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데기뿐인 사회주의 공화국

2016-02-29     프레데리크 로르동
좌절감이 서구 사회를 관통하고 있다. 전통 정당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몇 년 간 혹독한 긴축 정책이 실행됐음에도 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약속은 실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만성적인 실업이 지속되고 있고, 새로운 경제 폭풍우를 앞둔 상황이다(세르주 알리미 기사 7면 참조). 게다가 여기에 난민 사태, 국가보안법, 테러에 대한 공포까지 가중되고 있다. 좌파로 분류된 여당은 실리콘 밸리의 ‘기술 유토피아’를 역설하고(실리콘 밸리 기사 10면 참조), ‘기업과 개인의 해방’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권을 정면 공격하며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러나 진짜 덫에서 탈출하려면, 보다 큰 야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시대를 풍미하는 것은 이른바 ‘람페두사 정신’이다. 아무 것도 바뀌기를 원치 않는다면, 모든 것을 바꾸어야(적어도 바꾸는 척해야) 한다.(1) 적어도 진심으로 모든 것을 바꾸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물론 그들은 정말 진심어린 마음에서 모든 것을 바꾸려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분명 그것은 더욱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사실 ‘좌파 예비경선’을 주창한 주역들이 제5공화국의 죽은 언어를 나불거리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파격적인 정치적 혁신을 제안한다고 확신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지 않은가.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빠져 있는 세계 밖으로 사유의 범위를 확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열광적인 대통령 중심제화, 유령정당, 전략적 투표. 그런 것은 모두 일종의 정신의 감옥과도 같다. 그런데도 ‘좌파 예비경선’을 주창한 자들은 그것을 오히려 ‘대탈출’로 오인하고 있다. 대체 어디를 향한 대탈출이라는 걸까? 일반사회보장분담금(CSG)(2)과 소득세의 통합? 주택단열 지원산업? 아니면 ‘유럽의 노선 변경’을 부르짖는 대대적인 선언?
류마티즘과 내향성 발톱을 치료하는 데 특효로 알려진 자철석 보석 ‘북부의 돌’. 이 보석이 시중에 유통되기까지는 “TV에서 방영됐다”라는 인증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듯 “<리베라시옹>이 지지한다”라는 인증마크는 한물 간 상품의 무해성을 인증해준다.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전복적 시도라고 보기 어렵다. 그저 논설가들이나 놀라게 할 만한 가짜 전복(Subversion)에 해당한다. <리베라시옹>을 통해 ‘좌파 예비경선’을 주창한,  ‘조프랭-구필-콘벤디트’ 3인조가 현 시스템을 향한 찬가 말고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듯 꾸며대고 있을 뿐이다. 현 시스템은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는가. 그러니 그들은 어떻게든 현 시스템을 영속시키려고 할 것이다. 관 하나만 연결하면 죽은 목숨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이 팽배한 연명치료실에는, 아직 일할 만한 인력들이 충분히 있다.
궁한 이들은 시체라도 부여잡고 생명을 연장하려 안달한다. 그들이 그토록 살려내려는 것은 죽은 ‘사회민주주의’다. 현재 사회민주주의는 프랑스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도 마지막 부패 단계에 있다. 이처럼 죽은 시신을 붙들고 연명치료에 매달릴 정도로 맹목적이 되려면, 적어도 절망의 간호사들이 보기에도 장뤽 멜랑숑에서 에마뉘엘 마크롱에 이르는 부류가 ‘모든 좌파’로 문제 없이 분류돼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아직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것일까? 그들이 우파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말이다. 즉, 그들이나 그들의 지지자 중 ‘좌파 예비경선’에 합당한 인물은 없다는 사실은 다섯 살짜리도 안다.
