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거나, 관계를 맺거나

인문학 100년사 (1) 1900~1910년: 정신분석학과 사회학의 태동

2016-01-28     성지훈
     
   
▲ 1908년 5월 24일자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에 잔느 베버라는 여인이 자신의 아들을 끔찍하게 죽인 그림이 게재됐다. 이 여인은 나중에 조카 3명을 살해한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으나 사형당하지 않고, 정신이상을 이유로 병동에 오랫동안 감금되었다. 프랑스 정신분석학계에서는 이 새로운 유형의 사건을 놓고 수많은 논쟁을 벌였다.

1900~1910년의 인문학은 바로 전(前) 세기의 1, 2차 산업혁명 및 제국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18세기 후반, 전기와 증기기관의 발명을 계기로 본격화한 산업혁명은 생산성의 획기적인 진전과 일상적 삶의 전환을 가져왔다. 1900년 파리의 만국박람회는 당시의 놀라운 산업기술을 잘 보여주었다. 이 무렵 선보인 영사기, 전화기와 자동차는 새로운 시대의 등장을 알렸다. 1903년, 최초의 비행기가 이륙했다. 이때부터 인간은 하늘을 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문학적 관점에서 볼 때, 지난 100년은 우리 인류에게 있어 오만함에 대한 반성의 세기(世紀)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 스스로 자신이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특출한 능력을 지닌 최고의 존재라고 믿다가 그 한계를 깨닫고, 새로운 사유와 반성의 담론들을 쏟아낸 시기인 것이다. 1, 2차 산업혁명과 근대국가의 등장 이후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이 신의 전지전능함을 대신했으나, 곧 그 정당성을 위협받았다. 공교롭게도 20세기는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인간의 의지를 강조했던 프리드리히 니체의 죽음(1900), 그리고 인간의 나약한 정신세계를 탐구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1900)의 발표와 함께 시작됐다. 1900년을 기점으로 ‘신의 죽음’과 함께 ‘인간의 재탄생’이 본격화됐다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지난 한 세기 동안, 그리고 21세기의 문턱을 넘은 지금까지 인문학에서는 줄곧 인간을 연구 담론의 중심에 놓았다.
본지에서는 지난 한 세기의 인문학사(史)를 10년 단위로 나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서부터 멀티미디어 시대의 집단지성에 이르기까지 그 사상적 흐름을 살펴봄으로써 21세기를 살고 있는 인류의 존재와 그 가치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 한다.


대중의 시대와 개인 삶의 양식이 충돌하는 사회분위기 속에, 190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44세의 의사 프로이트가 쓴 <꿈의 해석>이라는 야심만만한 책이 출간된다. 이 저작은 꿈의 심오한 의미, 즉 인간 정신현상의 어려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은 우리들의 숨겨진 심리영역, 즉 무의식과 맞닿아 있는 관문이다. 꿈은 정신착란증세 같기도 하고, 일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어떤 숨겨진 의미를 전달한다. 꿈속에 담긴 내용은 의식 상태를 엿볼 수 있는 강력한 욕망의 표현이다.

프로이트, “모든 꿈은 욕망의 추구로 발현”

