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인들에게 옷을 입힌 베네통

2016-01-28     박용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복구가 한창이던 1955년. 이탈리아 트레비소의 폰자노 지방에 살던 루치아노 베네통(Luciano Benetton)은 열 살 나이에 세 명의 동생과 어머니를 돌봐야 하는 소년 가장이 된다. 그는 학업을 포기하고 동네의 조그만 양복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비록 궁핍한 삶이었지만 특유의 성실함을 기반으로 하나씩 일을 배우며 꿈을 키워나갔다. 드디어 스무 살이 됐을 때 루치아노는 막내 동생의 자전거와 자신의 아코디언을 판 돈으로 낡은 직조기를 한 대 사들이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에 뛰어들었다. 글로벌 의류업체 베네통(Benetton)의 출발이었다. 당시에는 옷을 선염(先染)공정으로 만들었다. 먼저 실을 염색하고 이 실로 옷을 짜는 방법이다. 색깔별로 염색한 실을 미리 준비해야 했기 때문에 재고 부담이 컸고 시간도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루치아노는 일단 한 가지 색상으로 옷을 만들고 그 위에 염색을 하는 후염(後染)공정 개발에 성공한다. 덕분에 원가경쟁력을 확보하고 소비자들의 취향에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 화려한 원색의 스웨터를 쇼윈도에 진열해 손님들이 직접 만져보고 고르게도 했는데, 당시 의류업계에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베네통은 1969년에 파리, 1979년에 미국에 매장을 열면서 해외로 확장했다. 그리고 1991년 떠오르는 신흥 시장 인도에 첫발을 내딛는다. 하지만 글로벌 명품 브랜드가 소득수준이 낮은 국가에 정착하기는 쉽지 않았다. 베네통은 인도 진출 후 10여 년 동안이나 부진을 겪어야 했다. 과연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인도 시장에서의 시행착오와 전열 재정비

우선 브랜드 이미지가 모호했다. 베네통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매스마켓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인도에서는 가격과 유통 모두 프리미엄 시장에 초점을 맞춘 것이 문제였다. 세계 시장에서 광고되는 제품과 인도에서 구매할 수 있는 제품에 미스매치가 발생한 것도 문제였다. 당시 인도에서 베네통은 티셔츠 브랜드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베네통의 자랑인 유아용품부터 속옷·액세서리에 이르는 다양한 포트폴리오를 보여주지 못했다. 또 다른 잘못은 사업 초기 단계에서 너무 빨리 프랜차이즈에 조급했다는 점이다. 시장점유율 확대에 지나치게 조급했던 까닭이다. 시장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는데도 인도 중소 도시에 공격적으로 매장을 확대한 결과 매출이 매장 증가 속도를 따라오지 못했다. 다행히도 베네통은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짚었고, 다소 늦은 감이 있었지만 이에 맞는 대응책을 마련해 나갔다. 특히 2001년에 제과회사 경영자였던 나탈니노 듀오를 영입하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우선 소매와 기획상품에 초점을 맞추고 경력직 인력을 대폭 채용해 차근차근 마케팅을 강화해 나갔다.

철저한 인도 시장 특성 반영해 성공

인도 소비자들의 요구를 반영해 선진국과 인도 시장에 신제품을 동시 출시하는 체계를 갖춘 것도 주효했다. 또한 베네통의 전체 상품군 중에서 인도에 소개되는 제품 수를 1999년 150개에서 2004년 230개로 늘려나갔다. 소매 채널도 다양화해 단독 매장에 대한 고집을 접고 전체 매장의 20% 정도까지 대규모 쇼핑몰에 숍인숍 형태로 입점하기로 했다. 아울러 인도 정부의 높은 관세와 현지화 정책에 대응해 현지 조달 비율을 높여나갔다(2015년 현재 100%). 이러한 노력의 결과 베네통은 2001년 2천만달러의 매출을 올려 전년 대비 60% 이상의 성장을 기록했다. 2002년 성장률도 20%에 달했고, 매장 수도 68개에서 100개로 증가했다. 아울러 2004년 그동안 합자관계였던 DCM 그룹의 지분 50%를 전량 인수해 100% 현지 자회사로 탈바꿈 했다. 2015년 현재, 인도에 진출한 글로벌 어패럴 브랜드 중에서 베네통의 매출은 80억2백만 루피(1루피=0.01달러)로 라이벌인 자라(ZARA)의 72억1천만 루피를 근소하게 앞서가고 있다(푸마·아디다스·나이키 등 종합 스포츠업체는 제외).

