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영웅, 오늘은 야만인?
지하디스트가 우리 친구였던 때
2016-03-02 드니 수숑
미국이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처참하게 패배한 1975년 4~5월부터 소련의 위성국인 유럽국가들(특히 1981년 12월 긴급사태가 선포된 폴란드)이 연쇄적으로 불화를 일으키던 시기에 이르기까지, 미국과 서유럽은 모스크바가 세계적인 대공세를 개시했다고 생각했다. 아니, 당시의 국제정세가 그렇게 믿게끔 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신생독립국인 앙골라와 모잠비크가 소련에 협력했고, 중앙아메리카에서는 마르크스를 신봉하는 게릴라들이 니카라과에서 친미독재정부를 붕괴시켰다. 서유럽에서는 친소공산당이 수개월 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인 포르투갈의 정책방향을 좌지우지했다.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모스크바의 강세를 확인시켰다. 이로 인해 양 진영 간에 냉전이 다시 시작됐다.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성스러운 이슬람 전사’) 전투는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소련의 야심에 제동을 거는 신전이자 서사시처럼 추앙됐다. ‘영웅’들의 대다수가 전통을 고수하고 체제를 지지하는 이슬람교도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종교는 반드시 퇴보의 요인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같은 시기의 이란에서처럼 종교가 서구의 전략적 이해관계와 대립하지 않는다면 문제되지 않았다.
하지만 크라쿠프의 옛 주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과잉보호하던 가톨릭 국가 폴란드에서만큼은 달랐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지정학적으로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에, 미국은 베트남에 관심을 쏟는 동안, 서구 미디어는 수년 간 무자헤딘들의 저항을 ‘비합리적’ 신앙에 따른 농민봉기처럼 소개함으로써 그들을 도발했다. 특히 서구 미디어는 순진한, 그래서 때로는 매혹적인 민중전통의 본질주의적 프리즘을 통해 아프간 여성들을 비췄다.
30년 후, <르 피가로 마가진>과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같은 프랑스 언론매체에 가득했던 이런 일반적인 담론을 재검토하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 행위는 과거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명명하며 공격한 것이 이후 어떤 식으로 혐오와 공포의 원천이 됐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1980~1988년, 사람들은 소련군에 대항한 ‘성스러운 이슬람 전사들’의 공적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리고 10년 후, 알제리의 이슬람 무장단체(IAG)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최근에는 중동의 알카에다와 IS는 그들의 이념적 동지들과 함께 ‘광신도’, ‘신에 미친 자’, ‘야만인’이 돼버렸다.
1980년대의 무자헤딘은 여러 측면에서 이슬람 무장단체(IAG)나 이라크의 IS 전사들과 구별된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은 종종 그들의 후계자들에게 실상 인큐베이터 역할을 해왔다. IS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요르단의 아부 무삽 알 자르카이는 소련군이 물러난 시기, 그곳에 상륙해 1993년까지 머물렀다. 알카에다의 창시자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오사마 빈라덴도 무자헤딘의 투쟁을 지원하는데 파키스탄 페샤와르에 있는 와하브교 왕국의 은밀한 도움을 받아 이동했다.
최근 부르키나파소 와가두구 지역의 르스플렌디드 호텔 공격사건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한 알카에다 북아프리카지부(AQMI)의 수장 모크타르 벨모크타르는 알제리 출신으로, 역시 1980년대 말 소련의 아프간동맹군과 싸웠던 인물이다. 이어 그는 알카에다에 합류하기 전, 내전 기간 중 알제리로 돌아와 알제리 이슬람무장단체(IAG. 독자노선이 있는 알제리인들은 ‘아프간인들’이라 불렸다)와 함께 싸웠다. 이들과 다른 조직들은 서구의 전략적 구상에 도움이 될 때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그들은 서구에 대한 태도를 바꿨고, 그에 따라 유럽과 미국 언론에 비춰지는 그들에 대한 이미지도 완전히 바뀌었다. 종교적 극단주의와 잔혹성이 부각된 것이다.