정치판에서 살아있는 시체가 생존법칙으로 삼는 것은 기득 체제에 알맞은 무기력, 그리고 물질적 이익의 골화(Ossification)다. 현재 본질을 잃어버린 사회주의 우파당은 간신히 벽에 기대어 버티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버틸 수 있을까? 같은 이익으로 이합집산한 잡화점 좌파(3)는 최소한의 활력증상(Vital Sign)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그들은 자신의 육체가 썩어가고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다. 폐허가 된 벌판, 그리고 썩어가는 시체를 치우지 못하게 막는 현 제도를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은 제5공화국의 제도와, 그 제도 속에서 어떤 한 쪽으로도 기울지 않게 양다리를 걸친 채 배를 내놓고 둥둥 떠서 헤엄을 치고 있는 기존의 조직들을 전면에 내세운 평범한 게임을 통해서는 그 어떤 ‘실질적인’ 대안도 탄생시키기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는 죽어가는 질서를 분명히 짓밟고 넘어서야 한다. 모든 광장 시위와 점거 시위가 수없이 증명해 보였듯이, 시민의 정치적 주권 회복과 현 의회제도 사이에는 철저히 모순된 관계가 존재한다. 전자가 살려면 후자가 죽어야만 한다.(4) 
 
‘정치의 형식’, 
헌법을 바꿔야만 한다
 
사실 후자, 제도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판명됐다. 그런데 ‘좌파 예비경선’이 그토록 열렬히 매달리는 목표가 바로 그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해체’ 운동도 결국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음’으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 이 운동이 대국적 차원에서는 제도화 혹은 재-제도화된 정치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사상(심지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대의라는 제도를 포함해서)으로 환원되는 순간, 이 운동은 무(無)로 끝나버릴 것이다. 분명 정치적 무중력이라는 불안정한 상태, 다시 말해 모든 제도에서 자유로운 ‘수평적’ 정치에 대한 환상은 특별한 도취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해체’ 운동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다시 땅에 내려오지 못한다면, 결국엔 기득권의 질서가 땅으로 내려올 것이다. 그것도 오로지 그 질서의 방식에 따라서 말이다. ‘해체’라는 불안정한 상태를 계속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결국에는 의회제도로 다시 회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대체 이 모순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 결정적 질문에 대해 내릴 수 있는 유일한 논리적 답은 오로지 하나, 바로 정치의 ‘형식 자체’를 바꾸려는 목적으로 다시 땅에 내려오는 것이다.
정치의 형식을 우리는 흔히 ‘헌법’이라고 부른다. 정치적 논의와 의사결정 과정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결정하는 것이 바로 헌법이다. 제도적인 조직 없이 정치적 논의와 의사결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기존의 형식에만 모든 것을 맡기려 하지 않는다면, 시민의 정치적 주권 회복을 향한 첫걸음은, 바로 헌법을 다시 고쳐 쓰는 것이다. 왜냐하면 헌법만이 차후 시민의 정치적 주권 회복의 내용과 형태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결정 체계, 논의과정의 규칙, 대표자 선출 방식, 대표단의 규모, 임기, 직무교대와 파면, 남녀동수, 의회 내 사회계층 구성 등 누가 어떤 정치적 임무를 맡는지, 누가 어떤 일에 영향력을 지닐지 결정하는 모든 사안이 원칙적으로는 헌법의 소관에 속한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혹자들은 헌법의 실행에 대해 그것이 아무런 실질적 영향력이 없을 만큼 모호하고, 구체적인 국민의 관심사와는 동떨어져 있다고 반발하곤 한다. 사실 헌법이 현실과 괴리된 법률적 성격만 지니는 어떤 형식적인 레고 장난감에 불과하다면, 헌법의 오글거리는 목소리는 단 1분도 들어주기 힘들 것이다. 왜냐하면 결국 그것이 무엇으로 귀결되는지를 우리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결국 논설가들의 유희나 의회의 정치적 포획 강화로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러나 헌법이 어떤 실질적인 사회적 기획에 종속돼 있는지를 깨닫는 순간, 더 이상 헌법은 법률가의 오락거리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시민들의 구체적인 관심사로 돌변한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을 돌아보면 금세 그 사회적 기획이라는 것이 얼마나 유해한 것인지를 여실히 깨닫게 된다. 이제는 사회 모델처럼 자리잡아버린 불안정성, 어제는 ‘콘티넨탈’, 오늘은 ‘굿이어’에 이어 내일도 또 수많은 다른 기업들에게 가해질 치욕적이고도 부당한 대우, 무참한 노동법 파괴, 이 모든 현실이 추구하는 목표는 단 하나, 바로 노동자를 굴복시키고, 완전한 자본의 지배를 완수하는 것이다. 최근 개봉된 프랑수아 뤼팽의 영화 ‘고마워요, 사장님!’은 분노를 부추기는 이 모든 동기들을 한 데 모아 마지막에 가서 웃음폭탄을 터뜨린다. 결국 강자가 무릎을 꿇고, 약자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깨닫는 것으로 영화는 통쾌하게 끝난다.(5)
