 조직은 북부 출신의 기욤 소로를 사무총장으로 세운다. 경찰의 수배를 받던 기욤 소로는 회의를 주재한 뒤 모습을 감추었고, 조직은 지하에서 활동하며 강성해졌다. 그의 대표적인 보좌진 가운데 하나였던 블레 구데는 끊임없이 전국을 누비며 조직 내 등급을 높여갔다. 대학 기숙사 통제권을 장악한 학생연합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수천 명의 학생을 동원해, 공화국전선의 시위대 수를 늘려줄 수 있었다. 공화국전선은 그바그보의 인민전선과 와타라의 공화주의자연합이 손을 잡은 동맹이었다. 부아니 대통령의 뒤를 이은 앙리 코낭 베디에 정권(1995~99)은 이들의 집요한 공격에 모든 대학들을 봉쇄한다.

1998년 그바그보 대통령이 참여했던 코트디부아르 학생연합 총회에서는 분열 양상이 벌어지면서 과도기 민주주의의 실패를 예고한다. 모임은 2000년 10월 각기 대선을 준비하는 그바그보 편과 와타라 편으로 나뉘면서 폭력이 난무하는 싸움판으로 변질된다. 이날 총회에서는 결국 샤를 블레 구데가 사무총장으로 선출됐으나, 폭력은 일상적인 정치 수단이 된다. 코트디부아르 학생연합은 조직의 마음에 든 후보가 최대 이익을 누릴 수 있도록 끊임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정파에 따른 대학가의 분열 심화

1999년 12월 24일 쿠데타가 일어난 뒤, 로베르 구에이 장군은 와타라와 그바그보가 참여하는 연합 정부를 구성한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는 분열이 계속된다. 그바그보가 코트디부아르 국적 소유 문제를 거론하며 코트디부아르 국적이 없는 와타라를 공격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대학가에서도 분열 양상이 심화된다. 블레 구데는 학생들의 방 배분 운영권을 거머쥐는데, 이는 학생연합의 주된 소득원이다. 그 밖에도 학생연합은 장학금의 1%를 가져감으로써 재정을 불리거나, 대학 거주 지구 부근에서 일하는 소규모 상인들을 갈취해서 소득을 늘려간다. 전시 중인 라이베리아로부터 총기를 반입하면서 갈등은 더욱 악화된다. 무장습격이 빗발치면서 총기보다는 맨손 싸움이 주특기였던 정통 루바르들은 추방된다. 존 포로로 소속원들은 백주 거리에서도 처형을 당했다.

2000년 대선에서 선거법상 성년 나이가 18살로 정해짐에 따라 40만 청년학생들이 유권자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7) 패배 기색이 역력해지자 구에이 장군은 서둘러 TV에 나와 승리자를 자처했다. 오랫동안 자신들의 후원자인 그바그보 후보를 지지하던 학생연합은 거리시위에 나섰고, 국적 무소유자로 판명돼 대선 레이스에서 탈락한 와타라의 공화주의자연합 세력도 그에 못지않은 시위를 벌였다. 거리에서 권력을 쥐는 자가 승리자였다. 그바그보의 지지 세력들은 헌병대와 ‘사이가 좋았고’ 헌병대는 공화주의자연합 소속원 수십 명을 처형했다. 2000년 10월 27일, 아비장 북서부 요푸공 빈터에서는 57구의 주검이 발견됐다.

