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트디부아르의 성장에 드리워진 그림자

2015-12-31     블라디미르 카뇰라리

부르키나파소에서는 쿠데타로 인해 총선이 연기된 반면 코트디부아르는 평온하게 10월 25일에 대선이 치뤄졌다. 예상대로 알라산 우아타라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런 평온함은 겉모습일 뿐이다. 2002~2007년 벌어진 내전과 2010~2011년 그바그보 전 대통령과 우아타라 대통령이 대립했던 무력충돌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2011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알라산 우아타라 대통령은 코트디부아르의 부흥을 약속하며 지난 10월 25일 실시된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그동안 코트디부아르가 쌓아올린 화려해 보이는 성장을 내세웠다. 그러나 코트디부아르 북부에서 남부를 가로지르는 도로의 새로 칠한 겉모습 뒤에는 불만과 과거의 유령들이 숨어 있다.

아비장 주재 프랑스 대사관저의 널찍한 테라스는 잘 조성된 넓은 공원을 향해 있다. 올해 7월 14일 프랑스혁명기념일, 외출복 차림의 군인들과 프랑스 기업체 사장들, 그리고 코트디부아르 엘리트들이 테라스를 서성거리기도 하고, 앙리 코난 베디에 전 대통령의 이름을 딴 다리(1)가 걸쳐 있는 호수의 탁 트인 전경을 바라보며 서 있기도 했다. 프랑스의 부이그 그룹이 개발 완공한 이 다리는 2014년 말에 개통됐고, 2010년 말 대선 최종 승자인 우아타라 대통령이 준공식에 참석했다. 당시 코트디부아르는 그바그보 전 대통령 지지자와 우아타라 신임 대통령 지지자로 나뉘어 심한 분쟁을 겪은 바 있다.

3천 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으며 사회 인프라는 황폐해졌다. 서아프리카에서 두 번째 경제력을 자랑하던 코트디부아르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했다. 그것이 바로 우아타라 대통령이 전념했던 일이다. 그는 코트디부아르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이 교량과 도로를 통해 드러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모습은 프랑스 지리교과서에 ‘코트디부아르의 기적’이라는 이름과 함께 모범사례로 등장하던 시기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이 시기는 파리와 코트디부아르 사이에 각종 사건과 타협이 번성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나들이옷을 입은 사람들이 프랑스 대사의 정원에서 바삐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그 시절이 되돌아왔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날 기념행사 주관자인 조르주 세르 프랑스대사는 만족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오늘날, 코트디부아르에 자리 잡은 프랑스기업이 직접 고용하고 있는 인원은 4만 명에 달하고, 코트디부아르 세수의 50%, 국내총생산의 30%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철도운송과 항만 컨테이너 터미널 2개는 볼로레 그룹이 맡고 있고, 전기와 수력은 부이그 그룹이 맡고 있다는 점, 코트디부아르 모바일시장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오랑주 사가 코트디부아르 축구리그의 주요 후원자라는 점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요컨대 프랑스가 귀환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프랑스가 코트디부아를 떠났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혁명 기념일을 위해 만들어진 핑거 푸드에는 프랑스국기가 꽂혀 있었다. 그리고 코트디부아르에서 프랑스 사람들이 자신들의 몫을 요구하는 듯이, 하객들은 각자의 몫을 먹어치웠다. 빳빳하게 풀 먹인 제복을 입은 코트디부아르 공화국수비대군악대는 땀을 뻘뻘 흘리며 널리 알려진 노래들을 연주했다. 마지막에는 크레올 그룹이 나와 샴페인 파티에 흥을 돋웠다. 프랑스와 코트디부아르의 우호 만세! 아비장의 프랑스 잔디 위에서 코트디부아르정부 인사들과 하객들은 분명 이것이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프랑스는 국제연합의 비호 아래 니콜라 사르코지 전 대통령의 개인적 친구이기도 한 우아타라 대통령 군대에게 결정적 군사지원을 해주지 않았던가? 그바그보 전 대통령 군대가 우아타라 군대에게 대통령관저 문을 열어 주기 전에 프랑스가 직접 대통령관저의 벽을 대포로 부숴버리지 않았던가? 그런 일이 있었던 이후에 베디에 다리 아래로 강물이 흐르고, 코트디부아르의 도로 위에 아스팔트가 다시 피어난 것이다.

