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의 국제정치와 반복되는 위기적 징후들

예측불가의 2016년 한반도 봄

2016-01-28     강태호


한반도는 폭풍 전야다.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대결 국면이 예고되고 있다. 북한의 수소핵실험의 국면 속에서 박근혜 정부가 기존의 6자 회담에서 북한을 뺀 5자 회담론을 들고 나왔으나, 중국의 즉각적인 반대에 직면했다. 2016년 한반도의 봄, 남북한이 각각 4월의 총선과 5월의 당 대회를 맞아 그 어느 때 보다도 강경한 분위기가 예고된다.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중단을 처음 예고한 것은 일본의 <아사히신문>이다. 이 신문은 작년 9월28일, 북한이 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인 10월10일을 겨냥해 준비해 온 “장거리 로켓 발사 관련 준비가 멈춘 듯한 양상”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그 근거는 사실상 빈약했다. 인공위성 정보에 의하면 당 창건일을 기준으로 ‘D-15’였던 9월25일 시점에 미사일(로켓) 본체의 존재가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에서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9월24일 북한 국가우주개발국장도 로켓 발사에 변화가 있음을 시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날 <CNN>과의 회견에서 “위성발사는 다가오고, 최종 준비가 진행되고 있다”면서도 “우리가 위성을 특정한 축일이나 기념일에 쏘아올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고 말했다. <CNN>은 그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고 밝혔는데, 그는 이 말을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은 묘하게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워싱턴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무렵이었다.

로켓 발사 중단과 세 갈래의 대화 기류

북한의 로켓 준비발사가 본격화됐음이 드러난 시점은 2015년 7월말이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산하 한미연구소가 운영하는 누리집 <38노스>는 7월28일 당시 촬영한 민간 위성사진을 판독한 결과,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로켓 발사장 내부의 증·개축 공사가 완료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밝혔다. 공사가 시작된 게 2013년 말이었으니 1년 6개월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정보당국과 전문가들은 이 발사대 증축으로 북한이 2012년 말 발사에 성공한 은하-3호를 뛰어넘어 미 본토에 도달하는 장거리 로켓을 발사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한 군 당국은 7월23일 이 기지에서 30m에 달하는 로켓 1단 추진체의 연소실험을 실시한 걸 확인했다. 2012년 은하3호 발사 당시 3단 로켓의 전체 길이가 30m였고, 이중 1단 추진체가 20m였던 것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약 1.5배나 커진 셈이다.
