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행은 지났어도 사파티스타의 가치는 건재
‘밑바닥 좌파’의 현장실천 작은 성취, 아직 먼 성공
정치무대선 고립상태… 인디언운동엔 희망의 등불
지난 8월 13일 멕시코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통해 1997년 12월 치아파스주 악테알 마을에서 초칠족 원주민 45명을 살해한 민병대원 20명을 석방했다. 사파티스트들은 ‘자치’를 실시하며 ‘밑바닥 좌파’로 현장에서 저항을 이어가지만 멕시코 정치무대에서는 다소 고립된 상태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탄압은 더 음험한 형태로 계속되고 있다.
“이곳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구역이다. 여기서는 민중이 명령하고 정부는 복종한다.” 세월의 때가 묻고 곳곳이 녹슨 거대한 철제 안내판이 변함없이 눈에 띄는 모습으로 봉기 지역 통과를 알려준다. 멕시코 치아파스주 오벤틱 마을에서는 약 15년 전부터 ‘사실상의 자치’가 이뤄지고 있으며, 그 자치는 최근 들어 한층 더 견고해졌다. 2001년 실시된 멕시코 행군의 참담한 성과로 쓴맛을 본 후 전략을 지역 중심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한 결과다. 당시 사파티스타 반군은 1996년 2월 16일 정부와 체결한 산 안드레스 협약에 약속된 개헌을 요구하기 위해 도심에 운집한 100만 명이 넘는 지지자들의 성원 속에 수도로 행진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1)
그러고는 활동이 소강기에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멕시코, 미대륙, 유럽의 사파티스타 동조자들이 이러한 현상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이후에는 이를 두고 사파티스타 반군이 변화를 전격 포기하고 제도권 정치의 길을 밟기로 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차별 및 주변화로 내몰린 수많은 농민들이 1994년 1월 1일 무장봉기를 일으킨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또 다른 세상’을 건설하려는 시도는 규범을 벗어난 이들 반군의 현실을 오늘날에도 사실상 구성하는 핵심이다.
소강 상태의 사파티스타 운동
2003년 40여 개 사파티스타 마을이 오벤틱·모렐리아·라게루차·로베르토바리오스·라레알리다드 등 5곳의 자치지구, 일명 ‘카라콜’(caracole)로 나뉘었다. 각 카라콜에는 통치위원회가 설치돼 행정을 담당했다. 남녀를 아우른 마을 대표 위원들이 집단형·수평형·순환형 등 다양한 운영 방식에 따라 차례로 1~2주씩 직책을 맡는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의 대변인이자 수장인 마르코스 부사령관에 따르면 부패나 민생고 경시 등 권력의 함정을 피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통치 방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방법이 과연 성공을 거두긴 했을까?
이들 자치마을이 비록 지상낙원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1994년 이전 멕시코 최고에 달했던 학교결석률, 영양실조, 영아사망률 지수는 낮아지고 있다. 또한 1993년부터 여성운동가들의 주장에 따라 마련된 알코올 금지법을 엄격히 집행한 결과, 당시 고질적 현상이던 알코올중독을 비롯해 이에 수반되던 부부폭력과 여성학대가 줄어들었다.
사법 분야를 살펴보면, 전통적인 추장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마을 관례에 의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다만 여기에는 위험이 따르기도 하며 ‘사법적 다원주의’의 복잡한 상황이 유발되기도 한다. 한 예로 인류학자 마리아나 모라의 설명에 따르면 비사파티스트들과 사파티스트 혼혈인, 원주민이 비슷한 비율로 모여사는 모렐리아 카라콜의 경우 이제는 토지·절도·이혼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공식 제도보다 자치기관을 통하는 편’을 선호한다고 한다. 자치기관이 더 ‘공정’하고 ‘효율적’일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라고 한다.
경제 분야는 아무래도 문제가 더 많다. 자치마을에서는 2003년 이래 지자체의 인기 영합적 재정 지원과 국가 지원에 의존하던 태도가 사라졌지만, 그 대신 국내외 비정부적 연대주의에 기댄 다른 유형의 재정 지원이 자리잡았다. 물론 이러한 연대주의가 사파티스트의 역동성과 우선과제를 더욱 존중해주기는 하지만, 마구잡이식 지원으로 변질될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아울러 비단 사파티스타 마을뿐만 아니라 치아파스 농촌의 원주민 지역 전체가 국가경제 및 세계경제 편입에 따르는 불이익의 대가를 지속적으로 치르고 있다. 예를 들자면 반군 마을을 대거 이탈하는 주민들의 경우가 그렇다. 사파티스트건 아니건, 치아파스 원주민은 보잘것없는 땅뙈기를 죽어라고 일굴 바에는 멕시코의 칸쿤이나 미국에 가면 건설업 등 다른 분야에서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더욱이 옥수수를 생산해봤자 1994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체결돼 미국의 잉여 농산품의 유입 통로가 마련되면서 수익성이 뚝 떨어진 형편이다.