욕망은 종종 성적 욕구, 근친상간적 성격을 띤다. 의학을 공부한 후 1873년 빈 의과대학에서 생리학을 전공한 프로이트는 1876년부터 신경학에 관심을 가지고 15년 간 신경학자로서 연구에 전념했다. 1885~1886년 그는 신경 병리학 분야의 권위자 장 마탱 샤르코가 운영하는 파리의 사르페토리에르 병원에서 연수한다. 이후 빈으로 돌아온 프로이트는 정신과 의원을 개업한다. 프로이트가 새로운 정신이론을 고안하기 시작한 것은 1889년 프랑스 낭시에서 심리학자 이폴리트 베른하임의 강연을 듣고 난 후다.
“나는 그곳에서 인간 의식에 숨겨진 정신과정의 가능성과 관련해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1895년, 프로이트는 자신을 치료해준 오스트리아 빈의 의사 요제프 브로이어와 함께 <히스테리에 관한 연구>라는 저서를 출간한다. 이 책에서는 브로이어가 1880~1882년 치료했던 안나 오(Anna O)라는 젊은 여성의 히스테리 증세가 묘사된다. 프로이트는 이 여성의 히스테리 증세를 아버지를 향한 근친상간적 욕망이라고 명명했다. 그러나 그는 안나를 만난 적이 전혀 없었다. 당시 브로이어가 안나에 대해 실행한 대화치료는 새로운 치료방법이라고 할만했다. 그러나 연구 성과를 공유하기를 원치 않는 브로이어에 의해 두 사람은 갈라선다. 이 후 프로이트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길에 뛰어든다. 몇 년의 연구를 통해, 그는 ‘정신분석학’의 중요한 개념들을 창안하고, 정리했다. 정신분석학은 1896년 그의 저서에서 처음 등장한다. 무의식, 리비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자유연상의 기술, 유년기의 성, 방어 기제 등이 그것이다.
물론, 프로이트가 언급한 무의식의 개념은 전적으로 독창적인 것은 아니었다. 아더 쇼펜하우어나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 같은 철학자들은 이미 오래전 ‘무의식’의 개념을 자신들의 철학에 응용했다. 피에르 자네(1859~1947)는 극복할 수 없는 외상의 경험과 관련이 있는 ‘다중 인격장애’라는 정신분석학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러나 무의식 개념의 진정한 창안자는 독일 심리학자 테오도르 립스(1851~1914)다. 그는 무의식이 과거의 전체적인 표상 행위들로 이뤄졌으며, 항상 내가 의식하지 않더라도 무의식은 나 자신 안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프로이트의 독보적인 저서로 자리잡은 <꿈의 해석>은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프로이트가 빠진 우울증과 그 기간 이뤄진 긴 자기분석 과정의 산물이다. 이 자기분석을 통해 그는 두 달 반까지 올라가는 기억을 되살리면서 자신에게도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과 어머니에 대한 욕망이 있었음을 발견한다. 그는 죽은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죄의식을 가진 아들이기를, 즉 곧 이론화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소유자이길 선택한 것이다. 그는 이 이론을 보편적인 것으로 일반화한다.
<꿈의 해석>의 출간은 프로이트에게 황금기의 시작을 알렸다. 그는 몇 년 간 수많은 저서를 출간했다. <일상생활의 병리>(1901), <성 이론에 관한 세 가지 논문>(1905), <무의식에 관해>(1915), <자아와 이드>(1923) 등이 그것이다.

 

 

   
▲ 화가 루시앙 레비뒤르메르가 1897년에 그린 그리스 신화속의 메두사. 푸른빛이 감도는 분위기 속의 메두사는 절망과 분노, 혼란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빈에서 환영받았다. 유년의 성(性)이라는 주제는 아서 쉬니즐러의 문학과 칼 크라우스(Karl Kraus)의 <디 파켈(Die Fakel, 횃불)> 등의 잡지들에서 종종 언급됐다. 성의 병리학에 관한 연구는 특히 마조히즘과 소아애 개념을 정립한 리하르트 크라프트-에빙의 <Psychopathia Sexualtis>(1886)에서 많이 다뤄졌다.
프로이트의 주장들은 빠르게 확산됐으며, 격렬한 논쟁의 불씨를 지피곤 했다. 몇 년 후 그는 유명한 정신의학자가 된다. 많은 환자가 그의 병원을 찾아온다. 프로이트는 병원에 있는 긴 의자에 환자들을 눕게 하고 의식과 무의식의 흐름을 자유롭게 말하게 했다. 또한, 프로이트는 자신의 학파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1902년부터 그는 매주 수요일 저녁 자신의 병원에서 정신분석학에 관심이 많은 의사 및 지식인 그룹과 교분을 나누었다. 열등 콤플렉스개념으로 유명한 알프레드 아들러(1870~1937)는 바로 이 그룹 출신이다. 1907년 3월, 스위스 출신의 칼 구스타브 융(1875~1961)과 루드비히 빈스방거가 프로이트 학파에 합류한다. 그룹 회원들은 국제적 운동의 토대가 될 새로운 정신의학그룹을 형성한다. 1908년, 정신의학 최초의 국제회의가 찰스부르크에서 개최된다. 그 이듬해, 정신분석학회지의 창간호가 발행된다. 이 무렵 미국에 초대받은 프로이트는 자신의 이론을 발표한다. 1911년 아들러가 프로이트의 성충동 중시를 비판하고, 그로부터 떨어져 나와 이듬해 ‘개인심리학회’를 창설한다. 그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을 평가하면서도 성 충동이 인간 동기의 주요한 요인이라는 프로이트의 견해를 받아들이길 거부했다. 아들러는 개인행동의 주요 동기는 열등 콤플렉스의 극복의지로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이어 융도 1913년 자신의 학파를 설립하기 위해 떨어져 나간다.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그는 처음에는 프로이트의 학설에 매료돼 프로이트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기도 했으나 프로이트의 초기 학설인 성욕 중심설의 부적절함을 비판해 독자적으로 집단적 무의식 세계를 탐구해 분석심리학설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신화와 종교에 관심이 많은 그는 집단적 무의식이 물, 불, 부친, 모친 또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거대한 특징적 형태와 같은 원형들에서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집단적 무의식과 원형의 개념은 신화학이나 민속학, 종교학이나 문화인류학의 연구자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칼 아브라함(1877~1926), 어니스트 존스(1879~1958), 오토 랑크( 1877~1939), 샌더 페런치(1873~1933) 등 새로운 제자들이 프로이트의 사상을 변호했다. 이들에 의해 프로이트 사상은 초현실주의, 마르크시즘, 현상학, 문화인류학 등과 혼재돼 다양한 새 이론들을 생산해냈다. 그리하여 정신의학은 1920년대부터 인문과학의 핵심이론으로 각광받으면서 발전하게 된다.