그 후 8월2일, 일본의 <교도 통신>은 외교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이 발사대에 덮개 설치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미 정보당국은 이 작업이 8월 중 완료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전했다. 덮개가 설치되면 위성의 감시활동이 어렵게 된다. 그리고는 9월 들어서면서 로켓발사는 기정사실이 됐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김정은 제1위원장이 중국이 초청한 9월3일 2차 세계대전 70주년 기념 전승절 행사에 불참한 것은 위성발사를 강행하겠다는 걸로 해석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9월25일 이전의 어느 시점에 북한은 로켓발사를 중단한 셈이다. 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북한이 로켓 발사 준비를 한 건 분명하지만 로켓 발사를 공식화하지는 않았다는 데 유념할 필요가 있다. 7월28일 북한의 장일훈 유엔 주재 차석대사의 발언도 그렇고 그 핵심은 북한은 ‘위성발사의 권리’를 갖고 있으며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로켓 발사가 무기, 이른바 ‘군사’의 문제를 넘어 국제정치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민감한 안보현안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이 한국에 배치하려는 고(高)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의 문제가 한미, 한중 나아가 미중관계에 까지 심각한 영향을 끼칠 외교현안이 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10월10일 당창건 기념일에 류윈산 상무위원이 북한을 방문하기로 한 것이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움직임에 영향을 줬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로켓 발사 중단은 8월 하순 이후 전개된 세 갈래의 대화 흐름 속에서 봐야 할 것이다. 우선 8월 초 군사분계선에서의 목함지뢰 사건으로 긴장이 고조되자 북한은 준전시상태를 선포했으며, 남북의 추가적인 맞대응으로 긴박한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9월3일 박근혜 대통령의 베이징 전승절 참가, 9월 하순 시진핑 주석의 미국 방문, 그리고 10월10일 당 창건 기념일 등 굵직한 외교일정을 앞에 두고 남북은 한발씩 물러섰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고위 대화채널(핫라인)이 가동됐고 남북은 김관진 청와대 안보실장-김양건 당비서의 담판을 통해 8.25합의라는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두 번째는 북중 관계의 변화다. 9월3일 김정은 제1비서의 전승절 불참과 최룡해 특사에 대한 중국의 냉대에도 중국은 당공식 서열 5위인 류윈산 정치국 상무위원을 10.10 당 창건 행사에 보내기로 했다. 그 발표시점이 10월4일이었다는 점을 볼 때, 그에 앞서 북한의 로켓 발사 움직임이 중단된 것은 북중 간에 교감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류윈산 정치국원이 보는 앞에서 북이 로켓을 발사할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시진핑 주석은 9월25일의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9.19 공동성명을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거나 유엔 안보리 결의를 위반하는 어떠한 행동도 반대한다”고 밝혔다. 북한을 직접 겨냥한 발언이었다. 이 시기 중국은 북한만이 아니고 미국의 자세 변화 또한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건 세 번째로 북미 대화 분위기로 나타났다. 9월19일(미국 현지시간) 성김 대북 정책 특별대표는 “우리는 북한과 진정으로 대화할 용의가 있다. 평양이든 어디든 장소는 중요치 않다”고 말했다. 그가 평양을 언급하며 방북 의사를 내비친 것은 앞서 북한의 평양초청을 그가 거부해 2015년 1월 말 북미 대화가 무산됐다는 점에서 중요한 메시지였다. 2015년 2월1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중앙통신> 기자와의 대담을 통해 미국과 북한의 대화가 평양이라는 장소 문제에 대한 이견으로 불발됐음을 폭로했으며, 2월4일엔 국방위원회의 담화를 통해서 미국과의 대화 단절을 선언했었다.