과연 영화 한 편이 ‘티핑포인트’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때로는 영화에서 비롯된 사상이 일반 담론이 호소하는 사상보다 100배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도 하지 않는가. 사실 현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어쩌면 한계점은 생각보다 가까울지도 모른다. 베르나르 아르노의 부와 클뤼 부부의 가난 사이의 직접적인 인과관계,(6)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본을 위해 복무하는 사회당 수뇌부의 파렴치한 부정부패,(7) 한 마리 순한 양처럼 현 시스템을 이루는 톱니바퀴가 돼버린 무용한 언론. 이처럼 영화 <고마워요 사장님!>은 우리에게 부패가 한참 진행 중인 현 사회의 모습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나아가 시민의 정치적 주권 회복 운동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자폐적인 입헌주의에 대한 해독제가 필요하다면, 바로 여기에 확실한 해독제가 있는 셈이다!
그러나 혹자는 헌법이란 정치적 논의의 규칙만을 규정할 뿐이고, 논의의 결말까지 관여하지는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다. 가장 전형적인 유럽의 결함은 경제정책을 일일이 ‘헌법’으로 규정한 나머지, 더 이상 그에 대해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순수 형식주의에 굴복하며, 헌법을 실질적인 의사결정과는 동떨어진, 일종의 무중력 상태에 있는 법률 정도로만 간주하는 것도 큰 실수다. 헌법은 그것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에 대해 어떤 고정된 사상을 저변에 감추고 있기 마련이다. 제5공화국의 헌법도 나름의 고유한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 심지어 그것은 지난 네 공화국의 사상과 완전히 동일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우리의 헌법이 지닌 사상이 무엇인지 소리 높여 말하기를 주저하는 것일까?
‘다른 생각’은 무슨 뜻일까? 그들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일까, 어제의 구태의연한 생각과 미래의 실현 가능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일까? ‘공화국’은 숨기기 게임의 명수다. 무언가를 보여주는 척하면서 다른 것들을 이내 감춰버린다. 자유라고? 그것은 자본의 자유에 불과하다. 평등이라고? 기표소에서만 통하는 평등일 뿐이다. 그렇다면 박애는? 그것 역시 빈껍데기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공화국’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바로 ‘소유’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는 역대 공화국들(사실 모두 같은 공화국의 변용일 뿐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그것은 ‘부르주아 공화국’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이 부적처럼 소중히 여기는 것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들이 누리는 권리다. ‘공화국’은 사회에 대한 자본의 지배를 수호하는, 헌법으로 만들어진 갑옷이다.
사실 노예상태를 강제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월급을 주는 ‘일자리’만큼 생활, 즉 인생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생존의 출발점인 일자리,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들이 독점권을 가지고, 자신들이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하는 자들에게만 공급을 허용하는 일자리. 세상의 모든 ‘클뤼’들이 등골을 빼 먹힐 대로 빼 먹힌 채 헌신짝처럼 내버려지는 것 역시 이런 자본의 지배가 낳은 결과다. 나아가 동시에 그런 행위를 합법화해준 헌법의 축도(縮圖)가 가져온 결과다. 이것이 이 불변의 공화국(노동과 자본의 관계에서는, 각각의 공화국에 순번을 매겨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에 깊이 뿌리박힌, 불변의 진실이라는 사실은 역사가 가장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소유자들의 권리, 다시 말해 자본의 지배가 진지하게 비판을 받고, 법의 심판대에 서거나, 철창신세를 지거나, 피를 흘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도는 항상 스스로 한계점에 이르러서야 진실을 드러내 왔다. 스스로 한계점에 도달할 때가 돼서야 자신에게 진정으로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폭력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부르주아 공화국에서 그 한계점이란 바로 ‘소유’다.
