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콜롬비아의 진실을 두려워하는가
지난 9월 23일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과 콜롬비아 정부 측은 6개월 기한의 평화협정 체결에 합의했다. 평화협정에 따라 설치될 특별 재판부에서는 콜롬비아 분쟁의 주동자가 처벌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 특별 재판부에서 최고위급 선으로까지 이어지는 분쟁의 책임자들을 가려 낼 대범함과 수단이 있을지는 두고 볼일이다.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과 후안 마누엘 산토스 정부가 노르웨이에서 정식으로 평화 협상을 시작한 지 3년이 넘었다.. 2012년 10월 20일,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의 지휘관 루치아노 마린 아랑고(일명 이반 마르케스)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오래된 게릴라를 대표해 다음과 같이 서두를 밝혔다. “우리는 올리브 가지를 손에 들고 평화라는 공동의 꿈을 찾아 부당함으로 얼룩진 마콘도(1)에서 오슬로에 왔다.”
수십 년 전부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분쟁으로 치달은 무력 투쟁의 원인을 상기시키듯이, 그는 몇 달 전 비공개 회담에서 결정된 의제에선 분명히 벗어나는 ‘구조적인 변화’를 요구했다.(2) 정부 측 협상단 대표로 나선 움베르토 델라 카예는 이 같은 요구에 대해 “광산 및 에너지 관련 의제(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중심 노선)를 논의하려면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은 무기를 내려놓고, 정치에 참여해야 하며 선거에서 승리해야 할 것이다”라고 응답했다. 또한 “비공개 회담은 신속하고 효과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몇 년이 아니라 몇 개월이면 끝나게 될 과정이다”라고 말하며 반란군들에게 비공개 회담의 기한에 대해서도 압박을 가했다.
2012년 11월부터 쿠바의 아바나에서 시작된 이번 협상 이전에도 다른 협상들이 진행되기는 했었다.(3) 벨리사리오 베탕쿠르 대통령의 보수 정권(1982-1986)시절에 열렸던 협상은 가장 많은 기대를 받았지만 이내 절망을 안겨줬다. 당시 상황을 되짚어 보자. 1984년 3월 28일 체결된 라우리베 협정 당시 양측이 합의한 휴전을 통해 애국연맹(PU)이라는 새로운 정당이 출범했다. 이 정당에는 여러 비무장 좌파가 모여들었고, 정당 출범을 계기로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에서 동원 해제된 수많은 게릴라 대원들도 합류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전투태세를 갖추고 이후 상황을 기다렸고, 안타깝게도 사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1986년 14명의 상원의원과 20명의 하원의원, 23명의 단체장과 300명이 넘는 지방의원을 배출한 애국연맹의 당원과 지지자 그리고 지도자들이 군대 과격파와 준군사조직에 의해 몰살당한 것이다. 하이메 파르도 레알(1987)과 베르나르도 하라미조(1990)(4) 등 두 명의 대선 후보를 포함해 4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반란군 전투원에서 민간인으로 돌아가 카케타주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던 이반 마르케스도 1980년대 말, 다른 이들처럼 다시 숲으로 몸을 숨겼다. 충동적인 결심도, 폭력에 대한 열의도, 밀림에 대한 애정도 아니었다. 오로지 생존을 위한 결정이었다.
뒤이어 1998년 10월과 2002년 2월 사이 안드레스 파스트라나 대통령 정권하에서 일명 ‘카구안’ 협상들이(5) 진행되었다. 스위스 정부의 밀사로 당시 협상에 참석했던 장피에르 공타르는 협상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었다고 말한다. “그래도 양측 모두 손해 볼게 없었다. 콜롬비아 정부는 미국과 진행 중이던 ‘콜롬비아 플랜’을 구체화할 시간이 필요했었고,(6) 빠른 속도로 세력을 키워가던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에게는 지휘관을 양성하고 숨을 고르기 위한 휴식기가 되었다.” 실제로 회기 중에 어떤 의제도 논의되지 않았다. “우리는 산비센테 델 카구안에서 작은 비행기를 타고 회의 장소에 도착했다. 평화 협상 위원이 오늘은 이 애기를 꼭 해보자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 사안을 논의하지 않았다.” 반군은 군대 측에서도 협상에 참석할 것을 요구했었다. “정부가 협상 장에 내보낸 퇴역 장군은 회의 시간 대부분 동안 자고 있었다. 날씨가 무척 덥긴 했다.”
