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나의 아름다운 주제여

2015-12-31     제라르 모르디아


문학작품이나 영화에 대한 절대적인 필요성이 사라졌다. 그럼에도 매년 수백 편의 책과 영화, TV드라마가 생산과 소비를 거듭하는 것은 과연 어떤 강력한 요구에 대한 응답일까? 전적으로, ‘도시국가와 연관된’ 정치적인 필요성 때문일까? 아니면, 작가 자신들의 삶이 관계된 사적인 필요성? 환부를 과감히 도려내려는 지성적 필요성? 다 틀렸다. 이제는 오직 하나의 필요성, 금전적 필요성만이 창작을 지배한다. 미디어에서는 이윤의 정도에 따라 우수성이 정해지는 순위표라도 만들듯 정기적으로 최다 판매 서적, 최다 관객 입장 영화를 발표한다.


따라서, 공공투자자들이건 개인투자자들이건 이들에게는 일명 공감되는 주제들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작가들을 고무시키는 열정적인 필요성을 쓸어내며 수익성 요구에 부합하는 그런 주제들. 이런 이유로, 이제 소설가나 영화인들에게는 먼저 단 하나의 질문에 대답할 것이 요구된다. “주제가 무엇인가?”

주제! 주제! 주제!

몰리에르의 작품에서처럼 “폐! 폐! 폐!”(1) 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 주제! 주제!”하게 된 것이다. 주제와 관련된 이러한 열광의 이유에는 평론가들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아이디어의 매개체로서 텔레비전은 교묘하게 문학비평과 영화비평을 타락시켰다. 비평가들은 점점 소설을 있는 그대로 읽거나, 영화를 연출된 그대로 보지 못하게 돼버렸고, 주제 찾기에만 열중한 채 문학과 영화 그 자체를 잊어버렸다. 소설과 영화는 작품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비평가들이 소설과 영화를 통해 찾아낸 주제로서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게 돼버렸다. 예를 들면, 로랑 세크직의 소설 <의술>을 읽고는 “변치 않는 신념과 정체성에 대한 문제 그리고 암이라는 비극, 불임의 번뇌가 담겨 있다”고 말하고, 에릭 라인하르트의 <사랑과 숲>에 대해선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전남편에게 고통 받던 한 여성의 해방”이라 말하며, 또 미하엘 콜마이어의 <해변의 두 남자>에 대해선 “모든 것이 사실이다. 창작과 우정은 이 책의 두 가지 큰 테마다”라고 말한다. 변치 않는 신념, 정체성, 암, 불임, 해방, 진실, 창작, 우정···, 신문과 라디오, 텔레비전 방송에서는 이 단어들로부터 수백, 수천 개의 화려한 글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같은 형식으로 만들어진다. 보도자료와 책표지 또는 홍보자료에 등장하는 장황한 문장들 그리고 호평이든 혹평이든 작품 자체가 아닌 작품의 주제에 대한 일련의 평가들, 마찬가지로 작가에 대해 작가나 영화인이 아닌 한 개인에 대한 칭찬과 조롱 그리고 비방들.

주제를 알면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지 않아도 된다. 이야기체, 문체, 문법, 새로운 어휘나 영상 및 음성기법 등을 헤아려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단순한 일화가 돼버린 작품은 두 명의 무장경찰 사이에 놓인 도망자가 돼버린다. 이럴 경우, 예를 들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나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또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제가 무엇이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아주 쉬울 것이다.

“진짜 이야기”가 품질 보증표

이러한 일화적인 측면에서, 투자자들뿐만 아니라 평론가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진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이라는 언급은 품질 보증표가 돼버렸다. 그렇다면 “가짜 이야기”란 무엇인가, 소설?

영화에서도 이는 피할 수 없는 기준이 돼버렸다.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마틴 스콜세지), <쉰들러 리스트>(스티븐 스필버그), <퍼블릭 에너미 넘버원>(장프랑수아 리셰), <늑대 소녀>(베라 벨몽), <언터처블>(올리비에 나카슈, 에릭 톨레다노) 등 수천 편의 영화들을 봐도 그렇다. 오늘날 미국 영화와 유럽 영화 다섯 편 중 네 편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이라는 문구를 달고 있다. 역설적으로, 1973년에 이미 오손 웰스는 그의 영화 <거짓의 F>를 통해 이렇게 비꼰 바 있다. “이 영화는 속임수와 사기, 거짓말을 다루고 있다. 집이나 거리, 영화관에서 듣는 모든 이야기는 확실하게 거의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앞으로 나오는 화면에서 보는 모든 것들은 완벽한 사실이다.” 픽션에 대항하는 “실화”, 소설에 대항하는 “공감되는 주제”의 부상과 관련해, 요한복음에 나온 빌라도의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진리가 무엇이오?”(요한복음서 18장 38절) 어떻게 이 말에 반박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짜라 주장하는 이 주제는 그저 돈을 벌기 위한 미끼이자 어리석은 속임수일 뿐이다.

문학 작품에서는 연애, 노골적으로 말해 성관계와 관련된 주제가 명실상부한 인기 주제다. 그래서 해마다 크리스틴 앙고식 표현(앙고는 선정적인 자전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역주)들을 동원해, 실화임을 내세우며 어떻게 작가 자신이 친부에게 강간을 당했고, 친모와 성관계를 맺었으며, 누이와 동거를 했고, 형제자매, 부모, 심지어 반려동물과 관계를 했는지 이야기하는 소설들이 넘쳐난다. 이를 토대로 주인공에 대해 갖가지 변주가 덧붙여지기도 한다(극단적 보수주의 이슬람교도가 된 독실한 가톨릭 신자, 혐오스러운 신체 기형을 가진 괴물, 거식증에 걸린 하이데거 전문가, 나치 학살 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의 옛 대원, 쿵푸에 빠진 병적 허기증의 서광 환자 등). 이런 기막힌 것들과 그것들의 선구자들이 문학의 모든 영토를 차지한 뒤, 문학이라는 산을 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설들을 아무도 못 빠져나가게 철조망으로 막아 놓은 반투스탄(1960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반투족 흑인을 격리하고 인종분리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설정한 보호령-역주)으로 밀어 넣는다면 얼마나 우스운 일이겠는가?

