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동 자르는 건 편성 자율권이 아니다
지상파는 ‘민주사회적 제도’… 시청자 주권 개입 마땅
권력에 예속된 채 시청자 배제하면 ‘국영방송’과 같아
1. 편성의 자율성과 시청자의 개입
“윤도현을, 김제동을 한국방송에서 자르고 내친 것은 제작진 내부의 편성 자율성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다. 한국방송 밖에서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불만을 품을 수는 있지만, 한국방송 내부의 편성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관영방송’ 한국방송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엽기적인 사건들에 대해 저들의 이데올로그들이 이렇게 대꾸하면(아니 실제로 이렇게 대꾸하는 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상식 있는 시민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을 수 없다’고 일갈해버리면 그만일까? 아니면, 너희들 입맛에 맞게 프로그램을 축소하거나 폐지하고 뚜렷한 이유도 없이 진행자를 교체하는 것은 소비자이자 시민인 시청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지 않다고 말해야 하는가? 이렇게 대응하면, 저들은 분명히 ‘공영방송의 편성 자율성은 노조와 사회단체 등과 같은 세력으로부터도 독립돼야 하며 보장받아야 한다’고 나설 텐데, 이에 대해서는 뭐라고 해야 할까?
생각이나 사고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아 쫓아낸 게 진실임을 현실은 말해주고 있는데, 이에 대한 해설을 둘러싸고 온갖 말의 성찬, 그리 녹록지 않은 해설들이 난무하는 게 또 다른 현실이다. 김제동과 윤도현의 축출과 추방에 대해 편성 자율성 논리를 대입하는 것에 당신은 어떻게 할 텐가?
양파 껍질을 계속 벗기면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처럼, 진실은 양파 껍질처럼 중층적이고 여러 층위가 서로 연결돼 있다.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수준에서 편성 자율성, 당연히 보장돼야 한다. 경영진이 보장해야 하고, 여러 사회 세력으로부터도 보장받아야 한다. 단, 조건이 있다. 시청자의 정당한 의견을 무시하는 도구로 편성 자율성 논리를 동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수준에서 시청자는 편성 자율성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의 사회성’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만약 1위 포털 사업자 네이버가 전자우편 서비스 제공을 중지할 경우, 당신은 고분고분 따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정부가 갑자기 수도나 전기를 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네이버의 전자우편 서비스라는 수단은 ‘사회화’했으며 사회성을 획득했다는 얘기다. 이용자나 시청자의 권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지상파방송 프로그램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현 정권의 도구주의적 방송관은 한국방송을 그대로 ‘관영’ 또는 ‘국영’ 방송으로 전화한다. 실제로 소유 형태 측면에서 한국방송은 명실상부한 ‘공적 소유’(publicly-owned)가 아니다. 정부가 100% ‘출자’한 정부 소유 공사다. 한국은행처럼 ‘무자본 특수법인’과 같은 형태가 아닌 소유의 취약함은, 한국방송이 언제든지 ‘관영’과 ‘국영’으로 회귀할 수 있는 물적 토대에 해당한다. 정치 권력으로부터 독립성과 자율성이 침해되면, 그리고 이에 맞서는 한국방송 내부의 저항과 견제가 작동하지 않으면, 그러면서도 편성 자율성 논리를 내세우면, 한국방송은 완벽한 ‘관영방송’, ‘국영방송’이 되고 만다.
2. 수신료 인상과 시청자 권리 침해
현 정권과 한국방송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수신료 인상은 한마디로 ‘대국민 사기극’이다. 수신료를 인상해 디지털 전환 투자에 사용하겠다고 하면서, 동시에 그만큼 한국방송 제2텔레비전의 광고를 줄이겠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방송에는 수신료 인상을 통해 디지털 전환에 투자할 수 있는 새로운 재원이 생기지 않는다. 한마디로 ‘똔똔’이다. 그러나 한국방송 내부는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이는 현 정권과 경영진의 사기극을 방조하는 꼴이다. 현 정권의 힘을 빌려 수신료 인상부터 하고 보자는 식이다.
수신료 인상과 동시에 추진하거나 미리 선결돼야 하는 과제들에 대해선 아예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게 시청자의 직접 수신 권리가 침해되는 현실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상파방송은 ‘공중에 대한 일방향의 콘텐츠 전송’을 그 본성으로 한다. 시청자는 지상파방송이 일방향으로 전송하는 콘텐츠를 직접 수신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는 방송법과 전파법에 보장된 시청자의 권리다. 그런데 한국방송을 포함한 지상파방송을 보기 위해 유료 방송에 가입하는 시청자가 전체 유료 방송 가입 가구의 30%를 웃도는 실정이다. 유료 방송 시청료뿐 아니라 수신료까지 내는 이중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다.
직접 수신 기반의 급격한 확대가 당장 어렵다면, 한국방송을 포함한 지상파방송 채널들만을 연번제로 한데 묶어 제공하는 상품을 유료 방송에 도입하고, 이 상품의 시청료는 수신료 수준으로 하는 정책이 추진돼야 한다. 방송통신위원회에 이를 요구하고 관철하기 위해 한국방송을 포함한 지상파방송 구성원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침묵한다. 상당수 시청자의 접근권 침해와 이중 부담을 모른 체한다.