쿠바와 노르웨이 두 보증국과 칠레, 베네수엘라 두 동반국의 후원 아래 진행 중인 현재의 협상들은 전혀 다른 맥락으로 흐르고 있다. 산토스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현대’ 경제 엘리트들은 해답 없는 대립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더 현실적이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최근 몇 년간 그 세력이 약화되긴 했지만 게릴라가 무력으로 제압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콜롬비아 무장혁명군도 승리에 대한 그 어떤 전망도 그리지 못하고 있다. 2012년 11월부터는 양측이 직접 대면하면서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쿠바는 협상을 감독하고 노르웨이는 재정을 맡았으며, 칠레는 별 다른 일을 하는 게 없고 베네수엘라는 반군들이 쿠바로 넘어갈 때 자국 영토를 통과하도록 해주고 있다. 공타르는 지금껏 상황이 이렇게 좋았던 적은 없다고 말한다. “쿠바에서 열리는 협상에 참석한 대표 중 일부는 이미 이전 협상들에 참여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경험에 의해 일종의 자본 환원 현상이 생겼기 때문이다.”
정부는 시계바늘과의 싸움을 통해 평화와 ‘고속 협상’을 이루어내겠다는 계획이었다. 부의 재분배나 사회적 변화 없이도 신자유주의 경제의 성장을 촉진시킬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은 이러한 정부의 계산을 뒤집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가장 근본적인 요구사항까지 모두 포기하며 무기를 내려놓을 수 있게 만드는 개혁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괴로운 일이지만 정부는 타협을 해야 했다. ‘전반적인 농촌 개혁’, ‘정치 참여’, ‘불법 재배 및 마약밀매’, ‘피해자에 대한 사법처리 및 보상’, ‘무장해제’라는 다섯 가지 협상 안건 가운데 처음 세 가지에 대해서는 이미 합의를 보았다. 정확한 내용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양측은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는 아무것도 끝난 것이 아니다”라고 결정했다. 협상을 신속히 진행하기 위해서 일부 논쟁이 이는 사안은 보류하고 마지막에 처리하기로 했다. 농지 회담(Cumbre agraria)을 통해 모인 농민 단체들이 요구한 대토지 농장(Latifundios)의 해체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2015년 8월 11일 발표된 정부의 농업용 토지 조사 결과에 따르면, 5헥타르 미만의 토지 농장 69.9%가 전체 농지 면적의 5%를 차지하고 있고, 0.4%의 농장주가 소유하고 있는 500헥타르 이상의 토지 농장은 조사된 전체 1억 1,300만 헥타르의 농지 중 41.1%에 이른다.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이 협상 테이블에서 요구한 것처럼 민간단체들은 농민 보호구역(ZRC)의(7) 개발을 주장하고 있는 반면, 정부에서는 소농민들을 농산업의 단순한 근로자이자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는 대기업과 소농민 사이의 불균형적인 조합인 농촌경제개발구역(Zidres)의 신설을 추진하고 있다. 동시에 정부에서는 황무지 관련 신규 법안을 제정하여 농민들에 대한 토지 소유권 반환을 회피하려 했다. 항의가 시위로 바뀌면서 곤봉과 최루탄이 난무하고, 실제로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들을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이나 민족해방군(ELN), 그리고 콜롬비아 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타 군사조직과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체포하고 ‘반군’이라 유죄 판결하며 투옥하는 과정이 뒤따랐다. 이렇게 전쟁 범죄자 약 9천 명에 정치범 수백 명이 더해졌다.
