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40년에 만나는 파솔리니의 찬란함

2015-12-31     세바스티앙 라파크


“우리는 한 명의 증인, 특별한 증인을 잃었다. 하지만 재차 말하건대, 그의 특별함은 무엇인가? 어찌 보면 그가 한 시도는 뭐랄까, 일종의 도발이었기 때문이다. 무기력한 이탈리아 사회 안에서 적극적이고 유익한 반응을 끌어내는 도발. 그의 남다름은 계산이나 타협, 망설임 없는 유익한 도발에서 기인하는 것이 분명하다.”(1)

1975년 11월 2일 오전,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오스티아의 어느 해변에서 머리가 으스러져 숨진 채 발견된 지 40년이 넘었다. 파솔리니 사후 40년 이상 지난 오늘날, 새삼 그의 친구이자 작가인 알베르토 모라비아가 낭송한 추도사의 비통한 문구들이 떠오른다. 파솔리니는 탁월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탁월함은 흔히 말하는 그런 탁월함과는 다르다. 물론 그는 공산주의자였고 남자를 좋아했는데, 전후 이탈리아에서 이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파솔리니는 소설과 영화에 자신의 열정을 반복적으로 담아 수많은 소송에 직면했다. 그리고 도덕적 심판과 무차별 폭력으로 인해 근심 속에서 평생을 보냈으나, 그는 충분히 가치 있는 일로 여겼다. 하지만 파솔리니의 영혼이 지닌 신비성이야말로 ‘범상하고 무가치한 무리’(2)와 그를 구분 짓는 요소였다. 파솔리니가 16세에 처음 접한 아르튀르 랭보의 통찰력 깊은 시에서처럼, 그도 역시 ‘인간이 본다고 믿었던 것을 이따금 실제로 보았다.’ 그리고 <계시(Illuminations)>의 저자 랭보처럼 이러한 환영을 진지하게 여겼고, 그 비극적인 책무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로마의 하층 노동자 중에서 자기 영화에 출연할 배우를 발굴하는 것을 좋아했던 파솔리니는 섬세하지만 난해한 예술가이자 교육자였으며, 사람들, 또는 사람들의 시선에 의해 현혹당하지 않는 현자(賢者)였다. 파솔리니의 눈에 기만과 거짓, 위선은 너무나 명백하게 보였다. “나는 단 한 번도 사람들의 인간성을 잘못 판단한 적이 없다. / 나의 리비도와 나의 수줍음이 / 내가 나의 닮은꼴들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3)

파솔리니가 유년기의 일부를 보낸 프리울리 지역(이탈리아 북동부 지방-역주)에서 그는 노동자와 자본가, 그리고 먹이사슬의 존재를 발견하고 1945년 칼 마르크스의 책을 읽었다. “시칠리아처럼, 아직도 봉건제도 하의 노예가 실존하고 있었다. 라티펀디아(노예제를 통해 존속하는 대농장 제도-역주)가 그것이다. 나의 몸은 그곳에, 빨간 스카프를 두른 채 깃발을 들고 연대하는 날품팔이 노동자들과 지주들이 있는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책을 한 장도 읽지 않은 채, 나는 자연스레 프리울리 노동자들 편이 됐다.”(4)
파솔리니는 정의라는 가치를 두고 투기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수많은 책략가들이 ‘정의’라는 가치가 하락 중인 주식을 사들인 후, 높은 값에 되팔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는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대항하려는 열정과 의지였다. “그는 사리사욕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남달랐다”고 모라비아는 재차 언급한 바 있다.(5)

파솔리니의 이러한 사심 없음, 그리고 오랜 이타성은 그의 다작(多作) 행보를 설명해준다. <생명의 젊은이(Ragazzi di vita, 1955)>, <폭력적인 삶(Una vita violenta, 1959)>, <석유(Petrolio, 1992, 사후 출판)>를 위시한 주요 소설과 <맘마 로마(Mamma Roma, 1962)>, <마태복음서(Il Vangelo secondo Matteo, 1964)>, <살로 소돔의 120일(Salò o le 120 giornate di Sodoma, 1975)>을 비롯해 걸출한 명작이 대부분인 장편영화 열두 편뿐 아니라 희곡, 수백 편의 시와 번역 작품, 평론 등이 <해적의 글(Scritti corsari, 1975)>과 <루터교도의 편지(Lettere luterane, 1976)>로 묶여 있다. 이는 그 중요성과 가치를 따지기 힘든 위대한 작품들이며, 그 진가가 이제야 겨우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는 용암을 더 이상 어떠한 무관심으로도 식힐 수 없으리라.