한미 군사훈련과
핵실험의 상호 중단

리수용 북 외무상의 제70차 유엔총회 기조연설(2015.10.1)은 이런 남북, 미중, 북중간 상호 교감 속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모든 문제의 발생원인인 미국의 적대시 정책의 종식이 확인되면 미국의 우려사항을 포함한 모든 문제들이 타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10월7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북한은 2015년 1월초 미국에 전달했던 메시지를 재확인하며 대화를 촉구했다. 그 메시지는 2015년 1월10일 <중앙통신>의 ‘보도’ 형식을 통해 공개한 것으로 “미국이 올해(2015년)에 남조선과 그 주변에서 합동군사연습을 임시 중지하는 것으로써 조선반도의 긴장완화에 기여할 것을 제기하고, 이 경우 우리도 미국이 우려하는 핵실험을 임시중지하는 화답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다는 데 대해 밝혔다”는 것이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는 9월말 북한의 장거리 로켓발사 중단은 “북한이 지난 2012년 북미 간에 이루어진 2.29 합의를 실패로 이끈 군사연습과 로켓 발사 강행이라는 두 악재를 한미 합동군사연습의 축소와 로켓발사 핵실험의 동결(및 검증)과 맞교환하는 ‘동결식 평화 체제’를 기대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1)
10월16일의 워싱턴 정상회담이 이런 북한의 제안을 논의했던 건 분명하다. 이 정상회담에서 한미는 북핵 문제의 해결과 관련해 ‘최고의 시급성과 확고한 의지(Utmost urgency and determination)’라는 표현이 들어간 별도의 대북 공동성명을 내놓았다. 두 정상은 또한 “대북 적대시 정책을 갖고 있지 않으며, 비핵화라는 우리의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북한과의 대화에 열려있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라는 메시지를 내놨다. 두 정상이 대북 적대시 정책(Hostile policy)이라는 표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북의 요구를 의식한 것이었다.
그러자 북한은 한미정상회담 직후인 10월18일 대변인 성명보다 한 단계 높은 외무성 성명을 통해 대북 적대시 정책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그 실체를 드러낼 것을 요구했다. 성명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미국이 먼저 용단을 내려야 할 문제이며 조미사이에 우선 원칙적 합의를 봐야 할 문제다. 유엔도 평화협정체결을 적극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조선반도에서 한 성원국과 유엔군사령부가 교전관계에 있는 비정상적인 사태를 끝장내는데 자기 몫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북한 초청은 이런 맥락에서도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성김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10월20일 의회 청문회에서 미국은 비핵화 단계를 뛰어넘는 평화협정 체결에는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그는 11월10일 워싱턴에서의 강연 뒤 북조선(북한)이 조선(한국)전쟁 정전협정을 대신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위한 대화를 요구하는 것과 관련한 질문에 대해 “비핵화를 위한 진전이 없는 한 응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그는 “순서가 반대다. 최대 문제인 비핵화에서 중대한 진전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9월 중순 내놓았던 미·북 대화의 가능성이 사라진 것은 북쪽에 잘못이 있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북한은 11월과 12월21일 두 번에 걸쳐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 실험으로 대응했다. 김정일 국방위 제1 위원장이 수소폭탄 개발을 언급한 것은 12월10일이었다. 8.25 합의에 따라 어렵게 성사된 12월11~12일의 남북차관급 당국회담 역시 예상된 것이지만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됐다. 북한은 이 회담에서 박근혜 정부가 미국의 압력으로 금강산관광 재개조차도 수용할 수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북한의 4차 핵실험은 북한의 일관된 입장을 반영한 예견된 귀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2016년 1월7일 ‘수소탄 시험' 감행의 주요 원인으로 2015년 1월 북한이 “한미 연합군사연습을 임시 중지하면 핵실험을 임시 중지할 수 있다”는 제안을 했지만, 미국은 ‘암묵적 협박(Implicit threat)'으로 일축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북한은 과거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제재 등을 결의하면 핵실험으로 맞섰다. 북한의 1∼3차 핵실험은 모두 장거리 로켓 발사 이후 1∼3개월 안에 이뤄졌다. 2006년 7월 대포동 미사일 발사는 그 해 10월9일 첫 핵실험으로 이어졌다. 또 2009년 4월 장거리 로켓(인공위성) 발사로 촉발된 위기는 5월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비화했고, 2012년 4월, 12월 두 번에 걸친 로켓 발사는 2013년 2월 3차 핵실험을 초래했다.  물론 각각의 정세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2006년 7월은 부시 행정부의 방코델타 아시아은행의 불법거래를 내건 대북 금융제재에 맞선 것이었다. 북한은 이때만큼은 인공위성 발사를 위한 로켓이라 하지 않고 미사일(대포동 2) 발사로 명명했다. 핵실험과 달리 로켓 발사는 우주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주권국가의 당연한 권리 행사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미사일 운반수단을 갖지 못한 핵무기는 기껏해야 자폭수단일 뿐이니, 미사일과 핵 실험은 같이 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장거리 로켓발사와 핵실험이 서로 연계되는 것은 군사적으로나 북한이 처한 상황으로 볼 때 자연스런 것이기도 하다.  외부의 시각으로 보면 그건 핵무장을 목표로 긴장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리는 벼랑 끝 전술이겠지만. 국가와 정권의 생존논리에서 본다면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유엔이 제재논리로 나섰다면 북한은 주권적 권리의 침해에 대한 최후의 수단으로서 핵무장으로 맞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북한이 작년 9월 양보할 수 없는 주권적 권리인 위성발사를 유보하면서까지 대화를 제의한 것은 처음이었다. 한미 정상이 밝힌 ‘최고의 시급성과 확고한 의지(utmost urgency and determination)’는 북한의 대화제의에도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의 전투준비태세 vs 미국의 플레이북

