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 아프리카, 살육의 향연

2016-01-28     제라르 프루니에
     


부룬디의 정치적 위기로 1년 만에 수백 명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지난 1월 말, UN은 분쟁의 ‘민족적 측면’이 확대되고 있다는 ‘비상 신호’를 감지했다. 복잡하게 얽힌 경제와 정치적 요인들 때문에 불길이 이 작은 나라를 넘어 아프리카 전역에 번질 위기에 놓였다.

아프리카 대호수 지역, 특히 르완다와 부룬디에 대한 현 시각을 다원적으로 결정짓는 기억들이 있다. 1994년 르완다 투치족 대학살에 대한 기억과 이보다는 약하지만 폭력의 규모는 더욱 컸던, 콩고민주공화국(DR콩고)을 초토화시킨 1996~2002년 전쟁에 대한 기억이다.(1) 르완다 대학살로 약 80만 명이 사망했으며, 뒤이어 DR콩고에서 발생한 다국적 전쟁은 3백만여 명의 목숨을 빼앗아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분쟁이었다.

1994년 르완다 대학살과 그에 따라 절정으로 치달은 결과들은 당시 사건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했으며, 그 후 이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들도 마찬가지였다. 잠재적인 ‘역사의 반복’이라는 표현들로 모든 것이 해석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는 미묘한 차이들, 다시 말해 실제 사실관계들을 평가할 가능성을 무시하는 일이었다. 2015년 이래 부룬디의 상황변화가 심각한 지역 불안정을 초래했을 것이므로, 이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사건의 구성요소들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이곳 지역의 많은 주요 인사들이 상황악화에 적잖은 관심을 보일 정도로 심각한 위기다.

은쿠룬지자 부룬디 대통령이 파렴치하게도 멋대로 취급하는 민족적 요소를 어둠 속에서 건져내야 한다. 르완다와 부룬디의 역사가 비슷하다고는 하나, 사실 이 둘은 이란성 쌍둥이에 가깝다. 투치족과 후투족은 벨기에 식민지였던 두 고대왕국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해왔다. 대호수 지역의 정치공작이나 뉴스 단신이 멋대로 떠들어대는 것과는 달리 투치족과 후투족은 부족이나 종족을 구성하지 않는다. 또한 지역사회 구조에 따라 두 계급 사이의 관계는 르완다보다 부룬디가 덜 긴장돼 있다.

 

부룬디의 골칫거리는 르완다의 민족간 분쟁

1960년 독립 직후, 르완다의 투치족과 후투족은 순식간에 폭력사태로 빠져들었다. 반면 부룬디는 어려웠지만 평화를 유지했다. 부룬디의 걱정거리 대부분은 이웃나라 르완다에서 벌어지는 상황에서 비롯됐다. 1959년과 1961년, 그리고 1963~1964년에 극단파 후투족이 ‘귀족’이던 투치족을 연이어 학살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 두려워진 부룬디의 후투족이 권력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순한 ‘이민족 간 증오’로 폭력이 폭발했다기보다는 식민지 해방 이후의 상황 때문으로 봐야한다. 1966년, 미쉘 미콤베로 부룬디 대령이 왕정을 전복했고, 왕위에 있던 은타레 5세는 우간다로 도망쳤다. 투치족 출신이라는 사실에 앞서 미콤베로는 무엇보다 1966~1972년 불투명한 진압작전을 추진했던 군부 독재자다. 그의 극단적 행동 때문에 1972년 폭동이 일어났고, 복잡하게도 주동자는 부룬디 서부의 임보(Imbo)지역 주민들이었다. 미콤베로와 투치족 극단파는 이번 폭동이 분명 1960년대 초에 르완다 투치족 대학살을 벌인 ‘다수 민족(Rubanda nyamwinshi)’의 인종차별적 이데올로기의 영향 때문이라고 믿었다. 민족적 기준으로는 명백하게 후투족이 권력을 잡게 된 전조였으며, 부룬디의 후투족 대학살의 계기가 됐다. 20만여 명의 희생자를 뒤로하고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이를 집단학살이라고 평가한다. ‘대재앙(Ikiza)’(2)이라고까지 표현되는 이 사건으로 악의 화신인 적대세력을 물리적으로 없애버려야 한다는 ‘르완다 바이러스’와 유사한 ‘민족적 본질주의’가 부룬디에 유입됐다. 그러나 과격적인 반응이나 집단의식은 르완다에 비하면 훨씬 표면적이라 할 수 있다.