 
부르주아 공화국과 사회주의 공화국
 
그러나 부르주아 공화국이 모든 공화국의 가능성을 전부 소진해버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최초의 공화국에 대해 여실하게 보여주었고,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제2의 공화국의 방향에 대해서도 힌트를 남겨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사실 현 공화국은 1789년 혁명(좀 더 정확히는 1793년)의 기운을 이어받은 반쪽짜리 부르주아 공화국에 불과하다. 1848년 혁명도 공화국의 온갖 이상과 결함, 더 나아가 과오만 보여주었을 뿐이다. 사람 간의 평등을 외치면서, 어떻게 자본이 인간을 최후의 예속상태에 매어두는 것을 찬양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대체 사회주의 공화국은 무엇일까? 그것은 1789년 혁명에 의해 보편화됐지만, 그동안은 오로지 정치적 영역에만 머물렀던 민주주의 사상을 진지하게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사회주의 공화국, 그것은 총체적 민주주의,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민주주의를 의미한다. 결코 5년에 한 번씩 투표를 하라고 불러내는 것을, 그리고 투표가 끝난 뒤에는 다시 잠이나 자라고 종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민주적 평등은 독재에 대한 혐오다. 한 사람이 타인의 독단적 요구에 굴복하게 만드는 독재에 대한 혐오 말이다. 이런 명령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 일을 해라. 아니 저 일을 해라. 우리가 말한 것을 해라. 우리가 말한 대로 해라. 혹은 이런 명령도 있을 수 있다. 우리는 더 이상 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곤란하다고? 그것은 너의 사정일 뿐이다.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너는 우리에게 복종해야만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너는 공포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노동자 가운데 공포의 위력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공포는 소유의 지배를 작동시키는 궁극적인 원동력이다. 누군가 자신의 삶의 조건을 일자리를 공급하는 최고 권력자에게 맡기는 순간, 누구나 공포를 경험하게 된다.
규범이 없으면 집단의 삶(여기에는 생산도 포함된다)도 존재할 수 없다. 루소가 보여주었듯이, 자율성은 규범이 부재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정한 규범을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란 누구인가? 그것은 자율적으로 그 규범을 지키기로 한(당연하다. 그것은 그들을 위한 규범이니까) 모든 이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가령 기업에서는 일부 소수가 일방적으로 다른 모든 이들에게 ‘자신들이' 정한 규범을 강요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논의의 과정도 없이 오로지 복종이나 공포에 의거해서만 작동하는 시스템을 우리는 무엇이라 부르는가? 그것이 바로 독재가 아닌가? ‘민주주의자’라면 누구나 정치의 영역에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본 순간 그 즉시 그것은 바로 독재가 맞다고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직업의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그런 일들이 큰 문제처럼 보이지 않는다. 아니, 사실 그것을제대로 보지도 못한다. 현 공화국의 모든 친구들(‘민주주의’를 입에 달고 다녀서 공화국의 친구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자들)은, 사회적 삶에서 모든 민주주의가 그토록 철저히 유린당하는 현실을, 어떻게 그토록 태연하게 용인하는 것일까? 어떻게 5년짜리 판토마임 외에는, 인간의 모든 구체적인 삶이, 한쪽은 결정을 내리고 한쪽은 복종하는, 일종의 구체제 형식 속에 머물러 있는 현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어떻게 ‘참여 경영’이나 ‘직무의 자율성’과 같은 허울좋은 조건들을 제외하고, 현재와 같은 참혹한 노동조건 속에서 각 개인이 그들의 목적인 자본의 증식을 실현하는 데만 얽매여 사는 데도, 그처럼 자신의 삶에 대해 모든 영향력을 박탈당한 채 소유주가 자신들에게 부과하는 운명만 수동적으로 기다리며 사는 것일까? 어떻게 민주주의 사회에서 버젓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있어 노동자의 삶은 ‘원래 그런 것’이 돼버린 것이 아닐까? ‘갑자기 일어날 어떤 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삶?