평화 또는 평화의 추구는 무기가 아닌 다른 수단을 이용한 전쟁의 연속이 될 수 있다. 지배계층은 자신들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경우에만 그 수단을 사용한다. 역사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세르히오 아르볼레다는 보고타에서 “지금 쿠바에서 논의되고 있는 내용들은 역설적이게도 실제 콜롬비아의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해 이렇게도 덧붙였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은 어쨌든 근본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매일 아바나에서 결정되는 사항들로 인해 콜롬비아가 더 굳건해 질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다.”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은 여러 차례에 걸쳐 일방적인 휴전을 선언했고 또 지켜왔다. 덕분에 전투에서 사망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현저히 줄어들기도 했다.(8) 하지만 군사적 압박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정부로부터 그에 대한 대가는 얻지는 못했다. 결국, 원인을 알 수 없는 참사는 계속되었고 군인과 게릴라 대원들이 쓰러져갈 때마다 양측은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현 정권이 마치 전쟁이 없었던 것처럼 계속 협상을 강요하고, 또 협상이 없었던 것처럼 전투를 계속하는 한 이런 위기는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협상이 악화될 것을 우려한 협상 보증국과 동반국, 그리고 진보주의 진영과 사회 운동가들의 우정 어린 압박에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은 지난 7월 12일 다시 한 번 독자적으로 휴전을 선언한다. 꺼져가는 협상의 불씨를 되살린 것이다. 이에 대해 부분적, 단계적 긴장완화 방침을 고수하는 산토스 대통령은 7월 26일 포격 중지만을 명령했을 뿐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비남미계 협상 관련자는(양측 협상단에는 수많은 국내외 자문위원, 민간 전문가, 군사 전문가가 포함되어 있다) “이토록 매우 복잡한 정치적 상황 안에서 대화가 진전될수록 그리고 여론이 압박을 가할수록, 평화를 위한 협상 과정은 가속화를 강요하는 단계로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테러리스트’들이 ‘항복’하지 않는 한 모든 협상을 반대한다는 극우파 알바로 우리베 전 대통령과 그의 추종자들의 압박, 그리고 또 평화에는 우호적이지만 반군들에게는 심히 적대적인 언론들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산토스 대통령이 2016년 3월 26일을 협상의 최종 시한으로 정한 것은 조금 경솔한 모습이 아니었을까? 전문가들을 대동한 양측 대표단들은 가장 민감한 사안으로 분류되는 ‘전환기의 정의’, ‘정치범’, ‘성범죄 및 아동범죄’, ‘무장해제와 휴전’ 문제에 대한 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해 네 개의 분과 위원회를 추가했고 이로써 협상은 더욱 복잡해졌다.
분과위원회는 정부군의 현역장교 및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의 부대 지휘관들로 구성된다.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의 모든 진영(9)들은 가장 강경하다고 여겨지는 진영까지 포함하여, 쿠바의 협상장에 단 한 명의 대표를 보내 내부 분열 가능성에 대한 소문을 일축시켰다. 이 비남미계 관계자는 “게릴라들은 뛰어난 융합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정부 군대가 중간에서 연락을 가로막아 하위 부대로의 정보 전달에 문제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꾸준히 소통을 강화해 엄청난 변화를 이끌어 냈다. ‘군사적’ 면모를 지닌 전방 부대의 지휘관과 중간 간부들을 좀 더 ‘정치적’인 인물들로 대체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9월 23일 기적이 찾아왔다.
애국연맹의 생존자이자 인권보호단체 레이니시아르의 대표인 하헬 키로가가 웃으며 말했다. “큰 사건이었다. 그날 아침 산토스 대통령이 중대한 소식을 발표할 것이며 처음으로 아바나에 간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인터넷으로 텔레수르 방송(10)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RCN이나 카라콜 등 콜롬비아 방송에서는 정부가 하는 말만 내보내고 게릴라 대표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방송을 중단하기 때문이다.” 그날 쿠바의 수도에서 콜롬비아의 대통령과 티모첸코라고도 불리는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의 지도자 로드리고 론도노 에체베리는 특별 재판부 설치 및 내전 희생자 권리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다고 밝혔다. 번복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두 사람은 역사적인 악수를 나누었다. 기쁨에 찬 쿠바의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 자신만의 축복 방식으로 두 사람이 서로 손을 맞잡도록 한 것이다.