코트디부아르 정부 내에는 ‘불간섭 자유방임’이라는 자유주의적 좌우명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런 흔적은 도로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북부의 도로는 ‘도로의 완전자유경쟁’이라는 명목으로 기동대의 바리케이드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0여 년 전만 해도 온갖 종류의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모든 통행객들과 상품을 대상으로 예외 없이 돈을 뜯어냈지만 이제 그런 일은 없다. 2013년 12월에 완공된 아비장-야무수크로 고속도로에는 현대식 톨게이트가 들어서 모든 협상을 금지한다. 현직 대통령의 선거 기반이자 그를 지지했던 반군지역인 북으로 가는 길은 완전히 자유롭다. 그러나 야무수크로를 지나면, 낡은 아스팔트도로 곳곳에 패인 수많은 웅덩이들을 요리조리 피해가야 해서 대형트럭과 대중교통수단들은 갑자기 난폭한 곡예운전을 하기도 한다. 우아타라 대통령은 여전히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동안 우아타라 대통령은 북부의 주요도시이자 코트디부아르 제4의 도시인 코로고로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다.

쌀값, 집세, 전기세, 물가는 끊임없이 오른다

2013년 7월에는 지방자치 장관회의를 위해 코르고에 거의 전 내각을 옮겨 놓다시피 하는 ‘국빈방문’을 실시했다. 그는 이런 상황을 주기적으로 연출한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이런 방문은 불가피하게 선거운동 양상을 띠고 있다. 방문할 때마다 투자, 교량 및 도로 건설 계획뿐만 아니라 병원시설, 학교, 행정서비스를 위한 차량 계획 등도 발표한다. 그런 발표장면은 잘 준비되고, TV로 전국에 장시간 방영된다. 대통령 긴급프로그램 덕분에 도청, 시청, 학교, 지역 병원들은 재개발되고 새로 페인트를 칠했다. 코로고(주민 30만 명)에는 지금까지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2개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각종 도로 포장이 한창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아스팔트를 먹고 삽니까?”라는 식의 문제제기는 여전히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의 입을 통해 반복되고 있다. 2010년 우아타라 대통령에 몰표를 준 북부도 예외는 아니다.

밤이 되자 희미하게 불이 밝혀진 흙길 한 구석에 몇몇 젊은이들이 둘러 앉아 차를 마시며 다른 세상을, 아니 다른 코트디부아르를 꿈꾸고 있다. 모두들 “나라는 발전하는데 국민들은 먹을 게 없다”고 말한다. 그들 중 월급쟁이는 한 명도 없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작은 가게를 운영하고, 시날리 같은 사람들은 이일저일 닥치는 대로 하며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다. 시날리는 “매일 밤, 집에 돈을 벌기 위해 다음날 어떤 일거리를 찾을 수 있을까 자문한다. 2002년 전쟁이 터졌을 때 스물다섯 살이었는데, 13년이 지난 지금 마흔이 다 돼서도 가족들이 살아갈 조그만 마당 하나 없다. 그리고 이제는 청년지원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가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모두들 쌀값에서 전기세, 집세에 이르기까지 물가가 올랐다고 걱정한다. 시날리 집에는 넉 달 전부터 전기가 끊긴 상황이다. 이 젊은이들 주위, 밤은 칠흑처럼 어둡고 불빛은 드물다. 시날리는 북부에서 형성된 신체제군(Forces nouvelles, FNCI)에 들어갔다. 2010년 대선 후 내전이 끝나자 그는 자신의 무기를 반납했고, 전투원 동원해제 명목으로 정부가 지급한 80만 코트디부아르프랑(약 1,220유로)을 받았다. 이중 절반은 빚을 갚는 데 썼고, 나머지는 양계장을 차리는 데 썼지만 곧 망하고 말았다. 그는 “더 취약한 사람들은 먹을 것을 제공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다시 무기를 들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들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시날리와 그의 친구들은 오는 10월 25일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우아타라에게 투표했다. 물론 지역 연대감 때문이다. 오랫동안 상대적으로 발전이 늦었던 북부는, ‘진정한 코트디부아르인’과 ‘임시변통의 코트디부아르인’을 구별하며 ‘코트디부아르성’(64개 종족으로 구성된 코트디부아르 국민의 국적을 정의하기 위해 1945년 등장한 개념으로 앙리 코난 베디에 대통령은 경제위기에 이 개념을 부활시켰다-역주)을 부르짖는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껴왔다. 부르키나파소 혈통이라고 비난받아 왔던 우아타라는 그의 국적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두 번이나 대선에 출마하지 못했다.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은 코트디부아르 기본법이 요구하는 대로 “코트디부아르 출신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태어나지 않았다”(2)는 점을 들어 그를 비난한다. 그래서 그는 ‘코트디부아르성’의 희생자의 상징이 되었고 사실상 북부 주민들의 투사가 된 것이다. 이런 불만은 2002년에 그바그보 전임 대통령 축출을 시도했던 반군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었다. 쿠데타가 불발로 그치자 그들은 신체제군이라는 이름으로 남북으로 양분된 코트디부아르의 북부를 ‘통치’했다. 북부 제2의 도시 부아케는 당시 그들의 수도였다.