그바그보가 대통령이 됐어도 폭력은 오래도록 지속됐다. 거리에서 경찰과 헌병까지 나서 북부 주민들이나 외국인들을 갈취했다. 2001년 7월 요푸공 사태와 관련한 재판에서 내려진 면소 판결은 코트디부아르의 신흥 루바르, 즉 학생연합 소속 학생들의 비처벌 특권을 확인해주었다. 연말에 개최된 화해포럼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로 인해 생겨난 불만은 2002년 9월 무장반군의 형태로 폭발한다. 북부에서 기욤 소로를 수장으로 내세운 코트디부아르 신체제가 들어선 것이다. 남부에서 정부군은 그바그보 대통령의 강력한 후원 세력 ‘국가 부흥을 위한 애국청년 동맹’의 지원을 받는다. 동맹 지도자의 이름은 샤를 블레 구데였다. 코트디부아르판 ‘서부 활극’에서 일선 청년들의 조연 역할은 스타급 인기를 구가했다. 대학가의 ‘칼부림’은 국가적 사안이 됐다.

배타적 민족주의의 위험성

2003년 1월 (파리 근교) 마르쿠시스에서 체결된 협정에 따라 그바그보 대통령은 신체제와 권력을 나눠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서명한 그바그보 대통령은 2주 후 자국에 이를 공표하며 자신의 지지 세력에게 열쇠를 넘겼다. 애국청년들은 프랑스 문화원과 학교를 약탈하고, 이런 후원 덕에 대통령은 합의안의 가치를 폄훼하고 차츰 내용을 빼버릴 수 있었다. 그바그보 대통령은 “내가 만일 이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여러분과 함께 거리에 있었을 것”이라고 선포했다.(8) 애국청년들을 부추기는 기색이 역력한 말이었다. ‘청년들의 수장’ 블레 구데는 유엔 결의안을 무시하고 평화 추진 절차를 저지하는 운동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인권감시기구의 한 보고서는 코트디부아르 학생연합의 과도한 폭력으로 인한 폐단을 규탄하고, 그바그보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 이 단체가 누려온 무죄판결 특권을 비난했다.(9) 그들의 ‘조직’은 코트디부아르 내부에 일종의 ‘루바르’ 국가를 만들어놓고 있다. 게다가 경찰이 캠퍼스 내부에 진입하는 경우는 드물고 학교 밖이라고 해도 경찰은 개입하지 않아, 시민은 불평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학생연합 조직을 이끄는 블레 구데의 애국청년들은 대통령이 대준 자금으로 무장을 하고, 옷을 입고, 교육을 받는다. 이들은 스스로 ‘평화를 위한 애국청년단’이라 부르는 민병대를 구성한다. 이 단체 또한 갈취를 일삼는다. 불과 몇 년 사이에 폭력의 문화는 나라 안에 폭력의 역모델을 확산시켰으며, 빈곤은 갈수록 더해갔다.

거리 세력의 지원에 힘입은 그바그보 정권이 마르쿠시스 협정을 무력화하자, 와가두구에서는 블레즈 콩파오레 부르키나파소 대통령의 주선으로 새로운 협상이 재개된다(그바그보 대통령의 반대로 이번에는 프랑스의 참여 없이 협상이 진행됐다). 2003년 3월 각 정당은 반군 및 민병대의 무장해제 일정에 동의하고, 대선 절차 재개에도 합의한다. 이에 따라 기욤 소로는 총리가 되었고, 샤를 블레 구데 또한 보란 듯이 모습을 드러내며 청년들의 ‘수장’이라는 별칭을 평화를 위한 애국청년의회 ‘의장’으로 갈아치운다.

두 사람 모두 권력과 돈을 손에 쥐었고, 4륜구동 차량을 굴린다. 한마디로 성공한 인생이라는 뜻이다. 이들의 투쟁 동지들 또한 살길을 마련한 경우가 많다. 학생연합의 막후 세력으로 종종 ‘군사책’으로도 불리며 (입학에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코트디부아르 국립행정학교를 졸업한 카쿠 브루, 일명 KB 사령관 또한 소령 계급으로 해양 및 항구과에 배속됐다.

