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 경계에 선 최후의 검투사들

규칙도 심판도 없는 금지된 폭력에 관객들 열광
군소 방송 상업적 성공에 거대 미디어들도 가세

2009-11-05     마르텐 반 보텐뷔르흐·요한 헤이브론|스포츠사회학자

오래전 한때, 로마에서 군중의 기쁨을 위해서 검투사들이 죽을 때까지 싸웠던 시절이 있었다. 이 전통은 사라졌지만 권투에서 무술에 이르기까지 더 정형적이며 규칙화한 전투는 이어져왔다. 1990년대 초 미디어 기업들이 새로운 시장을 찾던 중 서커스 경기를 다시 찾아냈다. 이렇게 ‘최후의 전투’가 생겨났다.


‘상대방을 죽일 수도, 혹은 내가 죽을 수도 있지만, 가진 것이라곤 몸 하나뿐인 스포츠맨들에게 이 이상 매력적인 것은 없다.‘

1993년 11월 12일 킥복서이자 ‘풀 콘택트’(룰에 의해 제한되는 특정 부위를 제외한 몸 대부분의 직접 타격이 가능함) 가라테 선수인 네덜란드인 제랄드 고르듀가 콜로라도 덴버시의 맥니콜라스 스포츠 아레나에 설치된 ‘최후의 전투’를 하러 철장 우리 안으로 입장한다. 상대는 하와이 스모 선수인 텔리아 툴리다. 격돌이 시작되자마자, 고르듀보다 80kg나 더 무거운 툴리가 그를 향해 달려든다. 고르듀는 물러서서 공격을 피한 후 뛰어올라 적수를 잡아당긴다. 비틀거리던 툴리가 바닥에 쭈그린 형태로 넘어진다. 당황해 허공을 쳐다본 순간 고르듀는 재빨리 툴리의 안면에 강력한 킥을 날린다. 이 하나가 튀어나와 케이지의 그물 철장 사이로 날아가 관중석으로 떨어졌다. 툴리의 턱에서 피가 선처럼 흐른다. 규칙이 없다는 것이 규칙인 경기에서,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심판은 전투를 중지시킨다. 경기가 시작한 지 딱 26초 후였다.

‘최후의 전투’는 끝이 났다. 8만 미국 가정이 페이퍼뷰(유료 케이블 TV에서 시청한 프로그램 수만큼 요금을 지급하는 방식)로 이 광경을 목격했다. 조금 후 고르듀는 팔이 부러지고 발을 다치면서 또 다른 경기에서 이겼으나 결승전에서 브라질 출신의 선수인 호이스 그레이시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레이시는 제1차 최후의 전투인 UFC에서 우승한 상금으로 5만 달러를 손에 쥐었다.

유료 케이블의 ‘페이퍼뷰’ 방식

이런 유형의 전투에서는 눈을 찌르거나 뽑는 것 말고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주먹과 발에 의한 타격, 심지어 상대가 바닥에 쓰러져서 반항하지 못할 때도 목 조르기, 머리 뽑기, 껴안아 조르기, 팔꿈치 치기, 머리로 받기 등이 가능하다. 맨손으로 체급을 구별하고 라운드 시간 제한이나 심판, 심지어는 점수도 없다. 유일한 가능성은 녹아웃과 항복뿐이다. 복서, 레슬링 선수, 유도 선수, 킥복서들이 마치 이 세계의 오래된 문제에 답하려고 링에 오른다. 이러저러한 종류의 무술을 실행함으로써 진정한 강자 중의 강자라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시합 전 격투 소개도 다른 어떤 유형의 경쟁 경기와 다르다. 첫 번째 토너먼트의 비디오카세트가 말해주듯 규칙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죽음의 10각 링 위에서 생존을 위해 싸운다. 빠져나갈 구멍은 없다. 링 위에는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없다.”

‘최후의 전투’나 ‘우리 안에서의 전투’는 곧장 풀 콘택트라는 무술계에서 자리를 확고히 했다. 갑작스런 유행으로 전세계에 걸쳐 수많은 변형 경기들이 생겨났다. 브라질의 모든 것이 가치가 있다는 뜻의 ‘발리 투더’는 전세계적으로 열리는 일련의 전시 대회로 유명해졌다. 그 외에도 ‘업솔리트 파이팅’, ‘익스트림 파이팅’, ‘케이지 파이팅’, ‘월드 컴뱃’, ‘판크라스’, ‘케이지 워즈’, ‘프리 파이팅’, ‘밀레니엄 브럴스’, ‘얼티메이트 컴뱃’ 등이 있다. 모든 타격이 가능하다는 의미의 ‘노홀즈 베어드‘가 공통의 선전 문구가 되었다.

