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세린, 상처받고 버려진 튀니지 땅

2016-01-28     로라-마이 가베리오

 

튀니지 내륙지역은 오랜 세월 소외돼 왔다. 늘 방치된 상태였고, 2011년 혁명을 통해서도 이렇다 할 성과를 건지지 못했다.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계속되는 폭력으로 얼룩진 이 지역 주민들의 분노와 환멸만 커지고 있다.

2011년 튀니지 혁명 당시 한 철로 벽을 따라 커다란 그라피티가 펼쳐졌다. “이 곳의 분노는 비단 어제 오늘의 것이 아니다.” 이 문구는 튀니지 독립 이후 쭉 소외돼왔고,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의 독재정권이 무너진 2011년 1월 14일 이후에도 여전히 소외된 채로 남아있는 튀니지 일부 지역의 입장을 대변하는 일종의 슬로건이 되기도 한다. 특히 튀니지 중서부에 위치한 주민 수 8만 명 남짓의 소도시 ‘카세린’의 민족적 특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카세린은 과거 튀니지 족장들,(1) 뒤이어 프랑스 점령군에 대항해 일어났던 대규모 민족운동의 보루로 여겨지는 지역으로, 모든 악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는 카세린 주(州)의 주도이기도 하다. 2012년 7월, 튀니지 지역개발부의 발표에 의하면 카세린은 개발지수(2) 측면에서 24개 지역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카세린의 공식적인 실업률은 26.2%로 국가 평균인 17.6%보다 훨씬 높고, 기대수명은 70세로 연안 대도시 평균인 77세보다 훨씬 짧았다.(3) 또한 전국 평균이 90%에 달하는 가계 식수 보급률도 카세린은 50%에 그쳤다.(4)