국립역사기념관에 따르면 콜롬비아에서 벌어진 비극으로 인해 21만 8,094명(이중 19%는 전투원)이 사망했고 1958년과 2012년 사이 571만 2,506명이 강제 이주를 당했다.(11) ‘라 비오렌시아’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새겨진, 1948년에서 1954년까지 일어났던 보수파와 자유진영 간의 끔찍한 전쟁에서 숨진 20만 명의 희생자들은 제외한 이상한 계산법이다. 당시에 공산당과 자유당에서는 임시적으로 농촌에서 자위대를 조직했다. 후에 이들에 대한 억압이 거세지자 이 자위대에서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이 탄생했다. 어찌되었든 이제 협상은 타결되었다. 비록 그것을 표현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은 여러 가지지만 말이다. 산토스 대통령도 “모두가 만족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 확신한다. 불만의 목소리가 남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완벽하게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변화는 아주 긍정적인 방향으로 올 것이다.”(12)라고 마치 달걀 위를 걷듯이 조심스럽게 발표를 하며 이를 인정했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양 당사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결백하지 않다. 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농촌 지역과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는” 도심지역 사이에는 분열이 명백히 존재한다고 아르볼레다는 설명했다. 각각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도 같지 않다. 공산주의 일간지 보즈의 카를로스 로사노 대표는 “콜롬비아의 양극화는 심각하다. 역사를 날조하고 진실을 뒤틀어 버리는 거대 언론들도 양극화를 부추기고 있다. 거대 언론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화해나 관용의 메시지가 아니다. 그들은 분열을 조장한다. 평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궁지에 몰렸다”고 밝혔다. 우리베 대통령이나 그의 악인 알레한드로 오르도네스 검찰총장에 의해 단련된 여론의 동향에 있어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질문은, 이 ‘테러리스트’ 지도자들의 정치 생활과 투옥 생활이 얼마 동안이나 금지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다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어디에서도, 전투복을 벗고 막 민간인의 옷으로 갈아입은, 진압되지 않은 무장 반정부 집단의 지도자들이 또 다시 감옥의 창살 뒤에 서기 위해 혹은 미국에 범죄자로 송환될 목적으로 평화 협정에 서명한 경우는 없었다. 반군들과의 초반 비공식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대통령의 형 엔리케 산토스는 논란을 정리하고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협상은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을 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많은 고통과 피해를 야기한 전쟁을 끝내기 위한 것이다.”(13)
1990년 게릴라 단체 M-19가 무기를 내려놓은 뒤 사면된 M-19의 전 지휘관 안토니오 나바로 볼프 상원의원도 같은 식으로 경고했다. “전 세계에서 그리고 우리 역사에서도 예외 없이, 정치 참여야말로 평화를 이루는 모든 과정의 핵심이다.”(14) 처벌을 위한, 선별적, 일방적, 편파적인 입장을 고수했던 정부와 정부의 협상가들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게릴라 지지자들이나 키로가 같은 옛 애국동맹 당원들에게 이러한 현실 직시는 더욱 어려웠다. “게릴라는 정치적 배제 그리고 민주적 방식으로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태어났다. 인권에 대한 가장 심각한 폭력은 정부와 준군사조직에 의해 행해졌다. 누구의 잘못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없다.” 재판이 수반되지 않은 형 집행이나 연속된 납치에 대해 잊지 않은 게릴라 대원들의 경우, 이들에게 “자신의 사고방식을 바꾸게 하는 일은 무척 어려웠다”고 최전선의 목격자는 털어놓는다. 2015년 9월 1일 헤수스 산트리치 지휘관이 “반란군으로서 우리는 다시 감옥에 가지 않을 것이다. 반란이라는 것은 우리가 행하고 있는 보편적 권리이고 이에 대해 어떠한 후회도 없으며, 어떠한 처벌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15)라고 선언했을 때 보인 사고방식이 그러하다.
UN의 성폭력 관련 보고 책임자가 방문했을 때나 강제 징병에 대한 주제가 논의되었을 때에 논쟁은 더욱 격렬했다. “게릴라들은 강간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자신들의 내부 규칙은 매우 엄격하다고 주장하며, 실제로 강간이 일어났었다면 그건 어떤 경우에도 합의된 방침이 아니었을 것이라 말했다. 또 강제 징병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논리에는 강제 징병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농촌 지역에서 자신들이 곧 정부이며, 그들과 함께 가지않으면 굶어 죽는다고 했다. 결국 반란군 지휘관들 역시 변해야 했다. 그들에게 민감한 이 두 가지 주제가 어쨌든 협정에서 다뤄질 것이었으니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러한 일은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의 방침이 아니다. 하지만 혹시라도 누군가 그런 범죄에 연루되었다면 개인적으로 답할 문제다. 이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정부와 반군들은 평화를 위한 특별재판부 설치와 가장 중요한 진실규명 위원회를 포함하는 진실, 정의, 보상, 재발방지 통합시스템 구축을 발표했다. 전쟁이 끝난 뒤 범죄와 수탈의 핏빛 그림자가 남았을 때, 법치국가는 우선적으로 기억할 권리를 전제로 복원 되어야한다. 어떤 범죄가 행해졌는지, 가해자가 누구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야 한다. 도덕적 의무와 사회적 필요도 절대적이다. 피해자들을 파악하고 그들에게 피해자라는 이름을 부여해야 한다. 그리고 보상을 해줘야 한다. 하지만 수천만 국민의 미래와 한 국가의 운명을 걸고 분쟁에서 분쟁 후의 상황으로, ‘혼돈의 사회’에서 ‘안정된 사회’로 넘어가려는 주요한 목표가 있다면, 그것이 꼭 감옥이라는 공간을 통해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이런 것을 바로 회복적 사법 혹은 전환기의 정의라 부른다.
