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 위기에 놓인 우크라이나
2016-03-02 세바스티앙 고베르
“공중보건요? 우크라이나는 단 한 번도 보건문제에 관심을 가진 적이 없어요. 국민복지 개선에 대한 정치인들의 강한 의지도 본 적 없고요. HIV/AIDS나 결핵처럼 ‘사회적으로 위험한’ 질병들은 갈 길이 멀다고 볼 수 있어요.”(1) 스비트라나 모로즈는 이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시련을 견디려는 노력처럼 보였다. NGO ‘노비이 덴(러시아어로 새로운 날을 뜻함)’의 빛바랜 서류더미와 콘돔상자 사이에 놓인 꽃무늬 소파에 힘없이 앉아있는 이 젊은 여성은 갈 길을 잃은 듯 보인다.
노비이 덴은 우크라이나가 통제하는 돈바스 지역의 크라마토르스크 도시에서 HIV, 결핵 및 기타 전염병에 걸린 5백여 명에게 사회적‧법적 도움을 제공한다. 창문에는 2015년에 사망한 환자들의 이름을 적은 노란색 사각 천이 걸려있다. 10월에만 16명이 사망했다. 모로즈는 “HIV보균자나 결핵환자가 제대로 된 진단과 치료를 받고 살 수 있음에도,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환자들은 이러한 권리를 전혀 누리지 못하는 게 가장 안타깝다. 우크라이나의 의료시스템은 경직되고 부적절하다. 그리고 공평치 않고 부패가 만연한 상태다. 여기에 전쟁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2014년 봄에 시작된 분쟁은 이 지역을 초토화시켰지만, 노비이 덴 인근의 건물들은 타격을 피할 수 있었다. 2014년 4~7월 분리주의 반군이 점령한, 돈바스 공업단지의 중추부였던 크라마토르스크의 주민들은 남쪽으로 60km 경계선을 따라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쟁 가운데 살고 있다. 공중보건시스템 등 노비이 덴의 활동들은 지역분열과 함께 무산됐다. HIV보균자 수는 전쟁 전에도 도네츠크 행정구역에서만 약 28,000명에 달했고, 이들 중 결핵에 동시 감염된 사람도 많았다. 이들 가운데 1만 명 이상이 반군이 자체 선포한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한스크인민공화국(LPR)에 여전히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UN, 국경없는 의사회, 적십자, 기타 국제기관이 전쟁 초부터 관여해 비통제 지역이라 부르는 이곳에 지속적인 약품 제공을 약속한 덕분에 당장은 이들 환자의 치료가 보장된다”고 올가 포노마레바가 차를 마시며 말했다. 노비이 덴의 마약중독회복자 대체치료프로그램 책임자인 포노마레바는 “하지만 약품재고가 바닥나면 상황이 악화될 위험은 여전히 존재한다”며 돈바스 지역 보건시스템의 취약성을 꼬집었다. 보건문제의 비상사태는 분쟁지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정부가 통제하는 지역에서도 보건당국의 대응은 더디게 진행된다. 교전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도, 노비이 덴의 담당자들은 약을 구하거나 도네츠크 연구실에 혈액샘플을 보내기 위해 국경을 넘어야 한다. 모로즈에게 전쟁이란 “정부의 무능함을 한층 더 잔인한 방식으로 분출시키는 것”일 뿐이다.
