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왜 이스라엘 건국을 지지했나?
이반 마이스키 런던 주재 소련대사는 1941년 2월 3일자 일기에 소련이 이스라엘 국가 조기 인정을 준비하며 예기치 않게 연 회견을 상세히 기록했다. 마이스키의 일기를 보면 원래 팔레스타인의 독립 국가 수립을 지지했던 소련이 입장을 바꾼 이유는 시오니즘(1)보다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에 더욱 반대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명확히 알 수 있다.
국제연합(UN)은 1947년 11월 29일 열린 총회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안, 즉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지지를 천명했다. 소련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역사적인 투표였다. 1939년 독일과 소련이 체결한 상호불가침조약은 여전히 발효 중이었는데, 놀랍게도 시오니즘 운동 대표자들이 소련 지도자들을 접촉했던 것이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기 몇 달 전에 최초 만남이 이루어졌다. 프랑스 군대를 궤멸한 독일군이 쉽게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던 스탈린은 1942년에 열릴 것으로 예상한 평화회담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는 이 회담으로 유럽에서 힘의 균형에 큰 변화가 생기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면 대영제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재검토하게 된다.(2) 그리고 소련은 새로운 권력관계에 이해관계자로 참여하기를 원했다.
시오니즘 조직들과
런던주재 소련대사 간의 교신
국제정치계를 신중히 관찰해 온 하임 와이즈만 세계 시오니즘 조직 총재는 스탈린의 의도를 꿰뚫은 것으로 보인다. 와이즈만은 즉시, 소련이 병합된지 얼마 되지 않은 폴란드, 발트해 연안 국가들, 베사라비아(현재 몰도바공화국 영토와 우크라이나의 남서부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의 운명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1941년 2월 와이즈만은 영향력 있는 이반 마이스키 런던 주재 소련대사와 교신채널을 만들었다.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 후 마이스키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얀 미하일로비치 랴크호베스키는 동방정교회 학교의 여교수와 폴란드에서 러시아로 이주한 유대인 의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1941년 2월 3일자 일기(3)에 이렇게 썼다.
“와이즈만은 내게 말했다. 현재 팔레스타인에서 생산한 오렌지를 판매할 시장이 전혀 없다. 소련이 이 오렌지와 모피를 맞바꾸는 걸 받아들일까? 그렇게만 한다면, 모피들을 미국에 있는 유대인 회사를 통해 쉽게 팔 수 있을 텐데.”
나는 와이즈만에게 현재로서는 확답을 줄 수 없지만, 문제해결 방안을 마련하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우리에게 너무 큰 기대를 하면 곤란하다고 덧붙였다. 사실 우리 규정상 과일을 수입할 수 없다. 다음 내용을 보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이 와이즈만의 제안을 거부했고, 그 때문에 오늘 아침에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렌지 수입에 관해 논의하던 중, 와이즈만이 일반적인 팔레스타인 관련 사안을 꺼냈다. 그는 현재 상황과 세계에 퍼져있는 유대인 디아스포라(4) 관련 계획을 설명했다. 와이즈만은 이에 관해 매우 비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현재 유대인구는 전 세계적으로 1,700만 명인데 그 중 1,000~1,100만 명은 신상에 대한 위협 없이 그럭저럭 살고 있다. 영국과 소련에 사는 유대인들의 경우다.
“소련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그들이 소련의 완전한 일부인 양 점점 러시아적인 삶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나는 이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어요. 적어도 소련 유대인들은 잘 살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독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발칸반도, 특히 폴란드 같은 중부유럽지역의 6~7백만 유대인들을 생각하면 공포가 앞섭니다. 앞으로 그들은 어떤 일을 겪을까요? 어떤 상황에 빠질까요?”
한숨을 내쉰 와이즈만은 말을 이었다. “만약 독일이 전쟁에 승리한다면 유대인을 말살할 겁니다. 독일이 승리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영국이 이긴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 순간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내비쳤다. 영국인들, 특히 식민지 행정관들은 유대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팔레스타인에는 유대인과 아랍인이 공존한다. 그곳의 ‘고위 관리들’은 눈에 띄게 아랍인을 선호한다. 사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행정관들에게 익숙한 일종의 모르모트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행정관들의 기를 꺾는다. 유대인들은 만사에 불만을 품고 질문을 퍼붓는다. 때로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도 있다. 이에 짜증이 난 행정관은 유대인들을 해로운 존재로 여긴다. 행정관은 유대인이 “당신은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나요? 아마도 내가 당신보다 배는 똑똑할걸요”라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본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행정관은 유대인에게 영원히 등을 돌릴 것이고, 아랍인을 선호할 것이다. 아랍인은 달을 요구하지도 않고, 귀찮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와이즈만은 걱정스럽게 자문했다. “영국의 승리로 유대인이 얻는 게 뭘까요?” 이 질문은 그를 불편한 결론으로 이끌었다. 그에게 중부유럽, 특히 폴란드의 유대인들을 구원할 유일한 ‘계획’은 이런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 1백만 명을 이라크로 이주시키고 폴란드와 여타 유럽국가의 유대인 4~5백만 명을 이렇게 수용된 영토에 정착시킨다. 그런데 영국이 이 계획을 수락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영국이 이를 거부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지금까지 아랍인 100만 명이 사는 땅에 500만 명의 유대인을 정착시키기 위한 그의 해결방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말했다. 그는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오! 걱정 마세요. 우리는 아랍인을 사막의 아들이라 칭하지만, 사실 사막의 아버지가 더 적합한 호칭일 겁니다. 그들은 어찌나 게으르고 구시대적인지 꽃이 만발한 정원을 사막으로 변모시킬 정도니까요. 아랍인 100만 명이 거주하는 땅을 준다면, 그 5배의 유대인들을 어려움 없이 정착시킬 겁니다.” 그러더니, 와이즈만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 말을 이었다. “유일한 문제는 어떻게 이 땅을 얻느냐는 것입니다.”