평화를 위한 특별재판부에는 콜롬비아 사법관을 비롯해 명망 높은 해외 전문가들로 구성된 재판소와 평화 법정이 배치될 것이다. 무력충돌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했던 모든 이들과 집단학살, 전쟁 범죄, 반인류적 범죄 등 ‘중대 범죄’에 가담한 이들이 이곳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 재판 절차는 두 종류로 나뉜다. 먼저, 사건과 자신의 책임에 대해 솔직하게 진술하는 이들에게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 5~8년의 ‘자유 제한조치’가 적용이 되고, 자신의 가담여부를 밝히지 않거나 뒤늦게 밝히는 이들에게는 최대 20년의 징역형까지 선고될 수 있다.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납치를 비호하고 전쟁 자금 지원을 위한 마약밀매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정치범 또는 정치범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는 사람들은 사면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게릴라들과는 이제 완전히 끝났다고, 그들을 지하 감옥으로 보내버리게 됐다고 믿었던 모든 사람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2005년 우리베 대통령이 조인한 정의와 평화법 덕분에 준군사조직의 범죄에 대해서도 가벼운 처벌만하게 한 데 일조했던 전쟁 지지자들마저도 얼굴이 붉어지고 눈은 휘둥그레져서 ‘처벌이 없는’ 상황에 대해 격노했다. 안드레스 파스트라나 전 대통령(1988~2002)은 치욕스럽게도, 콜롬비아가 베네수엘라로 변모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최악의 사태는 아직 오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협정은 ‘문명사회’와 인권 보호 전문가들에게 중요한 게릴라 대원, 군인, 준군사조직 대원 등의 무력 당사자들을 문제 삼는 것을 벗어나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 많은 이들이 원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콜롬비아 사람들에게 고통스러운 과거와 불편한 진실들을 마주하도록 강요할 것이다. ‘비전투대원’을 포함하여 분쟁에 연루된 당사자들은 진실규명위원회 앞에서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그로인해 나락으로 떨어지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떤 권리로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에게(그 다음으로 민족해방군에게) 해명을 요구하는 이중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가. 사회 부조리 그리고 극우파 민병대와의 연계성이 수도 없이 드러났던 보수적 과두 집단과 정당, 고위 공직자, 기업가, 농장주, 대토지주 그리고 다국적 기업에게는 아무런 설명도 요구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토지 몰수와 강제 이주, 독직을 통해 이득을 얻은 자들의 잘못을 사법 행정 안에서 면제해 줄 수 있을까? 집행자 뒤에 숨은 범죄 조직을 통해서? 1962년 준군사조직을 만들자고 제안했던 윌리엄 야버러 장군부터, 콜롬비아 플랜에 자금조달을 한 빌 클린턴 대통령과 조지 부시 대통령까지, 분쟁이 지속되는 동안 지배적인 역할을 했던 미국의 책임은 또 어떻게 은폐할 것인가? 노르웨이 정부의 초빙으로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의 법률 자문을 맡은 스페인 출신의 엔리케 산티아고 자문관은 매우 민감한 질문들을 공개적으로 던지며 파문을 일으켰다. “독재 권력에 있어서 상의하달의 끝은 어디로 연결되는가? 군 수뇌부의 중심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민주주의에서 상의하달의 끝은 대통령궁과 장관회의로 연결된다. 이것은 국제적 판례로 보장되는 것이다.”(16)
이렇게 이전 대통령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특히 우리베 전 대통령의 경우, 최고법원에서는 무엇보다 파렴치했던 1997년 엘 아로 준군사조직의 대학살에 대한 그의 “직접 가담이나 묵인을 통한 연루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17명의 농부가 고문을 받은 뒤 처형되고 1,200명의 주민이 강제 이주를 당했을 당시 우리베 전 대통령은 안티오키아의 주지사였다. 또한, 반게릴라 투쟁의 성과를 부풀리기 위해 군대가 최소 3,000명의 시민을 납치하고 살해한 ‘거짓 양성(False positive)’ 스캔들이 터졌을 때 누가 우리베 전 대통령 정권의 국방부 장관이었을까? 바로 산토스 현 대통령이다.
