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연출가 타데우스 칸토르의 미학

2015-12-31     기 스카르페타

비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공식 행사는 없었지만, 폴란드 출신의 연출가 타데우스 칸토르는 현대 연극인들에게 여전히 신화적인 인물로 남아있다. 그의 예술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이상하다. 추모에 대한 강박관념이 모든 역사의식을 대체하는 오늘날, 타데우스 칸토르의 탄생 100주년인 2015년은 너무 조용히 지나갔다. 프랑스의 경우, 오데옹 극장에서 비밀리에 진행된 추모의 밤, 소르본 대학에서 비공개로 개최된 토론회, 아비뇽 축제에서 젊은 배우들이 번외로 준비한 소규모 축하행사(현 아비뇽 축제 운영진들의 반대로 공식 프로그램에서 제외) 정도가 전부다. 신문‧출판‧방송은 잠잠했다. 한마디로, 세상은 칸토르의 예술 세계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돌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기억은 희미하고 뿌옇게 흩어진 채로 오늘날 연극계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있다. 특히나 칸토르의 작품을 직접 접해보지 못한 젊은 연극인들도 모두 칸토르를 전설적인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다. 1975년부터 1990년에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적이고 파괴적인 경험이 존재했다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감지하고 있는 듯하다. 이는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예술은 본래 예술가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지게 마련인데, 칸토르의 예술세계는 마치 죽은 별들처럼 실체는 오래전 사라졌지만, 그 은은한 빛은 여전히 우리 가까이에서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1935~1938년, 앙토냉 아르토는 ‘연극과 그 분신(Le Théâ̂tre et son double)'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이상적인 연극모델을 제시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연극은 정해진 대본을 읊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예술이자 의미를 위한 시’가 돼야 한다. 또한 연극의 구성요소인 조명, 음향, 무대 장치, 배우들의 연기가 모든 기능을 벗어던짐으로써 극작가가 아닌 연출자가 단 한 명의 진정한 창조자가 되고, 관객은 행위를 연기하는 모습이 아닌 실제행위 자체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르토가 꿈꿨던 연극 모델은 그로부터 30년 넘게 지나서야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완전히 새로운 연극적 형태로, 조형예술의 변두리에서, 계획된 연기가 아닌 즉각적이고 즉흥적인 개입에 의해 탄생한 것이다(해프닝, 행위, 퍼포먼스). 1970년대에는 줄리안 벡, 카르멜로 벤, 밥 윌슨, 리차드 포먼 등의 연출자-창조자가 등장해 각자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선보였다.(1) 그리고 칸토르는 이러한 흐름을 이끄는 중심인물이었다.

칸토르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1915년, 칸토르는 폴란드에서 유대인 아버지와 기독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역사적 소용돌이의 한 가운데 있었던 셈이다. 칸토르가 크라쿠프 미술학교에서 공부를 마쳤을 때, 폴란드는 나치 치하에 있었고 그의 아버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돼 있었다. 칸토르는 지하에서 비밀리에 제작된 ‘율리시즈의 귀환’에 참여하면서 연극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그 후 전후 수립된 공산주의 정권이 정부를 찬양하는 작품을 창작할 것을 강요하자(사회주의 리얼리즘), 이를 거부하고 다시금 지하세계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폴란드를 떠날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칸토르는 이후 몇 년 간 계속 지하에서 예술활동에 몰두했는데, 이는 서구 세계에서 아방가르드(추상화, 앵포르멜, 신 초현실주의, ‘레디메이드’ 오브제)가 유행했던 시기와 맞물린다. 그가 간헐적으로 올렸던 ‘해프닝’ 공연은 당시만 해도 폴란드 외의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시도였다. 그리고 칸토르는 점점 더 연속적인 형태의 무대 연출에 관심을 가졌고, 스타니슬라프 비트키에비치(2)의 작품을 전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연출해 자신이 직접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이 시점을 시작으로 칸토르의 명성은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5년에 급진적인 실험 연극 ‘죽음의 교실’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그의 예술세계는 새로운 차원과 도약의 시기를 맞이했다. ‘죽음의 교실’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유럽 출신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칸토르 역시 잊혀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60세에 발표한 이 작품을 계기로 칸토르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평가기준조차 부재한 그의 독특한 연극적 천재성은 서서히 전 세계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했다. “아방가르드라는 고속도로를 벗어나 묘지로 향하는 좁은 길로 들어섰다”고, 나중에 그는 웃으면서 당시를 회고했다.

미국에서 활동하던 동료 예술가들과는 달리 칸토르는 형태를 창조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따라서 형식주의를 거부했다. 반대로 그의 연극은 역사적 사실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칸토르는 세 가지 분쟁, 즉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 나치의 폴란드 점령과 폴란드 내 유대인들에 대한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말살 정책, 그리고 전후 스탈린 체제의 수립과 과거의 ‘퇴폐적인(Decadent)’ 흔적들을 뿌리 뽑으려는 노력을 작품 속에 투영했다.