마이스키의 일기에 그 밖에 다른 팔레스타인 관련 기록은 없다. 그렇지만 이스라엘 기록보관소에 따르면, 와이즈만과 당시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 단체(Jewish Agency) 대표였던 다비드 벤구리온(훗날 이스라엘 1대 총리)이 마이스키에게 계속 간청했다고 한다. 성공확률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들은 ‘사회주의 코먼웰스(연방-역주)의 핵심부’를 팔레스타인에 성공적으로 건설함으로써, 얼마나 진지하게 사회주의 정신에 따라 활동하는지 보여주었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성과 뒤에는 마이스키를 이용해 팔레스타인의 시온주의자들이 정치적 열망을 이루려하는 벤구리온의 계획이 숨어 있었다. 그는 이를 위해 소련을 ‘새로운 세상의 운명을 결정지을 3대 지배 세력 중 하나’로 칭했다.
1943년 여름 모스크바로 소환된 마이스키는, 이후에 전후 유럽에서 새로운 연대 결성과 국경을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몇몇 확실한 성공을 통해 자신의 불명예를 씻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런던에서의 마지막 체류기간 동안 소련정부의 허가 없이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안소니 이든 영국 외무장관과 일련의 협상을 벌였다. 그는 또한 시오니즘 이쇼우브(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를 소련의 지배하에 두려는 대담한 협상을 벌이고자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길에 근동 지역에 들르기로 했다.
1943년 10월 마이스키는 3일간 팔레스타인에 체류했다. 이 3일은 팔레스타인에서 시오니즘 운동이 실현될 수 있을지, 그리고 과연 팔레스타인이 엄청난 수의 유대인 이주민을 흡수할 수 있을지 가능성을 직접 평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는 다시금 비밀 협상에 나섰다. 이번에는 벤구리온, 골다 메이어슨(훗날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 및 예루살렘 인근 마알 하샤미샤 키부츠의 이쇼우브 지도자들과 함께였다. 마이스키는 평생 자신의 출생의 근원(유대인)을 멀리하려 했지만, 이번 방문으로 결국 그 근원에 빠져들고 말았다. 팔레스타인에서 만난 이들과의 공통점이 친근감과 함께 배가 됐다. 그들 대부분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으며, 정치적 힘으로서의 시오니즘 운동의 효과에 대해 절대적 믿음을 보였다. 또한 사회주의 신조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듯했다.
그렇지만 소련에서의 명예 회복에 연연한 마이스키는 벤구리온에게, 그리고 결과적으로 역사가들에게 그가 크렘린의 의중을 반영한다고 믿게 했다. 그리고는 협상을 함께 하는 시온주의자들에게, 자신이 대외관계에 있어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그리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소련 외무장관에 이은 제3인자라고 자랑한다. 유럽 전문가인 그에게 유럽의 미래를 협상한다는 막중한 임무가 주어졌다고 그는 확신했다. 시오니즘 지도자들은 당시 마이스키가 매우 불확실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모스크바에 도착하자마자 마이스키는 스탈린에게 팔레스타인에서의 외교적 성과를 강조하는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소용없었다. 그에게 열린 문은 없었다. 외무부에 감금된 상태였던 그의 활동 영역은 전후 계획 연구로 국한되게 된다.
세계지도를 바꾼 소련의 전술적 계산
팔레스타인 문제가 얄타회담의 공식 의제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공식적인 논의 끝에 모든 참가국이 하나의 의견에 도달했다. 팔레스타인에서 영국을 철수시킨 후 국제사회가 팔레스타인을 신탁통치 한다는 것이다. 얄타회담에서 소련은 연합국들이 특히나 전쟁 후에도 동맹을 유지해야한다는 점을 설득하는 입장이었다. 소련은 자국을 포함해 미국, 영국 등 3대 강대국이 소련과 서방세계 간에 명확한 경계선을 보장하는 대규모 평화동맹의 틀 안에서 손을 맞잡고 세계 경찰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연합국들은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45년 8월 17일 <뉴욕타임스> 논평을 보면,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포츠담 회담 때부터 처칠에게 팔레스타인의 미래를 수차례 언급한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 스탈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 서기장은 이 문제와 관련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게다가, 1946년 팔레스타인 사안을 ‘조사’하기 위해 설립된 영미위원회는 러시아를 배제했다.