사파티스트는 철 지났을까?
이를 고려하면, 매일 일정 수의 들뜬 관광객을 데리고 오는 여행업체들에 사파티스타 반군들이 아과아줄 폭포 입구에서 ‘불법으로’ 부과하는 얼마 안 되는 추가 요금은 어떻게든 추세를 반전시키려는 전초작업이라기보다 그저 소유권을 회복하려는 정당한 의지를 비공격적으로 드러낸 상징적 표현이다.
반군 지도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 자치계획에 가해지는 주된 위협은 최근 몇 년 들어 멕시코 당국이 강화한 ‘반봉기 전략’이라고 한다. 멕시코 당국은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군사적으로 말살하는 정치적 대가를 감수하지도 못했고, 반대로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지도 못했다. 그래서 자치마을들을 물리적·정신적으로 적극 괴롭히면서 봉기 주민들이 지치기를 기다리는 전략을 지난 1994년 이래 다양한 형태로 구사하고 있다.
멕시코 당국은 반군 지역의 군사적 감시(멕시코 연방군이 118곳에 주둔하거나 초소를 두고 있으며, 그중 57곳은 마을 내부에 위치), 위협과 강제 이주, 민병조직 ‘후원’, 전기 공급 중단과 각종 훼방 활동, 사파티스트가 점령한 영토의 소유권을 마음대로 친정부 농민에게 양도해 현지 농민조직들 간의 분열과 분쟁 조장 등에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상황 악화에 일조할 뿐이다. 오래전부터 갈가리 찢긴 조직들이 곳곳에서 과격한 교전을 벌였다는 소식이 일주일이 멀다 하고 들려온다.
반군 지역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현지 비정부기구(NGO)들은 그래도 낙관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사파티스트 수가 “10년 전보다 감소”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한다. 비록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떠나거나 새로이 합류하는 이들을 제대로 헤아려 지지 기반을 명확히 파악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반군운동이 “반시스템적”이고,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어느 때보다 단호”해졌다는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농업·환경 생산공동체들이 교육 및 보건 체계와 밀접한 관계 속에 자치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사파티스트의 이념적 가치는 여전
하지만 반군들은 멕시코의 다른 지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격리된 편이어서 상황이 한층 취약할 수밖에 없다. 마르코스 부사령관도 이 점에 동의한다. “사파티스타주의는 이제 유행이 지났죠.” 멕시코 좌파에서도 많은 이들이 다름 아닌 부사령관에게 그 책임을 돌리고 있다. 언론을 뜨겁게 달구던 모든 현상들은 어느 때고 수그러들며 사회적 성원도 필연적으로 줄어들게 마련이지만, 여기서는 그런 차원을 넘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지도자인 그의 국내외적 전략 자체가 문제시되고 있다. 특히 겸허한 척하면서 분열을 부추기는 그의 모순된 언사들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사파티스타주의를 멀리하는 지식인과 조직이 점차 늘어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기는 하나 2006년 대통령 선거가 결정적으로 분열의 원인을 제공했다.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하층 좌파’의 투쟁을 유도하고 조직화하기 위해 공식 선거 캠페인과 별도로 ‘또 다른 캠페인’을 마련했으나 여론은 이를 계기로 그의 ‘반정치주의’에 주목했다. 특히 좌파 유력 후보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공격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물론 이러한 공격에 이유가 없지는 않았다. 이 후보의 소속당인 민주혁명당(PRD)은 치아파스주와 의회에서 수차례에 걸쳐 사파티스트들의 대의를 ‘배신’했다. 치아파스에서는 사파티스트 원주민과 민주혁명당을 지지하는 원주민 간에 산발적인 교전이 벌어져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또한 2001년 민주혁명당은 산 안드레스 협약의 거부와 다름없는 ‘원주민법’에 찬성표를 던지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드러난 당 내부의 정치적 기회주의와 부패, 로페스 오브라도르의 모호한 경제계획 등도 사파티스트들의 반감을 사기에 충분했다.
