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니 젊은 쿠데타 장교, 달변-학살의 두 얼굴

전임 독재자의 잔재 일소한다며 제 배 채우기 ;“대통령 선거 불출마” 약속도 파기 가능성 높아

2009-11-05     질 니베 | 언론인

유엔의 요청에 따라 지난 2009년 9월 28일 코나크리에서 자행된 대량학살을 조사하기 위한 국제위원회가 구성될 예정이다. 시위에 참가한 200명 이상의 사람들이 군인의 손에 죽었다. 50년 동안 두 명의 대통령이 통치했던 기니는 두 달 전부터 2009년 말까지 자유선거를 통해 민간에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한 군사정권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러나 군사정권 지도자인 무사 다디스 카마라의 야망이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영원히 권력에 머무를 생각이 없다. 우리는 기니와 기니 군대의 영예를 드높일 자유롭고도 투명한 선거를 할 것이다.”

2008년 12월 23일 쿠데타로 권좌에 오른 무사 다디스 카마라 대위는 이틀 뒤 이런 입장을 밝히며 국민과 국제사회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러나 열 달이 지난 후, 그는 가면을 벗어던졌다. 2009년 9월 28일 코나크리 경기장에서 평화적 시위를 벌이던 200명 이상의 시민이 군인에게 학살당한 것이다. 그 다음날, 카마라 대위는 경적을 울리며 흥분한 서포터들 사이로 길을 트면서 <TF1> 카메라 앞에서 다음과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하면서 말이다. “대단한 애국자 다디스! 그는 신화적 인물이자 인민의 권력이다. 그런데 다디스 대위조차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신성함을 타고나다니!”

군사정권 지도자인 그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유는 전임자였던 란사나 콩테 장군 겸 대통령이 2008년 12월 22일 사망하기 훨씬 전부터 자신이 치밀하게 준비한 계획이 착착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콩테는 독재자였던 세쿠 투레가 1984년 숨을 거두자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차지한 인물이다. 프랑스·미국과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피 묻은 손으로 기니를 건국했던 독재자의 사망을 기쁘게 받아들였다.(1) 사실 콩테 장군은 이들 국가의 호의에 힘입은데다, 또 인권에 대한 개인적 불신에도 이들로부터 일찍이 용서를 받은 덕분에 4반세기 만에 ‘아프리카의 진주’를 다국적기업을 위한 사창가로 탈바꿈시켰다.(2)

광물들, 특히 보크사이트·금·다이아몬드·철 등 막대한 천연자원을 수출하면서도 기니는 최빈국 중 하나다. 유엔개발계획(UNDP) 인력개발 순위에 따르면 기니는 182개국 중 170위에 불과하다. 독재자 세쿠 투레가 숨지자 새로운 희망이 일었지만, 경제 발전은 광산 분야를 위시한 아주 국지적인 영역에서만 이루어졌을 뿐이다. 또 권력 주위를 맴도는 극소수 사람들은 국가의 금고를 털며 부를 누리고 있다.

2008년 카마라 대위는 정부를 장악하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준비했다. 그는 매스미디어가 묘사하는 것처럼 결코 겸손한 인물이 아니다. 그는 단시간에 지방 관청, 중앙행정처, 국제기구 전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콩테 대통령이 숨을 거두기 몇 달 전부터 수입이 짭짤한 군대 내 탄화수소 담당관 직책을 맡고 있던 카마라라는 이름이 이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마침내 2008년 12월 23일 쿠데타를 일으킨 카마라 대위는 국기로 몸을 감싸고 군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자신이 이끄는 군대 맨 앞에 서서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는 로마 황제처럼 코나크리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국민의 환호? 잠깐의 안도!

국민의 환호라니? 2007년 권력 남용을 자행한 군대가 용서받은 것일까? 도시 곳곳에서 중화기를 앞세워 살인적인 격돌을 벌였던 1996년 2월의 반란은 잊혀져버린 것일까? 그건 절대 아니다.

 

국민은 단지 안도감을 느꼈을 따름이다. 체제의 변화가 피를 흘리지 않고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고통을 겪어온 국민은 콩테 대통령이 사망할 것이라는 소문을 접하면서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한 사모리 투레와 알파 야야 디알로라는 두 개 병영이 충돌할까 두려워했다. 또한 국민은 전통적 헌정 질서를 이어받으며 수십 년 전부터 권력을 쥐고 직무를 유기하던 기존 지배계급이 체제를 유지하는 데 성공할까 걱정이 많았다.

44세에 불과한 군사정권 지도자의 젊은 나이, 팝스타의 태도와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젊은 대위의 모습이 국민을 열광시켰다. 새로운 강자 카마라는 기존 체제의 유력 인사들을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언론에 집중적으로 보도된 그의 선동적인 연설은 부정을 종식시키고, 부패와 마약 밀매를 통해 국부를 갉아먹는 부자들과 맞서 싸우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처럼 비쳤다. 새로운 제리 롤링스(3)가 탄생한 것일까? 일부 사람들은 그에게서 토마스 상카라(4)가 다시 육화한 느낌을 받았다고까지 말했다. 카마라의 입지 다지기는 신속한 만큼이나 거칠게 이루어졌다.