이번에는 항의의 소리가 들린다. 국가를 황폐하게 만들었지만 순수한 열정을 되찾은 이들이 국제 형사 재판소(ICC)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린다. 로사노는 조소에 가까운 말투로 말한다. “지금 이들은 회복적 사법의 목적이 게릴라병들을 감옥에 넣는 것이라 믿고 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창살 안에 갇히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 국가와 피해자들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도록 모든 이들이 증언을 하는 것이 목적이다.” 어쨌거나, 10월 19일 경제계에서는 산토스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다시 한 번 밝히며, 경영자들 괴롭히고 있는 우려에 대해 표명했다. 콜롬비아 기업인 연합(ANDI)의 브루스 맥 마스터 회장은 ‘평화 협정은 법치국가를 존중해야 한다’라는 제목의 자료를 발표하며 “우리는 간접적인 책임을 져야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걱정하고 있다”고 토로했고 협정을 보다 명확히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보다 며칠 앞서 델라 카예 정부 측 협상단장은 “협정문에 일부 모호한 부분이 있어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며 이미 한 발짝 물러섰다. 그때부터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의 대답이 큰 소리로 터져 나왔다.‘명확함은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성명을 통해, “정부가 이미 서명한 합의 내용을 문제 삼기시작하고 협상에서 진전된 것들을 다시 후퇴시킨다면 향후 6개월 안에 대화를 마무리 하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모두가 아직 희망을 붙잡고 있다. 사실 지금껏 콜롬비아 무장혁명군과의 평화 협상과정이 이토록 진전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쟁이 끝났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조금 이른 감이 있지 않을까.
글·모리스 르무안 Maurice Lemoine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기자. 라틴아메리카, 특히 베네수엘라 정치 상황을 전문으로 다루고 있다. 저서로 『검은 강물 위에서 Sur les eaux noires du fleuve』(Don Quichotte, Paris, 2013) 『피노체트 장군의 숨겨진 아이들 Les Enfants cachés du général Pinochet』 (Don Quichotte, Paris, 2015) 등이 있다.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대 통역대학원 졸업.
(1)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백 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가상의 도시 참조.
(2) 다음을 참고. 「콜롬비아에는 “정의도, 평화도 없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2월호.
(3) 에르난도 칼보 오스피나의 다음 기사 참고. 「아바나에서 보고 들은 것」,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3년 2월호.
(4) 이반 세페다 카스트로, 클라우디아 히론 오르티스의 다음 기사 참고. 「콜롬비아에서는 수천 명의 정당 조직원이 어떻게 제거됐는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5년 5월호.
(5) 라마카레나, 라우리베, 비스타 에르모사, 메세타스, 그리고 협상의 작은 ‘수도’라 불리는 산비센테 델 카구안(카케타) 지역에 협상을 계기로 4만 2,000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비무장’ 지대가 들어섰다.
(6) 미국이 구상한 이 계획의 첫 단계로, 콜롬비아 군대 현대화를 위해 107억 달러가 투입되었다.
(7) 1994년 160호 법에 의해 규정된 법정 구역. 점유 법칙에 따른 토지 집중화에 대항하고 가난한 농민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 농촌 경제와 식량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 시작된 농민들의 운동이 정치적 수단으로 작용함.
(8) 평화와 화해 재단의 추산에 따르면 매달 평균적으로 180~200건의 전투가 일어나는데,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이 처음으로 독자적 휴전을 선언한 다섯 달 동안 단 112건의 전투만이 발생해 90%이상의 감소세를 보였다(El País, Madrid, 2015.5.23.).
(9) 콜롬비아 무장혁명군의 군사조직은 7개의 대형 ‘진영’(각 영토 별로)으로 구성되며, 이 진영들은 다시 ‘중진’들로 이루어진 ‘전방 부대’로 나뉜다.
(10) 2005년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미국과 유럽의 거대 국제 방송에 대항하여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쿠바와 함께 만든 국제 텔레비전 채널. 2006년에는 볼리비아도 합류했으나 콜롬비아에서는 방송되지 않는다.
(11) Basta ya ! Colombia : Memorias de guerra y dignidad, Centro Nacional de Memoria Histórica, Bogotá, 2013.
(12) El Tiempo, Bogotá, 2015.9.22.
(13) El Tiempo, 2015.10.6.
(14) El Tiempo, 2015.10.8.
(15) New Colombia News Agency (Anncol), Stockholm, 2015.9.1.
(16) Semana, Bogotá, 2015.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