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포획된 야생호랑이가 밀림을 꿈꿀까?

과학적 인식론의 오류

2016-01-28     파블로 옌센


과학 이론은 한낱 신념에 불과한 것일까? 과학적 진리는 상대적인 것인가, 아니면 현실에 좌우되는 것인가?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과학 연구를 통해 내리는 결과와 그에 부여되는 가치는 한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그대여
중력의 법칙은 가혹하지만 그래도 법칙은 어쩔 수 없다네.”

조르주 브라상스, <비너스 칼리피기스(Vénus Callipyge)>

 

법률학자 알랭 쉬피오에 의하면,(1) 공통의 신념 없이 지속될 수 있는 사회는 없다. 공통의 신념이란 개개인을 초월해 존재하며 사회집단 전체를 결속시키는 모두의 믿음을 말한다. 따라서 신성불가침한 권리로 천명된 인권에 의거해, 프랑스 공화국에서는 “강자의 욕구보다 강력한 무엇, 즉 인간사회가 정글이 되지 않도록 상위의 무엇인가가 모두에게 강요돼 예속돼야” 한다. 역사적으로 ‘그 무엇’의 역할을 해온 것은 주로 종교와 의례였다. 또한 고대 로마 시대가 고안한 독자적인 법질서 또한 이러한 역할을 담당했다.
현대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과학의 비중이 점점 높아진다는 것이다. 물론 과학 각 분야에서 내세우는 근거는 저마다 다르지만, 어쨌든 오늘날 과학이 상당한 지위를 누리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도미니크 페스트르의 지도하에 집필된 한 공저(2)에서 강조했듯이, 오늘날에는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는 이유로 당연시되는 운용방식이 사람이나 사물을 대상으로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과학적인 근거’와 관련해 저마다 말이 달라진다. 혹자는 과학적 결과를 토대로 개인의 확신을 늘어놓기도 하고, 반대로 이러한 과학적 결과를 상대적으로 바라보며 기후학을 원용해서 정유업계의 막강한 로비 활동을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이에 질세라 과학적 근거를 들이대며 유전자재조합생물체(GMO)의 무해함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수많은 생물학자들의 견해도 무시한 채, 유전자재조합생물체의 위험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반대의 목소리를 높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과학적 권위를 입증할 것인가? 이에 대해 학자들은 매우 고전적인 현실주의적 인식론을 활용한다. 과학은 외부세계를 밝혀주는 학문이다. 즉 개개인의 생각이나 문화적 차이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그대로의 외부세계를 규명해주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두 물리학자가 최근에 출간한 한 저서(3)에서도 드러난다. 두 저자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만들어진 ‘가상의’ 원자와, 장 페렝(4)을 비롯한 20세기 초 과학자들이 밝혀낸 ‘진짜’ 원자를 대비시킨다. 두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원자론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은 원자가 의자나 산처럼 “그저 거기에 그렇게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순수과학은 언제나 중립적