미콤베로의 민족성에 대한 열광은 역설적이게도 같은 투치족 출신인 장-밥티스트 바가자 대령에 의해 1976년 그가 실각하면서 끝이 난다. 마찬가지로 투치족 출신인 피에르 부요야가 그 뒤를 이었으며, 보다 온건한 체제 하에 1993년 투명한 자유선거가 치러졌다. 대재앙에서 살아남은 후투족 출신인 멜치오르 은다다예 후보가 65%의 표를 얻었지만, 이는 일시적 소강상태에 불과했다. 투치족이 대부분인 군 세력은 변화를 원치 않았다. 결국 군부는 5개월 뒤에 대통령을 암살했고, 이로 인해 12년간 지속되며 20만 명의 사상자를 낸 내전이 시작됐다.

그러나 여기에도 르완다와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부룬디의 투치족과 후투족은 양측 간의 교류를 단절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르완다처럼 민족말살을 통해 한쪽 진영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식이 아니라 평화협정을 통해 전쟁을 종결했다. 2000년에 체결된 아루샤 협정은 이성의 승리인 것이다.

 

빈곤과 야망에 위협받는 부룬디

분쟁은 문화적으로 낯설게 느껴진다. 그러나 분쟁에 대해 ‘국제사회’가 선호하는 해결책들은 참으로 단순하다. 특히 국제사회가 선호하는 해결책은 선거다. 그러나 선거에 참여한 정당들은 대체로 지역, 민족, 종교, 혈연을 기반으로 한 집합체로, 실질적인 계획수립은 크게 중요시하지 않는다. 국제사회는 이 점을 정작 신경 쓰지 않는다. 실행하기 힘든 본질적인 해결책보다, 원자재 개발을 부추기는 ‘평화’에 관심이 많은 임대인들만이 이러한 사이비 민주주의에 만족할 뿐이다. 게다가 부룬디의 사회와 경제는 오래전부터 병들어 있었다. 분쟁이 끝나갈 무렵인 2005년, 부룬디가 꺼내든 것은 일시적으로 뇌관이 제거된 시한폭탄이었다. 전쟁을 일으킨 사회·경제적 원인들은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제문제의 핵심은 인구와 토지문제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일부 경제학자와 인구통계학자들의 심기가 불편할 수는 있겠으나, 우리는 현재 맬서스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부룬디의 인구밀도는 1㎢ 당 271명으로, 프랑스 인구밀도의 2.3배에 달한다. 게다가 모든 활동의 기초인 농업은 더할 수 없이 미개한 전통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원시시대에나 썼을 법한 괭이를 활용하고, 비료는 너무 적게 사용하며 종자선별 작업도 없다. 그 결과 1인당 연소득은 282달러에 불과하다. 인구 증가율이 연간 3.8%인 것을 감안할 때 2025년 인구는 1,600만~1,700만으로 예상된다. 농업생산성 증가에 그다지 유리하지 않은 구릉성 지대인 이곳의 인구밀도는 프랑스의 3.5배에 달할 것이다.

1인당 소득은 2004년부터 꾸준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다. 농업경제가 침체되는 사이, 농경지와 인구 간 관계도 계속 악화되고 있다. 1930년 농경지 1㎢ 당 먹여 살려야할 인구는 102명이였는데 오늘날 그 수는 6배 증가했다. 목초지 부족으로 가축 수가 급격히 감소했으며, 양계장은 사료마저 부족하다. 지난 30년 간 소의 수는 50% 줄어들었고, 가금류는 350만 마리에서 50만 마리로 감소했다.

