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성스러운 암소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폭력

2016-01-28     나이케 데크슨
   
▲ <인도의 거리>,1985- 브뤼노 바르비


작년 기독교도 수십 명이 협박을 받았다. 암소 고기를 먹었다는 의심을 받은 무슬림들은 폭행을 당해 사망했다.


아스팔트 도로 위에 널브러져 있거나, 무심하게 경오토바이나 사륜구동차 앞을 가로막는 암소 등 고전적인 장면을 연상시키는 것 만으로는, 인도에서 암소가 가지는 의미를 전달하기에 충분치 않다. 브라만이 정립한 암소의 신성성을 이해하려면, 인도 민족주의의 유래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암소는 무굴제국이 통치하던 12세기부터 18세기와 19세기 영국 식민지시대의 ‘정치적 동물’이었다. 암소를 보호하는 일은 오늘날 ‘힌두트바(힌두성)’라고 명명된 힌두교 공동체를 통합하는 교리를 세우는 일이었다. 이들은 인도를 힌두교가 주류인 나라로 간주하고 쇠고기를 먹는 소수민족, 특히 1억 7,700명의 무슬림(전체 인구의 14%)을 억압한다.
힌두성을 강조하는 이념은 강력한 민족주의 조직의 모임인 의용단일가의 비호를 받는다. 의용단일가에는 여당인 인도인민당(BJP), 나렌드라 모디 총리의 출신당인 국가자원봉사단(RSS), 더 과격한 단체인 세계힌두회의(VHP)와 하누만 신의 당(BD)이 속해있다. 암소 보호를 위한 투쟁의 명목으로 2015년 말 일련의 무슬림 살해 사건이 일어났다. 9월 28일 인도 북부 우타르프라레시 주에서 주민 2백 명이 쇠고기를 먹었다는 이유로 50대 남성을 폭행해 숨지게 했으며, 그의 아들에게 심각한 상해를 입혔다. 10월 9일 카슈미르에서는 암소를 운송하던 트럭에 누군가 사제폭탄을 던졌다. 당시 트럭을 운전하던 젊은 운전자는 무슬림이었는데 화상으로 사망했다. 5일 뒤 옆 주에서 소를 거래했다는 의심을 받던 20대 무슬림이 여러 명의 주민에게 구타 당한 끝에 사망했다. 11월 2일에는 또 한 명의 무슬림이 암소를 훔쳤다는 낙인이 찍혀 힌두교도 무리에게 살해됐다.
민족주의 운동이 득세하면서 소과 짐승의 거래를 금지하는 법령이 점점 더 엄격하게 적용되는 시대적 분위기를 타고 살인이 횡행하고 있다. 1949년 헌법은 각 주가 도축을 금지하는 고유의 법제를 마련하도록 권고했다. 인도의 29개 주 중 8개 주에서는 아직 이 권고를 따르지 않고 있어 암소를 매매하거나 식용으로 쓸 수 있다. 다른 3개 주에서는 도축이 엄격하게 관리된다. 나머지 18개 주는 도축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위반 시에는 최대 10년의 징역형이 선고된다. 이중 5개 주에서는 쇠고기 소비마저 금지돼 경찰이 식당을 압류 수색하는 경우도 있다.