창업 2세로의 세대교체와 새로운 도전

베네통은 한때 전 세계 젊은이의 사랑을 받던 파격과 강렬함의 대명사였지만 최근 들어 발 빠른 제품순환율과 트렌디한 디자인을 자랑하는 H&M과 자라의 파워에 밀리는 모양새다. 러시아·멕시코·한국·인도 등에서는 선방하고 있지만, 라틴 아메리카·중국·터키 등지에서는 다소 주춤한 상황이다. 2012년 1월에는 실적 부진의 여파로 이탈리아 밀라노 증권거래소에서 상장이 폐지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2012년 4월, 베네통의 경영권은 설립자인 루치아노 회장에게서 그 아들인 알레산드로 부회장에게 넘겨졌다. 젊은 선장을 맞은 베네통이 눈앞에 놓인 험난한 파고를 어떻게 이겨낼지 귀추가 주목된다. 특히 해외 아웃소싱 문제는 신임 CEO가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다. 2013년 4월 24일, 베네통 등 29개 글로벌 의류업체들의 하청공장으로 이용되던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 외곽의 무허가 증축 건물이 무너지면서 무려 1,138명의 노동자가 사망하고 2,500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한 대참사가 벌어졌다. 그보다 5개월 전인 2012년 11월에는 타즈린 의류공장에서 불이 나 110여 명의 노동자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생명을 위협하는 열악한 환경에서 방글라데시 노동자가 목숨을 걸고 일하며 받는 돈은 고작 한 달 38달러(약 4만원)에 불과했다. 이 사건들로 인해 글로벌 의류 브랜드들이 저개발국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다는 국제적인 비난이 일었다. 이에 놀란 글로벌 업체들은 처음에는 피해자 보상에 적극 나설 것처럼 행동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보상금으로 3천만 달러 이상이 필요한데도 2년이 지난 2015년 4월까지 모인 기금은 30%에 지나지 않는다. 베네통은 국제사회의 비난이 계속되고 심지어 런던 옥스퍼드 스트리트에 있는 베네통 플래그십 스토어를 폐쇄하자는 주장까지 터져나오자 최근에야 겨우 1백만 달러를 내놓았다(베네통은 사고 발생 시 처음에는 자사와의 관련을 부인하기까지 했다).

노동·인권 등 새로운 이슈 해법에 미래 달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국경을 초월한다. 글로벌 분업구도 속에서 해당 기업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는 그 기업의 성패를 넘어 사활을 좌우할 수 있다. 지금까지 베네통은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메시지들을 광고에 담아 세상에 경종을 울려왔다. 베네통의 광고는 단순 광고(Ad)가 아니라 캠페인(Campaign)이라고 불릴 정도다. 핏자국으로 얼룩진 보스니아 병사의 군복, 흑인·백인·황인이라는 태그가 붙은 똑같은 모습의 심장 3개, 걸프전으로 오염된 바다에서 기름으로 흠뻑 젖은 물새, 연인처럼 키스하는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이 모든 광고에는 아무런 카피 없이 녹색 직사각형 박스에 흰색의 “United Colors of Benetton”이라는 로고만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베네통이 전 세계 의류산업의 착취적 분업구도에 어떤 목소리를 내고, 그 결과 앞으로 어떤 이미지로 기억될 것인지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글·박용삼 yong3park@posri.re.kr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 

* 본 글은 본지와 제휴한 <친디아 플러스> 1월호에 실린 것으로, 상호협약에 따라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