토양에 상관없이 생존에 적응한 염소의 수만 2배 증가했다. 그러나 역사적 선례를 보면, 염소류 가축이 증가하는 것은 오히려 쇠퇴의 징후이다. 이는 생태학적 붕괴와 관련이 깊다. 대표적인 경우로 8~13세기 이집트 칼리프가 파티마 왕조와 아바스 왕조 간 싸움의 일환으로 아랍 원시부족을 앞세워 북아프리카를 정복한 이후 상황을 들 수 있다. 마그레브의 상황은 아직도 회복되지 않은 상태다.

게다가 2000~2005년 아루샤 협정 체결에 의한 과도기 단계에 들어서면서 50만 명 이상의 난민들이 탄자니아에서 돌아왔다. 이들 대부분은 토지가 없다. 2012년 11월1일 제네바에서 열린 기부자 회담에서 20억 달러의 지원을 약속받았지만, 이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인구폭발 문제와 결합된 원시적 농업방식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지 않는 이상 부룬디는 살아남기 힘들 것이다.

아루샤 평화협정이 당장의 이익을 가져왔을 수는 있으나, 정치적 측면에서는 현재 위기의 씨앗을 뿌린 셈이다. 민주방위국민평의회-민주방위군(CNDD-FDD) 수장이던 은쿠룬지자는 처음 151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국회에서 91.5%의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CNDD-FDD로 말하자면, 전쟁의 선봉에 서서 내전을 치르며 무위를 떨친 바 있다. 무엇보다 반대파인 투치족과 후투족의 라이벌들과 협의할 수 있는 역량을 보여주었고, ‘국제사회’와도 좋은 관계를 구축했다.

그렇게 좋은 패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경제적 이유 때문에 이를 사용할 줄 몰랐다. 아니, 정확하게는 원치 않았다. 분쟁 이후 모든 상황은 생존자들의 지배 아래 있었다.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오직 국가만이 국민을 도울 수 있었고, 국민은 존재하지도 않는 산업에도, 자영업에 의존할 수도 없었다. 국제사회에서는 이를 부패라 부르고, 현지에서는 권력이 후견주의적(Clientélisme) 생존망을 만들어냈다고 한다.(3) 2015년 7월21일 대선에서 은쿠룬지자 대통령이 얻은 득표율 69.4%의 대부분은 ‘은쿠룬지자식 민주주의’의 수혜자들이 던진 표일 것이다. 이는 매우 사적인 정치 공략임에도, 은쿠룬지자 대통령도 숨기지 않는다.

2006년 8월 총선거가 있은 지 1년여 후 CNDD-FDD는 경쟁자들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했다. 쿠데타를 계획해 도미티엔 은다이제예(후투족) 전 대통령, 피에르 부요야(투치족) 전 대통령, 레오나르 니안고마(후투족) CNDD 창설자, 극단파 투치족 집단인 민주주의청년연대(Sojedem)의 데오그라시아스 니욘지마 수장, 온건파 후투족인 판크라스 심페이에까지 그 책임을 지운 것이다.

전쟁 베테랑이자 정중한 스타일의 수단 출신 외교관, 누레딘 사티 UN특사는 “추방당하기 싫으면 개입하지 말라”는 요청을 받았다. 카드로 만든 성은 위태롭게 휘청거리더니 결국 스스로 무너져버렸다. 유일한 희생양인 알랭 무가라보나 민족해방전선(FNL) 수장은 2007년 1월에 징역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무고했을 뿐더러 음모는 존재한 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명분아래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로써 상식을 벗어난 CNDD-FDD의 비전이 더욱 공고해졌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CNDD-FDD는 이 승리를 통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재량권을 얻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2010년 5월 대선과 총선거가 치러졌다. 잠잠한 분위기에서 진행된 선거에서 64%의 표를 얻은 CNDD-FDD의 승리로 돌아갔다. CNDD-FDD의 승리는 경쟁세력들이 악조건 속에 있었던 덕택이기도 하다. 14.25%의 표를 얻은 FNL은 1972년 ‘대재앙’ 이후 창설된 극단파 후투족 집단인 팔리페후투(Palipehutu)라는 노장 세력으로 무장한 분파로, 아루샤 협정을 거부한 ‘악역’을 맡았다. 국가진보연합(Uprona)의 경우 6.25%밖에 얻지 못했는데, 1966~1990년 유일한 정당이었던 것에 대한 대가를 치른 셈이다. 득표율이 5.4%에 그친 부룬디민주전선(Frodebu)은 전쟁을 치르면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Frodebu는 1990년 다당제 도입과 더불어 창설돼 1993년에는 은다다예 대통령을 당선시키는데 기여한 바 있다.