이제 북미는 2013년 봄처럼, 서로의 위협수단을 다 내 놓고 충돌하는 무모한 ‘치킨 게임’에 들어선 듯하다. 어찌 보면 2013년 봄의 대결을 경험한 북미는 서로의 카드를 알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쟁의 위기를 더욱 고조시키는 위험한 게임을 벌일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그 때와 달리 북한은 지난해 9월 발사준비의 최종단계에서 중단한 장거리 로켓의 발사라는 카드를 가지고 있다. 북은 굳이 이번 로켓 발사를 인공위성 발사로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2006년 7월처럼 탄두 재돌입을 시험하기 위한 미사일로 쏘아 올릴지도 모른다. 과거에도 미국과 일본 내에서는 로켓 내지 미사일 발사에 대한 요격주장이 나온 적이 있지만, 한미일이 이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한미는 지금 핵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과 대화의 국면에서가 아니라, 군사적 대결과 긴장의 국면에서 ‘최고의 시급성과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려 하고 있다.
큰 흐름에서 보면 1993년의 1차 핵 위기는 10년 만인 2003년에 2차 위기로, 다시 10년 만인 2013년에 3차 핵위기로 묘하게도 10년 주기설을 보여왔으며, 공교롭게도 1993년 김영삼, 2003년 노무현, 2013년 박근혜 등 새 정부가 출범하는 2~3월에 북핵 위기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새 정부 출범의 시기가 한반도 정세를 위기로 반전시키는 전환점이 된 것이다.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 왜 그런가? 모든 걸 북한 탓으로 돌리는 시각에서 벗어나서 본다면 이는 새 정부 출범에 따른 정책 전환이 기존 갈등을 더욱 증폭시킨 요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정권 교체에 따라 정책의 연속성은 단절되고 기존 합의는 부정됐다. 무엇보다도 2000년의 미 대선과 2007년 남한의 대선으로 이뤄진 정권교체가 기존 합의를 붕괴시킨 원인이 되고 있음은 분명하다. 여기에 시기적으로 보면 누적된 갈등과 대결이 팀스피리트 키 리졸브 등 한미 군사연습을 앞둔 상황에서 정면대결의 힘겨루기로 치달은 측면도 있다.
2016년 봄, 한반도는 다시 북한의 핵실험을 응징하기 위한 미국의 핵무기 등 군사적 시위와 유엔 및 한미일의 강도 높은 대북 추가제재 등을 앞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2월부터는 한미 합동 군사연습인 키 리졸브와 독수리 훈련이 이어지는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이미 미국이 보여준 것처럼, 괌에서 발진한 B-52 전략폭격기의 한반도 출격은 2013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맞선 대응조처를 그대로 재현하는 듯 하다. <월스트리트저널>(2013년 4월3일자)에 따르면 당시 미국은 이른바 ‘플레이북’으로 대응했다. 작전계획의 하위 개념인 이 플레이북은 2012년 12월 미 태평양 사령부가 북한의 군사위협에 대응해 새롭게 마련한 일종의 ‘전술교본’이었다. 그 목적은 북이 위협을 가할 경우 훨씬 강력하고 압도적인 무력시위를 통해 북한이 추가 도발에 나서지 못하도록 제압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 정부의 지나친 군사적 대응도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전면 대결전을 선언한 북한은 그에 맞서 때로는 보다 선제적으로 2월12일 3차 핵실험을 감행했고, 이어서 정전협정 폐기까지 모든 합의를 무효화하면서 전쟁준비를 본격화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국과 북한은 ‘키 리졸브’ 연습이 시작된 3월11일을 기점으로 실제 무기를 동원한 ‘도상(圖上)전쟁’을 벌이며 위기를 고조시켰다. 미국은 3월19일 B-52 전략폭격기를 한반도에 전개하는 등 3월에만 세 차례 이상 B-52를 출격시켰다(올해의 경우 그 시점은 1월로 앞당겨졌다). 또 20일엔 전략핵잠수함인 샤이엔을 연습에 참가시켰다. 그리고 이런 사실들을 모두 공개해 힘을 과시했다. 그러자 북한은 3월20일 B-52가 재출격하면 군사적으로 대응하겠다고 선언했으며, 전략로켓군 부대들과 장거리포병 부대들에 대한 1호 전투근무태세를 발동시켰다. 당시 인민군 최고사령부 성명은 “지금 이 시각부터 전략로켓군 부대들과 장거리 포병부대들을 포함한 모든 야전 포병군 집단들을 1호 전투근무태세에 진입시킨다”고 밝혔다. 1호 전투근무 태세는 김정은 최고사령관이 최종적으로 전략 로켓군의 미 본토 괌 일본 등의 미군기지에 대한 타격계획을 비준했다는 걸 의미했다. 실제로 그 뒤 북은 사정거리 4천km로 추정되는 중거리 미사일 무수단을 동해안으로 이동시켜 발사 대기상태에 들어갔다. 그러자 미국은 3월28일 B-52를 능가하는 스텔스 전략폭격기인 B-2를 미 본토로부터 출격시켰다. 북도 물러서지 않았다. 3월29일 김정은 최고사령관은 전략미사일 부대의 화력타격 임무에 관한 작전회의를 긴급 소집하고 ‘사격 대기상태’에 들어갈 것을 지시했다. 북한도 이 회의를 언론에 공개했다. 미국은 3월31일 주일미군의 스텔스 전투기 F-22 랩터를 한반도 상공에 출격시킴으로써 이 또한 무시했다. 지금 미국은 B-2 스텔스를 2월 중 한반도로 출격시키려 하고 있다.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대결이 예고된 2016년 봄