군사정권이 벌인 첫 번째 조처는 헌정 질서와 공화국 제도를 유보하는 것이었다. 아부바카르 솜파레 국회의장은 헌법이 규정한 대로 사망한 국가지도자를 대행해달라고 사람들이 부탁해줄 것을 2008년 12월 24일 하루 내내 고대했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 ‘새 민주주의의 힘’ 정당을 창설했고, 야당 지도자 중 가장 젊고 가장 과격한 인물인 묵타르 디알로는 “힘으로 권력에 오르는 것보다는 미약한 체제가 더 낫다”고 주장하면서 법이 무시당한 상황을 홀로 비판했다.

이러한 예외적 상황은 앞서 2007년부터 준비된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중지시켰다. 유럽연합(EU)이 800만 유로를 재정 지원한 국회의원 선거는 세 번이나 연기됐다. 새로 구성된 의회가 단말마의 고통에 시달리는 콩테 대통령에 대해 의학적으로 통치 불능 상태를 선언함으로써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된 선거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불화 때문에 세력이 약화된 야당과 시민사회는 태업 의심을 받던 행정부가 선거를 예정대로 준비하도록 압력을 넣지 못했다.

당시 정부는 일어날지도 모를 군사 쿠데타의 불법성을 공격한 후 ‘대통령 각하’가 ‘온전히 운신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기 시작했다. ‘그의 지혜’에 감사를 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콩테 사후에 더욱 놀라운 사실은 2007년 초 콩테 체제를 뒤흔들기도 한 반항의 역사적 주체들이 기니 군대의 권력 남용에 집단적 건망증 증세를 보여주고, 카마라 대위에 대해 “성실함과 단호함에 대한 신뢰”(5)을 내세우며 그가 이끄는 국립민주발전위원회(CNDD)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새 지도자가 표명한 ‘국가를 청소하겠다’는 의지에 이끌린 듯, 노조들은 쿠데타가 발생한 지 이틀 만에 선언문을 발표해 “기니 군대가 변화의 이행 과정에 합류한 사실을 기뻐하고 축하했다”.(6)

반면 야당은 군사정권 지도자가 “당신들을 위해 내 베레모를 벗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 또 새 정부에 야당 사람들을 입각시키겠다고 약속한 사실에 만족을 표시했다.

 

쿠데타에 팔짱 낀 미국과 유럽

만약 미국이 쿠데타를 단죄했더라면 유럽연합과 프랑스가 군사정권을 거의 만장일치로 받아들이는 국민적 합의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와 유럽연합은 가능한 한 빨리 헌정 질서를 회복하라는 단 하나의 요구사항만을 내세웠다. 프랑스 협력담당 국무장관인 알랭 주아양데는 2009년 1월 4일 이후 코나크리를 방문한 최초의 서방 외교관이다.(7)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이름으로, 그는 기니 상황이 염려스럽다고 강하게 발언했다. 이어 기니에 많은 투자를 해온 프랑스의 억만장자인 뱅상 볼로레는 코나크리 자치항에 대한 현대화 공사의 지속성을 요구했다. 그 즉시 CNDD 지도자는 그의 우선권을 인정했다.

군사정권과 정당, 노조, 시민단체 등은 권력 이양에 신속히 합의했다. 이에 따르면 2009년 말로 예정된 권력 이양에는 “자유롭고도, 신뢰할 만하며, 투명한”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포함된다. CNDD는 입후보자를 내지 말아야 한다. 주간지 <청년 아프리카>는 “쿠데타 주동자들의 기회는 그들 쿠데타가 예측 가능하다는 사실에 있다. 2003년부터 서아프리카 주재 유엔 특별대표직을 맡고 있는 아흐메두 울드 압둘라는 군사 쿠데타와 그에 뒤이어 자유선거로 연결되는 민간으로의 권력 이양을 기니에 권고했다. 유엔 외교관들 사이에서는 그런 방식을 ‘제로에서 다시 출발하기 위한 파탄 시나리오’라 부른다”(8)고 상기시키고 있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은 지속되지 않는다. 거의 매일 저녁 국영 TV를 통해 중계되는 카마라 대위의 쇼는 일시적으로 시청자를 만족시켜주지만, 그와 동시에 국민으로 하여금 충동적이고 화를 잘 내며 폭력적인 그의 기질을 발견하게 해주고 있다. 카마라가 일삼는 거짓말들도 예외가 아니다. 새로운 강자 카마라는 민족중심주의와 맞서 싸우기를 원한다고 말했으나, 자신이 속한 종족 출신의 고위 공직자를 정부부처, 민간사회, 군대의 수장 자리에 지속적으로 임명하고 있다. 군인은 총독·도지사와 관련된 모든 직책을 독점하고 있다. 심지어 그들은 금 채취 회사들의 수장 자리에 무더기로 임명됐다.