 
21세기판 ‘피가로의 결혼’, 
<고마워요 사장님>
 
베르나르 아르노에게 해고당한 극중 인물 세르주 클뤼는 절망이 극에 달하자 결국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한다. 영화 <고마워요 사장님!>은 우리에게 아르노가 무릎을 꿇고, 클뤼가 마침내 집과 일자리를 되찾는 행복한 결말을 선사한다. 그런데 그런 결말은 영화의 차원을 한참 초월한다. 바로 그것이 이 영화가 지닌 힘이다. 뤼팽의 영화는 우리에게 개별적인 사례를 보여주면서, 우리가 이 사례를 보편화하는 어떤 정치적 기획의 가능성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클뤼를 구하는 데에만 만족할 수 없다. 모든 ECCE의 해고자들을 구하는 것으로 만사가 끝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적 기획’이란 더 이상 세상에 그 어떤 클뤼도 더 이상 생겨나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버려진 노동자, 굴종하는 노동자, 이 소유의 제국이 만들어낸 피조물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소유의 제국도 역시 사라지게 해야 한다. 그것도 피조물 보다 한참 더 먼저.
완전한 공화국에서는 결코 생산수단의 금전적 소유(사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로지 이런 종류의 소유다)가 생명을 지배하는 권력(당연히 독재적인 권력)이 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클루의 사례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사회주의 공화국의 정치적 의미도 바로 그런 것이다. 소유의 지배를 해체하고, 소유의 지배가 삶에 미치는 독단적 권력을 종식시키며, 민주주의를 확대하는 것, 다시 말해 생산 집단의 규범이 자율성을 띠게 만들고, 그들이 정치적 주권을 되찾게 만드는 것.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주의 공화국의 헌법이 ‘영리적 목적의 소유를 철폐’하고 순수한 사용 목적의 소유만을 인정한다고 선포해버리는 것을 말한다.(8) 생산수단은 마땅히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소유’가 돼야 한다. 설령 생산 공동체가 재화와 서비스를 공급하는 일에만 매달려 있다 해도, 그들은 분명 일종의 공동체로서 ‘정치’ 공동체의 성격을 함께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민주적인 방식으로 스스로를 통치할 권리를 지닌다.
잠시 정리해보자. 한쪽에는 클뤼 부부라는 보편적인 노동자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마크롱을 포함한 모든 좌파 간 예비경선’이라는 웃을 수 없는 희극이 있다. 이제 이 난관을 벗어날 유일한 길은 바로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해체-재정립 운동뿐이다. 다시 말해 민중이 자신의 소유였던 것, 한 마디로 헌법을 되찾아, 거기에서 소유라는 독소를 빼내고, 대신 그 자리에 이번에는 진정으로, 1793년 서약에 의거한 민주주의, 온전한 민주주의,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민주주의를 삽입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 선서까지 마친 민주주의자들 중 대체 누가 공개적으로 이 새로운 조항에 반대하러 오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분노가 담긴 통은 이미 충분하다
 
현 사건을 보며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2세기 전부터 ‘공화국’은 폭정, 다시 말해 소유의 폭정을 일컫는 가명이었다는 것이다. 아마 클뤼가 자기 집에 불지르는 장면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이런 소유의 폭정에 반기를 들게 될 것이다. 사실 그것이 바로 뤼팽의 영화가 지닌 강력한 힘이기도 하다. 사건을 직접 눈으로 보여주는 것. 만일 우리도 프랑스 텔레콤의 최고경영자 디디에 롱바르에게, 그리고 오늘날 ‘노동법’에 집착하는 모든 이들에게 창문으로 뛰어내린 시신을, 아니 적어도 그 유족의 얼굴을 보여주었더라면, 그는 감히 사내 연쇄자살 사태에 대해 ‘유행’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 없었을지 모른다.
