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는 과연 문제적 존재인가

2015-12-31     에블린 피에예

 

굶주린 광대들은 누더기 차림으로 추위에 떨며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럼에도 그들은 생기가 넘치며 매력적이었다. 차가운 성문을 두드린 유랑극단 배우들에게 숙식을 제공한 젊은 시고냑 남작. 그는 광대들을 보며 권태가 숙명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과 인생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프라카스 대장이 된다. 테오필 고티에의 매력적인 소설 <프라카스 대장>(1863)은 17세기 전반 프랑스 유랑극단의 모험담을 그린다. 고티에는 이 소설을 통해 왕과 거지 사이를 오가는 자유로운 존재이자, 나약하지만 재치있고,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고 도덕성에도 다소 문제가 있긴 하지만, 예술에 헌신하는 존재라는 광대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고착시켰다.


광대에 대한 애매하고도 전형적인 이 이미지는 단지 한 소설가의 상상력에 의한 부산물은 아니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매혹적인 이미지들이 덧칠됐지만, 광대의 이미지가 전적으로 바뀌었다고 볼 수는 없다. 광대를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교회는 분명히 책임이 있다. 배우들이 프랑스에서 쫓겨났을 때, 피터 애크로이드가 셰익스피어 자서전에서 밝혔듯 영국의 청교도는 “배우는 성적인 욕망을 부추기고 가식적이며, 신의 이미지를 모방한다”(1)고 맹비난했다. 그 후 청교도는 제임스 1세와의 투쟁에서 승리한 덕에 연극을 전면 금지시키는 ‘성스러운 기쁨’을 누리기도 했다. 사실 청교도뿐 아니라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이들 모두 배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없었다.

배우들의 행실이 대체로 좋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런던에서는 곰이나 개를 싸움 붙이는 공연이 흔했고, 공연장은 과세를 피하고자 시 외곽 사창가 근처에 세워졌다. 연극과 매춘 모두 지배적인 윤리관과 교회의 도덕주의에 반하는 휴식처를 제공하며 사회적 혼돈을 유발할 여지가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극작가 벤 존슨이 1598년 자신의 작품 <볼포네>의 주역인 가브리엘 스펜서를 결투에서 죽였듯, 극단 일원들 내지는 청중들 간의 싸움도 빈번했다. 연극이 끼쳤던 더 큰 해악은 그것이 특권층보다 천한 하층민과 밑바닥 인생인 비신도들을 결집시켰으며, 더욱이 귀족과 평민을 등장인물로 동등하게 다루어 사회계층을 평등화시켰다는 점이다.

요컨대, 배우가 통제 대상이 된 것은 이단의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었다. 1572년 “귀족에게 종속되지 않은 모든 검술사범, 곰 사육자, 막간 배우나 음유시인은 매질을 당하거나 귀를 불로 지지는 형벌에 처한다”는 영국법이 세워졌다. 이에 따라 배우들은 후원자를 찾아다녔다. 그리고 가급적 글로브나 로즈 등 유명극단에 자리 잡으며 약간의 명예라도 얻으려 했다. 그러나 후원자가 모든 순회공연을 보장하지는 못했다. 일례로 런던에 흑사병이 유행하자, 배우들은 다시 수레를 끌고 이 마을 저 마을로 이동하며 공연 허가를 부탁하고 다녔다. 그리고 공연 후 귀가 길에는 동전 한 푼 없어서 매번 의상을 팔아야만 했다. 배우는 어느 길드에도 속하지 않았기에 후원자의 선의만이 그들을 구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배우의 지위가 거지나 곡예사보다 조금 높아졌다면, 그것은 로드 체임벌린 극단 같은 몇몇 후원자의 명성 덕분이었다. 셰익스피어는 로드 체임벌린 극단 소속 극작가이자 공동경영자로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후원자가 사라지고 전염병이 창궐하면 배우들은 다시 거지 신세가 됐으며, 종교 설교자들은 신을 거역하는 행위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볼테르 작품의 유명배우였으나 사망 후 교회장을 거절당했던 여배우 아드리엔 르쿠브뢰르가 사망한지 약 30년 후, 1758년 장 자크 루소는 수학자 달랑베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배우를 맹렬히 비난했다. “배우의 재능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아닌 타인으로 위조하고 탈바꿈 하는 기술, (…) 타인의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망각하는 기술이다.” 배우는 내재된 이중성으로 사회 무질서를 야기하는 위험한 존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디드로는 <배우에 관한 역설>(1773년)이라는 저서를 통해 “연극이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면, 배우는 명예롭고 존경받는 직업이었을 것”이라며 간접적으로 답변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배우는 시민권을 획득하면서 마침내 시민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됐다. 1810년부터 배우들의 이름이 포스터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시대적인 대변화의 흐름에 따라 스타들은 힘 있는 사회정치적 중심인물(2)을 연기하기도 했다. 때로는 공공연히 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전직 노동자였던 배우 보카즈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희곡작품 출연배우로 유명했으며, 확고한 공화주의자였다. 서로 신념이 일치했던 보카즈와 극작가 펠릭스 피아는 의기투합해 무대를 정치적인 지지 활동을 위한 장소로 활용했다. 오케스트라가 잔잔히 울려 퍼지면 그는 자문했다. ‘정치인이 행동하기를 원하는가, 배우가 연기하길 원하는가?’ 마르셀 카르네 감독의 영화 <천국의 아이들>에 출연한 배우 프레데리크 르메트르는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즉흥적으로 극의 흐름을 바꿔, 멜로드라마가 시사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록 했다. 