파솔리니에게는 전기 작가가 필요하지 않다. 그의 인생은 전부 공공연히 드러나 남김없이 바쳐진 그의 작품 속에 존재하니까. 그는 “은둔의 성인”, “절대 아버지가 될 수 없는 아들”, “특권을 지닌 마르크스주의 시인”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정의했다. 하지만 “나는 과거의 힘이다. / 내 사랑은 전통 속에만 존재한다. / 나는 폐허와 교회, / 제단 뒤 장식화에서, / 내 형제들이 살았던 / 아펜니노 산맥과 알프스 산기슭의 / 버려진 마을에서 왔다”처럼 예상치 못한 표현도 있는데, 이는 시집 <장미 모양의 시(Poesia in forma di rosa)>(6)에 수록된 시다. 샤를 페기가 “나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대정당(大政黨)”의 기치를 높이 올리며 <빅토르-마리, 위고 이야기>에서 그랬듯이, 1922년생으로 당시 40세 남자였던 파솔리니가 그의 유년기, 시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회상하며 1960년대 초에 지은 자전적 애가다. 페기와 파솔리니라고? 그들의 연관성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조르주 베르나노스나 빅토르 세르주, 조지 오웰, 시몬 베유, 알베르 카뮈처럼, 자유를 향한 투쟁과 관련된 상황 속에서 두 시인은 비겁함과 몰지각함을 비난하고자 자신의 진영을 대담하게 공격했다. 파시즘 성향을 지닌 관리의 아들 출신으로, 종전 직전에 살해당한 레지스탕스 동생을 둔 파솔리니는 “자기 가족에 반(反)하는, 때로는 가족의 배척을 초래하는 저항”을 증명했다. 페기가 드레퓌스주의의 맹목성이 결국에는 정치행각으로 끝나는 것을 본 것처럼, 파솔리니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목이 매달려 처형당한 지 한참 후 반파시즘이 어떻게 됐는지 목격했다. “오늘날 반파시즘, 혹은 반파시즘이라 불리는 것의 대다수는 온갖 안락과 평온함으로부터 반파시즘을 끄집어낸다. 나는 사회학자들이 아주 상냥하게 ‘소비사회’라고 이름 붙인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파시즘이라고 마음속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해적의 글>

이는 1975년 죽음의 날(멕시코의 기념일. 10월 31일에 시작돼 11월 첫째 날과 둘째 날 행사가 치러짐-역주)에 무참히 살해당하기 얼마 전, 말년의 파솔리니가 1973~1975년 기사에서 언급했던 내용이다. 파솔리니의 끔찍한 죽음을 그의 시적 문체가 지닌 자유로움과 연관 짓는 것은 분명 매혹적인 시도이다. 최근 파솔리니에게 바쳐진 가장 뛰어난 평론인 <작품의 무언가(Qulque chose d'écrit)>(7)에서, 이탈리아 저자 엠마누엘레 트레비는 <석유>가 집필된 유래를 밝힌다. 파솔리니가 말년의 3년을 할애한 이 작품이야말로 그의 목숨을 앗아간 원흉일지도 모른다. 1974년 일간지 <코리에레델라세라>에 ‘쿠데타란 무엇인가?’(8)라는 제목으로 실린 기사에서 파솔리니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1969년 12월 12일 밀라노 학살(우파 테러리스트들에 의해 발생한 밀라노 몬타노 광장의 폭발사건을 가리킴-역주)을 일으킨 장본인의 이름을 안다. 나는 1974년 초 브레시카와 볼로뉴의 학살 사건(9)이 누구 책임인지 안다.” 이러한 대담성을 계속 밀고 나가, <그람시의 재(Le ceneri di Gramsci, 1957)>의 저자는 권력의 사악한 성질을 드러내길 갈망하는 ‘완전한 책’의 집필에 1972년 착수했다.

파솔리니는 죄의식을 고취시키는 고결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도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며 이탈리아공산당(PCI)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TV와 미 중앙정보국(CIA), 그리스 장군들, 마피아의 지휘 계급을 노렸으며, 최후의 저서에서 기업권력과 석유관련 압력단체를 공격했다. 최면을 일으키는 듯 한 이 최후의 작품은 각종 문헌자료에서부터 온갖 형태의 내레이션을 활용했으며, 성(性)과 죽음, 정치, 신화와 현실, 지혜와 광기가 뒤섞여있다. 1972년 3월 5일 50세 생일을 맞이한 파솔리니는 부르주아지를 향한 증오가 절정에 달해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악마다(La borghesia è il diavolo).” 말년의 파솔리니에게서 ‘악마’라는 말이 나온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무신론자이자 비종교인이었던 그는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성스러움에 대한 자신의 견해에 부합하는 신을 연상시키는 단어를 사용한 적이 없었으나, 오늘날 역사의 이면에서 제 힘을 행사하는 악마(Maligno)를 보았다.

마지막 10년간의 글과 작품에서 더욱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잃어버린 유년기의 순수에 대한 집착, 어머니 수잔나 콜루시의 매혹적인 존재감이다. 파솔리니는 영화 <마태복음서>의 성모 마리아 역할을 어머니에게 맡겼다.