사실 이런 종류의 일에서 어떤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역사다. 1848년과 파리 코뮌의 유혈 혁명 속에서 일궈낸 민주주의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잘 알다시피, 당시 잔혹한 학살이 자행된 것은 모두 ‘공화국’이라는 명분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공화국’이 소유의 독재가 지닌 권력의 근거가 돼주었던 셈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의 말처럼 ‘상속자는 고인의 재산을 즉각 물려받기 마련’이고, 우리의 현재에는 이 ‘공화주의적인’ 과거가 끊임없이 주입되고 있다. 사실 오늘날 ‘굿이어’와 ‘콘티넨탈’의 노동자들, 즉 더 이상 굴종하는 삶을 거부하는 모든 이들을 감옥에 처넣고,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도 ‘공화주의 질서’가 아니던가? 수많은 발스와 사르코지들이 스스로 이 ‘공화국’ 에 소속된 자라고 여기는 것보다 세상에 더 놀라운, 아니 더 병적인 일도 드물다. 오늘날 공화국은 오로지 정교분리, 학교, 국가정체성, 안보와 같은 의제에만 병적으로 집착하고 있다. 이는 더 이상 놀랍지도 않다. 사실 ‘공화국’은 오늘날 ‘사회당’으로 불리는 일당들, 티에르에서 클레망소, 쥘 모크, 발스 등에 이르는, 한 마디로 ‘공화주의자들’을 우리에게 남긴 체제가 아니던가?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또 다른 사실 하나는 재제정에 이르지 못하는 해체는 헛발질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해체가 없는 재제정은 허망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 차분하게 생각해보자. 원칙적으로 기존의 제도 속에서는, 혹은 제도가 자동으로 해체되기만 바라서는 절대 제도를 해체할 수 없다. 해체는 다른 영역에서 다른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 영역은 어디일까? 논리적으로 우리가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공공의 장이다. 제도 정립 운동을 위한 가장 좋은 장소는 거리, 광장이라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할 일은 사람들을 한 데 결집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코 법령에 의해 결집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한 데 모이거나 혹은 모이지 않는 것은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변화를 향한 운동이 분노를 단지 ‘연소를 돕는 조연성 물질(Comburant)’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진정으로 ‘직접 연료가 되는 가연성 물질(Carburant)’은 다름 아닌 희망이다. 그러니 우리는 현재 화학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지 않은가? 두 가지 물질을 다 쥐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에게는 분노가 담긴 통은 충분하다. 이 사실에는 아마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 통들을 한 데 모으면, 어마어마한 잠재적 폭발력이 나타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디에서나 부당한 현실과 만난다. 굿이어, 콘티넨탈, 에어프랑스에서, 의자를 훔치는 자들,(9) 룩스리크스(10)의 폭로자들, 현 총리가 과거 ‘화이트’, ‘블랑코’ 등을 운운하며 (진지하게) 백인을 비하하는 표현법을 썼던 것을 (희화적으로) 차용했다 기소당한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그들 모두는 ‘공화주의의 법정’ 앞에 부당하게 끌려나와 있다.
분노는 ‘조연성 물질’이며, ‘가연성 물질’은 바로 희망이다. 우리가 스스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때 비로소 희망이 움트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을 잊어버린 지 오래다. 처음에는 희망의 의미를 잊어버렸고, 다음에는 희망이라는 단어 자체를 잊어버렸다. 그러나 희망은 역사의 보이지 않는 굴곡 속에서 재발견될 날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사회주의 공화국은 온전한 민주주의를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유일하면서도 진정한 좌파의 장이다. 좌파에게서 멀어진 좌파는 이제 좌파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어느 ‘공화주의자’는 가까운 미래에 닥칠 좌파의 죽음을 예고하기도 한다.(11) 그러나 ‘좌파 예비경선’에게 대고 한 번 물어보자. 좌파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아마 오랫동안 웃음을 선사할 대답이 돌아오리라. 사실 좌파가 무엇인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사회주의 공화국의 사상, 즉 민주주의 뿐이다. 우리는 아직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모든 곳에, 민주주의를 정립해야 한다. 소유의 제국에 민주주의를 강제해야 한다.