그들은 다함께 북부에서 돈을 뜯어냈다

라마단이 끝나는 날을 축하하던 2015년 7월 어느 날 밤, 젊은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외출복 차림의 청소년 무리들이 술래잡기를 하고, 사거리를 가로지르며 오가는 차량들의 통행을 방해하며, 축제의 자유에 취해 몰려다녔다. 비록 하룻밤일망정 그들은 기성세대의 권위에서 해방됐다. 즐거운 무질서 속에서 그들을 제지하는 경찰관은 한 명도 없었다. 2007년 코트디부아르의 재통합과 행정재편 이후에도 부아케는 여전히 반정부적이다.

셀 수 없이 많은 중국산 오토바이들은 부아케가 코트디부아르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나있었던 시절을, 오래전부터 오토바이가 도시 풍경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부르키나파소의 수도 와가두구의 모습과 더욱 닮았던 시절을 나름의 방식으로 증언하고 있다. 더욱이 와가두구는 2002년 북부를 장악했던 반군 세력의 배후기지였고, 반군 장악지역을 먹여 살릴 상거래가 이루어졌던 경유지였다. 그들의 군 지휘관들, 즉 ‘콤존(Com'zone)’이라 불리던 이 지역 사령관들은 ‘행정관’이라 불리던 민간인들의 도움을 얻어 코트디부아르 땅의 절반 이상을 나누어가졌다. 이 ‘행정관’들은 나중에 국회의장이 되는 기욤 소로(3)로 대표되는 신체제(FNCI)의 정치적 날개가 되었다. 이들은 함께 협력해 그들의 군대와 토지의 관리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른바 ‘전담기구’를 설치하고 세금을 거둬들이는 방식으로 북부지방에서 정기적으로 돈을 뜯어냈던 것이다.

부아케의 혼잡한 오토바이 통행은 이 시기의 유산이다. 장래에 대한 비전이 없는 많은 젊은이들이 오토바이를 굴리기로 결정하고, 면허도, 헬멧도, 보험도 없는 상태로 오토바이택시 운전사가 된다. 게다가 그들 중 많은 젊은이들이 오토바이를 타다가 대학병원센터로 실려 온다. 우아타라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병원 재개발이 시행됐지만 시설은 여전히 열악하다. 중부-북부-서부 지역 전체, 다시 말해 코트디부아르의 절반에 해당하는 지역의 유일한 대학병원은 겉만 새로 칠했을 뿐 설비와 자재가 턱없이 부족하다. 원칙적으로 무료인 산부인과와 소아과를 제외하면, 대부분 변칙적 경제활동으로 살아가는 국민 절대 대다수에게 병원 치료비는 너무 비싸다. 코트디부아르 국민 85%가 어떤 형태의 사회보장혜택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정부는 병원 접근성 개선을 위해 2015년 1월에 기초의료보험(CMU)을 시행했다. 하지만 이 제도는 프랑스의 기초의료보험과는 다른 것으로, 한 달에 1인당 1천 코트디부아르프랑(약 1.5유로)을 내고 의료비의 3/4을 부담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분담금납입자가 너무 적어 매우 초기단계에 있다.