국가가 선택한 극단적 자유주의가 소외를 부르다

이 지역의 가장 가난한 마을인 에주우르(‘꽃’이라는 뜻)를 가로지르는 바둑판 형 길 곳곳에는 철근이 삐져나온 짓다 만 폐건물들이 줄서있다. 청년들은 실업과 권태에 직면해있고, 어린이들은 학교 밖에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거리를 배회 중이다. 게다가 학교 주변은 마약 거래, 지하디스트(이슬람 무장단체)의 조직원 모집 등 불온한 만남의 장이 돼버렸다. 또한 카세린 입구에는 기형아 출산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셀룰로스 공장의 폐수가 흐르고, 시내에는 모든 것을 잃고 살아가는 주민들만 남아 있다. 국가는 약속을 저버린 채 카세린에 대한 어떤 인프라 프로젝트도 시행하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무능한 국가로부터 버림받은 셈이다.
카세린 주민들에게 있어 이러한 소외현상은 오래 전부터 계속된 것이었다. 카세린 내 3대 부족(프라시슈, 마제르, 울레드틀릴)이 국가권력에 대해 완고한 태도를 고수해온 대가를 치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교 교장이자 프랑스어 교사인 사미르 라비 씨는 그것만이 원인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그에게 비난받아 마땅할 것은 “40여 년 전, 국가가 선택했던 극단적 자유주의”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1980년대 당시 하비브 부르기바 대통령이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시행한 정책들을 비판하는 것이다. 튀니지 정부는 수출과 단체관광산업에 중점을 두고 연안 지역의 인프라에 투자를 집중했고, 내륙 지역은 방치했다. IMF의 권고에 따른 이러한 정책들은 1984년에 일어난 ‘빵 폭동’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특히 카세린은 곡물 가격의급등으로 143명이 사망했다. 이 사망자 수는 당시 노동조합이 발표한 것으로, 정부의 공식 발표에서는 73명에 그쳤었다.
결국 카세린에는 어떠한 공공개발정책도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23년간 이어진 벤 알리 정권도 이러한 차별 정책을 전혀 문제시하지 않았다. 이러한 지역적 방치에 대한 보상을 묻기 위해, 국경없는 변호사회(ASF)의 지원을 받고 있는 튀니지 경제적·사회적 권리 포럼(FTDES)이 지난 2015년 6월 튀니지 진실·존엄위원회 측에 카세린에 ‘피해 지역’ 자격을 부여할 것을 요청했다. 진실·존엄위원회는 지난 수십 년간의 독재정권의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설립된 임시 사법기관이다. 라비 씨는 “공공 안전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정부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나 이곳 청년들에게 국가는 폭력을 휘두르는 경찰관이자, 신분증에 적힌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시간이 갈수록 이 지역 경제는 점차 비공식 경제로 바뀌었다”고 강조했다.
카세린은 기존의 반체제적 역사에 걸맞게, 2010년 12월부터 2011년 1월까지 진행된 혁명운동의 전초 역할을 했다. 카세린은 이웃한 혁명의 발원지 시디 부지드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카세린의 ‘혁명 순교자’는 50명이 넘었고, 특히 에주우르 지역에서의 진압은 잔혹하기 짝이 없었다. 2011년 1월 9일, 경찰만으로도 충분히 시위를 진압할 수 있었음에도, 정부군 저격수들이 건물마다 자리잡고 거리의 시위대와 장례행렬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에주우르에서 미용업에 종사하는 카리마 씨는 베르베르족 타입의 스카프로 얼굴을 감싼 채 당시 일을 회상했다.(5) “그 때 나는 경찰들에게 외쳤다. “부끄럽지 않은가? 자신들의 형제들을, 아이들을, 여성들에게 이렇게 하다니!” 그러자 경찰 한 명이 나를 마구 구타했고, 나는 최루가스를 마시고 쓰러지고 말았다.”
허름한 미용실에 앉아, 카리마 씨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까지 누구도 찾아와 묻지 않았던 불행한 기억들을 몰아내고 싶은 듯했다. 그는 튀니지 곳곳에 알려진 유명한 일화를 이야기했다. “문제의 그 날, 경찰들이 유통기한도 지난 최루가스를 여성 전용 하맘(터키식 목욕탕)에 뿌려댔다. 그러자 목욕하던 여성들이 벌거벗은 채로 뛰쳐나왔고, 경찰들은 그걸 보며 낄낄거렸다.”