신성한 암소 vs 악마의 물소

딱 한 종류의 소만 이런 특별대우를 받지 못한다. 바로 신화에서 악마를 상징하는 (주로 검은색) 물소다. 차티스가르 주를 제외하고 모든 주에서 수출용 물소 도축이 허용된다. 이 때문에 2015년 인도가 브라질을 제치고 세계 쇠고기 수출국 1위에 오르는 모순적인 상황이 가능했다.
무슬림, 기독교인, 부족민, 카스트제도의 하층민 중 상당수는 암소 고기를 먹는데 문제가 없다. 물론 금기시되지만, 상당히 저렴하기 때문이다. 정육점에 가서 대놓고 암소라고 말하는 대신 ‘큰 거’를 주문한다. 불가촉천민들은 암소 고기를 먹는다. 전통적으로 그들은 죽은 가축의 고기 처분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고기와 가죽을 가져와 가죽은 무두질해서 사용한다. “노점 뒤편에서 물라(이슬람 율법학자)가 암소를 도살하면 분해, 절단하는 작업을 담당하는 자는 여전히 불가촉천민”이라고 지리학자 미카엘 브루커는 기록했다.(1) 지방도축장의 정육업자와 상인은 대부분 무슬림이다. 반면, 힌두교와 무슬림이 아닌 사람도 산업화된 도축장을 운영할 수 있고, 그곳에서 일할 수 있다.
역사학자 드위젠드라 나라얀 자는 그의 저서 <성스러운 암소 신화>에서 극우민족주의자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쇠고기는 인도에 무슬림이 들어오기 전부터 인도 음식문화의 일부였다고 주장했다.(2) 하이데라바드 법원은 이 책의 판매를 금지했고, 저자도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힌두교에 관한 고대 성전에는 “암소는 여신이며, 도살하면 안 된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때에 따라 희생되거나 귀한 손님을 대접할 때에는 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베다시대 말기(기원전 1~2세기)에 금욕주의의 인기가 높아지고 채식을 기반으로 한 자이나교와 불교 간의 경쟁구도가 형성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널리 보급된 인도혹소는 물론, 암소를 여러 용도로 희생시키던 브라만은 입지가 취약해짐을 인식하면서 암소 보호자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점차 다른 카스트에서도 이를 따르게 됐다. 암소 고기를 먹는 사람은 불경한 사람이 됐으며, 암소 배변은 고결한 가치를 지니게 됐다. 그때부터 암소의 배설물을 원료로 한 약품과 화장품을 판매하는 가게가 생겼다.