처벌받지 않는 사람들, 원한은 깊어간다

부아케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면 듬성듬성 나무가 있는 초원지대가 펼쳐지다가 숲으로 이어진다. 야무수크로에 다다르면 지평선은 짙은 초록색이 되고, 유명한 사원의 둥근 지붕을 볼 수 있다. 코트디부아르 독립의 아버지 펠릭스 우푸에-부아니가 25년 전에 자신의 마을에 이 사원을 건립한 후 사원의 둥근 지붕은 야무수크로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도시를 관통하는 널따란 두 도로 위를 다니는 차량은 거의 없고, 도시 전체가 너무나 큰 옷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다. 부아니의 후계자들 모두가 약속했던 국가기관 이전은 사문화된 상태로 남아있다.

마을을 벗어나면 카카오 재배지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카카오는 코트디부아르의 주요수입원이었지만 1970년대 말 세계시장에서 코코아 가격이 폭락하면서 큰 손실을 입었다. 이후 코코아 관련 산업은 세계금융시스템의 요구에 따라 민영화되었고, 코트디부아르의 정치-군사 위기가 진행되는 동안 완전히 몰락했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도로 주변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거대한 톰보크로 플랜테이션이 그런 사실을 증명한다. 우푸에-부아니 대통령이 코트디부아르 국가에 물려준 플랜테이션은 대부분 다른 나무들이 무성한 상태로 버려져 있다. 아직 이곳에 살고 있는 농업노동자들은 카카오나무 사이에 옥수수와 카바사를 재배하며 언제 나올지 모르는 유령 같은 월급을 10년 째 기다리고 있다.

2011년에 취임한 우아타라 대통령은 코코아 재배자들에게 일정 가격을 보장하고 수백만 명의 코트디부아르 국민들이 의존하고 있는 코코아 관련 산업을 활성화하며 코코아생산 환경을 개선했다. 2014년 코코아 생산은 1,700만 톤, 전 세계 생산량의 35%를 차지하며 기록을 세웠다. 코코아 생산은 코트디부아르 국내총생산의 15%를 차지한다. 그러니 땅은 중요한 쟁점이고, 농산물의 분배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이 문제로 코트디부아르에서 가장 비옥한 서부지역은 20년 전부터 갈등을 겪고 있다.

두에쿠에 마을은 분쟁으로 대단한 고통을 겪었다. 도시의 중심축을 따라 나붙어 있는 대형포스터에는 “선거는 지나가지만 공동체는 남는다”고 적혀있다. 다른 어느 곳보다 이곳의 이 슬로건은 의미심장하다. 이곳 사람들은 다른 어느 곳보다 선거에 두려움을 갖고 있고, 선거로 인해 악마가 잠에서 깨어날까 두려워한다. 지난 대선 후, 이 마을과 인근 지역에서 천여 명이 사망했다. 이는 2010~2011년 선거 후 무력충돌 시에 공식 집계된 총사망자 수의 1/3에 해당한다. 5년이 지난 지금, 그 후유증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마을은 평온하다.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대화의 마지막에 이어지는 침묵은 이곳에서 벌어진 잔혹한 이야기들을 침묵으로 울부짖는 것만 같다. 아직도 시체안치소에는 신원확인을 기다리는 사망자들이 남아 있다.