만만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CNDD-FDD는 Uprona와 임시변통으로 맺은 연맹관계의 덕도 보면서 정치계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후투족 농민들 대부분은 CNDD-FDD의 반민주적 행동에 개의치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대통령이 국민을 ‘도울’ 능력이 있는지다. 대통령은 이 카드를 최대한 활용해 특히 은고지(Ngozi) 지역과 카얀자(Kayanza) 지역을 사로잡았다. 젊은 체육교사 출신으로 축구도 잘하고, 열렬한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인 그는 종종 지방에 들러 소규모 사회프로젝트(보건소, 학교, 소규모 협동조합) 개막식에 참석했다. 이런 행동들이 경제상황을 크게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일단 눈에 잘 띄고,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인 것이다. 정치계가 폐쇄적으로 되거나 정보의 자유가 위협받는 것은 그리 중요치 않다. 반체제 인사들이 계속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리고, 아루샤 평화협정으로 자리 잡은 메커니즘이 와해되는 것도 그에게는 큰 문제가 아니다.

2015년 4월25일, 은쿠룬지자 대통령이 헌법에 반하는 3선 출마 의지를 밝히자, 고데프로이트 니욤바레 장군이 5월13일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반란 시도는 48시간 만에 실패로 돌아갔다. 주원인은 ‘민중적 독재자’가 군 내부와 유권자들로부터 받는 지지를 ‘민주적 반란자’가 과소평가했기 때문이다. 니욤바레 장군은 르완다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부룬디는 저강도 내전에 휩싸였다. 2015년 하반기 내내 표적암살과 군부대를 급습하는 일이 증가했다. 정부는 7월 이래 130명이 사망했다고 밝혔지만, 야당이 발표한 사망자수는 530명에 달한다. 농촌보다는 후견주의 영향력이 적은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분쟁이 발생했다.