38세의 히켐 씨는 부모와 함께 에주우르 마을 입구 부근 철로가 끝나는 지점에 살고 있다. 철로 근처에는 매일 무허가 좌판들이 자리를 펴고 채소와 과일을 판다. 주민들이 데려온 양들이 쓰레기 더미 속에서 풀을 찾아 뜯기도 한다. 히켐 씨는 그의 집에서 몇 미터 걸어나와 한 골목을 가리켰다. 그와 함께 혁명에 참여했던 동료 중 한 명이 저격수의 총을 맞고 숨진 곳이었다.
히켐 씨는 모나스티르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했다. 그는 학업을 마친 후 대졸 실업자 대열에 합류했다. 공식 통계에 의하면, 튀니지 내 40세 미만 대졸자의 약 2/3가 실업자다. 히켐 씨는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고 결과를 기다리면서 개인 공사현장에서 일하는 중이다. 그는 말한다. “용돈벌이는 된다. 어쨌든 가계 지출에 보탬은 되고 있다.”
주거환경은 도시 안쪽으로 갈수록 황폐화돼있었다. 어떤 길의 끝에는 2층짜리 큰 회색 주택이 있었다. 한 젊은 청년의 유가족들이 살고 있는 집이다. 카세린 내에는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그의 이름은 사베르 르티비, 2011년 1월 9일 경찰의 총에 숨진 희생자다. 혁명 후 4년이 지난 지금도 ‘혁명순교자 소송’은 면소, 연기 등에 그쳐 여전히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있다. 시위대에 사격을 가한 이들 중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도 매우 드물다. 2014년 1월, 고등군사법원은 최종판결에서 대부분 무죄 석방을 선고했으며,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도 경미한 처벌에 그쳤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한 벤 알리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궐석 판결만을 내렸다. 르티비 씨의 가족들은 약간의 보상금과 함께 그의 이름을 딴 거리 명칭만을 부여받았을 뿐이다. 이러한 부당한 처사는 정치색과 무관하게, 국민들이 뿌리 깊게 품고있던 정부에 대한 분노를 자극했다.
2012년 말 이후, 카세린은 폭력과 공포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카세린은 텔 아틀라스 산맥의 산괴인 샤암비 산으로부터 17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이슬람 무장단체들이 알제리와의 국경 양쪽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튀니지의 이슬람공화국화를 주장하면서 지속적으로 정부군과 경찰들을 공격할 뿐 아니라, 정보를 얻기 위해 지역 주민들을 노리고 있다. 최근 무장단체의 습격을 받은 희생자들 중에는 압델마지드 답바비 씨도 있었다. 답바비 씨는 에주우르에 거주하던 국경 수비대원으로, 지난 2015년 8월 23일, 국경검문소 부근의 부체브카를 지나던 중 매복해 있던 무장세력의 습격으로 숨졌다.
취재를 위해 답바비 씨의 유족들 집을 방문했다. 그러나 부인인 야스민 씨는 문을 열어주지 않고 망설였다. 결국 문을 열어 우리를 맞이한 것은 아버지인 타예브 씨였다. 그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길 원했다. 타예브 씨에 의하면, 그날 밤 아들인 답바비 씨가 여느 때처럼 순찰 후 “집으로 간다”고 전화했었다는 것이다. 가족들은 어떻게 수비대원이 아무 제지 없이 무장단체가 도사리고 있는 위험한 길로 갈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야스민 씨는 “남편이 상관들에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렸지만, 그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편이 죽은 후 정부에서 받은 것이라고는 추도식과 연금이 전부였다. 기자 한 명 이곳을 찾지 않았다. 세 아이들은 계속 악몽을 꾸고, 죽은 아버지에 대해 질문하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해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취재를 마치고 일어설 때, 그녀는 남편의 사진을 건넸다. 다른 ‘순교자’들의 가족을 방문했을 때도 매번 사진을 받았다. 이렇게 건네받은 증명사진 한 장은, 결국 우리가 함께 얘기했던 순교자를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와 같은 것이다.