칸토르의 연극은 어떤 면에서 억압된 것들의 반발, 무너진 역사와 사라진 기억의 재건과도 같다. 장면은 희미하고 뿌연 형태로 표현된다. 잊혀진 것과 죽은 것에서 본뜬 이 형태들은 죽음의 흔적과 부활을 의미한다. 만일 역사를 재현한다면, 그것은 사실적인 방식이 아니라 붕괴되고 환각적인 이미지의 형태로만 가능할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고야의 예술 세계, ‘변덕들(Los Caprichos)'과 ‘전쟁의 참화(Los desastres de la guerra)’를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칸토르의 개성 덕분에 그의 작품은 비극적이고, 가슴을 에는 듯이 날카롭고, 또한 의도적으로 익살스럽다. 페이소스와 아이러니가 함께하고, 신성한 것과 불경스러운 소극이 공존한다. 오직 칸토르 작품에만 있는 놀랍도록 감정적인 분위기, 관객들을 웃기는 동시에 울리는 비밀이 여기 있다. 현재 보존돼 있는 비디오 촬영본으로는 그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칸토르는 걸작들을 내리 발표했다. 대단히 당혹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인 공연 ‘죽음의 교실’에서는 천재지변 속에서 살아남은 성인들이 교실로 돌아와 어렸을 적 자신들의 모습을 하고있는 인형들과 마주한다. 그리고 농담과 익살, 유령의 등장, 소란과 소동을 거쳐 이들은 점점 더 인형을 닮아가고, 반대로 인형들은 살아있는 사람을 닮아간다. ‘빌로폴, 빌로폴(1980)’에서는 ‘다른 세상’이 돼 버린 전후 폴란드에 칸토르가 유년시절 접했던 인물들이 갑자기 등장하면서 우스꽝스럽고, 짓궂고, 감정을 동요시키는 상황들이 펼쳐진다. 과격한 장면들이 이어지는 ‘예술가들은 죽어야 한다’(1985)에서는 폴란드의 역사 인물들과 칸토르의 개인적인 환상 속 인물들이(‘유령의 집’, ‘거지 소굴’) 무대 위로 돌진해 보여주는 광기어린 원무가 잊을 수 없는 잔상을 남긴다(뼈대만 남은 말 위에 올라탄 필수드스키 수상, 죽음의 천사로 변신한 창녀). 중간 중간 촌극들이 삽입되는데, 종종 활인화(Living picture)의 형태로 표현되며 분해-재구성되고, 혁명과 폭동이 일어나고, 광적인 움직임이 시작되고, 결국에는 모두 붕괴한다. ‘나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1988)’는 일종의 요점정리 같은 작품으로, 칸토르의 이전 작품들에서 등장했던 거의 모든 오브제들과 인물들(사제, 가스실에서 희생자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면서 생을 마감하는 하녀, 닭장 속에 갇힌 검은 스타킹을 신은 창녀, 바이올리니스트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십자가, 교수대, 덮개, 기괴한 무대 장치들)이 조화를 이루고, 충돌하고, 서로 얽히고, 폭력적이고 기묘한 악몽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며, 우리 시대에 가장 강렬하고 인상적인 죽음의 춤을 보여준다.

칸토르 미학

그렇다면 칸토르 미학의 대표적인 특징들은 무엇일까?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예술의 자율성’이다. 원칙에 대해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 고집이다. 칸토르는 연극적 창조에 관한한 어떠한 권력에도 순응하기를 거부했다. 두 번째는, 리드미컬한 운율을 엄격하게 따르면서도 연속적인 회화 모델에 부응하는 독특한 방식이다(강약 조절, 블록 별 구성, 긴장선, 비틀린 형태 등). 세 번째는, 다양한 연극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들을 환상적 효과, 시각적 이미지, 공연 전체를 구성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1인칭’의 전례 없이 주관적인 연극을 창시했다는 사실이다. 칸토르는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등장하되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모습으로 장면마다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의 기억 속에 자리한 강박관념과 고뇌를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이 네 가지 특징들의 조합을 통해 칸토르만의 예술세계가 완성될 수 있었다.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도 칸토르는 굴복하지 않았다. 후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돼 당국에서도 그의 작품 활동을 저지하지 못할 때까지, 칸토르는 지하에서 꾸준히 공연을 기획했다. 1956년, 1970년, 1980년 해빙기 때는 좀 더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또한 1989년 공산주의가 붕괴된 뒤에는 그 이후에 펼쳐질 상황들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가장 ‘순응적’인 ‘가톨릭주의’와 가장 역겨운 폴란드 국가주의의 귀환을 우려하면서, 또 다른 이데올로기가 주도권을 잡아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폴란드 출신의 극작가 및 소설가인 비톨트 곰브로비치(3)와 마찬가지로 칸토르 역시 이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내비쳤다). 그리고 이전 시대의 문화적 독재가 그랬듯, ‘시장의 법칙’이 ‘예술의 자율성’을 위협할 것이라 전망했다.(4) 이는 1990년, 칸토르가 세상을 뜨기 몇 달 전에 인터뷰를 통해 했던 말들이다. 칸토르의 말에 의하면, “예술은 현실에 대한 반영도 변환도 아니다. 현실에 대한 응답이다.” 칸토르는 올해 100세가 됐다. 역설적이게도, 앞으로의 그의 행보가 더 기대된다.


글·기 스카르페타 Guy Scarpetta
작가, 최신작으로 <마법사, 라울 루이즈>(브누아 피터스 공저, Les Impressions Nouvelles, 브뤼셀, 2015)등이 있다.

번역·김소연 dec2323@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조형 예술에서 영감을 얻은 ‘퍼포먼스’로 연극 작품을 구성하는 일은 오늘날 몇몇 연출자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로드리고 가르시아와 로메오 카스텔루치가 대표적이다.
(2) 폴란드의 화가, 철학자, 극작가(1885~1939)
(3) 폴란드 출신의 작가로(1904~1969)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며, ‘페르디두르케(Ferdydurke)(1937), ‘코스모스(Cosmos)(1964)’를 발표.
(4) <그들이 말하는 자유>, 1990년 2월 인터뷰, [기 스카르페타, <현재 시점에서 바라보는 칸토르>, Actes Sud, 아를르, 2000년]에 인용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