두에쿠에가 중심이 되는 구에몽 지역은 우거진 숲 지역인데, 수십 년 전부터 ‘이민족(대부분 부르키나 파소 출신)’과 ‘타지출신(코트디부아르의 타 지역 출신)’들이 숲을 개발하고 있다. 우푸에-부아니 전 대통령은 “땅은 그 가치를 드높이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1993년 그가 사망한 후 ‘코트디부아르성’ 개념이 땅에도 부가됐다. 경제위기는 ‘토착민’(4)들이 타지에서 온 농민들에게 양도했던 카카오가 심어진 땅을 자기 것이라 요구하도록 부추겼다. 당시 많은 합의들이 토착민들에 의해 재검토됐고, 코트디부아르 남서부(토착민들이 소수인 지역)에서는 이 지역 출신이 아닌 경작자들이 그들 스스로 개척한 땅에서 쫓겨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코트디부아르 서부를 공동체간 분쟁의 온상으로 만드는 폭력과 탄압이 주기적으로 순환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선 후 위기시기에 두에쿠에는 비극의 진원지가 됐다. 2011년 3월, 우아타라가 이끄는 군대가 아비장에 진입해 도시를 장악하고, 토착민인 ‘웨’ 족으로 구성된 친(親)그바그보 자위대가 기반으로 삼은 카르푸르 구역으로 진격했다. ‘도조(전통적으로 사냥꾼들을 지칭하는 말로 나중에 민병대가 됐다)’의 지원을 받은 친(親)우아타라 부대는 살육을 자행했다. 한 젊은이는 “그들은 카르푸르 구역의 젊은이들이 모두 민병대원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그때 도망쳤던 사람들은 전부 가톨릭 대표단으로 모여들었다. 마당에 쌓인 시체가 3천 구에 달했고 인근의 라이베리아로 떠난 피란민들은 25만 명에 달했다. 시체들이 널려 있는 두에쿠에의 길에서 유엔코트디부아르평화유지군(ONUCI)은 시체의 수를 세어가며 아직까지 흙으로 덮지 않은 구덩이에 서둘러 시체를 매장했다. 유엔에 따르면 두에쿠에에서만 적어도 5백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국제적십자위원회(CICR)는 사망자를 8백 명으로 집계했다. 대부분은 카르푸르 구역에서 사망했다. 그 구역의 지도자였던 드니 제이아는 “그곳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일은 설명할 수 없다”면서 입을 다물었다. 그의 침묵은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이다. 웨 족의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후 숲으로 쫓겨났고 2012년 7월에는 인근의 숙영지에서 공격당했다. 그 모든 일이 무력한 유엔평화유지군이 지켜보는 가운데 벌어졌다.

두에쿠에 학살과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은 우아타라 대통령의 대선을 피로 얼룩지게 했고, 그 핏자국은 앞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바그보 전 대통령과 그를 지지했던 애국청년단의 리더 샤를 블레 구데는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은 반면 우아타라 대통령이 저지른 범죄는 벌 받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어, 승자의 정의라는 끈질긴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5) 많은 다른 사람들이 아직까지 재판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다. 편파적이라는 비난을 받는 코트디부아르 법정은 결국 2015년 6월 우아타라 대통령의 승리에 기여한 두 사람을 고발하기에 이르렀다. 그 중 두 명은 그 유명한 ‘콤존(Com’zone)’으로, 셰리프 우스만과 로세니 포파나다. 두 사람 모두 현 체제 국가안보기관의 고위직 인사로, 당장은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반면 코트디부아르에서 이들을 고발함으로써 이들은 국제사법재판소 출두 요구를 비켜갈 수 있게 됐다.

두에쿠에 가톨릭 대표단의 책임자인 시프리엥 아우레 신부는 “최소한의 정의도 없이 과연 화해가 가능한가?”라고 자문한다. 폭력이 발생할 때마다 난민들(부르키나파소 출신, 바울레 족, 웨 족)이 넘치는 것을 본 아우레 신부는 2011년 설립된 대화·진실·화해 위원회(CDVR)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CDVR이 우리를 불만스럽게 했다. 우리는 예정된 모든 단계, 특히 보상 단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예전의 전투원들이 그 대상이었다. 많은 돈이 걸려 있었지만 우리는 무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에게 돈을 줄 수 없고, 모든 것을 잃은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아우레 신부는 설명한다. 국가적 차원에서의 카타르시스 또한 없었다. 위원회는 자신의 작업 결과물을 발표하지 않았고, 그토록 기대했던 공개청문회 장면도 방영되지 않았다. 2015년 3월 CDVR의 뒤를 잇게 된 ‘희생자들의 화해와 보상을 위한 국가 위원회(CONARIV)’가 4500명과 연관된 보상의 첫 단계를 시작했을 뿐이다.