영화에서 범죄, 특히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범죄 이야기는 언제나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 <좋은 친구들>(마틴 스콜세지), <뜨거운 오후>(시드니 루멧), <조디악>(데이비드 핀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아서 펜), <적>(니콜 가르시아) 등 수백 편의 영화가 그랬다. 미디어 스스로가 위안과 확신이라는 원칙을 들고 있는 한, 폭력적이고 잔인한 영화일수록 사람들을 더 안심시킨다. 관객들은 스크린을 마주하며 루크레티우스가 <만물의 본성에 관해>에서 설명했던 구절들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바람이 불어 거대한 바다가 일렁일 때, 바닷가에 서서 조난 당한 타인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토록 큰 기쁨을 주는 것은 타인의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어떠한 불행을 피할 수 있었는지 보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폭력과 잔혹함은 기습이며, 사람들은 내가 당하는 폭력과 잔혹함을 수용할 수 없지만, 영화에서는 무슨 끔찍한 일이 있었더라도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불이 켜지면 끝이다. 이런 점 때문에 영화에서나 문학에서 범죄라는 주제가 그토록 잘 팔리는 것이다. 고통을 완화시켜주면서도 실생활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완벽한 무해성. 놀랄 만큼 수익성이 좋은 상품이다.

글쓰는 사람은 많지만, 작가는 드물다

“수익성이 좋다.” 바로 이것이 키워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개인의 자본뿐 아니라 공공재정에까지 영향을 준 경제위기로 인해 투자자들은 확실한 가치, 또는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텔레비전 방송국들에게 소중한 “50세 이하의 주부”에 이어 “한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 그리고 이 가장의 신중한 재산관리가 예술무대를 점령했다. 영화계에서도 흥행배우 개념이 생겨나 영화제작 가능성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했다. 과거 장 가뱅, 페르난델, 루이 드퓌네스, 브리짓 바르도 만큼 그 이름만으로 극장을 꽉 채울 수 있는 배우가 오늘날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드러났는데도 말이다.

수익성이 키워드가 된 두 번째 이유는 우리 사회를 휩쓸고 있는 ‘실업’이라는 거대한 두려움이다. 프랑스에서 실업률이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시기, “진입차량에는 우선권 없음”이라는 기본원칙을 가진 회전교차로가 급속히 확산됐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소외와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 관객과 독자들의 습관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사람들은 모두 깊게 판단하지 않고 되는 대로 유사한 영화(<레슈티>, <레브롱제3>, <아바타>, <타이타닉>, <007> 등)와 작품(여전히 상영 중인 장 푸아레나 야스미나 레자의 작품)을 보려 하고, 같은 책(기욤 뮈소, 마크 레비, 미셸 우엘벡, ‘해리포터’ 및 기타 등등)을 사거나 읽으려 하며, (보부르, 오르세, 그랑팔레 등에서 열리는, 오직 공식적인) 같은 전시회에 줄을 선다. 문화 콘텐츠의 소비가 영화나 연극, 문학이나 미술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공동체에 속해있다는 안도감을 얻으려는 욕망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소외되지 않고, 동료나 친구들과 공유할 ‘주제’를 가지기 위함이다. 따라서 호기심은 위험한 것이 되고, 자신만의 스타일은 위협적인 것이 된다. 모든 독특함, 고독함의 상징조차 꺼려진다. 반면에, 정신을 좁은 곳에 가두고 가슴을 메마르게 하는 보수주의나 전통적 형식주의는 사람들을 안심시킨다.

“글 쓰는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해 무엇인가 쓰는 자체에 만족하지만, 작가는 문학의 완성을 생각한다” -롤랑 바르트

롤랑 바르트는 이렇게 ‘글 쓰는 사람’과 ‘작가’를 구분했다. 전자는 “어떤 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쓰는 데에 만족하지만 후자는 “문학의 완성”을 생각한다. 전자는 주제의 덕을 본 사람들이고 후자는 주제의 폭정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다. 오늘날 출간되는 엄청난 양의 소설들은 ‘주제들’을 팔라고 강요받는 글 쓰는 사람들의 생산물이다. 작가의 작품은 드물다. 잘 팔리는 주제에서 벗어나, 그 보잘것없는 전통적 형식주의에서 빠져나온 영화인들, “화형당하는 사람들이 화형대 위에서 마지막 신호를 보내듯”(2) 스크린에 영상을 보여주는 영화인들의 수가 줄어든 것처럼, 작가의 수도 줄어들었다.


글·제라르 모르디아 Gérard Mordillat
영화인, 작가. 제롬 프리외르와 함께 TV 다큐멘터리 시리즈 <예수와 이슬람>(Jésus et l'islam, DVD, Arte, 2015)을 연출했고 <마호메트가 본 예수(Jésus selon Mahomet>(Seuil, Paris, 2015)를 펴냈다.

번역·김자연 jayoni.k@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상상병 환자(Le Malade imaginaire)>(1673)
(2) Antonin Artaud, 『연극과 그 분신Le Théâtre et son double』, Gallimard, Paris, 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