기욤 소로와 샤를 블레 구데를 위시한 코트디부아르 학생연합 세대, 도덕도 법도 모르는 이 세대는 스스로가 추구하던 자리를 찾았다.(10) 이들은 스스로 거처를 마련해 생계를 꾸려나간다. 현 상태를 지속시키고, 당초 2005년 예정이던 선거를 지연시켜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트디부아르의 ‘소르본’이라 불리던 아비장대학은 역설적이게도 프랑스를 비난하는 초강력 민족주의자들의 발언대가 되었다. 코트디부아르의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의 꿈이던 상징들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듯하다. 아울러 그들은 부아니 전 대통령이 프랑스의 충실한 동맹으로서 코트디부아르를 번영시켰던 모든 것들을 짓밟아버리고 싶어하는 것 같다. 마치 자신들은 그 번영에 접근한 적이 없다는 듯이….

글·블라디미르 카뇰라리 Vladimir Cagnolari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미래를 심는 사람> 등이 있다. 


<각주>  

(1) <Jeune Afrique>, Paris, 2009년 2월 2일자.

(2) 유권자 확인 작업(신분증 배부) 및 선거인명부 작성이 지연됨.

(3) 2007년 2월 이후, 샤를 블레 구데는 이동 금지 처분을 받았고, 재산은 동결됐다.

(4) 대선 출마를 희망하는 후보자들 혹은 투표를 원하는 일반 시민들에게 코트디부아르 출신임을 증명하도록 하는 엄격한 국적 규정.

(5) ‘주글루’는 쓰레기, 찌꺼기, 폐물(廢物) 등을 의미한다. <Cahier d’études africaines> 42호 p.772~796-Génération zouglou, 파리, 2002 참조.

(6) 사학과 교수였던 그는 당시 대학교수와 학자들의 주요 노조인 ‘시나레스’(Synares, 전국 고등교육 및 연구노조)의 조합원이었다.

(7) Christian Bouquet, <Géopolitique de la Céte d’Ivoire>, Armand Colin, 파리, 2006.

(8) RTI(Radio Télévision ivoirienne), 2003년 2월 7일.

(9) Human Rights Watch, <La meilleure école>, 뉴욕, 2008년 5월.

(10) Richard Banégas, <Les jeunes se lèvent en hommes. Anticolonialisme et ultranationalisme chez les jeunes patriotes d’Abidjan>, 국제학연구소(CERI·Centre d’études et de recherches internationales) 연구 보고서, Paris, 제137호, 2007년 7월.

연표: 위기의 7년

- 2002년 9월 19일: 쿠데타 기도. 부르키나파소로 근거지를 옮겨온 코트디부아르군이 북부의 부아케와 코르호고 지역을 점령. 하지만 수도인 아비장을 탈환하지는 못함. 코트디부아르가 정부군 영역과 반란군 영역으로 나뉨.

- 2002년 9월 22일: 프랑스, ‘리코른’ 작전을 펼쳐 재외국민을 피신시킴. 교전 상대 사이에 개입하기도 함.

- 2002년 9월 23일: 서아프리카공동체, 평화군 파병.

- 2003년 1월 26일: 마르쿠시스 협정에 따라 권력 분할 결정.

- 2004년 2월 27일: 유엔 코트디부아르 평화유지군, 평화유지 업무 담당.

- 2004년 10월 11일: 유엔 코트디부아르 평화유지군, 시위대의 공격으로 부상자 다수 발생.

- 2004년 11월 6일: 코트디부아르 정부군, 부아케에 주둔해 있던 프랑스 기지 폭격. 이로 인해 9명의 사망자와 37명의 부상자 발생. 이에 대한 반격으로 프랑스가 코트디부아르 항공대 파괴.

- 2004년 11월 7일: 아비장 이부아르 호텔 앞에서 프랑스군이 시위대에게 총격, 수십 명 사망.

- 2007년 3월 4일: 부르키나파소 수도 와가두구에서 평화협정 체결. 반군 지도자 기욤 소로가 과도정부 총리로 임명됨.

- 2009년 11월 29일: 대선(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