여배우 라셸은 1858년 무대 위에서 ‘라 마르셰예즈’(3)를 불렀다. 배우가 마침내 시민, 노동자와 동등한 지위를 얻은 것일까? 오랜 기간 극장을 경영했던 테일러 남작이 1840년 가난한 배우와 가수를 지원하고, 사회보장 분담금과 자선공연으로 퇴직기금을 마련하는 협동조합인 ‘연극배우협회’를 창립한 것을 보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협회에는 정부 보조금을 지원받는 극단 소속이거나 특권층과 교류하는 이름 있는 예술인들만 가입할 수 있었다.

40년 후 중산층 출신의 예술인 비율이 증가했음이 오랜 연구를 통해 밝혀졌다. 그러나 ‘여신’이라 불리던 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5개 대륙 순회를 할 때도 여전히 광대라는 멸시는 뿌리 깊게 존재했다.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웠던 작가 옥타브 미르보는 “배우는 본질적으로 배척당한 하급 존재이다. 배우가 무대에 오르는 순간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포기한다”라고 말했다(Le Figaro, 1882년 10월 26일). 이 글에서 직접적으로 저격당한 장본인이랄 수 있는 코클랭은 연극 <시라노>의 전설적인 배우로서 <예술과 배우>(Ollendorff, Paris, 1880년)라는 저서를 통해 일찍이 이에 대한 대답을 했다. “배우는 예술인이며 모든 시민과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지닌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다른 예술 분야와는 달리 관객이 있어야 성립되는 공연의 특성상, 관객이 찾지 않는 배우는 예술인이라기에 애매한 측면이 있다. 문화정책 전문가 마리 앙쥬 로슈(4)가 말했듯, 파리나 근교의 음악카페에서 활약하는 개그맨, 가수 등 다양한 예능인들은 대공연의 배우들처럼 예술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들은 테일러 남작의 ‘연극배우협회’에서도 제외됐고, 예술에 의한 모든 정당화에서도 예외였다. 심지어 코클랭 조차도 1905년 퐁토담(Pont-aux-Dames)시에 그가 설립한 노인복지시설에 ‘품행이 좋은’ 배우들만 받아들였다.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친구인 작가 막심 뒤 캉은 “3류 음악식당이나 3류 뮤직홀 종사자들은 대중이 좋아하는 노골적인 쾌락에 몸을 던지며, 더 나아질 것도 없는 하층민의 품위 하락에 일조한다”고 강도 높게 표현했다. 음악카페는 윤락업소가 아님을 대대적으로 알리기 위해 온 힘을 쏟았고, 사회보장제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사회의 존중을 받고자 했다. 음악카페는 입장료를 받지 않았고, 손님들이 먹고 마시는 소비 활동으로 운영됐다. 초대된 여성들은 카페에서 매력을 발산하기 위해 줄서서 입장했고, 카페 종업원보다 급여가 적은 남자들도 음악 카페를 즐겨 찾았다. 기품 있는 가요로 성공한 오페라 가수 쥘 파크라(1833-1915)는 대중적인 연극 뿐 아니라 렐도라도(l'Eldorado) 같은 고급 음악카페에서도 사랑받았다. 그는 파리코뮌 가담자들과 뜻을 같이했고, 첫 번째 ‘예술가협회’의 구상에 참여했다. 1880년 가수 아리스티드 브루앙을 비롯한 몇몇 동료들과 함께 쥘 파크라는 ‘오페라가수상호조합’을 설립했다. 아리스티드 브루앙은 1년 후 카바레 르 샤 느아르(Le Chat Noir)를 열었다. 소외계층 오페라 가수들에게 의료혜택과 연금을 제공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오페라가수상호조합’이 설립됐다. 스타들의 지원 하에 사회보장 분담금, 기부, 자선공연으로 재정을 충원하며 동시에 이를 명예를 찾는 기회로 삼았다.

