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권력이 조장하는 ‘문화의 정치화’

신자유주의 우파 정권 “경제위기 해법은 문화”…문화주인공들 제치고 대통령이 핵심 전도사로

2009-11-05     에블린 피엘| 번역가 겸 소설가, 시인

지난 1월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현재의 경제위기가 문화의 필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진단하며 “이 메시지를 국가에 전한다”고 덧붙였다. 알다시피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은 자신의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형이다. 그래서 지난 2월 이 위기의 결과에 대한 이유 있는 분석을 내놓으면서 ‘예술창작위원회’를 새로 설치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프랑스 정부는 이처럼 문화가 경제위기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을 공식적으로 발표함으로써 다시 한번 그 독창성을 빛나게 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문화’라는 단어는 도대체 정확히 무엇을 지칭하는지 애매할 때가 많다. 그러나 사르코지는 이 어휘의 개념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 “우리의 문화는 가장 소중한 재산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며, 우리 사회를 지탱하고 함께하는 것으로서 우리 문명을 구성하는 것입니다.”(1)

더 나아가, 사르코지는 “금융위기나 경제·사회적 위기보다는 문화와 윤리의 위기가 우리를 관통하고 있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의 생각 속에서 ‘문화’는 ‘가치’와 동일시된다. 프랑스 문화부의 역사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문화부 창설 50주년 기념일인 2009년 2월 3일은 상징적인 날이다. 예술창작위원회가 설치된 그 전날 역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문화부 창설 50주년을 기념하는 크리스틴 알바넬 문화장관의 연설은 그다지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날의 스타는 단연 대통령이었다. 그의 연설 솜씨는 약간 애교스러웠지만 그 솔직함은 칭찬해줄 만했다. 위원회는 그에게 직접적으로는 비난할 만한 것이 없는 하나의 ‘카운터 프로젝트’ 같은 셈이었다. 장관은 명퇴를 앞둔 표정처럼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을 뿐이다. 게다가 사르코지는 감추는 것이 없었다. 그는 관료들의 ‘부동자세’를 흔들려는 대담함을 감추지 않았다.

헷갈리는 문화 위기의 본질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사르코지는 좌파 성향의 문화계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낸 적이 없었다. 위의 담화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적절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프랑스의 문예 전성기를 가져온 사를 5세나 프랑수아 1세를 언급하면서 위원회의 창설을 정당화했을 때, 그는 공화국의 미덕에 대해서는 그다지 주목한 것 같지 않았다. 루아르 강변에 성곽을 세운 것보다는 루브르궁을 국유화한 것에 더 주목했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 특히 문화계 인사들을 놀라게 했다. 예술창작위원회는 마린 카미츠를 필두로 12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데, 특이한 사실은 대통령이 회의를 주재한다는 점이다. 카미츠에 의하면 위원회는 누구보다 먼저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한다고 한다. 이것이 조금 혼란스러운 대목이다.(2)

마지막으로 중요한 점은 옛것을 모방하는 ‘고풍주의’라는 오래된 짐을 던져버리고 우리의 국제적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바란다면 대통령의 권한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진부한 행태에 집착하지 않고 정책의 창의성을 평가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법이다.

위원회의 목표는 이미 공감대가 형성된 부분이다. “프랑스 예술가들이 꽃을 피우고 외국의 예술가들을 불러들여 재능을 발휘하게 하며 거리와 사이버공간에 예술품을 전시하는 것이다.”(3) 위원회의 출범을 계기로 프랑스가 향후 ‘문화의 변화’를 자극하고 수십 년간의 나쁜 습관들을 떨쳐버리기 기대해볼 만하다. 앙드레 말로가 “우선은 가장 많은 프랑스 작품들을 포함한 인류의 주요한 작품들에 사람들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고, 우리의 문화제를 널리 알려 작품의 창조와 예술정신을 고양해야 한다”고 피력한 문화부의 임무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위원회는 지난 50년간의 허약한 문화정책을 수정함으로써 예술가에 대한 지원을 집중하고, 학구적인 틀에서 벗어나 작품의 대중화를 도모해 청소년과 친숙해지고 현대성에 잘 조화를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어설픈 문화의 민주화