영국의 책략에 대항하기 위해, 소련은 4가지 중점 계획을 마련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끝내고 주둔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영국에 확실히 요청하는 것. 이 점에 있어 소련은 1941년 이래 입장을 바꾼 적이 없었다. 그러나, 소련이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이용하고자(적어도 소련이 원하는 것) 명확한 의견을 표명하며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미래와 유대인 문제를 언급한 것은 처음으로, 획기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소련은 소수인 유대인들이 아랍인들과 ‘동일한 국가권리와 민주권리’를 누릴 수 있는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단일 팔레스타인’ 수립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련의 공식 입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7년 3월 12일 의회 연설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소련의 위협에 맞서 그리스와 터키에 금융지원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련의 팽창주의에 맞선 세계방위 개념이 태동하고 있었다. 훗날, 트루먼 대통령은 이렇게 회고했다. “유일하게 소련 지도자들이 이해하고 반응을 보인 대상은 권력과 힘의 언어였다.”
1947년 4월, 35살의 안드레이 그로미코 UN 주재 소련대사(5)는 한 달 전 시온주의자들에게 크나큰 실망을 안겨준 소련 정부의 가이드라인으로 무장한 채 UN 총회 준비 회담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로미코는 스탈린에게 전보로 보고한 대로, 미국과 영국이 ‘팔레스타인 운명을 그들끼리만, 그리고 그들 맘대로 결정’하기 위해 지연수단을 사용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이처럼 긴장된 상황 속에서 소련은 공산주의 팽창을 견제하는 트루먼 독트린에 대해 조사에 나선다.
UN총회 특별회기 개막일인 1947년 4월 28일 그로미코 대사는 갑작스럽게 몰로토프 장관으로부터 새로운 지시사항을 전달받았다. 전쟁 중에 유대인들이 겪은 ‘전례 없는 고통과 재앙’을 강조하라는 것이었다. 소련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종식 요구라는 노선은 유지하면서 나머지 부분에서는 입장을 완전히 바꿨다. 이제부터는 ‘두개의 대안을 염두에 두고 유대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여러 계획안을 고려’한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대안은 ‘유대인과 아랍인이 동등하게 대우받는 아랍-유대 국가 건설’. 두 번째 대안은 유대인과 아랍인 간에 관계가 악화되면 ‘팔레스타인을 독립적인 별개의 아랍, 유대 국가로 분할’하기 위한 모든 제안을 지지하는 것.
그러나 뒤를 이은 몰로토프의 전보가 명시하는 바대로, 첫 번째 제안은 ‘전술적 고려’에 의한 것일 뿐이다. 소련 외교의 수장인 몰로토프는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해결책일지라도 소련이 유대국가 건설에 앞장선다는 인상을 주기를 원치 않았다. 이러한 소련의 입장 변경은 실로 충격적이었다. 첫 번째 제안이 실현됐다면 별개의 독립 국가에 대한 유대인들의 열망에 치명타를 날렸을 뿐만 아니라, 근동 및 세계 지도를 바꿨을 지도 모른다.
소련의 갑작스런 입장 선회는, 일부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및 영국군의 주둔을 가능한 한 빨리 끝내고 싶었던 소련의 열망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새로운 유대 국가와 장기적인 관계를 수립하려는 전략적 의지 때문이기도 하다. “팔레스타인 관련 중요한 모든 사안에 관한 유대인들의 의견을 고려해야 한다. 특히 예루살렘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고 소련은 UN 주재 소련대표부에 강력히 지시했다.
글·가브리엘 고로데츠키 Gabriel Gorodetsky
옥스퍼드 올 소울즈 칼리지에서 국제정치학을 가르쳤다.
번역·조승아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Zionism, 고대 예루살렘 중심부의 ‘시온’이라는 약속된 땅, 즉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유대 민족주의 운동(역주)
(2) Michel Réal ‘소련이 이스라엘을 지지할 때 (Quand l’Union soviétique parrainait Israël)’ 참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14년 9월.
(3) 최근 출간된 Gabriel Gorodetsky 편집, <The Maisky Diaries. Red Ambassador to the Court of St James’s, 1932-1943>, Yale University Press, New Haven, 2015. ‘런던 주재 소련대사의 수첩(Carnets d’un ambassadeur soviétique à Londres)’ 참조,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 2015년 10월.
(4) Jewish Diaspora,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역주)
(5) 소련 외무장관(1957~1985)에 이어 소비에트연방 최고회의 의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