암소의 상징성을
정치화하는 힌두교 극단주의

역사학자 바그완 조쉬는 “공동체간 대립지로서 암소의 상징성을 이용하는 일은 무굴족이 침입했을 때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러므로 힌두교도는 숫자는 많지만 문화적 지위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3) 하지만 이슬람 지도자들은 카스트제도 상위 계급의 지도자에게 권리를 보장했다. 심지어 공식적으로 소의 도축을 금지한 황제도 있었다.
암소 문제에 관한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운동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이다. 이 운동은 민족주의와 힌두교 부흥을 꾀하는 다야난다 사라스와띠와 그의 조직 아리야 사마즈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그는 기원전 6~2세기 인도의 황금기였던 아리아족의 베다시대의 신화를 발전시켰다. 이 시기가 막을 내린 이유는 힌두교도가 건방지고 인종차별적인 침입자와 성스러운 암소, 나아가 힌두교 여성을 공격하는 이들로 그려진 무슬림을 상대로 자신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1882년 사라스와띠는 암소보호협회(고락시니 사바)를 설립한다. 영국의 식민통치로 자신의 권력을 잃을까 두려웠던 카스트제도 상위 계층의 토지소유자들이 이 전례 없는 협회로 모였다.
단순한 동물보호운동은 급속하게 반(反)무슬림 발언과 행동으로 이어졌다. 익명의 편지를 받은 사람이 다시 익명으로 불특정다수에게 동일한 내용을 발송하는 ‘줄줄이 편지’가 여러 마을에서 돌았다. 이 편지에는 “암소와 함께 있는 무슬림을 보면 그 암소를 빼앗는 것이 네 의무다” 등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암소보호협회는 ‘암소 구조’ 활동도 펼쳤는데 이는 1893년과 1917년 심각한 폭동으로 이어졌다. 각 가정에서 모집한 자금으로 빼앗은 가축을 돌보는 대피소를 운영했다. 이 자금은 특권층 힌두교도와 교육 수준이 떨어지는 청중을 대상으로 열띤 선교를 펼치는 유랑 선교자에게도 지급됐다.
1924년 독립운동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고락시니 사바의 온건판인 ‘고 세바 상그(암소를 위한 단체)'를 만들었다. 그는 “나는 진심으로 숭배하는 암소를 구하기 위해 내 인생을 바칠 준비가 됐다”고 했다. 간디는 이 문제로 무슬림을 공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영국 식민지 지배에 대한 무슬림의 주장을 지지하면서 동물 보호에 관한 협상을 시도하긴 했다. 그는 당시 “무슬림들이 힌두교도에 대한 종교적 공감과 의무를 고려해 자발적으로 암소 학살을 그만둔다면, 상당히 영예롭고 고귀한 행위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4) 친근한 압박인가, 정치적 협박인가? 어느 쪽이든 성스러운 동물에 대한 간디의 우려는, 근본주의적 담화를 약화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불을 지펴 결국 정치적 사안으로 부각시켰다.
식민시대에 태어난 운동의 상징적 동기와 행동 방식이 요즘 다시 힘을 얻었다. 이 점에서 2015년 9월 28일, 비사라 마을에서 카스트제도의 상급 계층인 라지푸트족이 벌인 폭행사건은 의미심장하다.(5) 소환된 피의자 중에서 사건이 발생한 집으로 사람들을 몰고 간 사람들은 BJP소속이고 마을 대표의 아들처럼 의용단일가 민병대에 속한 사람도 있었다. “아클라크 가족이 소(실제로는 염소였다)를 도살했다”는 소문을 유포한 사람은 바로 몇 주 전 이 마을에 온 종교인이었다. 그는 과거 유랑 선교자처럼 설교 중 이 가족을 비난했다. ‘줄줄이 편지’를 대신해 고깃덩이 사진이 휴대전화를 통해 퍼져나갔다.
인도 북부에서는 특별소대가 증가하고 있다. 의용단일가의 색상인 오렌지색 스카프를 맨 소대원들이 그들 눈에 미심쩍은 가축 운송 트럭을 감시하고 운행을 방해하고 운전자가 무슬림일 때에는 그를 공격한다. 암소 보호 운동의 초창기처럼 구조된 암소들은 동물보호협회가 운영하는 ‘대피소’에 몰아넣는다. 정치학자 샬롯 토마스(6)는 “자칭 암소 구원자들은 훔친 암소를 종종 암시장이나 정육점에 되팔고 있다. 이것이 이 운동의 위선적 측면을 드러낸다”고 꼬집었다.
모디 총리는 그토록 약속했던 성장을 이루지 못했기에, 2014년 임기 초반에 성공적으로 이용하던 온건한 구세주 이미지를 더 이상 활용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그의 파벌은 그로 하여금 반(反)무슬림이라는 슬픈 카드를 다시 꺼내게 했다. 2002년 구자라트에서 있었던 무슬림 학살에 동조하던 그의 모습을, 사람들은 잊지 못한다.(7) 그는 9월 28일 집단폭행을 처벌하지 않았다. 그리고 8일 뒤에야 ‘슬프고 애석한 일’이라고 짧게 논평했다. 그의 동료들은 좀 더 말이 길었다. 농림부장관은 암소 도축이 ‘치명적인 죄악’이라고 평가했고, 하리아나 주의 최고장관(BJP)은 “무슬림이 이 나라에서 계속 살려면 쇠고기를 그만 먹어야 한다”고 발표했다. 이런 극우 민족주의적 발언에는 정부가 보호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며, 인간은 그들의 처지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연중에 죄인 취급을 받게 된다는 뉘앙스가 내포돼 있다. “공권력은 지속적인 문화적 헤게모니를 수립하려고 노력 중이다. 현 정권은 무슬림의 표 없이 당선됐으니, 이들에게 인도 정권 균형에 있어 당신들의 자리는 없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던지는 셈”이라고 역사학자 조쉬는 평했다. 이렇게 암소는 힌두교도의 15% 미만을 차지하는 카스트제도 상위 계층에게 소수층에 대한 정치, 경제, 문화적 지배력을 강화시켜줬다. 2002년 하리아나 주에서는 불가촉천민 5명이 이미 죽은 암소를 분해, 절단했다는 이유로 이웃에게 살해당했다.
다행히 연대의식을 심으려는 인도인들도 있다. 인도 중앙의 하이데라바드에 있는 오스마니아 대학에서 종교와 무관한 ‘소의 축제’가 매년 열린다. 브루커는 “세속주의적 사회를 수호하고, 관습은 그 자체로 존중할만하다는 것을 확인하자는 두 가지 주장을 바탕으로 한 행사”라고 분석했다. 2015년 12월 축제에서 처음으로 문제의 쇠고기를 먹는 100여 명의 학생 중 30명이 ‘공공장소에서 쇠고기를 먹은 혐의’로 체포됐다.

 

 

 

글·나이케 데크슨 Naïké Desquesnes
언론인.

번역·서희정 mysthj@gmail.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역서로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들>이 있다.