결과를 기다리면서, 정치인들을 배제한 아래로부터의 화해가 시작되고 있다. 코트디부아르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두에쿠에에서도 다른 방도가 없기 때문에 여러 공동체들이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서로를 받아들인다”라는 말은 가장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우리는 서로 관계를 맺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대통령은 대통령일 뿐이다. 내일은 다른 사람이 대통령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살아나가야 한다”고 드니 제이아는 단언한다. 지난 시절 서로 대립했던 구역들에 사는 젊은이들이 서로에게 다시 말을 건넨다. 그러나 불씨 하나만으로도 화약에 다시 불이 붙을 수도 있다. 한 청년은 “도시에 무슨 일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카르푸르의 젊은이들을 표적으로 삼는다. 사람들은 우리를 그바그보의 형제들로 취급한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들은 학살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여전히 자유롭게 자신들의 사냥총을 들고서 도시를 활보하는 것을 한탄한다. 두에쿠에의 이런 평화는 승자들의 평화만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전에 무시당했지만 이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적에게 공포를 강요하는 것인가? 과거에나 지금이나, 처벌하지 않는 것은 미래를 담보로 하는 원한을 낳는 법이다.

서부에서는 토지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고, 라이베리아로 피난 갔던 수많은 원주민들이 되돌아와 점유당한 자신들의 토지를 되찾았다.(6) 이 지역 부지사는 이곳에 살고 있는 공동체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토지분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임무는 만만치 않다. 법에 따르면 토지는 국가 혹은 코트디부아르 국적 소지자들에게만 귀속될 수 있다. 코트디부아르 국적 소지자들은 행정부가 발부하는 소유권을 교부받아야 한다. 그러려면 많은 돈이 들어간다.

대략 5백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선거인단의 1/3을 차지하는 아비장이 선거의 주요 초점이 되고 있다. 이 경제수도의 고층건물들과 상업지구들은 예전의 화려함을 되찾았다. 예전에 ‘코트디부아르 기적’의 상징이었던 고층건물들과 상업지구들은 이제, 우아타라의 약속대로 2012년부터 연간 8% 이상 성장하면서, 다시 솟아오르는 코트디부아르를 구현하고 있다. 석호(潟湖)의 제방들은 재정비되고, 조만간 입체교차로가 들어설 것이며, 연말이 되기 전에 도심철도 공사가 시작될 것이다. 아비장 심장부에 자리 잡고 있었던 달동네들은 ‘축출돼’ 버렸고, 그바그보를 지지했던 애국청년들의 영지였던 ‘소르본’ 광장은 황무지로 변해 주차장이 되었다. 권력의 이동이 도시 풍경 속에서도 읽혀지는 것이다.

우아타라를 지지했던 보충부대들은 마지막까지 점령하고 있었던 건물들에서 2015년 6월에 퇴거했다. 우아타라의 임기가 끝나기 몇 달 전의 일이다. ‘행복’ 작전이라 명명된 이 작전은 무장해제과정의 최종단계에 맞추어 이루어졌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교전 당사자 양측의 전투원 6만 4천 명의 91%가 무기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적으로 사회에 복귀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북부지역을 지배했던 ‘콤존’들은 거의 대부분 자신들의 영지 밖으로 배속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현재 국가안보기관의 핵심 자리에 포진하고 있다. 우아타라를 취임시키는 데 공헌한 이들은 여전히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렇지만 한 유엔보고서의 지적에 따르면 가미나 금광에서 불법 채굴이 자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예전의 ‘콤존’인 와타오가 통제했던 곳인데 그는 현재 공화국수비대 부사령관이다. 유엔보고서는 또한 쿠아쿠 포피가 코로고에 무기고를 보존하고 있다고 고발한다.(7) 결국 장래 권력투쟁에서 콤존의 입지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되는 것은 2020년 선거다. 왜냐하면 2015년 10월 25일 대선에서는, 우아타라를 당선시킨 당들의 연합으로 강력해진 우아타라가 분열된 야당과 대결하는 구도이기 때문이다.(8)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는 누구인가