순수과학은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순수과학은 그저 이 세계를 발견하게끔 해줄 뿐이며, 언제나 중립적이다. 비판의 여지를 보이는 것은 오직 이를 응용한 사례뿐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유전자는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존재했지만, 그에 반해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유전공학이라는 중립적인 학문을 기묘하게 응용한 유전자재조합생물체이다. 이렇듯 순수과학의 중립성을 내세우는 것은 참으로 편리한 해법이다. 학문의 정당성도 살려줄 뿐만 아니라 과학적 ‘오용’의 사례로부터 면죄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자들 입장에선 손쉬운 자기 위안의 길이 된다.
철학자들은 이러한, 사물에 대한 시각의 미흡함에 대해 오래 전에 입증한 바 있다.(5)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그저 거기에 그렇게 존재했기 때문”에 어느 순간 모두의 동의를 얻는다는 생각과, 그 이론적 틀의 변화에 따라 생기는 결과를 어떻게 양립시킬 것인가? 또 다양한 개체를 상정하는 과학이론들이 동일한 현상들을 예측하고 있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양자역학의 기틀을 마련한 물리학자 닐 보어 또한 인식론적 난관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는 관찰된 현상이 관찰 도구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강조했다. 가령 어떤 도구는 우리가 빛을 파장으로 인식하게 만들지만, 또 다른 도구는 분자로 인식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페스트르가 그의 저서에서 밝혔듯, 과학 사회학자 및 과학 사학자들의 연구결과에서도 “지난 5세기 동안 과학이 다른 영역과 서로 복잡하게 뒤얽혀왔다”는 점이 드러났다. “기술 및 생산 분야, 군사 분야, 정치 분야, 나아가 제국주의적 시도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역이 과학과 뒤얽혀 있었다”는 것이다. 특정 계층이나 문화에 좌우되는 과학 실무자들이 순수한 주체인 것도 아니고, 나아가 과학의 개념이나 도구 또한 기술적 측면이나 정치적 측면과 분리될 수 없다.(6) 18세기 말 수열에 관한 연구가 대두된 것도 사회적 차원에서의 선택과 무관하지 않으며, 특히 이는 보험회사나 은행, 정부 등 여러 집단의 필요에 따라 초래된 결과였다.
하지만 세상에 대한 ‘이상적인’ 시각, 즉 지극히 완벽한 객관적 표상을 얻고자 하는 학자들의 바람에 유감을 표하려면, 내재적이며 결정적인 불변의 과학적 진리를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과학적 진리는 연구실 안에서 하나의 과학적 사실이 구축됨으로써 터득된다. 예를 들면 숲속을 뛰어다니던 야생 호랑이가 우리 안에 갇혀 관찰당하는 호랑이가 된 상황이다. 호랑이의 행동 변화를 유발할 수 있는 조명기기 아래에 호랑이를 가둬두고 호랑이의 행동을 관찰함으로써 야생 호랑이의 행동과 관련한 진리를 도출하는 것이다. 이 때 ‘포획’이라는 상황은 시간과 장비, 기관 차원에서 이뤄지는 막대한 투자를 의미한다. 이러한 투자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야생 호랑이의 수많은 도약 행동 중 몇 가지에 관한 과학적 사실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적 진리가 규명된 후에는, 우리는 그 결과를 반복적으로 얻어낼 수 있다. 이는 연구자가 수행하는 연구의 창의성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연구자의 역할은 비단 세상의 배열과 질서에 대해 밝히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러한 질서와 배열의 형태를 심도 있게 변화시켜 길들이는 단계까지 가야하기 때문이다. 즉, 연구자는 개념적 도구든 기술적 도구든 특정 형태의 도구를 이용해 세상의 이치를 관찰하고 그 특징을 규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외부세계와 과학적 결과 사이에는 연속성과 타자성이 존재한다. 우선 이 둘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하는 이유는 야생의 호랑이든 우리 안의 호랑이든 둘 다 호랑이라는 점이다. 우리 안에 있다고 해서, 호랑이가 우리 뜻대로 조작이 가능한 인위적 존재는 아니다. 과학적 사실은 자연의 역할이 작용하지 않는 사회적 구축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어 타자성, 즉 ‘다름’과 ‘구분’의 개념이 등장하는 이유는 야생의 호랑이가 인공적 조명 밑에서는 결코 자연 상태에서와 같은 행동을 보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포획돼 있는 것도 호랑이의 습성이라는 주장을 펼 수도 있을지 모르나,(7) 호랑이는 다시 밀림으로 돌아가 자유롭게 뛰어다니길 꿈꿀지 모르기 때문이다.
현실주의적 인식론의 오류는 과학적 사실이 실로 객관적이고 안정적일 경우, 이로써 외부세계에 대한 파악이 가능해졌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외부세계는 중간의 모든 매개체로부터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 연구자들의 일상을 주의 깊게 바라보면, 객관성은 반대로 실험실 안에서 외부세계를 길들이는 어마어마한 작업에서 생겨난다.(8) 일정한 방식으로 호랑이를 길들임으로써, 우리는 손수 만들어낸 한 가지 가능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 가령 호랑이를 길들여 더욱 공격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과학 사학자들은(9) 발생론적 시각이, 1940년대 록펠러 재단이 장려한 독특한 생물체 관찰 방식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보건 분야의 수많은 연구소에 자금을 대주는 록펠러 재단은 우생학을 고양했다는 의심을 받게 된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유전자가 곧 공학기술을 이용한 잠재적 통제 수단으로 자리 잡고, 생체 프로세스는 이러한 유전자를 통해 통제가 가능한 대상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시각은 생물체의 연구 방향에 있어 지대한 역할을 해왔다. 또한 이에 따라 식습관이나 환경의 영향처럼 보다 막연하고 모호한 요소들에 대한 연구는 줄어든다. 하지만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이러한 선택은 다소 암묵적인 정치적‧사회적‧기술적 편견의 영향을 받는다.
또 다른 예도 있다. 알랭 데로지에르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실업 통계는 단순히 현실의 반영에만 기여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만들어 내는 데도 공헌했다. 실업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는 상대주의적인 시각은 아니다. 하지만 실업이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되고 표현되며, 수량화될 수 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 이러한 방법론적 차이는 단순한 세부기술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역사적‧정치적‧사회학적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10)
그러므로 대중공론의 장에서 과학에 올바른 자리를 부여하려면, 의사 결정을 내릴 때 굳건한 과학적 지식을 기반으로 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응용된 사례의 오용에 대한 대처로서가 아닌, 사전 연구과제에 관한 민주적 논의가 선행돼야 한다.(11) 주된 정치적 사안에는 항상 과학 외적인 차원의 문제가 내포돼 있다. 오로지 과학에만 의존해 모든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은 비생산적일 수 있다. 학문 연구의 기본 요소가 되는 의심이 원론적 차원에서 확대될 때에는 이러한 결정들도 그에 따라 흔들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기근을 퇴치하기 위한 투쟁에서, 농지개혁을 활용하기보다 과학을 위시해 종자개량법을 쓰려는 것은 부당하다. 하지만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감소는 생태발자국 지수와 소비를 줄임으로써, 사회정의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던가.
뤽 볼탄스키가 강조하는 바와 같이, 포맷을 해 안정화시킨 하나의 특정한 ‘현실’과 포괄적 ‘세계’ 사이의 구분은 자본 민주주의라는 특징적 지배 체제 안에서 제기되는 주된 비판적 요소이다. 이러한 비판은 다음과 같은 전문가적 소견을 그 근거로 한다. “다름 아닌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서 존재하는 것은 이 세계의 특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계가 하나의 현실과 구분되는 이 본질적인 차이 때문에 우리는 전체적인 관점에서 이 세계를 인지하지도, 인지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하지만 이런 지배형태에 내재된 정치 형이상학 안에서 세계는 이제 학문의 힘을 통해 인지 가능한 대상이 되고 만다. 즉, 자연과학과 인문과학, 사회과학의 힘을 빌려 세계를 인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12) 모두의 공통된 ‘현실’은 과학 실험실이나 경제 연구실에서 한 엘리트 지식인이 발견해낼 수 있는 현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이 현실은 모두가 힘써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13)