카마라는 치안을 약속했다. 하지만 종종 군복을 입은 군인들 무리가 밤낮 가릴 것 없이 그 누구의 제재도 받지 않으며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공격하는 중이다. 뇌물 공여자와 부패한 공무원들을 가려낼 책임을 맡은 그들이 도리어 강탈과 정치적 보복을 일삼고 있다. 회수한 돈은 CNDD 금고, 알파 야야 군사 캠프로 바로 들어간다. 광물국·세관·국세청·자치항·사회보장금고 등 돈벌이가 가장 잘되는 분야는 대통령에 직접 배속된다. 투명해야 할 시장은 협상에 따라 조직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불투명하게 운영된다. 콩테 치하에서 시작된 계약은 뇌물을 전제로 체결되며, 예전에 이미 체결된 협상들은 재협상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공격의 대상이 된다. 막대한 뇌물이 필요함은 당연지사다.

 

본색 드러낸 쿠데타 세력들

심지어 마약 밀수꾼들에게 선포한 전쟁도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한 홍보 수단으로 변질됐다. 600명으로 ‘특별히 구성한’ 경찰대 수장을 맡고 있는 무사 티에그보로 지휘관은 9개월 동안 다른 액체를 섞은 코카인 22kg과 인도 대마 1500kg을 압수했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그러나 기니는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마약 요충지로 간주된다. 코카인이 수t씩 그곳을 통과하는 것이다. ‘마약 밀수꾼’들에 대한 사냥은 카마라 눈에 성가신 수십 명의 군대와 경찰 간부들을 숙청하는 데 특별히 이용됐다. 그들은 투옥된 후 고문을 당하고 비인간적인 억류 조건을 감내해야 했다.

CNDD가 기니를 이끈 10개월 동안, 국가의 새 주인들은 권력을 정착시키고 공고히 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콩테 체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이에 젊은 권력 주체들은 9월 28일 대량학살을 자행하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더 분명하게 한 것이다. 민주화의 이행 과정은 그런 식으로 퇴보하고 있다. CNDD와 ‘활력 있는 집단’들을 연계한 국립민주화이행위원회가 2009년 1월에 빛을 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7월 말에 대통령 법령을 통해 창설된 이 기구는 여전히 작동하지 않고 있다. 선거조직에 필요한 자금이 8월 말에 풀리기는 했지만, 올해 말로 예정된 선거를 준비하기에는 너무 늦은 감이 든다. 선거는 아마 2010년 1월 말에 실시될 것이다. 군사정권 지도자는 조커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는 ‘성경과 코란’에 손을 얹고 자신이 2009년 말 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이라 전세계 사람들에게 약속했다.

하지만 군대와 국가의 다양한 수단들에 힘입어 2010년 선거에 그가 출마하는 것을 저지할 방법은 전혀 없다. “국민이 원하기만 한다면!”이라 주장하면서 말이다.

 

글·질 니베 Gilles Nivet
<코나크리, 고아 혁명>(Cona‘cris, la révolution orpheline·2008)이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만든 작가다. www.10francs.fr

번역·이상빈 malraux21@ilemonde.com
파리8대학 불문학 박사. 역·저서로 <현대 프랑스 문화사전>과 <나폴레옹의 학자들> 등이 있다. 


<각주>  

(1) 독립 당시 세쿠 투레가 불러일으킨 희망들을 독재기구가 모두 날려버렸다. 독재기구들은 수천 명에 달하는 기니 사람들 목숨을 앗아간 부아로 수용소로 대표된다.

(2) 쥘리앙 브리고, ‘러시아인들과 기니의 작은 보석>(Les Russes et le petit bijou de la Guiné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한국판 ‘러시아와 기니, 불편한 동거), 2009년 10월호 참조.

(3) 1981년 쿠데타를 일으킨 장본인인 제리 롤링스는 가나에서 복수정당주의를 구축하게 된다.

(4)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부르키나파소 대통령이던 토마스 상카라는 대중적인 범아프리카주의자였다. 그는 현재 대통령인 블레즈 콩파오레가 쿠데타를 일으킨 1987년 10월 15일에 암살당했다.

(5) www.africaguinee.com, 2009년 1월 6일자.

(6) www.infosud.org, 2009년 1월 13일자.

(7) 토마 델통브, ‘뱅상 볼로레의 아프리카 전쟁들’(Les guerres africaines de Vincent Bolloré),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09년 4월호 참조.

(8) <청년 아프리카>(Jeune Afrique), 프랑스 파리, 2009년 1월 1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