노비이 덴은 국제지원을 받아 무료로 HIV감염 간이테스트를 해준다. 2011년에 HIV에 감염된 이리나 르호비치는 “전쟁 전에는 병원에서 정밀테스트가 무료였는데, 지금은 물품이 부족해 120흐리브나(약 5,400원)를 받는다. 이곳 평균 월급여가 1,000~1,500흐리브나(약 47,000~68,000원)라서 테스트 비용은 큰 부담이다. 그래서 환자들 대부분은 NGO가 제공하는 간이 테스트만 받는다”고 한탄했다.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건물들 사이로, 공터를 지나 크라마토르스크 제2병원을 향해 나아가며 르호비치가 말을 이었다. “공공기관에서 항레트로바이러스 치료를 독점적으로 제공하고 있어서 할 수 없이 여기를 계속 다녀요.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들 대부분은 의사를 불신하고, 노비이 덴 같은 NGO를 선호해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보건시스템도 부패의 뿌리가 깊어, 가난한 환자들이 대거 피해를 입고 있다. HIV보균자와 결핵환자들은 관련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의료종사자들에게 끊임없이 차별대우를 받는다. 환자를 모욕하거나 임의적으로 구금하고, 가난하거나 통제가 어려운 환자의 치료 거부가 우크라이나 언론에 계속 보도되고 있다. 르호비치는 “전쟁 전에도 있었던 일이다. 정부가 우리를 이렇게 무시하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NGO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구가 이동할 때 전염병도 이동한다
가장 취약한 계층이 우크라이나 분쟁지역과 그 외 지역을 벗어나 이동함에 따라 보건위기가 우려되는 상황이다.(2) 모로즈는 “대대적인 군사배치와 함께 매매춘이 늘면서, 전염병이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크라마토르스크 제2병원의 이에레나 베레가 보건역학과 과장은 “이미 결핵으로 진단된 병사들이 있다. 미군부대에는 콘돔배급이 있지만 우크라이나부대에는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프랑스의 경우, 2004년부터 신규 감염자 수가 감소했다.(3) 유럽에서 HIV보균자 수가 매년 증가하는 곳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뿐이다. 2015년 10월에 공식적인 HIV보균자 수는 24만 명으로 집계됐다.(4) 하지만 세계보건기구(WHO)는 40만 명이 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같은 시기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사라진 결핵에, 우크라이나에서는 최소 4만9,400명이 감염됐다.
이런 우려스러운 상황의 원인은, 소비에트 시절부터 이어져온 보건시스템의 붕괴로 일부분 설명된다. 만성질병에는 취약하지만 전염병 퇴치에는 효율적이던 보건시스템이, 1991년부터 심각한 재정위기에 빠진 것이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0년 우크라이나의 공중보건 지출비중은 GDP의 2.9%에 그쳤는데, 이는 WHO의 기준으로 필요한 지출규모의 절반에 불과하다. 의료 접근성도 불평등이 심화됐다. 임금이 낮은 의사들이 뒷돈을 요구하거나 공금횡령을 하는 등 부패행위가 이러한 상황을 부추겼다.
그 결과,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의 평균수명은 1990년 70세에서 2003년 67세로 3년 낮아졌다(2013년에 71.2세로 다시 높아지긴 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평균수명이 가장 낮고,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는 약 10년이 더 낮다. 우크라이나는 돈바스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위생 및 전염병 문제가 심각했던 것이다.
수도 키예프에 있는 한나 우사타는 “HIV보균자 수가 계속 증가하는 것은 HIV검진이 체계화됐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현 상황에 대해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Health Focus GmbH 단체의 HIV/AIDS 예방 프로젝트 코디네이터인 우사타에 의하면 “일부 공중보건 관계자들이 상황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전염병 발생현황과 관련된 처치가 개선됐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염병 발생현황 감시기구인 ‘UCDC(사회적으로 위험한 질병 관리센터)’에서 대민관계 업무를 담당하는 나르미나 스트리체넷은 “항레트로바이러스가 필요한 환자 중 치료받은 이들은 30%에 불과하다. 하지만 2006년 진료 받은 환자 수가 3,400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한 진전”이라며,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긍정적인 결론을 덧붙였다.
전염병 예방이 부족한 이 초라한 성과들은, 우크라이나가 ‘에이즈·결핵·말라리아 퇴치 세계기금’의 원조를 받는 주요 수혜국이라는 점에서 더욱 비판받아 마땅하다. 2003년 이래 4억 6,300만 달러 이상을 지원받았으며, 이중 HIV/AIDS 퇴치에만 3억 5,840만 달러가 사용됐다.
“우크라이나는 엄청난 행정부담을 안고 있으며, 정치적 의지가 심각하게 부족하기 때문에 공중보건 문제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어렵다.” 미쉘 카자츠킨 동유럽·중앙아시아지역 HIV/AIDS관련 UN특사는 말했다. 그는 “UCDC보다 투명하고 효율적으로 보이는 ‘우크라이나 알리앙스’와 ‘HIV감염인 네트워크’, 2개 NGO가 세계기금 원조금 대부분을 관리한다”고 덧붙였다.