(1) Michaël Bruckert, ‘인도 타밀나두 주에서 살펴본 고기의 지리학: 지위, 장소, 유통’ 2015년 파리 소르본 대학 발표 논문.
(2) Dwijendra Narayan Jha, <The Myth of The Holy Cow>, Verso, London, 2002
(3) Shashi Joshi and Bhagwan Josh, <Struggle for Hegemony in India : Culture, Community and Power (vol. 3)>, Sage Publications, New Delhi, 2012 (1st ed. : 1994) 참조.
(4) Philippe Godard가 <간디와 인도. 통합과 형제애의 꿈>(Syros, ‘문헌’ 총서, Paris, 2007)에서 인용함.
(5) ‘Mob lynching in Dadri. A report’, <Economic and Political Weekly>, vol. 50, n° 42, Calcutta, 2015년 10월 17일자.
(6) ‘2002년 무슬림 학살 이후 아마다바드(인도, 구자라트)의 소수인 무슬림의 저항과 통치: 주하푸라 게토화의 역설’, 2014년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 발표 논문의 저자.
(7) Christophe Jaffrelot의 ‘힌두 민족주의, 경제 자유주의, 하이테크 포퓰리즘’과 ‘극우의 여러 얼굴’, <마니에르 드 부아>, n° 134, 2014년 4~5월호 참조.

 

박스기사

 

사프란 색상의 역사와 교육

 

2014년 요가부를 창설한 나렌드라 모디 정부는 외교부 소속 산스크리트어 정무차관직을 새로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일련의 조치를 볼 때 인도의 교육과 역사는 힌두교를 상징하는 색상인 사프란색을 띠게 될 것이다.
‘힌두트바(힌두성)’라는 정치적 목표에 부합하게 (재)창조된 힌두교의 과거를 찬양하는 작업에서 신화와 종교와 이론과 실제 사실은 경계가 무너진다. 무굴제국과 서방식민시대가 역사에 기여한 부분은 현재 개정 중인 교과서에서 평가 절하되거나 삭제됐다. 목적은 “진정한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는 6세기 인도 영웅설화인 <라마야나>로 탈바꿈했고, 인도는 <마하바라타> 시대에 핵폭탄을 보유하고 있었고, 1992년 파괴된 바브리 마스지드 회교사원(1)은 람 왕이 태어난 곳이라고 한다.
부족문화(상기 기사 참조)도 이런 프리즘을 통해 소개된다. 아루나찰프라데시 주의 관광부장관은 불교와 힌두교 성지를 소개한다. 힌두 극우민족주의 운동 중 하나인 국가자원봉사단(RSS)의 문화지부 중 한 지점은 인도 일부 부족과 베다시대 인도 사이의 ‘역사적’ 또는 계보적 상관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 지점은 그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문화재 보존에 관한 업적을 훌륭하게 수행했다.(2)
모디 총리는 이 이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특별위원회(지도이사회 및 교육자문위원회) 자문을 맡고 있는 디나나스 바트라는 현재 델리와 경계를 접한 하리아나 주의 교육프로그램을 개편 중이다. 2014년부터 그의 저서는 모디 총리가 예전에 지배하던 구자라트의 학교에서 교과서로 쓰이고 있다. 같은 해 RSS의 전 구성원인 수더르샨 라오는 역사연구분야의 최고기관인 인도역사연구협의회(ICHR)의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역사학자 로밀라 타빠르에 따르면 그는 인도 영웅설화의 문학 강독에 찬성하는 인물이다. 2015년 6월 정부는 이 협의회 구성원에게 국가교육연구기술위원회(NCERT)의 역사책의 전면 ‘수정’ 계획에 최선을 다해 달라고 요청했다.


(1) Teesta Setalvad, ‘힌두 민족주의자, 민주주의를 위협하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1997년 7월호 참조.
(2) Nicolas Jaoul, Daniela Berti and Pralay Kanungo(총괄지도), <Cultural Entrenchment of Hindutva>, Routledge India, Delhi, 2011.
(3) Romila Thapar, ‘History repeats itself’, <India Today>, New Delhi, 2014년 7월 11일자. Thapar는 ICHR의 기관지 심의위원회 소속이었다. 이 위원회는 2015년 5월 새로운 사무국이 들어서며 해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