한편, 음악카페의 또 다른 예술가 레몽 브로카는 1890년 ‘연극배우와오페라가수협회’를 창립해 더욱 적극적인 권리 주장을 펼쳤다. ‘페트로닐, 너에겐 민트 향기가 풍겨’란 연극에서 명연기를 펼친 드라낭은 리조랑지스(Ris-Orangis)시에 있는 견고한 성을 구입해 예술인 동료들을 위한 노인복지시설로 제공했다. 그리고 여기에 1911년 프랑스 대통령이 이들을 위한 공식시설을 열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보면, 배우들이 드디어 권리 뿐 아니라 명예도 얻은 듯 보인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고성은 팔렸고, 쥘 파크라의 상호조합은 2011년 재정이 건실한 오디앵(Audiens)그룹에 통합됐다. ‘공연예술 비정규직을 위한 실업급여제도’ 같은 제도로 인해 공연예술 종사자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5)는 현대화됐고, 이제는 공연예술 종사자들이 불로소득자들처럼 간주되고 있다.

예전에 디드로는 배우들은 시간의 소중함을 모르고 방탕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오늘날에는 배우의 권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를 언급한다. 2004년 문화부 장관에게 제출된 기요 보고서는 2003년 아비뇽 연극제를 취소했던 예술인의 심정을 담아 ‘공연예술 분야에서 창출하는 부가가치는 항공, 조선, 철도 산업 분야의 부가가치와 맞먹는다’고 주장했다. 그 후 경제적인 논거는 정당성 부여를 위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존재의 이유로서 수익성의 우위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슬픈 해결책이다. 놀이의 필요성, 상상력을 공유하는 행위의 필요성, 인간의 꿈을 재현하는 호사의 필요성 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글·에블린 피에예 Evelyne Pieiller
<르몽드 디플로마티크>기자이며, 문화예술 비평가로 활동하고 있다.

번역·김영란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1) 피트 애크로이드, <셰익스피어 자서전>, Philippe Rey(Fugues), Paris, 2015년첫 번째 프랑스어판은 동일 출판사에서 2006년 출판함.
(2) 올리비에 바라, 미레유 로스코 레나, 지도교수 안 펠루아, <19세기 배우들의 영웅적 행위>, Presses Universitaires de Lyon, Lyon, 2015년
(3) 공병장교 루제 드 릴이 1792년 4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사와 곡을 지었으며, 프랑스 혁명 때 많이 불리다가 1879년 정식 국가로 채택된 노래.(역주)
(4) 마리 앙쥬 로슈, <이기주의 타도, 상호조합 만세! 공연예술 종사자와 예술가 상호조합(1865-2011)>, Presses Universitaires de Vincennes, Saint-Denis, 2015년
(5) 뱅상 에댕, <공연예술 종사자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 개선>, L'Atelier, Ivry-sur-Seine, 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