2014년 6월 국제사법재판소가 그바그보의 재판 회부를 공고한 이후, 그바그보가 이끌던 ‘코트디부아르 인민전선(FPI)’의 심각한 분열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전직 대통령의 석방을 선거참여의 조건으로 내세운 ‘반대세력’인 인민전선 당원들은 당대표이며 전직 수상인 파스칼 아피 은구에산을 면직시키려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은구에산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그가 다음 선거에 다원주의 체제를 도입하여 권력게임을 하려고 한다고 비난한다. 일부 반대파들은 독립적인 선거위원회의 구성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들은 선거위원회가 우아타라에게 호의적이라고 판단하고, 그런 이유로 우아타라 대통령의 전통적인 선거기반지역에서 선거운동을 하기 어렵다고 규탄한다. 다른 한편으로 코트디부아르국민들은 선거명부 등록을 서두르지 않았다. 36만 7천 명의 유권자가 새로 임시명부에 등록했는데, 이렇게 되면 선거연령 인구 9백만 명 중에서 유권자 수가 6백 10만 명이 되는 셈이다. 선거 결과가 뻔해 보이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국가를 망친 정치 투쟁에 대한 혐오증 때문일까, 아니면 무력대치상황이 다시 벌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까? 대통령은 평화로운 선거를 약속했다. 이미 지쳐버린 코트디부아르 사람들은 이 프로그램에 만족할 것이다.
2011년 4월 코트디부아르를 통치하게 된 우아타라는 경제학자로서 본인 자신이 IMF의 지도급 인사였기 때문인지 IMF의 문법을 착실하게 실행하고 있다. 그는 인프라 건설, 투자와 성장의 활성화를 위해 전력투구했다. 우아타라는 “돈은 돌고 있지 않지만 일은 하고 있다”라는 말로 성장의 배당금이 자신들에게 현실적으로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현재로서는 대중들 및 특히 젊은이들(인구의 77.5%가 35세 이하다)이 아직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확연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람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자라고 있는 분열의 씨앗들을 잠재우려면 사회복지 이상의 다른 조치가 필요할 것이다. 화해는 기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처벌받지 않는 관례가 계속 남아있는 상황이다.

코트디부아르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희생자라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스스로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여튼 간에 정치가들이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민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글·블라디미르 카뇰라리 Vladimir Cagnolari
<르몽드 디플로마티크>특파원, 저널리스트

번역·김계영
파리4대학 불문학 박사. 저서와 역서로 <청소년을 위한 서양문학사>(2006), <르몽드 세계사3>(2013), <키는 권력이다>(2008) 등이 있다.

 

(1) 앙리 코난 베디에는 1993년에 펠릭스 우푸에-부아니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1999년 쿠데타로 물러난 그는 2010년 우아타라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우아타라의 정적이었다.
(2) “우푸에 부아니의 저주받은 상속자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1년 1월호 참조.
(3) 신체제군의 주요 지휘관들은 민간인이든 군인이든 체제 내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4) 구에몽 지역의 토착민들은 ‘웨’ 족이다. 중부와 북부의 주민은 타 지역출신 주민(바울레 족, 말랭케 족, 세누포 족)과 부르키나파소 출신 이민족이 다수를 이룬다. 강인한 기질의 ‘코트디부아르적’ 반응으로 인해 말랭케 족과 세누포 족은 흔히 이민족으로 잘못 분류되기도 한다.
(5) 시몬 그바그보 부인은 2015년 3월 10일 코트디부아르 법정에서 25년 징역형을 선고받은 후 상고했다.
(6) 파니 피조, “코트디부아르 서부의 카카오 전쟁”,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12년 9월호 참조.
(7) 유엔 보고서 n° S/2015/252, 2015년 4월.
(8) 코트디부아르민주당-아프리카민주연합(PDCI-RDA, 예전에는 하나의 당이었음), 공화당(RDR, 우아타라가 속해있는 당), 코트디부아르 민주평화당(UDPCI, 로베르 구에이 장군이 창설한 당)을 연합한 당이 민주평화를 위한 우푸에티 연합(RHDP)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