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셰비즘의 음모와 독일 스파이
1917년 러시아에서는 두 차례의 혁명이 일어났다. 2월 혁명으로 군주제가 무너졌고, 10월 혁명으로 레닌이 권좌에 올랐다. 이토록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역사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로마노프 제국은 스스로 무너져버렸다. 그러나 상당수의 사람들은 10월 혁명을 구체제 러시아의 멸망을 염원하던 숨은 세력들의 음모 결과로 보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음모’의 이름은 ‘볼셰비즘’(이해하기 어려운 이름이지만)이다. 볼셰비즘의 이데올로기적 기반은 독일 유대계 출신의 국적 없는 철학자, 칼 마르크스의 이론이며, 주동자는 레닌이라는 가명으로 정체를 숨긴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였다. 다른 혁명들과 달리, 볼셰비키는 신속하게 목표에 도달했다. 당을 창설한 지 20여 년 만에 권력을 찬탈한 것이다. 볼셰비키의 이러한 놀라운 정치적 성과 앞에서, 당시 패배자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따라서 패배자들 간에는 음모의 유혹이 샘솟았다. 그들은 레닌을, “러시아 군인들을 몰살하고, 동부전선의 저항을 박살내기 위해 히틀러가 보낸 독일 스파이”라고 규탄했다.
전쟁과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인해 스파이 공포증이 맹위를 떨치던 시대였다. 일례로, 프랑스는 이국적인 매력의 댄서 마타 하리를 ‘독일 스파이’라는 혐의 만으로 유죄판결을 내리고 그녀를 처형했다. 또한 프랑스는 급진주의자 조세프 카이오가 영토의 병합이나 배상 없는 평화를 위해 투쟁했다는 이유로 그에게 유죄판결을 내리고 목숨만 구제해 주었다. 러시아에서는 세르게이 미카일로비치 미아소이에도프 대령이 (죄가 없었지만) 적과 내통했다는 판결을 받고 1915년에 처형됐다. 또한 독일 출신의 러시아 황후는 끊임없이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이런 때였던 만큼, 레닌이 독일 스파이라는 의혹은 빠른 속도로 번져나갔다. 결국 레닌은 독일황제를 위해 일했다는 비난을 받는다. “프랑스와 영국의 동맹국인 러시아를 불안에 빠뜨리기 위해, 독일 군대가 편의를 봐주어 그가 1917년 4월(1) 쉽게 귀국할 수 있었다”는 허위 근거로 레닌은 비난받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페트로그라드 전쟁에 반대하는 큰 시위가 벌어지기 이틀 전, 시위조직자들인 ‘볼셰비키들’ 사냥에 시동이 걸리던 1917년 7월 18일에 시작된다. 극단적인 군주제를 옹호하고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신문인 <지보이에 슬로보>에 전직 의원인 알레크신스키가 군사 스파이인 에르몰렌코의 증언을 바탕으로, “레닌이 적군과 내통하고 있다”고 비난한다. 알렉산더 케렌스키에 의해 7월 1일 시작된 독일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이 대참사로 끝난 시점에 이 폭로가 이루어진다. 에르몰렌코는 볼셰비키의 자금과 지시사항들이 독일로부터 흘러 들어온다고 단언하면서도, 레닌이 그 자금을 어느 정도, 얼마나 자주 받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하지 못한다. 레닌도 위험과 호사를 오가며 사는 많은 스파이들처럼, 그 자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한 것일까? 레닌의 평소 생활이 검소했던 것을 볼 때, 아마도 그 자금은 당의 재정과 선전기관인 프라브다에 사용됐을 것이다. 독일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볼셰비키들이 무기를 얻었을까 하는 점이 마지막 의혹이다. 사실 상당수 투사들이 자신들의 무기를 전선에서 가져왔고, 노동적위대는 1917년 민중폭동이 벌어졌을 때 무기고를 약탈하고 탈취했다. 그러므로 실제로 존재했다하더라도, 얼마 안 될 독일의 자금이 어디에 사용됐는지는 알기 어렵다.