대중의 ‘관계’를 논하는 사회학 등장

대중시대에 접어든 20세기를 전후해 복합적인 사회문제가 대두되면서, 유럽에서는 사회학, 미국에서는 실용주의가 본격적으로 싹트기 시작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인류문명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이해하기 위한 인류학이 지식인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오귀스트 콩트가 새로운 사회현상에 주목해 1848년 ‘사회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냈으나, 사회학이 본격적으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20세기에 들어 가브리엘 타드(1843~1904), 르네 보름스(1867~1926), 에밀 뒤르카임(1858~1917) 3명의 지식인이 사회학 발전에 선도적 역할을 했다. 이들 중 가장 핵심적인 인물인 타드는 저서 <여론과 군중>(1901) 등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학파를 만들지 않은 외로운 학자였다. 보름스 역시 19세기 말 사회학 분야에서 혜성 같은 존재였으나 오늘날 그의 이름은 완전히 잊혀졌다. 그는 1893년 국제사회학회지를 창간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국제사회학연구소를 설립해 연례학술행사를 개최했다. 보름스는 특히 1896년 <조직과 사회>를 출간해 당시 사회학적 글쓰기의 전형(典型)을 선보였다. 보름스의 뒤를 이어 등장한 뒤르카임은 사회학에 대해, “자연과학의 실험과 같이 비교학적인 방법론을 적용하는 사회과학”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1895년 저서 <사회학적 방법의 규칙들>에서 사회학의 학문방식을 정의했으며, 1897년 <자살>에서 이를 자살 문제에 적용했다.
이렇게 해서 사회학은 연구의 목적과 대상, 방식을 갖게 된 것이다. 사회학을 다른 학문과 관련해 잠깐 살펴보자. 특히 제도적인 부문에서 사회학의 발전은 어떠한가? 조직 활동에 탁월한 실력을 발휘한 뒤르카임은 자신의 연구계획에 많은 이들을 참여시킨다. 그는 1898년 젊은 학자들과 함께 <사회학의 해(L’Année sociologique)>라는 학술지를 창간한다. 여기에 그의 조카인 마르셀 모스를 비롯해 모리스 알박스, 셀레스탱 부글레, 프랑수와 사미앙, 폴 포코네 등이 가담했다. 이로써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서 사회학이 주요학문으로 자리 잡는다.
19세기 말은 각종 ‘사회문제’가 제기되던 시기였고, 사회체제의 붕괴 위기감이 팽배했다. 극우 애국주의 형태인 불랑제주의와 드레퓌스사건과 같은 정치·사회적 위기의식이 젊은 지식인들을 뒤르카임의 주변으로 끌어 모았다. 프랑스 기득권 체제에 자리했던 반유대주의, 보수주의, 교권주의에 맞서 사회주의, 이성주의, 공화주의 정신이 사회적 의제로서 유행처럼 부상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경험사회학의 선창자 중 한 명인 프레데릭 르 플레이는 가톨릭 보수주의를 표방한다는 이유로 사회학계에서 외면당한다. 사회학에서 사회문제를 다루는 것이 지적 유행이 되다시피 했다.
“우선적으로 현실을 연구하자고 제안하는 것이 현실 개선을 포기하자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오직 사변적인 목적을 위한 연구라면 단 한 시간도 할애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론적인 문제를 실천적인 문제와 떼어내서 연구하는 것은 실천적인 문제를 경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더 잘 해결하기 위해서다.” (뒤르카임, <사회분업론>의 서문에서)