I. 이슬람 근본주의, 서양의 전략적 동지
1978년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들어선 공산정권이 붕괴되고, 이 곳에 소련이 군사개입한 지 몇 주 후인 1980년 2월 3일,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지미 카터의 안보특별보좌관 즈비뉴 브레진스키는 파키스탄으로 날아갔다.(1) 그는 국경선 밖으로 피난한 무자헤딘에게 약속했다. “저 땅은 당신들의 것입니다. 여러분의 투쟁은 승리할 것이며, 언젠가 여러분은 저 땅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 때면 여러분의 집과 사원을 되찾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투쟁은 정당합니다. 신은 여러분의 편입니다.”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 관련 프랑스 언론의 보도는 미국의 지정학적 목표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내정간섭의 의무는 승리의 기회
(베르나르 앙리 레비, 프랑스 TV인 <TF1>, 1981년 12월 29일)
“전 세계의 모든 저항군과 마찬가지로, 아프간인들도 무기가 있어야 이길 수 있다. 총과 기관총 사수가 있어야 탱크를 무찌를 수 있고, Sam 7이 있어야 헬리콥터를 이길 수 있다. 그들에게 소련군으로부터 강탈한 것 외에도 다른 무기가 있어야, 다시 말해 서구가 그들을 돕기로 동의해야 소련군을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서구는 그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 나는 오늘날 우리가 스페인 전쟁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 스페인의 경우 개입의 의무, 내정간섭의 의무가 있었다. (…) 오늘날에도 우리가 아프간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동의할 때 아프간인들에게 승리의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베르나르 앙리 레비는 알카에다 세력이 2001년 9월 11일 미 무역센터를 공격한 후, 미국이 일으킨 2차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마찬가지로 열렬히 지지했다.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시대처럼
(마렉 알테르, ‘라디오-카불 리브르’, <르몽드>, 1981년 6월 30일)
“프랑스가 점령당하던 시기, 프랑스인들 간에 대화가 절실했듯, 아프간인들 간에 대화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인권위원회는 아프간의 저항군을 도와 그 지역에 라디오 방송국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라디오 카불 리브르’이다.
1979년 12월 27일, 세계 제1의 열강이 힘없는 이웃나라를 침공했다. (…) 상자에서 낡은 총들이 나왔고, 상자 밑에서는 권총과 짚으로 만든 장화가 나왔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상황에서 저항군은 봉기했다.”
이 부분에서 마렉 알테르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찬가인 <빨치산의 노래>의 유명한 구절을 인용했다. “짚더미에서 총을, 산탄을, 유탄을 꺼내라.”
전체주의에 희생된 모든 이들의 전투
(장 다니엘, <르 누벨 옵세르바퇴르>, 1980년 6월 16일)
“아프간인들의 전투는 공산주의와 파시스트 전체주의에 희생된 모든 이들의 전투다.” “베를린에서처럼, 부다페스트에서처럼 소련적군은 또 총을 쏘았다.”
(장 프랑수아 르 무니에, <르푸엥>, 1980년 3월 3일)
“Allah o Akbar(신은 가장 위대하다)”, “러시아인들은 나라 밖으로.” 이슬람교도에 비공산주의자인 카불인들은 잊지 못했다. 2월 22일 금요일 그들은 이슬람의 초록 깃발을 앞세우고,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며 소련군대의 주둔을 반대하는 외침을 들었다. 이 날 아침, 과거 동베를린과 부다페스트에서 그랬듯 소련군은 총을 발사했다. (…) “마르크스와 알라 간의 대화는 불가능해 보인다.”
소련 점령군에게서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사회를
(파트릭 푸아브르 다르보르, <주르날 당텐느>, 1980년 7월 2일과 8일)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어려운, 놀랄 만한 자긍심에 찬 시선이, 비록 아프간인들의 도구가 미약할지라도, 그들이 소련 점령군에게서 벗어나려는 의지 하나는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파트리스 드 프렝케트, <르 피가로 마가진>, 1980년 9월 13일)
“카불에서 소련의 군화에 밟혀 죽는 것은 고귀하고 자유로운 인간사회다.”
다국적 지원병처럼, “엑사곤의 아프간인들”
다니엘 트라마르는 1984년 12월 19일자 <르몽드>에서 “아프간 게릴라들과 함께 활동하는” 몇몇 프랑스인들에 대해 언급했다. 당시 전쟁경험을 통해 “급진적이 된” 그들이 귀국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전혀 없었다. “그렇다, 프랑스-아프간의 우정. 친구를 돕는 친구. (…) 이자벨과 프랑수아는 페르시아어를 배웠다. 올 여름, 국경을 넘어 그는 6일 간, 밤낮으로, 때로는 진창길을 꾸준히 걸어서 앞으로 나아갔다.”