음모론의 중심에 서게 된 레닌
외국, 특히 동맹국인 프랑스와 영국에서는 ‘봉인된 열차’ 에피소드가 레닌에게 불리한 증거로 작용했다. 스위스로 망명한 이 볼셰비키 지도자는 1917년 4월 9일 러시아로 가기 위해 기차로 독일을 횡단하라는 독일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열차가 치외법권의 혜택을 누리며 쉬지 않고 여정(旅程)을 횡단할 것과, 러시아의 포로들과 독일·오스트리아의 포로들을 교환해 줄 것을 요구한다. 이 협정에 의해 독일 외교관들과 신비의 인물인 알렉상드르 파르뷔스(진짜 이름은 이츠라엘 라자레비치 겔판트)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다. 혁명의 한복판에서 출입이 자유로워진 파르뷔스는 러시아의 비밀 서클들과 독일의 여러 기관들 사이에 없으면 안 되는 중재자로 인정받았다. 1915년 독일 수뇌부와 러시아 볼셰비키당의 수뇌부에게 “총파업으로 러시아를 무력화시키자”고 말한 파르뷔스의 계획은 그가 그 누구보다 먼저 레닌의 영향력을 감지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파르뷔스가 볼셰비키 승리의 주역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파르뷔스는 1917년 3월 21일 임시정부가 베푼 일반사면을 이용해, 혁명가 33인의 여정을 짜기 위해 무대 뒤에서 활동하면서 볼셰비키의 승리에 기여했을 뿐이다. 이 여행사건이 알려지는 것은 독일의 이미지 향상에 도움이 된다. 인도주의적 행동(포로교환)을 하기 위해 전쟁법에 어긋나는 술책을 눈감아 주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여행사건은 신성한 동맹을 추구하는 독일사회주의자들과 레닌이 단절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변절, 공격거부, 장교들에 대한 폭력 등의 혼란스런 현상들을 은폐하기 위해 당수뇌부가 ‘산통(産痛)하는 볼셰비즘’이란 용어를 만들었다. 이 산통하는 볼셰비즘은 전쟁을 비판했다. 그 전쟁은 볼셰비즘을 드러내고 퍼뜨리기 위한 독일 스파이들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레닌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건은 1917년에 종결돼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1998년 장 샤를르 드니오는 <TF1>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레닌의 유죄를 증명하는 러시아와 독일의 서류들을 제시했다. 2007년 12월 <슈피겔>지는 볼셰비키들의 반역에 대한 새로운 증거를 파르뷔스의 플랜에서 찾아내 다시 출판했다. 당시 대사관 사무국은 러시아 정치세력들의 상황에 대해 상당히 불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었고, 의심하면서도 모든 정보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래서 대사관 사무국의 문서보관실에는 날조된 고발내용이 넘쳐난다. 이따금 상업적인 목적으로 발행된 진위를 알 수 없는 매체들이 싼값으로 레닌에 대한 비난을 게재하면서, 레닌의 수많은 적수들이 저지른 수많은 전략적 오류들을 정당화시켰다. 이런 폭로들은 역사적 비판 앞에서는 거의 효력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당이 활발하게 움직였던 곳에서는 여전히 유치한 반공산주의가 활발히 타오르고 있다. 300년 간의 군주권력과 사망자가 발생하는 분쟁을 끝내지 못하는 민주주의에 대해 대중은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오래된 음모신화를 상기하는 것이 더 쉽다. 전쟁으로 인해 고조된 계급투쟁은 사회-민주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소외된 소수가 권력을 획득할 수 있게 만들어버렸다. 10월 이후에는 나라를 정복하고 사회에서 혁명을 일으키는 일만이 그들에게 남아 있었다.
글·알렉상드르 쉼프Alexandre Sumpf
저서로 <잊혀진 위대한 전쟁, 1914-1918>(페렝, 파리, 2014)가 있다.
번역·고광식
파리8대학 언어학박사, 주요 역서로 <르몽드 세계사 3> 등이 있다.
(1) 이 기사에 언급된 날짜들은 프랑스 책력(冊曆)을 따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