한발 늦은 독일 사회학의 출발

프랑스와는 달리, 독일에선 20세기 초까지 사회학이 존재하지 않았다. 막스 베버, 베르너 좀바르트와 조지프 슘페터는 1903년 독일에서 최초의 사회과학 잡지라 할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잡지>를 창간했다. 하지만 ‘사회학’이라는 용어는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그 무렵,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경제학 교수로서 지식인 사회에서 잘 알려진 베버(1864~1920)가 경제사와 토지 소유문제, 주식 등 경제 분야에서 다양한 저술을 펴냈다. 정치에도 관심이 많은 그는 사회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과로의 누적과 가정불화로 인해 1897년 대학 교수직을 그만둔다. 베버는 1900년부터 활동을 재개해 사회과학 방법론과 인식론적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또 다른 주요 관심사는 자본주의의 역동성이었다. 신교도 출신의 기업가 가족에서 태어난 베버는 경제적인 역동성과 종교적인 원리 사이에서 존재할 수 있는 연관성들에 대해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는 1905년 출간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자본주의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를 분석하고, 합리적이고 자주적인 윤리로서 금욕적 직업윤리를 강조했다.
베르너 좀바르트(1863~1941)도 비슷한 문제에 열중했다. 1902년, 그는 자신의 역작이 될 <근대 자본주의>의 초판을 발행했는데, 이는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잇는 명저가 되길 원하는 그의 야심이 담겨 있었다. 좀바르트는 자본주의의 등장을 기술적, 사회적, 경제적 및 정치적 요인으로 파악했다. 특히 그는 이 요인들을 새로운 사회 계급, 예를 들면 기업가 계급에 의해 발현된 ‘새로운 정신’의 출현과 연결시키고자 했다. 이어 1904년 베버와 함께 <사회과학 및 사회정책 잡지(Archive für Sozialwissenschaft und Sozialpolitik)>를 펴낸 그는 윤리적 사회정책학파에 대항해 사회정책 과학성의 확립에 힘썼다. 그는 역사학파의 몰이론성에 불만을 품고, 이론과 역사의 통합에 노력해 ‘경제체제’의 개념을 확립하는 등, 경제사회의 전체적 파악을 시도했다. 그 성과를 집대성한 것이 <근대 자본주의>의 최종판(1927)이다.
그러나 베버와는 달리, 좀바르트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역할을 중시하지 않은 채 부르주와지의 사회적 배경에 관심을 가졌다. 예컨대, 프로테스탄티즘 못지않게, 유대인 역시 자본주의의 등장에 특별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게 그의 견해였다. 물론 근대적인 시장체제의 발전에 있어, 유대인의 역할을 매우 비판적으로 다뤘다(<유대인과 경제 생활>(Die Juden und das Wirtschaft sleben, 1911). 그 후 1913년, <사치와 자본주의>를 통해 부르주아의 사회적 삶의 조건에 대한 독창적인 분석을 시도했다. 좀바르트는 ‘금욕과 절제’, 소비의 억제가 자본주의를 발전시킨다는 베버의 주장에 정면으로 거부하고, 사치와 소비가 자본주의를 지속시킨다고 주장했다. 독일 사회학의 두 거목 간에는 인식의 차이가 분명했지만, 현대사회의 사회 문화적 토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1910년, 베버는 게오르그 지멜(1858~1918), 페르디난드 퇴니이스(1855~1936)와 몇몇 다른 사회학자들과 함께 독일 사회학회를 설립한다. 종교 영향력의 퇴조 속에 인간 소외, 과학과 기술의 발전, 행정과 경영의 등장, 노동문제 대두 등은 20세기 전반기 독일 사회학자와 철학자들의 주요 관심사가 됐다. 독일 사회학회의 좌장격인 퇴니이스는 1887년 <게마인샤프트와 게젤샤프트>를 출간했으나, 1902년 재판 발행을 통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인간의 사회를 본질의지에 기초한 친족, 자연사회, 도시공동체 등의 게마인샤프트와 선택의지에 기초한 대도시, 국가, 세계 등의 게젤샤프트의 2가지 기본유형으로 분석했다. 그의 사회이론은 산업화나 근대국가와 국제사회의 성립 등을 게마인샤프트적인 사회에서 게젤샤프트적인 사회로의 전개로서 분석했다. 또한 그러한 사회에서의 새로운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 질서를 구상하는 것을 목표로 그의 영향력은 사회과학 전반에 미쳤다.
이에 반해 지멜은 초기의 종합사회학에 반대했으며, 사회화의 형식을 그 내용으로부터 분리시켜 독자적인 대상으로 하는 형식사회학을 주장했다. 그는 사회를 개인을 초월해 실재하는 실체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하고, 사회를 각 분야의 기능적인 상호작용으로 파악했다. 그에게 있어 실재하는 것은 통일체로서의 사회가 아니라 개개 인간의 상호작용일 뿐이다. 따라서 사회학의 대상도 개인 간의 심적인 상호작용에 두었고, 심리학적 측면을 중시했다. 그는 1900년, 저서 <돈의 철학>에서 화폐를 통해 인간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검토했다. 특히 화폐가 ‘물물교환-금속화폐-종이화폐’로 진화하면서 결국 ‘돈의 추상화’ 내지 ‘신격화’가 진행될 것이라고 정리했다.
지멜에 따르면 돈은 모든 인간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를 수로 환산할 수 있는 단순한 양적인 크기와 관계로 환원시켜버린다. 그리고 개인을 점점 더 단순한 경제적·사회적 기능의 담지자로 전락시킨다. 더욱이 원래 수단이었던 돈이 나중에 절대적인 수단이 되고, 또 절대적인 가치로 고양되며 종래는 신격화된다. 신용카드가 일반화되고 사이버머니까지 통용되는 현 시점에서 보면, 지멜이 말한 ‘돈의 추상화’는 한 세기를 앞서 간 탁견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실용주의의 탄생

