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외교관 시대를 열다
한국외교의 인맥 <1> 김용식·최규하·김동조
김 승 웅 <본지 회장>
외교란 따지고 보면 사람이 벌이는 작업이고, 따라서 아무리 제도와 절차로 묶어 인위적 차이를 제거하려 노력해봤자 결국은 외교주역을 맡은 사람의 성향과 개성에 따라 외교의 컬러가 달라지게 마련인 탓이다. 외무장관은 외교관의 정상에 선다. 우리나라는 정부 수립 60년이 되는 2008년까지 모두 35명의 외무장관을 배출했다. 초대의 장택상(1948년 8월 ~ 12월) 으로부터 35대의 유명환 장관에 이르기까지 기라성 같은 외교주역들이 국제무대와 외교가를 석권하고, 통솔하고 부침했다.
이 가운데 초창기 외교주역을 맡았던 김용식, 최규하, 김동조 세 장관의 우화를 서두에 소개한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커리어 디플로맷', 소위 직업외교관 제도가 한국외교에 뿌리를 내린 것이 바로 이 세 장관들이 외교주역을 맡던 시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또 이 셋 외교주역들이야 말로 한국형 직업외교관의 효시이자 오리지널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 수립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외교관이란 직업을 갖지 못했다. 수천, 수만 종류의 직업군 가운데서도 외교관이란 직업은 (국회의원직과 마찬가지로)우리에게 생소한 어휘였고, 따라서 직업 외교관이라는 프로페셔널리즘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큰 무리였다.
우리나라 외교가(街)에 직접 외교관 제도가 착근(着根)한 시기를 기산(起算)할 때, 대부분의 고참 외교관들은 김용식이 장관에 취임했던 1963년 12월을 꼽는데 별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한 12년 동안은 무엇으로 치느냐는 반문도 없지 않겠으나, 이 시기의 한국외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경무대 외교' 라 불러 무방할 만큼 이승만 외교의 전횡시대를 뜻했다.
생애의 반 이상을 외국에서 독립 투쟁에 보냈고, 따라서 국제 조류의 파악에도 그만큼 출중했던 이 박사는 그 스스로가 탁월한 외교가였다. 휘하의 누구도 그의 외교적 탁견과 형안을 따라잡지 못했고, 말단 외교관의 해외 출장비 지급에서부터 사소한 조약문서의 작성에 이르기까지 이 박사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을 만큼 완벽한 외교를 구사한 것이다.
따라서 이 박사 시절 외무장관을 역임한 초대 장 택상으로부터 임병직, 변영태, 조정환, 허정은 개개인의 출중했던 능력별 고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이승만 외교'라는 후광에 가려지는 불운을 겪고 만다.
김용식의 장관 등장은 우선 그가 이 박사 시절의 외무장관들과는 전혀 달리, 마닐라 특사, 장관 보좌관, 홍콩 영사, 주일 공사, 주불 공사, 그리고 외무차관까지 차례로 역임한 후, 커리어 출신으로서 최초의 장관직을 따냈다는데 첫 액센트가 있다.
변호사출신 김용식, '세련된 외교 엘리트'의 선두주자
관료출신 김동조, '뚝심과 배짱'의 저돌형
교수출신 최규하, '킹스 잉글리쉬' 구사하는 귀족풍
이어 김용식을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외교 엘리트의 구축이 이 시기부터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데 부차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의 새로운 외교엘리트의 구축 - 외교인맥(人脈)의 형성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 과 그 형성 시점은 김용식의 부상(浮上)이 있기 5~6년 전의, 김동조 외무차관 시절(1957년 5월~59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순리일지도 모른다.
소위 '김동조 사단', 그의 이니셜을 딴 속칭 'DJ사단' 이 이 무렵부터 서서히 외무부 안에 구축되기 시작한 것이다. 김용식 계보의 경우 역시 그의 이니셜을 따 'YS 맨'이라 불렸다. 57년 김동조가 외무차관에 이르고 그로부터 2년 후 이번에도 역시 커리어 출신 외교관 최규하가 차관 바톤을 승계한다.
다시 말해서 57년부터 63년까지의 6년을 한국 직업 외교진의 결실기라 불러 무방할 만큼 커리어 제도가 확립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이 결실 과정을 좀 더 소상히 규명하기 위해 김용식, 최규하, 김동조의 외무부 입부(入部) 과정과 입부 후 발휘된 업적과 성과, 개개인의 퍼스낼리티를 추적해볼 필요가 있다. 이 세 외교관의 부상과 치적은 또한 60년대 후반과 70년대를 거쳐 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외교의 주축을 형성해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 사람이 외무부에 발을 들인 것은 대개 비슷한 경위와 동기에서 시작된다.
또 발을 들인 시기가 정부 수립 직후 또는 그로부터 길어야 2~3년이 지나서부터라는 점에서 세 사람 모두 초창기 한국외교의 창설 멤버라 해도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다. 굳이 입부 순서를 따진다면 6.25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으며, 6.25 이전에 발을 들인 사람은 김용식 혼자다.