“당신은 그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예요. 그래서 당신이 내게 준 삶은 고독에 빠진 것입니다. / 나는 홀로 있고 싶어요. 나는 사랑에 대한, 영혼이 떠난 몸에 대한 사랑을 향한 터무니없는 갈망이 있어요. / 왜냐면 영혼은 당신에게 있으니까, 영혼이 당신 자신이며, 당신은 그저 나의 어머니요. 당신의 사랑은 나의 복종이니까. / 나는 어린 시절 내내 거대한 약속에 대한 이러한 감정에, 한껏 고양돼 있으며 돌이킬 수 없는 감정에 굴복한 채로 살았어요.”(10)

<장미 모양의 시>에서 파솔리니는 기이하게도 자신을 ‘성인 태아’로 정의했다. 이는 이탈리아에서 낙태 합법화 논란이 일었을 때의 그의 불편한, 그리고 이해받기 어려운 입장을 해명해주는 기이한 이미지다. 자궁 내에서의 행복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고 맹세하던 그는 낙태에 대해 형이상학적으로는 반대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찬성했다. 파솔리니는 소비사회에 의한 성생활 지배로 여겼던 것에 대한 개인적인 반감을 구식 법적장치로 반복된 혼란, 계급 불평등의 명백한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힘을 발휘했다. 이는 비극적이면서도 감동적이다. 1968년, 학생들은 부르주아고 경찰들은 프롤레타리아이므로 자신은 학생들에 맞선 경찰들의 편이라고 말했던 그는 스캔들을 아랑곳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낙태에 관한 그의 본질적 감정을 도발적 취향이나 공산적 청교도주의, 기독교도의 지나친 수줍음과 연관 짓는 것은 잘못된 생각일 것이다. 이를 명확히 하려면 모친의 유해에 대한 그의 변함없고 단호한 집착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는 프리울리 노동자들의 빨간 스카프처럼 시각적인 문제다. 그는 1949년 미성년자를 유혹한 문제로 교직과 공산당에서 제명당했다. 그리고 자신을 따라 로마까지 따라온 용기를 보여준 ‘슬픈 성모(어머니)’와 늘 함께했다. “나는 어머니와 가방 하나, 거짓으로 드러난 몇 가지 기쁨들과 함께 화물열차처럼 느린 기차를 타고 달아났다.” 파솔리니에 대한 경의의 마음을 담아 떠난 답사의 일종인 <파솔리니의 발자취(La Piste Pasolini)>(11)에서 저자 피에르 아드리앙은 당연한 일이지만 파솔리니의 무덤이 위치한 우디네 서부 포르테노네 지방 카사르사 마을의 공동묘지에서 시간을 보낸다. 파솔리니의 부친과 형은 좀 더 멀리 떨어져 묻힌 반면, 파솔리니는 소박한 포석 아래 모친과 함께 묻혀 있다. 파솔리니는 “어쩌면 그 누구도 이 정도 수위의 욕망, 죽음의 번민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적으며 아들과 어머니를 이어주는 본질적이고도 위험한 열정을 밝혔다. 어쩌면 여기에 그의 위대함과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


글·세바스티앙 라파크 Sébastien Lapaque
<리오 드 자네이로의 이론(Théorie de Rio de Janeiro)> (Actes Sud, Arles, 2014)의 저자


번역·박나리 
연세대 불문학 및 국문학 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Collectif, <Pasolini Roma>, Skira Flammarion - Cinémathèque française, Paris, 2013.
(2) Pier Paolo Pasolini, <Ecrits corsaires>, Champs-Flammarion, Paris, 1987.
(3) Pier Paolo Pasolini, <Qui je suis>, Graziella Chiarcossi의 개정판, Arléa, Paris, 2015.
(4) Pier Paolo Pasolini, <L’Inédit de New York>, Giuseppe Cardillo와의 대담집, Arléa, 2015.
(5) Guy Scarpetta, ‘Pasolini, un réfractaire exemplaire’, Le Monde diplomatique, février 2006. 참조.
(6) Pier Paolo Pasolini, <Poésie en forme de rose>, René de Ceccatty 편역 및 서문, Rivages poche, coll. «Petite bibliothèque», Paris, 2015.
(7) Emanuele Trevi, <Quelque chose d’écrit>, Actes Sud, Arles, 2013.
(8) ‘Le Roman des massacres’라는 제목으로 가필 수정돼 <Ecrits corsaires>에 실린 기사.
(9) 이탈리아의 사회정치적 혼란기인 1970~1980년대 ‘납탄시대’ 중 ‘긴장 전략(Strategia della tensione)’에 의해, 극좌파의 소행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극우파가 계획한 테러.
(10) Pier Paolo Pasolini, <Poésie en forme de rose>, op. cit.
(11) Pierre Adrian, <La Piste Pasolini>, Equateurs, Paris,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