그러나 미국에서는 인간 사회의 본질적 문제에 천착하려는 유럽의 지적 분위기와는 달리, 다윈의 진화론적 시각을 반영한 실용주의가 태동했다.
“아이디어는 진위(眞僞)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유용성의 문제다.” 윌리엄 제임스(1842~1910)는 1907년 펴낸 소책자 <실용주의>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다윈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하버드대 교수 출신의 그는 도덕, 정치, 교육 등 모든 영역에서 실용주의적 가치의 우위를 설파했다. 이어 등장한 존 듀이(1859~1952)는 처음에 헤겔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제임스의 실용주의에 이끌려, 실용주의 또는 도구주의(Instrumentalism)의 입장을 확립했다. 그의 <논리학적 이론의 연구>(1903)에 의하면, 모든 사고는 혼탁하고 불확실한 상황을 명확한 상황으로 개조하려는 노력, 다시 말하면 ‘탐구’인 것이다. 특히 그는 교육과 관련해, “교육이란 경험의 끊임없는 개조이며 미숙한 경험을 지적인 기술과 습관을 갖춘 경험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키거나, 반대로 학생들의 자발성에만 의존하면 불충분하다. 학생들을 여러 가지 경험에 참여시킴으로써 창조력을 발휘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를 위해 학교는 현실사회의 모델로서뿐 아니라, 사회개조의 모체가 될 수 있는 이상사회로서 제시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용주의는 미국 사상사의 주류 사상이 됐지만, 유럽에서는 애써 무시됐다. 버틀랜드 러셀은 실용주의를 “장사꾼의 철학”이라고 폄하했다.

 

박스기사

 

대공황기의 아들러, ‘헬조선’이 그를 소환하다!


지난해 40주 연속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80만 부 이상 판매된 <미움받을 권리>(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지음, 전경아 옮김, 인플루엔셜 펴냄)는 아들러 심리학이라는, 조금은 생소한 개인 심리학 이론을 철학자의 말을 빌려 쉽고 간결하게 소개하고 있다. 아들러 심리학 관련 책들이 30종 이상 출간 됐으며 지금도 출간을 준비 중이다. 프로이트가 성(性)본능을 중시한 반면, 아들러는 인간의 행동과 발달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존재의 보편적인 열등감과 무력감, 그리고 보상 또는 극복하려는 권력에의 의지, 즉 ‘열등감에 대한 보상욕구’라고 생각했다. 아들러의 심리학이 1년에 책을 고작 1~2권 읽는 우리 사회에서 크게 주목받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과거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해졌으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황장애, 우울증, 불안장애 등에 시달리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그를 소환한 듯하다.