세 사람은 또 학력도 비슷했고 수학지(修學地) 모두 일본이라는, 소위 일본 유학파라는 점에서도 같았다. 김용식은 경남 충무 출신으로 중앙고를 거쳐 일본 중앙대 법학부를 졸업, 일본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후 39년부터 법관 생활을 시작, 해방 후엔 변호사를 개업해왔다.
변호사 개업 19년만인 48년 어느 날 그는 중앙고 시절 영어교사이자 당시 마닐라 특사로 임명된 변영태의 부름을 받고 외교계에 첫발을 들인다.
김동조는 김용식과는 달리 전형적인 행정관료 출신이다. 부산 출신인 그는 43년 일본 구주제대 법문학부를 졸업, 졸업하던 해 고문(高文) 행정과 시험에 합격하며, 정부 수립후 경남도청의 이재과장, 상무과장, 법제과장을 거쳐 49년 일약 체신부 이사관으로 발탁되어 상경한다. 그는 상경 직후 체신부장관(당시 장기영)의 비서실장을 거쳐 51년 체신부 감리국장을 수임하며 같은 해 외무부 최고의 요직인 정무(政務)국장(지금의 차관보)으로 자리를 바꾼다.
최규하가 외무부에 첫발을 들인 것은 김동조와 같은 51년이다. 김 용식이 변호사 출신이고 김동조가 고급 행정관료 출신인데 비해 최규하는 학계 출신(서울사대 교수)이라는 점에서 당시 외교계에 발을 들인 한국 외교주역들의 다양한 입문 경위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는 제1고보 (현 경기고)를 졸업한 후 당시 전국의 수재들이 다 모이는 경성제대에 응시, 합격했으나 방향을 일본으로 돌려 동경고사(東京高師)로 진학했다. 이어 43년 만주 대동(大同)학원을 졸업한 후 해방과 함께 귀국, 서울대 사대에서 영어 교수로 재직했다. 46년 군정 하에서 중앙식량행정처 기획과장으로 공무를 시작한 최규하는 정부 수립과 함께 농림부 양정과장, 6.25 피난시절인 51년에는 부산 임시수도에서 농림부 귀속농지관리국장 서리에 올랐고, 같은 해 외무부 통상국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처럼 비슷한 여건, 비슷한 동기에서 만난 세 사람은 그 후 외교 주역으로 대성하기까지 외무부내에서 심한 보합 경쟁관계를 벌이며 성장한다. 한 사람이 야전사령부(해외 공관)를 호령할 때 다른 사람은 참모본부(외무부)에서 명령을 시달했다.
'킹스 잉글리시'를 과시하는 최규하에게 김용식은 율사(律士) 출신다운 냉정으로 응수, 정확한 외교용어의 구사를 종용했는가 하면 두 사람 모두가 자칫 결하기 쉬운 뚝심과 배짱은 김동조의 전유물이었다.
주일공사로 있던 김 용식이 외교 문안을 놓고 참사관인 최규하와 영어사전을 펴가며 실랑이를 벌였다. 그 실랑이 내용을 전해 듣고 이번엔 본부의 김 동조가 득의의 웃음을 짓더라는 얘기는 지금 외교계를 은퇴한 전직 고참 외교관들 사이에 두고두고 남아있다.
세 사람의 특성과 취향을 설명하는 또 하나의 에피소드로 '돌다리'가 있다. 셋이서 따로 떨어져 돌다리를 건너게 됐다. 김동조는 뒤도 안 본채 무턱대고 다리를 건넜다. 김 용식은 돌다리를 두들겨 본 후 조심조심 건넜다. 최규하 차례가 됐다.
그는 돌다리를 두들겨보고도 한참을 기다렸다. 그리고 남이 먼저 건너기를 기다렸다 그 뒤를 따라 건너는 것이었다.
김용식 최규하 두 분이 영어에 출중했던 것은 두 사람의 외교부 입부(入部) 경위가 영어 때문이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김용식이 외교계에 첫발을 디딘 것은 3대 외무장관을 지낸 변영태의 발탁에 따른 것임은 이미 밝힌바 있다. 정부수립 직후인 49년 1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마닐라 특사에 임명된 변영태(당시 고대 영문과 교수)는 수행보좌관을 누구로 할 것이냐를 두고 적이 부심한다. 개인 사무실로 쓰던 종로YMCA빌딩에서 망연히 창밖을 응시하던 변영태의 시선에 저만치 내려다뵈는 곳에 걸린 '변호사 김용식 법률사무소' 의 간판이 들어왔다.
"어? 바로 김용식 군 아닌가. 그를 데리고 가자. 그만한 영어, 그만한 체구를 지닌 인물이 없지, 김 군은 또 법률로 무장된 만큼, 외교관으로는 가장 적격인 변호사가 아닌가..." 김용식은 이렇게 해서 외교관이 된다.
김용식이 중앙고보 재학시절 변영태는 그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공부 잘하고 다른 과목보다 특히 영어에 출중했던 김용식의 소년 시절 모습이 그 훤칠한 체구와 함께 옛 스승의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주요 저서로, <파리의 새벽, 그 화려한 떨림>, <모든 사라진 것들을 위하여>, <DJ를 평양에 특사로 보내시오>, <실록 김포국제공항>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