게다가 2016년 한반도의 봄은 남북한은 각각 4월의 총선과 5월의 당 대회를 맞는다. 남쪽은 첨예한 정치세력 간 대결이 벌어질 것이고 강경론이 득세할 것이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작년부터 이미 대선국면에 들어섰으며, 공화당 경선에서는 극우적 성향의 트럼프 후보가, 민주당 경선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버니 샌더스 후보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3월 워싱턴에서 열리는 핵안보정상회의는 북한을 규탄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한반도는 폭풍 전야다. 그 어느 때보다도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대결적인 국면이 예고되고 있다. 게다가 안보리를 통한 반복된 구태의연한 제재에 의존한다는 비판에 직면한 박근혜 정부는 5자 회담론을 들고 나왔다. 지난 1월 22일 외교부와 국방부, 통일부가 청와대 영빈관에서 박근혜 대통령에게 실시한 연두 합동 업무보고는 ‘북핵 문제 해결’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박 대통령이 “6자회담은 지난 8년여간 개최되지 못하고 있다”며 6자회담 무용론을 시사한 것은 이 자리였다. 게다가 그는 ‘북한을 제외한 5자회담을 시도’할 것을 주문했다.
2016년을 2013년보다 더 위태롭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이를 ‘다양한 창의적인 접근 방법’의 하나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적으로는 정부부처와 재계에 대해 ‘경제 살리기 법안’서명에 줄서기를 강요하고, 북한에 대해서는 대화의 가능성을 닫아둔 채 일방적인 굴복을 강요하는 5자회담을 창의적인 접근법으로 보고 있다. 이는 권위주의로 무장한 통치자의 일관된 사고 방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중러와의 갈등을 자초하는 이른바 자충수임에도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다. 훙레이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같은 날인 22일 정례 브리핑에서 “박 대통령이 북한을 뺀 5자회담을 추진하자고 제안한 것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6자 회담을 조속히 재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5자 회담을 일언지하에 거부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현재 반도(한반도)의 형세에서 대화·담판은 여전히 문제 해결을 위한 근본적인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중국의 이런 태도는 북 핵실험에 대한 한미의 ‘중국 책임론’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미국이 주한 미 대사관의 성명을 통해 5자 회담 지지를 밝힌 것은 박근혜 정부를 카드로 삼아 중국을 압박하려는 것이다. 2013년의 봄의 위기는 6월, 궁극적으로 중국이 한미와 긴밀한 협력 하에 북한의 최룡해 특사를 불러들여 불완전하나마 출구를 찾았다. 2016년 봄은 그러한 출구마저 보이지 않는다.

 

 

 

글·강태호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산하 통일연구소 수석연구위원, 한겨레신문 통일팀장 등을 지냈고, 현재 선임기자로 주로 남북관계를 다루고 있다. 편역서로 <천안함을 묻는다>, <미국의 세계전략: 닉슨부터 레이건에 이르는 반혁명세계전략>, <코리안 엔드게임> 등이 있다.


(1) 이정철 숭실대(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 담론의 마지막 유효기간이 다가온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1년 11월(8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