곧이어 질문이 제기된다. 이 혼란은 부룬디 국경 내에 머무를 것인가, 아니면 국경 밖으로 번질 위험이 있는가? 최근 몇 주간 있었던 일들이 특히 우려스럽다. 오랜 기간 지속되고 파괴력도 엄청났던 1996~2002년 전쟁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4) DR콩고의 북부 키부와 남부 키부 지역도 여전히 일촉즉발의 화약고로 남아있다. 르완다는 공식적으로는 DR콩고에서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부족 민병대를 멋대로 부리며 광물자원을 불법채굴하고, 르완다해방민주세력(FDLR)의 게릴라부대를 감시 중이다. 1994년 후투족을 학살했던 구 정부에서 시작된 FDLR은 콩고에서 생존하고 있다. 르완다에게는 ‘콩고’ 출신으로 구성된 자신만의 민병대인 M23가 있다. 현재 M23은 남수단으로 후퇴한 상태인데 남수단은 나라 자체가 붕괴 직전에 있으며,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맞닿은 국경은 미관리 상태로 범죄자 신분의 광신도들 집단인 신의 저항군과 같은 각종 집단세력들이 배회하고 있다.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DR콩고를 근거지로 삼아 암암리에 수단 정부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반군, 민주군사동맹-우간다해방군(ADF-NALU)이 지속적으로 우간다를 공격하고 있다. 그런데 DR콩고 정부는 이에 맞서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DR콩고는 공식적으로 이 분쟁에 대해 ‘개탄하고’ 있으며, 이를 끝내려는 시늉만 하고 있다. 실상 조셉 카빌라 DR콩고 대통령은 수단과의 동의하에 동부 아프리카의 적수들이 수많은 소규모 지역분쟁의 타격을 입어 약화되고(실제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는다), 국제적 이미지가 ‘뒤죽박죽’ 되는 것을 관망하고 있다. DR콩고와 우간다는 양국이 맞닿는 국경에 위치한 알버트 호수의 유전개발을 두고 경쟁 중이다. 한때 콩고민주연합(RCD) 반군의 장교였던 카빌라 DR콩고 대통령은 르완다 적과 우간다 적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기 쉽다. 1990년대 중반, 당시 자이르라 불리던 곳의 잔유물을 차지하기 위해 우간다와 르완다는 RCD를 지지했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남수단이 맞닿은 국경부터 남부 키부 지역과 탕가니카 호수 연안까지 이어지는 선을 따라 소규모 지역에 불안정성이 만연하다. 폭풍지대는 아니나 강한 돌풍이 몰아치고 있으며, 정부는 입으로만 관리할 뿐 실질적인 통제는 없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우간다, 남수단, 부룬디, DR콩고 모두 수도 이외의 지역에서는 정부가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군사력과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이 지역의 모든 국가가 다양한 이유로 쇠약해진 상태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 최근 프랑스가 내전을 진압한 이후 상황이 불안정하며, ‘대부’격인 프랑스는 파병한 군대를 언제 철수시킬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남수단의 경우, 2013년 12월 독립 직후 발발한 내전이 정부간개발기구(IGAD)의 중재 하에 2015년 8월 아디스아바바에서 체결된 평화협정으로 해결책을 찾은 듯 보인다. 협정내용을 시행하려고 추진 중이나, 성공할 확률은 낮아 보인다. 실제로는 한 번도 중단된 적 없는 전투가 언제든 재개될 수 있는 상황이다.

아프리카연합(AU)이 ‘지역의 대부’로 승격시켜준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은 30년 째 집권 중이다. 게다가 헌법을 위반하지 않고도 올해 선거에 나갈 수 있게 됐다. 2005년 헌법을 개정해 재임 횟수를 제한하는 모든 수단을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정보부 장관이던 폴 카가메는 르완다의 대통령이 됐고, 철저히 계획된 국민투표를 통해 르완다에서도 같은 일을 벌였다. 폴 카가메 대통령은 1994년 대학살 당시 거둔 군사적 승리의 후광을 아직도 누리고 있다.

카빌라 DR콩고 대통령도 헌법을 개정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무스베니 대통령처럼 국회를 잘 다룰 능력도, 카가메 대통령처럼 ‘나 아니면 혼돈’이라는 공식으로 끊임없이 협박할 능력도 없다. 따라서 카빌라 대통령의 경우 우회수단이 필요하다. 은쿠룬지자 부룬디 대통령도 이런 식으로 헌법을 위반할 수 있었다. DR콩고 군은 키부 지역에서 M23 일원이던 부룬디, 르완다, 콩고 출신 병사들 십여 명을 체포했는데, 이들은 은쿠룬지자 정권을 뒤흔들 선동자 모집을 위해 르완다에서 부룬디로 가던 중이었던 걸로 추정된다. 이 사건으로 카빌라 대통령은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은 채, 내부 반대파를 침묵시킬 카드를 쥐게 됐다. 르완다 국경에 군화발소리가 울려 퍼진다면, 반대파가 헌법 조작의 현장에서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 것이다. 비판을 잠재우고 긴급사태를 정당화시키기에 충분한 위협 수단을 쥔 셈이다. 따라서 반대파 대부분은 애국심을 의심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부룬디 상황이 악화되는 가운데, 은쿠룬지자 르완다 대통령에게도 수확이 있으리라 짐작된다. 은쿠룬지자 대통령은 반란군 배후에 투치족이 있다고 비난하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분쟁에 민족성을 부여했다. 사실 반란군 모두 자신의 옛 동료였던 후투족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은 20년 전 르완다에 투치족 정권을 부활시켰듯, 부룬디에도 투치족 정권을 복귀시키려는 꿈을 꾸며 부룬디 반군을 지원 중이다. 키부 지역에서 억류된 병사들도 그가 지원하는 M23의 일원이다. 현재 도망 중인 부룬디 투치족 출신 정치인인 알렉시스 신두히제가 M23과 관련이 있으며, 부룬디군(FAB) 참모장군이던 장 비코마구 장교도 마찬가지다. 장 비코마구 장교는 온건파로 전향했는데 8월15일 ‘낯선 이들’에게 살해당했다. 카가메 대통령의 독선적 방식은 점점 더 ‘국제사회’와 대립하기 시작했고, 시선을 돌리기 위해 약간의 폭력이 필요했다. 특히 분명 과장된 측면이 있겠지만 ‘집단학살’에 대한 두려움을 미디어에 확산시킬 폭력수단이 필요했다.