‘좌파 간 예비경선’을 주창한 많은 이들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해답을 마침내 찾았다고 생각한다. 우파/좌파라는 이분법을 ‘그들/우리’라는 이분법으로 대체하는 것이 해답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완벽한 실수다. 포데모스를 필두로, ‘그들’, ‘특권계급’과 ‘우리’, ‘민중’을 외치는 것이 해법이라 여긴다면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들과 더불어 좌파의 사상도 함께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우리’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는다면 충분히 상황은 바뀔 수 있다. ‘그들’이란 기득권 질서 속의 권력 기반을, ‘우리’는 그 속에서 고통 받는 다수를 의미한다고 말한다면 말이다.
다음의 카드들을 한 데 모을 수 있다면, 우리는 게임의 ‘우승패’를 쥘 수 있다. 먼저 소유에 방점을 둔 ‘그들/우리’라는 ‘이분법’이다. 이 이분법은 버려질 위기에 처한 좌파의 사상을 되살릴 것이다. 다음은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귀에 익숙한 ‘공화국’이란 단어에 ‘사회주의’를 덧붙이는 순간 공화국은 다시금 유장한 정치사 속에 편입될 것이다. 마지막은, 이론의 여지없이 매우 중요한 기표가 되는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완전한 확대를 거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이 저절로 주어질 것이라고는 착각하면 절대 안 된다. 지금까지 소유의 지배에 반대해온 모든 것처럼, 더 나아가 소유의 지배를 진정으로 종식시키고자 한 모든 것처럼, 사회주의 공화국이나 온전한 민주주의도 오로지 투쟁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  
 
 
 
글·프레데리크 로르동 Frédéric Lordon
프랑스 경제학자이자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CNRS)와 유럽사회학연구소(CSE)에서 연구팀장을 맡고 있다. 금융위기, 사회학에 관한 연구를 주로 하고 있다. 특히 저서 <언제까지? 금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Jusqu‘à quand? Pour en finir avec les crises financières)는 많은 관심을 받았다. 최근 저서로는 2009년에 출간된 <넘쳐나는 위기: 파산한 세계의 재건>(La crise de trop. Reconstruction d’un monde failli)이 있다.
 
번역·허보미 jinougy@naver.com
서울대 불문학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소설 <표범>(1958년)에서 혁명에 직면한 한 귀족 출신의 인물이 자기 계급의 특권을 지키기 위한 전략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 것도 바꾸지 않게 하려면 모든 것을 바꾸면 된다.”
(2) 사회보장재원 확보를 위해 근로자의 전 소득에서 일정 비율을 공제하는 세금.(역주)
(3) 지난 지방 선거에서 클로드 바르톨론은 피에르 로랑, 에마뉘엘 코스와 다정히 서서 근사한 사진을 남겼다. 이렇게 그들은 선거철만 되면 같은 문간 앞에서 사진을 찍어대곤 한다. 비록 삼류 잡탕요리에 불과할지라도, 그들 나름의 권리를 지키려는 시도일 것이다.
(4) Julien Coupat, Eric Hazan, ‘해체 과정을 향해, 여행으로의 초대’, <리베라시옹>, 파리, 22016년 1월 24일.
(5) ‘기득권자들이여 두려움에 떨 준비를 하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6년 2월호 참조.
(6) 세르주 클뤼는 베르나르 아르노 LVMH 그룹의 자회사 ECCE에서 해고된 노동자로, 부인과 함께 영화 <고마워요, 사장님!>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7) LVMH의 비서실장 앙트완 자메는 전 사회당 인사다.
(8) Bernard Friot, <노동을 해방하라>, 라디스뷰트, 파리, 2014년.
(9) 탈세를 방조하는 은행들에서 의자를 훔치는 운동가들을 의미.(역주)
(10) 2014년 11월 국제기사조사단에 의해 드러난 금융스캔들. 맥도날드를 비롯한 300여 개 다국적기업이 비밀거래를 통해 유럽에서 발생한 수익을 세율이 낮은 룩셈부르크로 옮겨 수십억 달러의 세금을 탈루한 사건. 룩셈부르크 리크스로도 불린다.(역주)
(11) Manuel Valls, ‘좌파는 죽을 수 있다’, <롭스>, 2014년 6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