 

 

 

글·파블로 옌센 Pablo Jensen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 CNRS 연구원.


번역·배영란 runaway44@ilemonde.com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피에르 라비의 자발적 소박함> 등의 역서가 있다.


(1) Alain Supiot, <수의 논리에 의한 협치(La Gouvernance par les nombres)>, Fayard, Paris, 2015.
(2) Dominique Pestre, <기술과학의 통치(Le Gouvernement des technosciences)>, La Découverte, Paris, 2014.
(3) Hubert Krivine & Annie Grosman, <상상의 원자와 실제의 원자. 상대주의에 대한 반론(De l’atome imaginé à l’atome déouvert. Contre le relativisme)>, De Boeck, Paris, 2015.
(4) Jean Perrin, <원자(Les Atomes)>, Flammarion, Paris, 2014. (초판: 1913)
(5) Cf. Alan F. Chalmers, <과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science ?)>, Le Livre de poche, Paris, 1990 /Michel Bitbol, <양자역학. 철학적 입문(Mécanique quantique. Une introduction philosophique)>, Flammarion, Paris, 2008.
(6) Cf. Dominique Pestre, <과학의 사회문화사를 위해 – 새로운 주제, 새로운 정의, 새로운 방식(Pour une histoire sociale et culturelle des sciences. Nouvelles définitions, nouveaux objets, nouvelles pratiques)>’, HSS연감, 3권 50호, 1995 / <과학과 지식의 역사(Histoire des sciences et des savoirs)>(3권), Seuil, Paris, 2015.
(7) Cf. Didier Debaise, <가능성의 미끼(L’Appât des possibles)>, Les Presses du réel, Paris, 2015 / Bruno Latour, <존재 방식에 대한 연구(Enquête sur les modes d’existence)>, La Découverte, 2012, 관련 사이트: modesofexistence.org
(8) Cf. Bruno Latour, <행동하는 과학(La Science en action)>, La Découverte, 2005 / 기후와 관련해서는 다음을 참고: Paul N. Edwards, <A Vast Machine>, MIT Press, Cambridge (Etats-Unis), 2010.
(9) Lily E. Kay, <The Molecular Vision of Life>, Oxford University Press, 1993.
(10) Alain Desrosières, <통계, 자유의 도구인가, 권력의 도구인가?: 통계운동, 수와의 투쟁(La statistique, outil de libéation ou de pouvoir?, Statactivisme. Comment lutter avec des nombres)>, Zones, Paris, 2014
(11) 다음에 수록된 Brian Wynne의 발문: Matthew Kearnes, Phil Macnaghten & James Wilsdon, <Governing at the Nanoscale. People, policies and emerging technologies>, Demos Foundation, London, 2006.
(12) Luc Boltanski, <비평에 관해De la critique>, Gallimard, Paris, 2009.
(13) Cf. John Dewey, <대중과 문제Le Public et ses problèmes>, 갈리마르Gallimard, ‘폴리오 에세Folio Essais’ 총서, 2010, 및 다음에 수록된 조엘 자스크Joële Zask의 도입글: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 <공통의 세계는 없다: 이는 손수 만들어 내야 한다Il n’y a pas de monde commun : il faut le composer>, Multitudes, no 45, Paris,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