민족 간의 증오 퍼뜨리기. 이는 대호수 지역에서 권력을 잡을 수 있는 확실한 비결이다. 무세베니 대통령은 AU로부터 부룬디 위기를 해결하도록 일임 받았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우간다 대통령 재임 횟수 제한에 관해 비열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이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도덕적·정치적 권위가 부족하다. 그래서 무세베니 대통령은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는 상태다. 그 동안 구조적 결함을 틈타 반대자보다는 수익자가 늘어나는 정치상황 속에서 폭력이 늘고 있다. 마지막으로 1996년에 이 지역에서 동일한 전략적 술책을 이용한 결과, 3백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글·제라르 프루니에 Gérard Prunier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소(CNRS, 파리) 연구원이자 프랑스 에티오피아학 연구소(Centre français d’études éthiopiennes, 아디스아바바) 소장

번역·이보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피에르 베네티 Pierre Benetti, ‘Au Burundi, les racines de la colère(부룬디의 분노의 뿌리)’,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15년 6월호 참조.
(2) Cf. 장-피에르 크레티앙 Jean-Pierre Chrétien, 장-프랑소와 뒤파퀴에 Jean-François Dupaquier, ‘Burundi 1972 : au bord des génocides(부룬디 1972년: 집단학살의 언저리에)’, Karthala, 파리, 2007년.
(3) Cf. 크리스틴 데슬로리에 Christine Deslaurier, ‘Un monde politique en transition : le Burundi à la veille de l’indépendance(과도기에 있는 정치계: 독립 전야의 부룬디)’, 파리1대학 개발연구소(IRD) 소장 논문, 2002년.
(4) Cf. ‘Africa’s World War. The Congo, the Rwandan Genocide and the Making of a Continental Catastrophe‘, Oxford University Press America, 뉴욕, 2009년.

 

 

[박스기사 1] 후투족과 투치족의 차이

투치족과 후투족이 부족이나 민족을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역사학자와 사회학자들이 충분히 증명한 바 있다. 투치족과 후투족은 고향이 같으며, 언어, 문화, 종교적 기준도 동일하다. 예전부터 결혼도 가능했던 것을 볼 때 계급의 차이도 아니다. 그러한 점들을 볼 때, 그들 간의 차이를 정의하기에는 ‘신분’이라는 단어가 더 적합할 것이다. 1789년 이전 프랑스에 존재하던 계급을 의미하는 ‘신분’ 은 혁명 이전의 유럽에서 같거나 다른 구성원들 간에 매우 다양한 관계를 형성했다. 르완다에서 비공식적으로 후견인-피후견인 계약을 의미하는 ‘ubuhake’는 매우 엄격하게 지켜졌다. 대다수의 후투족 농민에게 농노에 가까운 지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부룬디에서는 ‘ubugabire’라는 보다 관대한 관계를 도입했다. 노동시간이 일정했으며, 농사에 가축을 활용할 수 있게 하는 등 현물 보상을 했다. 또 하나의 큰 차이점이 있다. 르완다 왕국은 전쟁을 자주 일으켰기에 주변의 은코레 왕국(현 우간다), 카라그웨 지역(현 탄자니아 북서부), 키부 지역(콩고)과 끊임없이 분쟁했다. 르완다는 이 지역의 바이에른이 아니라 프러시아였다. 반면 부룬디는 종종 르완다의 공격을 막아야 했지만, 훨씬 평화로운 모습을 보였다. 르완다 왕족은 명백하게 투치족이었지만, 부룬디의 왕족혈통인 간와(Ganwa)는 투치족도 후투족도 아닌, 본연의 민족주체성을 구현한 별개 집단으로 간주됐다.