이같은 현상이 무술 잡지와 <플레이보이> <펜트하우스> 같은 남성잡지의 범주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몇몇 국가에서 논쟁이 있었다. “최근에 내 아들이 텔레비전에서 ‘최후의 전투 챔피언전(UFC)’이라는 제목이 붙은 유선방송 프로그램을 즐기고 있는 걸 보고 거의 공포를 느꼈다. 남자들이 거의 죽을 때까지 싸우는 것이었다. 왜 그런 것들이 방송에 허용되는가? 합법적인가?”라고 한 미국 잡지의 독자 투고란에 분노에 찬 항의가 실렸다.(1) 1996년과 1997년 케이블 방송사들이 정치적 압력에 밀려서 경기 중계방송을 거절하면서 경기 주최 쪽은 심각한 실패를 경험한다. 페이퍼뷰라는 수익성 좋은 시장이 붕괴 직전에 이른다.

충분한 액션이 없는 가라테와 태권도

풀 콘택트라는 스포츠계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던 네덜란드에서도 1995년 봄 체육부 장관인 에리카 테르프스트라가 이러한 ‘반항적인 스포츠’는 스포츠라고 분류되기에 적절치 않아서 용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한다. 국회의원들 역시 ‘노 홀즈 발드’(NO Holds Barred)에 대한 보이콧을 호소한다. 스포츠계도 반대 입장을 취하도록 강요당한다. 선수와 주최자들 역시 폭력성을 인정한다. 다음날 고르듀는 케이지 격투를 ‘의례적인 살인’이라 평가했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킥복싱계의 코치인 톰 헨리크는 ‘야만적인 대중오락’이 문제라고 말한다. 하지만 금지에는 모두 반대한다.

어떻게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모든 것은 1970년대에 시작됐다. 당시에는 공권력에 의한 엄격한 제약 때문에 유도·가라테·태권도 등 잘 알려진 무술에 대한 식상함이 있었다. 반면 타이 복싱이나 킥복싱같이 더 자극적인 볼거리가 있는 무술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전문잡지들은 “가라테는 주목을 끌 만한 충분한 액션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식으로 기존 무술들에 대한 비판을 되풀이한다. 그 결과 네덜란드의 몇몇 관계자들이 여러 무술을 혼합해 하나의 미숙한 형태의 경기를 만들어낸다. 이를 ‘바로카이’라고 불렀는데 거리의 싸움 형태는 아니었다. “우리는 결코 (상대방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판크라스(2)나 상대를 오로지 병원으로 직행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 전투형 격투로 나아갈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그런 쪽으로 흐르는 것을 피하려 했다.(3) 바로카이는 좋은 스포츠이고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실패한다.

오랫동안 대부분의 무술은 경기자와 관중 등 관련자 모두의 바람과 흥미에 맞춰 규칙화됐다. 20세기가 끝날 무렵, 스포츠 행사들이 대규모 관중을 동원하는 데 성공하고, 행사 조직자들은 관중의 흥미와 요구에 부응하게 된다.

1990년대에 이르러 텔레비전 방송시장이 위성과 케이블에 힘입어 급속도로 팽창한다. <ABC> <CBS> <FOX> <ESPN> 같은 미국의 주요 방송사들이 인기 있는 스포츠 이벤트를 독점한다. 이에 따라 <SEG> 같은 군소 방송사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게 된다. 이들이 바로 케이지 속 격투를 조직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가능한 한 가장 많은 수의 관중을 끌어들어야 하기에 하나의 스펙터클로서 감정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격투의 유형과 테크닉이 변하게 된다. 물론 끝없이 확장되는 폭력성에 의해서다.

1980년대에 비디오의 등장이 포르노그래피의 대량 유포를 부추겼듯이, 페이퍼뷰의 등장은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오락을 조장한다. 정상적인 한계를 벗어나는 금지된 ‘진짜’ 폭력에 의한 극적인 녹아웃에 열광적인 요인이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UFC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페이퍼뷰가 된다. 이벤트마다 1천만 달러 이상이 오고 간다. 미국 외 지역에서 벌어진 첫 번째 챔피언전은 일본에서 거행되는데 무술 이벤트상 결코 성공하지 못했던 관중 동원을 이뤄낸다. 영국에서는 첫 번째 UFC 비디오테이프가 가장 많이 대여된다. 이같은 상업적 성공에 유혹을 받아 동참한 미디어 그룹들이 변형된 형태의 격투를 만들어낸다. 피터 엔터테인먼트 그룹이 먼저 ‘월드 컴뱃 챔피언십’을, <펜트하우스>의 편집자인 제너럴 미디어 인터내셔널의 자회사인 베틀케이드는 또 다른 이벤트인 ‘익스트림 파이팅’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조직은 명확히 활력적인 상업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심판과 배심원, 그리고 점수를 세는 사람들이 오락계나 미디어 산업계에서 나온 사람들로 대체된다. UFC 게임의 사회자는 예전에 광고계에 종사했던 인물이다. 창설자인 존 밀리어스는 영화감독이었고 프로모터와 제작자는 스포츠연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로 페이퍼뷰 텔레비전 회사의 사람들이다.