클로드 코르스는 1987년 12월 19일자 <르 피가로 마가진>에서 아프간인들을 돕던 프랑스인 의사, 농학자, 기술자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여기서도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언급하고 있다. “수염, 터번, 사나운 눈, 전형적인 이 아프간인들은 곧 프랑스인이다. 그 중 브르타뉴 출신 선원 한 명은 폴리네시아 바람 전문가다. 그는 과거 취미로 바람이 많이 부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산악에서 생활하며 농학자를 자처했다. (…) 소중한 식량을 주는 이 밤나무는 생명의 나무다. 이 나무는 과거 점령군에 맞섰던 카슈탄니챠 지방의 코르시카 목동들처럼, 공산주의 침략자에 맞서 단결한 수많은 이탈리아 민족통일주의자의 희망을 상징한다.
II. 신비스러운 아프간과 무자헤딘
공산주의와의 전투는, 프랑스에서 보편적으로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아프간인들의 애국적이고 전통주의적인 동기가 더 많은 지지를 받을 수 있도록, 주요 미디어들은 그 동기들을 모험의 욕구, 잃어버린 낙원과 연결시켰다. 그런 매력적인 무대에서 아프간 전투가 일어났었기에 그 전략의 실행은 쉬웠다. 시선을 강탈하는 아프간의 맑은 호수와 그림 같은 풍경들은 1960년대에 성인이 된 서구 한 세대 전체를 사로잡았다. 여행자들이 꿈꾸던 나라, 또는 카트만두에 가기 위해 거쳐 갔던 나라. 아프간은 물질적이고 상업적인 현대문명과 정반대에 있었다. 즉 순수한 자연, 비물질적 가치, “잔인하고 아름다운 산”으로의 회귀였다.
“사람들은 전쟁의 아름다움을 잊고 있다.”
(다니엘 트라마르, <르몽드>, 1984년 12월 19일)
“이것은 마치 사랑 이야기처럼 시작된다. 그들은 거의 모두 아프간으로 갔다. 첫 번째 여행부터 아프간의 매력은 상당했다. 그들은 먼 곳에 있는 철로도 공장도 없는, 그 탁월한 장소”를 묘사했다. 공간과 자유. “아프간인들은 당신을 자유롭게 내버려둔다.” 이자벨은 이렇게 말했다. “때때로 사람들은 전쟁이 그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잊는다.”
“가장 풍요롭고 화려하고 눈부신”
(로베르 르콩트르, <르피가로 마가진>, 1980년 1월 12일)
“가장 풍요로운 계곡, 가장 화려한 의상들, 가장 눈부신 시장들 위로 5천 미터 높이에 불쑥 솟아오른 힌두쿠시 산맥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이어지면서 황금빛 모래사막의 북쪽과 남쪽을 가로막는다.”
“검은 수염, 매부리코, 날카로운 시선”
(제롬 마르샹과 장 놀리, <르푸엥>, 1980년 10월 21일)
“그들의 검은 수염과 매부리코, 날카로운 시선은 맹금류를 연상하게 한다. 그들은 타고난 전사로 공포나 추위, 피로에서 자유롭다. 그들은 고독과 배고픔, 죽음에도 담담한 특별한 존재들이다. 낡은 소총, 1918년 모델 엔필드가 무기인 그들은 8백 미터 거리에서 과녁을 맞힌다. 역사는 타지에서 온, 심지어 국내에서 온 어떤 군대도 그들을 진압할 수 없음을 입증했다. (…) 이러한 승리의 축적, 적들의 죽음, 그들의 자존심, 그들의 자부심으로 인해 오늘날 1,700만 명의 아프간인들은, 키플링이 ‘왕이 되기를 원했던 인간’을 살게 한 곳에서 세계의 지붕 아래 은신한 채, 곧 자신들의 수호자가 승리를 거둘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눈을 맞으며 천천히 길을 가던 터번을 두른 기사”
(니콜 장드, <르몽드>, 1980년 12월 9일)
“어느 찻집에서 총을 옆에 내려두고 차를 마시던 파슈툰 족 짐승몰이꾼들은 어떻게 됐을까? 힌두쿠시 산맥의 수원(水源) 근처에 있던 목동은? 내리는 눈을 맞으며 천천히 길을 가던 터번을 두른 그 기사는? (…) 바람이 물결 모양을 조각한 거대한 모래언덕들, 어느 노인이 맡는 장미꽃 향기에 아찔해지고, 푸른 낙원, 장식용 징이 박힌 화려한 문들이 호기심을 유발하고, 차도르를 쓴 여인의 흰 천에 감싸인 다리가 놀라움을 선사하는 헤라트의 거리들. 그녀의 시선이 자수의 네모 문양 사이로 새어나온다.”