글·제라르 프루니에 Gérard Prunier

번역·이보미

 

 

[박스기사 2] 뜨거운 냄비, 대호수 지역의 연대기

1960년 - 콩고 독립
1962년 - 부룬디, 르완다 독립
1963년 - 르완다에서 후투족 세력이 투치족에 대한 대학살 자행
1965년 - 피에르 응겐단두뭬(후투족) 부룬디 총리가 암살당함
1972년 - 부룬디 남부에서 투치족에 대한 대학살 발생. 후투족 수십만 명을 진압하고 추방함
1973년 - 르완다에서 쥐베날 하비야리마나가 쿠데타를 일으킴. 투치족에 대한 대학살 발생
1986년 - 우간다에서 요웨리 무세베니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 장악
1990년 10월 1일 - 폴 카가메가 이끄는 르완다애국전선(FPR)이 우간다에서부터 공격 시행
1993년 - 부룬디에서 멜치오르 은다다예(후투족)가 대통령에 당선되지만, 10월21일에 암살당하고 내전 발발. 르완다 정부와 FPR은 아루샤 협정 체결
1994년 4월6일 - 하비야리마나 르완다 대통령과 시프리엔 은타리아미라 부룬디 대통령이 테러로 암살당함. (4~7월) 르완다 투치족에 대한 대학살 발생. FPR은 학살 자행세력을 내쫓고 권력 장악
1996~1997년 - 르완다군이 학살 자행세력을 뒤쫓기 위해 자이르공화국(현 DR콩고)를 침략함에 따라 제1차 콩고전쟁 발발. 로랑 데지레 카빌라가 조셉 모부투를 축출하는 것으로 전쟁 종결
1996년 - 우간다에서 무세베니가 대선 승리(2001년 재당선)
1997년 - 자이르공화국이 DR콩고로 바뀜
1998~2002년 - 키부 지역 반란을 시작으로 제2차 콩고전쟁 발발. DR콩고, 나미비아, 앙골라, 짐바브웨, 르완다, 우간다 등 6개국 개입
2000년 -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 당선(2003년, 2010년 재당선). 부룬디 정부, 야당, 반군이 아루샤협정을 체결함에 따라 내전이 종결되고 다당제 민주주의를 재정립할 기반 마련
2001년 - 조셉 카빌라가 암살당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2006년, 2011년 재당선)
2005년 - 부룬디에서 다당제 자유선거 실시. 피에르 은쿠룬지자 대통령 당선
2006년 10월 29일 - DR콩고에서 처음으로 민주적 대선 실시
2010년 - 논란의 여지가 많았고 폭력사태가 뒤따른 선거를 통해 은쿠룬지자 대통령 재당선
2015년 4월 27일 - 은쿠룬지자 대선 후보의 3차 연임 시도에 반대하는 시위가 시작됨. (5월 13~15일) 쿠데타 시도. (7월21일) 논란은 많았지만 은쿠룬지자 대통령 재당선. 반대시위와 무력진압 발생. (11월12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결의 2248호에 따라 부룬디에서 대화의 자리를 마련할 것 촉구. (12월18일) 아프리카연합(AU)은 부룬디에게 96시간 안에 부룬디보호·방지아프리카파견단(Maprobu, Mission africaine de prévention et de protection au Burundi)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 (12월23일) 야당이 부룬디공화주의부대(Forebu, Forces républicaines du Burundi) 창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