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과 바나나 사이에서

2015-12-31     르노 랑베르

“자유무역 협정(FTA)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논리는, 과학보다는 숭배에 가까운 거짓말 내지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2006년, 에콰도르의 대선 후보였던 라파엘 코레아는 그의 생각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그가 자유무역 협정을 조인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8년 후인 2014년 12월 12일, 코레아 정부는 EU와의 자유무역 협정에 간략 서명을 한다. 태도의 돌변? 그렇다. 아니, 이건 배신이 아닐까?

2014년 12월 31일 저녁, 에콰도르에 대한 EU의 일반특혜 관세제도(GSP) 협정 적용기한이 만료됐다. 관세장벽을 낮춰준 이 조치는 에콰도르의 대유럽 수출액의 60%(2013년 기준 총 25억 유로)를 차지하는 약 6,500개 품목에 해당됐었다. 그 중 바나나는 유럽 판매가 30%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콜롬비아와 페루의 주요 수출품에도 바나나가 포함돼 있다. 2012년 콜롬비아와 페루는 EU와 FTA를 체결했고 이들에 대한 관세 장벽은 GSP보다 훨씬 큰 폭으로 축소됐다. 에콰도르에게는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2013년 에콰도르의 바나나 수출이 25% 감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FTA를 통해 콜롬비아산 바나나와 페루산 바나나에 부과되는 관세가 점진적으로 축소돼 2020년까지 1톤 당 최저 75유로(에콰도르의 경우 114유로)에 이를 예정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신념과 바나나 사이에서 고민하던 코레아 대통령은 일단 선택을 거부했다. EU에서는 그에게 콜롬비아나 페루와 동일한 내용의 협정문에 조인할 것을 제안했으나 코레아 대통령은 협정기한을 논의하고자 했다. 소용없는 일이었다. EU은 그리스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와의 협상에서 만큼이나 코레아 대통령과의 협상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협정의 체결과 포기, 둘 중 하나 밖에 없었다. 협상장에서 EU 대표는 에콰도르 협상단에게, GSP에서 제외된 에콰도르에게는 “FTA에 서명하는 것과 고립, 둘 중에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EL Diario, 2014.11.8.) 결국 코레아 대통령은 신념 대신 바나나를 선택해야 했다.


글·르노 랑베르 Renaud Lambe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