UFC가 처음에는 여러 유형의 격돌 형태로 잉태됐지만 프로모터들은 이것이 텔레비전 시청자의 눈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안다. UFC 격투 진행자 아트 데이비에 따르자면 페이퍼뷰 관객의 대다수는 “NFL 미식축구나 트럭풀스 (4) 혹은 프로레슬링의 팬들이다. 이들은 액션을 원한다. 이들이 무술에 흥미를 느끼는 것도 아니고 각 격투의 형태에 집착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라고 한다.(5)

관중은 일상에서 금지된 폭력에 반해, 진짜 거리의 싸움처럼 두 상대가 위험스럽게 격돌하는 것을 보면서 열광하는 것이다.

육체적 자산이 전부인 ‘막장’ 스포츠맨들

모든 사람들의 눈이 쏠린 격투에 대한 당사자들의 느낌은 어떤가? 이들은 물론 다른 시각을 가진다. 왜 그들은 경기에 출전하는가? 물론 참가 수당과 우승 상금이 이유다. 명성을 잘 관리하면 또 다른 수입원을 얻을 수도 있다. 강의도 하고 시범도 보이고 다른 격투 계약도 하고 영화나 광고에 출연하기도 한다. 물론 개인 도장을 차리기도 한다. 위험을 충분히 인지하기에는 아직 젊거나, 경력의 정상에 있는 선수들은 이런 형태의 격돌을 피한다. 부상이 치명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예전에는 돈이 그다지 생기지 않는 스포츠의 챔피언 출신이다. 그들의 경력은 이제 거의 막바지에 달해 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육체적 자산’밖에 없다. 격투는 그들에게 위상을 부여하고 무술계에서 다시 예전의 모습을 찾게 해준다. 철장 안으로 입장하는 데는 용기도 필요하고 인상적인 체격도 필요하다. 이들이 카메라와 영사기에 보여주는 힘은 놀라울 정도다.

이들 중 한 사람은 자신이 느끼는 모호함을 이렇게 말한다. “거리의 싸움 같아요. 내가 그걸 했지요. 내가 철장 안에 있었단 말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을 위해서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그건 확실합니다. 당신에게 말하건대 누군가 어느 날 죽어야 한다면, 거기 링 위에 죽은 채로 축 늘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한 번은 해볼 만한 멋진 경험이었답니다. 두려움을 주지만 자부심도 주지요. ‘나도 한 번은 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당신에게 말하자면, UFC는 진짜 추한 것입니다. 넘어져 있는 상대에게 발길질을 한다는 것은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 영국에서처럼 격투 캠페인이 금지된 나라에서는 기업들이 전략을 바꾼다. 미디어와 정치권을 피해 적법성의 경계 지점에서 이벤트를 주선한다. 예컨대 네덜란드의 격투기 주최자들은 당국의 주목을 피하고 이벤트를 진행한다. 네덜란드령 아루바섬이나, 카리브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격투를 진행하기도 한다. 다른 방향은 ‘스포츠’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엄격하게 규칙을 정하거나 페이퍼뷰에 다시 접근할 수 있도록 허가를 얻는 것이다. 이것은 UFC가 미국에서 선택한 전략이다.

유료 텔레비전 방송사, DVD, 인터넷상의 다운로드 그리고 스트리밍 서비스는 지방 정부나 국가의 통제가 미치기 힘들기 때문에 이벤트의 상업화를 가능하게 한다. 환상과 감동이 중시되는 사회적 삶의 다른 분야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현실적 사실감을 주는 것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없다.

글·마르텐 반 보텐뷔르흐 Maarten Van Bottenburg·요한 헤이브론 Johan Heilbron
보텐뷔르흐는 네덜란드 유트리에트대학의 스포츠사회학과 교수이며, 하이브런은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 산하 유럽사회연구소의 연구원이다. 본 기사와 관련해선, <사회과학 연구>179호에 이들이 공동 기고한 ‘철장 우리 속에서, 최후의 전투의 기원과 활력’(2009년 9월) 참조 바람.

번역·이진홍 memosia@ilemonde.com 


<각주>  

(1) <퍼레이드 메거진>, 1995년 12월 10일, 로렌스 베너의 인용임. <미디어 스포츠>, 러트리치, 런던, 1998.

(2) 고대 그리스에서 행해졌던 격투로 거의 모든 타격이 가능하다.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3) 젠도칸, 1985.

(4) 거대한 트럭들이 엄청난 양의 화물을 끄는 이벤트.

(5) 클라이드 젠트리, <노 홀즈 발드의 진화>, Miko Books, Preston, 영국,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