문화부와 위원회의 ‘역할’ 분담은 외견상 분명하다. 문화부는 문화재를 관리하고, 위원회는 창조와 작품의 유포를 책임진다. 그러나 위원회가 예술가, 좀더 광범위하게는 문화적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유혹하려는 사업’을 하는 단체처럼 인식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당장 이 위원회에 반대할 이유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위원회는 9월 ‘현재와 미래를 대비한 더 폭넓고 강력한 문화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10개의 아이디어를 공식 채널을 통해 발표했다. 피에르 닥이 말했듯이 미래를 예측하긴 어렵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하나의 관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아쉬운 것은 10개 제안 중에 단 2개만이 ‘창조’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여기에 접근하려면 나이가 어려야 하고 상대적으로 준비가 덜 돼 있어야 한다는 것이 필수 조건이다. 2개의 제안 중 하나는 ‘역사 기념지’를 ‘창조적 목적’으로 전용해 사용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도시 근교에 있는 하천지에 영화학교를 지어서 ‘거리의 영화’를 만들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창조적 목적’이라는 용어가 넘쳐나게 될 것이고 대중영화로 넘쳐나는 도시의 ‘대중성’을 꿈꾸게 될 것이다. 각 사회 계층은 자기 나름의 미학을 갖고 있지 않겠는가.

이것이 전부다. 초라하다. 그러나 이 프로그램의 요점은 너무 엘리트적인 ‘문화의 민주화’다. 20세기 작품들을 보여주기 위한 이동 미술관, 학생의 요청에 따른 비디오 서비스, 빈민 지역에서 음악을 접해보지 못한 어려운 상황의 청소년들에게 고전음악 연주단에 참여하게 하는 것… 그 정도다. 변덕스럽고 유동적인 만큼 놀랍기도 하다. 그 자체로는 도저히 문화정책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이런 ‘세심한’ 잡동사니 프로그램으로는 아슬아슬하게 민중 선동정책의 경계를 스친다. 잘 포장하려면 ‘민주화’라는 옷을 입혀야 할 것이다.

놀라운 것도 없고 공격적이지도 않다. 다만 이 위원회에 부여된 또 다른 임무들은 훨씬 덜 명확하다는 점이 유감이다. 위원회는 우선적으로 “예술적 창조를 위한 새로운 원천을 조성하려면 그것을 가능케 할 조치들의 본질을 검토해야 한다.” 카미츠가 정확히 지적하듯이 “관객과 대중을 동원해야 하고 공공 재정 말고도 개인에 의한 재정 조달도 해야 한다. 예술가는 자기만이 유일한 예술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공공 보조는 ‘자선’의 성격이 강한 것인가? 위원회가 비용이 많이 드는 연극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인터넷에 집착하는 것을 이해할 수는 있다. 제안된 아이디어 중 4개가 인터넷과 관련됐다. 이 프로그램에서 ‘창조’는 미미한 자리를 차지하고 ‘시민’보다는 ‘관객’이 더욱 주된 관심사라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7천만 유로의 매출액을 올린 ‘엠케이2’라는 회사의 설립자인 카미츠에 의하면, “문화는 반항에 의해서만 형성된다”고 한다. 무엇에 대한 반항인가? 어려운 시기에 설정한 목표에 대한 반항? 아니면 문화부의 자유주의적 개혁에 대한 반항인가?(4)

글·에블린 피엘 Evelyne Pieller

번역·이진홍 memosia@ilemonde.com
파리7대학 불문학 박사. 주요 역·저서로 <진보와 그의 적들>(2003), <자살>(2004) 등이 있다. 


<각주>

(1) 2009년 2월 2일, 예술창작위원회 창립시의 연설.

(2) 총리와 문화부 장관은 우파 인물이다.

(3) 2009년 2월 2일, 예술창작위원회 창립시의 연설.

(4) 전국문화예술기업노조(Syndeac)는 위원회의 폐지를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