“별의 냉기와 불타는 모래 바람이 만드는 완강함”
(카트린 샤타르, <르몽드>, 1985년 5월 20일)
“혹독한 삶에 익숙해진 아프간인들에게는 준엄한 풍경, 별에서 쏟아지는 냉기, 불타는 모래 바람이 만들어내는 완강함이 있다. (…) 우리의 작은 공동체에서는 놀라운 조화가 유지된다. 무자헤딘들은 며칠이고 신발창이 맞닿을 만큼 붙어있지만, 그들 간의 마찰을 본 일이 거의 없다. (…) 저항군 조합이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급속도로 바꿨다. (…) 기분이 울적하다가도 공동체의 좋은 기운과 유머, 열기로 인해 기분전환이 된다.”
III. 신앙과 전통에 충실한 전사들
신앙심이 줄어가고 문화적 자유주의로 충만한 프랑스인들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의 지지를 받는 전통주의자 아프간인들 간에는 당연히 유사성이 없다. 때문에 무자헤딘을 신앙이 충만한, 그리고 전통과 마을의 연대감을 고수하는 ‘소박한 사람들’로 소개할 필요가 있었다. 종종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하는, 부족과 소련에 반대하는 종족 간의 대립은, 옛날 골지방의 마을사람들이 로마군단에 맞서 싸운 전투처럼 소개됐다.
“극단적으로 정치화되지도, 과열되지도 않은”
(피에르 블랑세, <르누벨 옵세르바퇴르>, 1980년 1월 7일)
“장르를 혼동하지 말자. 테헤란에서 체제유지주의는, 소수 민족이 과대망상과 혼란과 소란스러운 서구화로 20년을 보낸 후 시도한, 도시로부터의 무모한 해방에 상응한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전통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이란에서처럼 극단적인 정치화도 과열도 없다. 열정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 신의 산사람들, 신의 항독지하운동가들은 신을 믿는다.”
(장 크리스토프 빅토르, <레누벨 다프가니스탄>, 1983년 12월)
“나는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이 본의 아니게 아프간의 대의에 누를 끼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프간의 저항에는 이란의 혁명과 같은 급진성도 과격성도 없다.”
“성스러운 전쟁의 전사들”
(카트린 샤타르, <르몽드>, 1985년 5월 20일)
“아프간인들은 수줍음과 알라의 뜻에 대한 절대적 믿음, 그에 함축된 숙명론을 지닌다. 그들은 성스러운 전쟁의 전사로서 사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삶의 방식도, 더 고귀한 활동도 없다고 할 것이다. 그 삶은 각자를 예언자의 삶에 근접시킨다. 이 저항조합은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급격히 바꾸어놓았다. 우리 중 카리(거대한 바람의 신)가 있다. 그의 표정에는 선량함이 깃들어 있어 모두가 그를 숭배한다. 사람들은 그가 하루 종일 형이상학적인 문제들을 성찰하다가 저녁이면 낮은 목소리로 코란을 읽는다고 말할 것이다. (…) 뮐러는 여느 때보다 열정적인 기도를 올렸다. 손을 벌리고 하늘을 향한 채 사람들은 신앙고백을 낭송했다. 그 주문을 외는 어조에서 슬픔과 믿음이 느껴졌다.”
(장 카르도넬 신부, <르몽드>, 1980년 6월 9일)
“그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가난한 자들의 민족이다.”