시청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책임성(accountablity)조차 지키지 않는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법적으로 수신료는 텔레비전 방송 용도 이외에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그러나 현재 수신료는 ‘잡수익’으로 처리돼 광고 수입과 혼합돼 집행된다. 어디에 어떻게 사용됐는지에 대해 시청자는 전혀 알지 못한다. 분리회계가 이뤄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에 쓰이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수신료를 올려달라고 하는 저질 코미디 행각을 시청자는 지켜봐야 하는 실정이다.
3. ‘주식회사’ 지상파방송의 모순과 책임성
한국에서는 일상적으로 부인당하고 있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주인은 ‘국민’이다. 국민주권이고 인민주권이다. 그렇다면 주식회사의 주권은 누구에게 있을까? 주지하다시피, 주주 주권과 경영자 주권이 양립해오다, 1980년대 이후 시장근본주의 창궐과 함께 주주 주권이 패권을 잡았다. 경영자 주권은 주식 소유의 분산과 자유로운 주식 거래에 따라 주주가 기업이란 조직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만큼 경영자에게 자연스럽게 점점 더 집중되는데 이것이 바람직하다는 뜻을 지닌다. 후자는 주주야말로 위험을 부담하는 유일한 주체이기 때문에 기업의 진짜 주인이라는 논리다. 비록 한국에서는 주주 주권의 도전 앞에 재벌총수 주권이 방어에 성공해 ‘총수 주권과 주주 주권의 악조합’이라는 결과를 낳았지만, 어쨌든 선언적인 차원에서 주주 주권이 대세다. 주주 주권이 상징하는 소유권은 기업 통제권과 수익 전유권으로 이뤄진다.
그렇다면 ‘주식회사’ 지상파방송의 주인 역시 주주일까? 아니다. 지상파방송은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공적 자산’인 주파수를 기본으로 한다. 그것도 5년 한도 안에서 3년마다 주파수 사용권의 재허가를 받아야 한다. 등록제나 신고제가 아닌 허가제가 지상파방송의 뼈대를 이룬다. 게다가 전파법에 따라 지상파방송은 주파수에 대한 배타적 이용권을 갖는 것도 아니다. 주파수의 용도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주식회사’ 지상파방송의 자궁이다. 지상파방송의 주인은 시청자이고, 그래서 시청자 주권이다.
주식회사 지상파방송의 주주들이 소유하는 것은 전파가 아니다. 방송시설과 설비를 소유할 따름이며, 전파에 대해서는 한시적인 이용권만을 갖는다. 그런데 이 방송시설과 설비를 가지고 주파수를 이용해 나오는 수익을 주주들이 배당을 통해 나눠갖는다. 물론 방송통신발전기금으로 일부 납부하고 공적 출연금을 일부 내기도 하지만, 그 나머지는 모조리 주주들의 수중으로 떨어진다. 최근 SBS에는 지주회사 체제가 도입돼 주주 주권이 한층 더 강화됐다.
일부 지상파방송들은 증권거래소에 상장을 했거나 상장을 추진하고 있다. SBS는 일찌감치 상장했고, 대구민방이 상장을 추진하고 있다. 허가제 아래에 있는 지상파방송이 상장을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인데도 지금까지 아무런 제재도 없이 그대로 오고 있다. 전파를 이용해 나온 결과를 자유롭게 시장에서 거래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것이 타당한 것일까? 지상파방송이 소유의 대상일 수 있을까? 아니다. 지상파방송은 하나의 민주사회적 ‘제도’(institution)이자 하부 시스템이다. 헌법재판소는 2006년 6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제기한 신문법 위헌심판 청구에 대한 결정을 내리며 “신문 기업은 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하물며 지상파방송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제도로서 지상파방송의 기반은 바로 시청자다. 제도로서 방송은 방송 자체를 위해, 시청자를 위해 운영돼야 한다는 원칙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민영’방송의 개념은 두 가지 모호한 의미를 대별해왔다. 하나는 국가나 공공기관이 운영하지 않고 민간 기업이 운영한다는 의미였고, 또 다른 하나는 영리를 추구해 이익금을 남겨도 용인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제도의 기반인 시청자나 지역성, 방송으로서의 책임감 등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단지 외삽될 뿐이다.
이런 상황을 지양하기 위한 개념적 준비를 할 필요가 있다. ‘민영’ SBS는 그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SBS의 지주회사인 SBS홀딩스는 현재 사실상 SBS의 실질적인 주인이며, SBS에 관한 모든 주요한 결정을 내리고 있다. 지상파방송을 소유한 지주회사와 지상파방송의 관계, 방송사를 소유한 지주회사에 대한 공적 책임 등에 대한 개념화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방송사를 운영해 영리 추구를 통해 이익금을 남겨도 용인할 수 있다’는 민영 개념을 수정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지상파방송 전체에 ‘비영리’ 개념을 적용하는 것이다. 비영리 기업이라고 해서 이익을 내는 게 금지됐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다만 그 이익이 기업을 통제하는 사람들에게 분배되는 것에 제한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민영’ 지상파방송은 ‘비영리’ 지상파방송이 돼야 한다. 지상파방송의 순이익이 주주들에게 배당되는 것에 일정한 상한선을 설정하고, 민주사회적 제도인 지상파방송 그 자체를 위해 사용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현실이 생뚱맞다고 말할지라도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