마르코스 부사령관의 독설 또한 멕시코 좌파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극좌파에서 중도좌파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좌파가 일심동체가 되어 민주혁명당 후보를 지지했다. 선거 부정으로 보수우파 신자유주의자인 펠리페 칼데론 후보가 대통령에 재선되자 이에 대한 반발과 함께 멕시코 좌파의 로페스 오브라도르 후보에 대한 지지는 더욱 강화됐다.
마르코스 부사령관은 그 ‘허세’와 ‘정치적 갈지자 행보’ 이외에도 사파티스타주의를 국내외 무대에서 스스로 퇴출시켰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남미의 다른 혁명운동들을 깔보았고, 오만함 때문에 일을 그르치기도 했으며, 걸어가야 할 길을 제시할지언정 과정을 안내할 생각은 늘 없었다. 이에 부사령관은 몇 가지 판단 오류가 있었음을 기민하게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언론의 큰 주목을 받으면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개인 중심 조직으로 변모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지만 사파티스트들 사이에서 자신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것에는 짐짓 놀라는 눈치다. 이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를 천재적인 반군 대변인으로 추앙해왔으며, 그가 아니었더라면 단 48시간도 세계의 이목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반정부 소수집단(사회·민족·성·세대 등 다양한 차원)들을 찾아 전국을 누볐던 ‘또 다른 캠페인’의 여세를 몰아 기존 정치제도를 벗어난 수평적이고 밑바닥에서 비롯된 “전국적 좌파 반자본주의 운동의 가능성”에 꾸준히 기대를 걸고 있다. 2009년 초, 치아파스에서는 무장봉기 15주년을 기념한 ‘존엄한 분노의 페스티벌’을 기해 국제적인 만남의 장이 마련됐다. 1996년부터 열린 회의인 ‘은하계 간 만남’보다는 덜 인기를 끌었지만 일종의 ‘해프닝’인 이번 회의에도 라틴아메리카의 유수 지식인과 정치인, 국내외 원주민·농민운동 인사들이 자리했다. 특히 사파티스트들이 동질감을 느끼는 농민조직인 ‘비아 캄페시나’(Via Campesina·농민의 길)(2) 관계자들의 참석이 눈길을 끌었다.
아무튼 멕시코 외딴곳에서 이들 반군이 장차 어찌되든 간에 한 가지 높이 살 점은 있다. 현지 거점을 기반으로 삼아 보편적인 인종적·정치적 이상에 생기를 불어넣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처음에는 무기를 들고, 그 다음에는 평화적인 방식으로, 상황과 역학관계, 자체 전략의 적합성을 고려해 운동을 전개했다. “우리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평등을 추구합니다.” 정체성 확인의 괴이한 상징으로 자리잡은 복면을 쓴 반군 지도자들은 이를 거듭 강조했다.
1994년 ‘민주주의, 자유, 정의’를 기치로 봉기를 일으켰던 이들은 물론 그간 개헌을 이끌어내거나 제도의 식민성을 제거하거나 나라를 민주화하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경색되고 글로벌 경제의 거센 바람에 노출된 멕시코에서 사회적 선택에 목소리를 내려는 이들의 의지는 여전히 굳건하다.
오늘날 멕시코·볼리비아 등 곳곳에서는 미약하나마 다양성 인정의 움직임이 반드시 정체성의 문제나 ‘문명의 충격’을 유발하는 것만은 아니며 사회정의와 법치국가를 위한 투쟁과 발맞춰 나아갈 수 있음을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증명해 보이는 인디언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사파티스타주의는 이러한 운동에 온전하게 참여하고 있다.
글·베르나르 뒤테름 Bernard Duterme
벨기에 루뱅라뇌브 3대륙센터(Cetri) 소장.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다. http://www.cetri.be.
번역·최서연 qqndebien@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텔레비전의 종말>(2007) 등이 있다.
<각주>
(1) 1차 협상 후, 헌법 개정을 통해 원주민의 권리와 문화 관련 사항을 수정하기로 했다. 그러나 결국 이것이 실행되지 않으면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사회경제적 요구들을 비롯한 이후 협상 내용도 지켜지지 않았다.
(2) 1993년 탄생한 ‘비아 캄페시나’는 식량안보 권리와 중소농 보호를 위해 힘쓰는 국제조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