“그들은 필요할 때 엄청난 대담성을 보여준다”
(파트리스 프랑체스키, <르푸엥>, 1982년 12월 27일)
“과거와 마찬가지로 무자헤딘은 자신의 땅에 묶여있는 농부이다. 그는 자신의 땅을 완강하게 지킬 줄 알지만, 땅만 위협받지 않으면 대개 모든 공격성을 잃을 것이다. (…) 불복종, 수다스러움, 비밀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것 등 아프간인의 기질적 결점들로 인해 이들의 주된 장점을 잊으면 안 된다. 그들의 용기와 고통을 견뎌내는 능력은 실재하며, 그들은 필요할 경우 엄청난 대담성을 보여준다.”
“그들의 문명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파렴치하다”
(장 다니엘, <르누벨 옵세르바퇴르>, 1980년 6월 16일)
“저항군이 점령군보다 나은지, 그들의 이슬람교가 원시적이고 야만적이지 않은지, 즉 카불을 위해 죽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지, 이런 의문을 갖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아프간인들이 서로 죽이며 도움을 요청하는 동안, 사람들은 사방에서 이런 식으로 회피할 것을 우리에게 권한다. 그 때 그들의 SOS 앞에서, 소련점령군에 맞선 아프간인들의 저항이 모든 해방전쟁과 마찬가지로 정당하다는 것을 소리 높여 외쳐야 한다. (…) 그들의 이슬람교는 소련의 공산주의에 버금간다. 공산주의만큼 이슬람교도 ‘총체적 현실’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도, 그들이 이슬람교를 이토록 영웅적으로 지켜내려는 시점에서 그들의 문명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은 파렴치한 일이다.”
<르피가로 마가진>의 기자가 ‘진심으로’ 코란에 입 맞추다
(스탕 부아펭 비비에, <르피가로 마가진>, 1987년 12월 5일)
“공격 전에는 항상 기도를 올린다. 그것은 각자가 자신의 영혼을 알라에게 부탁하는 짧은 기도이다. 저항군은 이어서 작은 코란이 안에 놓인 팽팽한 깃발 아래를 통과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에 입을 맞추고 또 다른 사람들은 열정의 표시로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다. 아냐톨라는 나에게도 의식을 치르라고 끈질기게 요청했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했다. 실상 아프간 민족이 단결을 유지하고 저항할 정신적 힘을 주는 것은 이슬람교다. 지하드(성전)와 이 저항이 가지는 이슬람교의 성격이 불안감을 줄 수도 있지만,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 그들에게서 광적인 행태는 보이지 않는다.”
IV. 여성과 관련된 문제들
용기와 저항, 공동체적 연대감, 이국주의와 아름다움이, 아프간 여성들의 문제를 회피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특히 여성운동을 통해 의식이 많이 개조된 프랑스인들에게 아프간의 여성문제는 매우 까다로운 문제다. 더군다나 아프간 공산주의자들이 여성과 관련된 기본법(조혼 금지, 지참금 축소)을 개정한 만큼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아프간의 상황을 무조건 서구식으로 인식하는 것을 경계함으로써 난관을 피할 수 있다. 국가별 문화의 차이를 들어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 상대주의조차 “우리를 닮지 않은” 전사가 동맹군이 아닌 적군이 될 때 사라질 것이다.
유럽중심주의는 아프간 여성들을 이해 못 한다
(엠마뉘엘 토드, <르몽드>, 1980년 6월 20일)
“여성에 대한 ‘억압’은 이 체제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전적인 유럽중심주의는 가령 부모가 정하는 결혼에서 ‘억압’이 여성에게만큼 남성에게도 가해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사회를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성은 다른 여성의 보살핌을 받는다
(프랑수아즈 지루(프랑스 여성문제담당 장관), <르몽드>, 1983년 1월 25일)
“아프간 여성은 결코 남성 의사에게 진료를 받지 않는다. (…) 의료용품을 갖춘 천막에는 베일을 두른 아프간 여성들이 계속 몰려든다. 그곳에는 자신들을 맞이해 이야기를 들어주고 돌봐주는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에 상처가 났거나 피부병, 결핵에 걸린 아이들도 데리고 온다.”
“여성들은 아프간 저항군의 그림자 군단”
(카트린 샤타르, <르몽드>, 1985년 5월 20일)
“다른 이슬람교 국가의 무장한 여전사들은 여전히 몽상가들이다. 물론 무자헤딘 중 여성은 없다. 하지만 차도르에 폭발물을 숨겨 운반하거나 연락병 역할을 하는 여성들이 있다. (…) 여성들은 아프간 저항군의 그림자 군단이다.”