말뿐인 혁명, 무법지대로 전락한 카세린

카세린 주지사인 체들리 부알라그는 취임 한 달째였던 2015년 9월, 해당 지역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자 이렇게 답했다. “공공안전은 더 이상 문제가 없다. 무장단체들의 은닉처도 파괴됐다.” 공식적으로 출입금지 지역들은 군에 의해 통제되고 있지만, 여전히 해당 지역 내 무장단체들의 활동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그들 중에는 알 카에다와 연결된 ‘카티바 오크바 이븐 나파’, 이슬람국가(ISIS)가 공식인정한 적은 없지만 스스로 “ISIS와 연관이 있다”고 주장하는 ‘준드 알킬라파’ 등도 있다. 또한 무기 밀거래는 물론, 알제리 접경지역에서 건너오는 식품밀수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시내로 거처를 옮길 형편이 안되는 주민들은 산기슭 마을에 남아 있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폭격과 포격을 겪었고 그로 인해 토지자원과 생계수단들은 파괴돼갔다. 기자들도 해당지역을 취재하려면 주(州)의 허가를 받아야 하고, 군의 호위가 있어야만 출입이 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카세린에서 약 45분 거리에 있는 페지부하시 마을로 이동할 때, 이 모든 의무사항을 쉽게 어길 수 있었다. 그렇게 찾아간 마을의 양봉업자들은 벌통 대부분을 잃은 상태였고, 지역 간 협동경제 네트워크로 맺어진 유기농 벌꿀 협동조합도 무너진 상태였다.
60세의 음바르카 씨는 가족들과 한때 유명했던 자연보호지역의 아래쪽에 거주 중이다. 그는 두렵다고 털어놓으며, 어떻게든 부족의 뿌리인 이곳을 등지고 떠나겠다고 단언했다. 그는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고립된 상태여서,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집 근처에서 풀을 캐다가 익혀야 했다. 그의 집은 지하디스트들의 은닉처인 동굴 근처에 있다. 지하디스트와 군부대의 충돌이 있는 밤이면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는 포탄의 소리가 생생하게 들리는 곳이다.
샤암비 산의 상황에 대해 묻자, 히켐 씨는 에주우르 주민들 대부분이 그렇듯 무장단체들에 대해 분노를 표했다. 그리고 산에서 성행하고 있는 밀수입자들의 ‘사업’도 막아야 한다고 비판했다. “튀니지에 그들을 반기는 곳은 없다. 우리와 전투를 하러 오든, 산에서 내려오든, 이곳의 누구도 그들을 반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에주우르에 사는 30대 청년인 카이스 씨도 마찬가지다. 2009년부터 2015년까지 카세린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그는 졸업 후 이일저일 전전하다 마침내 국립 초등학교에서 아랍어 교사직을 맡게 됐다. 비록 빈곤층 아동 대상의 시골 학교라서 낮은 보수로 일하지만, 그는 자신의 일에 만족했다. 그 역시 샤암비 산의 무장단체들을 옹호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튀니지 사람들을 죽이고 있을 뿐, 종교의 길을 따르는 이들이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한 당국의 공모 하에 산을 장악한 범죄조직에 지나지 않는다.”
이렇게 우리가 만난 주민들은 자기 지역을 침범한 무장단체에 대해서는 비난했다. 그러나 시리아의 상황이나 전 세계적인 지하디스트들의 테러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을 보였다. 지난 11월 13일 파리에서 연쇄 테러가 일어나고 이튿날, 에주우르의 한 카페에서 만난 카이스 씨를 만났다. 그는 평소의 온화한 말투를 잃어버린 채 신랄한 비판을 쏟아냈다. “프랑스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샤를리 에브도가 화근이다. 프랑스인들이 이슬람 선지자를 조롱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는 아무 관련도 없이 리비아 사태에도 개입하지 않았는가. 시리아 지하디스트들에게 그것은 프랑스 말리 내전 개입처럼 외부 작전일 뿐이다. 테러는 그에 대한 결과일 뿐이다. 이번 파리 테러로 인한 희생자 수보다, 서구의 폭격으로 숨진 시리아 아이들의 숫자가 훨씬 많지 않은가!”
카이스 씨는 시리아의 지하디스트를 지지하며, 몇몇 동료들에게 물자 보급을 하는 형태로 참여하고 있었을 것이다. 튀니지의 수많은 서민 지역, 심지어 수도인 튀스도 그렇듯 말이다. 에주우르 역시 지하디스트 대원 양성소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식조사에 의하면 해당지역 내 ISIS와 알누스라 전선(알카에다 연계)에 가입한 숫자가 5천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최대 해외 파병 병력보다도 큰 숫자다.
카세린의 경계지역에는 군데군데 총알 자국이 난 집이 한 채 있다. 그 집 벽에 커다란 그라피티가 펼쳐졌다. “Fuck USA!” 이곳의 분노는 식을 줄 모른다.

 


글·로라-마이 가베리오 Laura-Maї Gaveriaux
언론인, 연구가

번역·김보희 sltkimbh@gmail.com
고려대 불어불문과 졸업.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역서로 <경제 성장이라는 괴물>등이 있다.


(1) 족장들(Beys): 독립적 군주제를 실시했던 오스만 제국의 군주들을 가리킴.
(2) 개발지수: ‘지식’, ‘재산 및 고용’, ‘보건 및 인구’, ‘정의 및 평등’의 네 가지 기준을 통해 산출된 것임.
(3) 국경없는 변호사회, 튀니스 시, 카세린 주 지속가능한 지역개발계획(PREDD), 2012년 2월 자료
(4) 국경없는 변호사회
(5) 본 기사에 등장하는 주민들은 자신의 성(姓)은 밝히길 원치 않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