 

박스기사

 

 

<탈(脫)제국주의 인류학>
20세기 전까지만 해도 제국주의의 영향 탓에 서구와 비서구 문명을 진화론적 차이로 설명하는 구분 짓기가 유행이었다. 인류학에 있어 루이스 모건(1818~1881)은 1877년 저서 <시대에 뒤떨어진 사회>에서 ‘진화론’을 적용해 사회발전 단계를 구분지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관점은 힘을 잃어 갔다. 미국으로 이민한 독일 출신 인류학자 프란츠 보아스는 역사주의적인 입장을 중시하면서 문화를 통합적 전체로서 고찰했다. 그는 문화영역·주변영역·부족유형(部族類型) 등의 개념을 고안해 뒷날의 기능주의적 연구를 위한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특히 그는 제임스 프레이저가 주창한 진화주의적인 문화발전론을 경멸했다. 인류학계의 주요인물이 된 보아스는 인류학계의 한 세대를 구성한다. 로버트 로위에, 알프레드 크뢰베, 에드워드 사피르, 랠프 린튼등이 그들이다. 인류학은 보아스와 함께 새로운 전환점을 갖게 됐다. 문화의 연구가 인종의 연구에 대해 우위를 갖게 된 것이다.

<제국주의를 거쳐>
19세기 무렵, 서구인들은 과학기술을 앞세워 나머지 세계의 발견을 끝내고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서구 국가들은 세계를 각각 구분 지어 지배했는데, 경우에 따라선 전쟁을 통해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해갔다. 5억 인구를 지배하게 된 대영제국은 인도를 차지했고, 프랑스 제국은 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를 삼켰다. 한때 아시아의 맹주였던 중국은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미국이 호시탐탐 노리는 먹잇감이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19세기 산업혁명의 물꼬를 이끈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시간이 흐르면서 기업들의 집중화, 즉 트러스트, 카르텔, 독점 현상에 자리를 내주었다.

<대중시대의 도래>
산업혁명의 확장과 함께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됐다. 유럽과 미국의 대도시에서는 새로운 삶의 양식들이 전개됐다. 노동 분업과 상품시장의 등장, 관료사회와 개인주의의 출현은 사회관계에 이어 농촌의 삶까지 변화시켰다. 바야흐로 대중과 군중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페르디난드 퇴니이스같은 사회학자들은 이 새로운 삶의 양식을 공동체에서 사회로의 이행과정으로 이해했고, 에밀 뒤르카임같은 이들은 이를 도덕과 종교와 연계된 기술적 연대로부터 구체적인 사회그룹 속 개인들의 지위와 연결된 유기적 연대로 향하는 이행과정으로 파악했다. 또는 일부 학자들은 전통적 삶의 양식이 합리주의로 변화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라 벨 에포크>(La Belle Epoque)
이 무렵, 산업혁명에 따른 물질적 풍요와 함께 도회지 부르주아와 새로운 중산층이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문화를 누리게 됐다. 이름 하여, 이 시기는 ‘라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라고 불렸다. 카바레와 선술집, 영화관에 사람들이 몰렸고, 해수욕장에도 여가를 즐기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라 벨 에포크’는 건축과 실내장식 분야에도 새로운 양식의 취향을 가져왔다.

<새로운 물리학의 출현>
1905년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그의 첫 상대성 이론을 창안했으며, 같은 해 그는 빛이 작은 알갱이라고 이뤄졌다는 이른바 광자(光子)의 가정을 세웠다. 또한, 그는 1900년 막스 플랑크가 창안한 양자(量子) 이론을 발전시켜, 현대 물리학의 혁명을 이루었다.

<미술의 전통을 깬 큐비즘>
미술에서 마티스, 고갱, 고흐, 뒤피등으로 대표되는 포비즘이 기존 미술에 화려한 색깔을 입혔다면, 피카소가 1907년 ‘아비뇽의 아가씨들’로 첫선을 보인 큐비즘은 기존 미술의 전통적 기법을 깨뜨렸다. 큐비즘은 동작과 형태의 해체를 가져왔고, 이로써 예술은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 이른바 ‘추상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