그들 삶의 방식을 방해하지 말라
(피에르 블랑세, <르누벨 옵세르바퇴르>, 1980년 7월 5일)
“우리 중 프랑스 여성 사진기자가 있었다. 다른 여성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베일을 쓰지 않은 채 아무 문제없이 받아들여졌다. 이란에서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슬람교가 고도의 정치적 수단이 된 이란과 달리, 이곳에서는 이슬람교가 보다 근본적이고 단순한 것인 듯하다. 어떤 진보주의를 내세워 아프간인들의 삶의 방식을 방해할 것인가?”
“우리가 이해 못하는 사회에서 우리 기준은 무엇인가?”
(아니 조르크, <레탕 모데른느>, 1980년 7월-8월)
“우리의 기준에 의하면,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소외에 대해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우리의 기준들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아프가니스탄의 구식 남녀관계는 분명 우리에게 충격을 주지만, 그 문제들은 아프간 여성들 자신이 원하는 시기와 속도에 의해서만 재검토될 수 있다. 군인과 탱크를 앞세워 강요할 수 없다.”
“결혼보상금 제도는 하나의 존중이다”
(베르나르 뒤페뉴, <레누벨 다프가니스탄>, 1986년 10월)
“전 세계 많은 사회에서, 아프리카처럼 아시아에서도, ‘결혼보상금’ 제도는 물론 많은 지장을 초래한다. 특히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 그러나 가난한 시골 사회에서 이 제도가 신부에게 확실한 예방조치가 된다는 점은 확실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결혼보상금 제도는 여성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제도로 이해돼왔다. 그런 사회에서 이 제도를 갑자기 폐지하는 것은 여성을 경시하는 처사가 된다. 딸을 아무 대가 없이 아무에게나 내어주지 않는 것은, 농민들로서는 딸과 스스로에 대한 존중이었다.”
일부다처제, 지참금, 베일에 대해
(샹탈 로바토, <오트르망>, 1987년 12월)
“일부다처제는, 시기에 따라 남성이 자신의 승리를 관리하는 수단이기도 했고, 경제적 필요 때문에 채택된 수단이기도 했다. 또한 불임여성이 한 가정, 그리고 사회조직에 통합될 수 있는 예방조치이기도 하다. (…) 지참금은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여성을 위한 보증이 된다. 왜냐하면 이혼할 경우 여성이 저당 잡혔던 재산과 함께 지참금을 되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베일을 착용하는 것은 퇴행적 행위가 아니라 존중받기 위한 실천적인 수단이며 명예의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실 서구인들이 억압의 표식으로 보는 바로 그곳에, 종종 생각보다 복잡한 현실이 있다. (…) 따라서 그곳에서 여성의 역할은 가치 있고 또 높이 평가받고 있다.”
모하메드 나지불라의 아프간 공산체제는 초기인 1989년 2월, 소련군이 들어온 이후에도 3년 간 존속했다. 이어서 경쟁파벌들 간에 유혈사태가 일어나고 몇 년 후인 1996년, 카불은 탈레반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들은 국제연합 건물에 피신 중이던 전 대통령을 체포해 고문, 거세하고 총살한 후 그 시신을 가로등에 매달았다. 1998년 1월 15일, <르누벨 옵세르바퇴르>는 브레진스키에게 “이슬람 전통주의를 두둔하고 미래의 테러리스트들에게 무기와 자문을 제공했던 일을 후회하진 않는지” 질문했다. 브레진스키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세계사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탈레반? 소련제국의 붕괴? 일부 이슬람 과격분자들? 아니면 중부유럽의 해방과 냉전의 종식?”
글·드니 수숑 Denis Souchon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있는 미디어 비평단체라고 할 수 있는 아크리메드(Acrimed)에서 1996년 이 단체의 출범때정치,경제, 사회 문제와 관련해 전방위적인 미디어 비평활동을 하고 있다.
번역·문경자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공저), 옮긴 책으로 <성의 역사2>(공역), <부르디외 사회학 입문>등이 있다.
(1) Christian Parenti, <아프간 공산주의의 쓰라린 추억>,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2012년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