2014년 2월, 권위적인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전복시킨 ‘존엄성의 혁명’의 핵심에는 국가의 결속 및 현대화에 대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2014년 대선·총선으로 선출된 행정부가 의료시스템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만성적 부패에 전면적으로 맞서면서 시작된 개혁운동은 기본적으로 공중보건 관리의 합리화를 주장한다. “공중보건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4%로 이스라엘과 폴란드에 근접한 수준이나, 그 결과는 매우 다르다”고 알렉산더 크비타츠빌리 보건부 장관은 말한다. 그는 2014년 11월, 정부에 합류하기 위해 우크라이나 국적을 취득한 장관들(5) 중 한명이다. 2008~2010년 조지아에서 같은 직무를 수행했던 크비타츠빌리 장관은 조지아에서 추진했던 공중보건 개혁을 우크라이나에서 재현하기를 원한다. “핵심은 간단하다. 병원 자율화를 보장하거나 해당분야 종사자의 경영개입 확대를 장려하는 것이다.” 이 자유주의 개혁자에게 특히 중요한 것은 마지막 개혁안이다. “우크라이나에는 병원침대가 인구 1천 명당 9개임에도 평균 30%만 사용되고 있다. 스웨덴은 사회주의 성격이 강한 국가임에도 인구 1천 명당 병원침대 수는 2.7개에 불과하다. 평균 입원기간은 우크라이나가 13일, 스웨덴은 5일이다.” 크비타츠비리 장관의 개혁안은 이렇게 “전적으로 비기능적인” 시스템을 바꾸자는 것이다. 그의 부서는 2015년 봄에 관련 개혁안을 만들었다. 세계은행도 2억 1,500만 달러를 지원하며 개혁안에 힘을 보탰다.
국민 의료비의 80%를 부담하는 현실
그러나 2015년 봄부터 수많은 공중보건 법안이 ‘라다(우크라이나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고, 비난의 표적이 된 크비타츠빌리 장관은 결국 7월 2일 사퇴의사를 밝혔으나 국회의원들은 이를 수락하지 않았다. “개혁안은 긍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민영화와 병원 폐업이 뒤따를 것으로 예상돼 거절당했다. 개혁안이 의료계를 이중구조로 이끈다는 것은 조지아의 경우를 보면 알 수 있다”고 장관은 말했다. 이 나라는 민간보험을 우선시하기 때문에 국민이 의료비 지출의 약 80%를 부담하고 있다. 이 중 약품구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이는 셀프-메디케이션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6)
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우크라이나 환자재단’의 올가 스테파니치나 총장은 “내용 때문에 개혁안이 통과하지 못한 게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공중보건시스템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부패한 분야 중 하나였다. 우크라이나 중앙정보국에 따르면, 매년 공공입찰에 들어간 자금 중 40%인 5천만 달러가 횡령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을 바꾸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보건 분야도 ‘존엄성의 혁명’이 요구하는 바를 정치적으로 반영하는데 고전하고 있는 것이다. 스테파니치나 총장은 말을 이었다. “크비타츠빌리 장관이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여서 굳이 로비에 맞서지 않는 것이 큰 문제다. 크비타츠빌리 장관은 복잡하게 뒤얽힌 시스템을 앞세워 자신을 옹호하면서도 누군가를 임명하지는 않는다. 그가 임명한 사람은 예전 변호사였던 알렉산드라 파블렌코 보건부 차관밖에 없을 것이다.” 스테파니치나 총장은 주저 없이 관공서, 정부, 정당 등 모든 계층의 인물 리스트를 건네주었다. “파블레코 차관은 다닛사 제약회사와 사장인 홀리브 재고리를 변호한 바 있는데, 홀리브 재고리는 페트로 포로셴코(현 대통령) 블록의 의원이다.” 세계기금은 독립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정부 기구를 선호했지만, 이들도 이해충돌을 피해가지 못했다. 2015년 6월, 세계기금은 우크라이나 알리앙스의 재무이사가 스캔들에 연루되자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었다.
복잡하게 뒤얽힌 시스템과 불확실한 보건개혁에 직면한 우크라이나 환자재단과 기타 단체들은 제약업계의 독점형태를 무너뜨리고 제네릭 의약판매를 허용해 부패를 척결하려 했다. “예산이 제한된 상황에서 저렴한 가격에 좋은 약을 살 수 있게 되면 더 많은 환자를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호르 페레히넷츠 보건부 차관은 설명했다. 그는 WHO 우크라이나 부지부장을 역임했으며, 현 정부에선 국가 복지책임주의자로 통한다.
“예산이 제한된 상황”은 현실적인 표현이다. 보건부는 2016년 약품구매 예산으로 81억 흐리브나(약 4,080억 원)를 요청했지만, 2015년 12월 25일에 통과된 정부예산에서 겨우 39억 흐리브나(약 1,970억 원)밖에 배정받지 못했다. 스테파니치나 총장은 “HIV감염자 중 25%, 결핵환자 중 35%밖에 치료를 받지 못한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이에 대한 논란이 일자, 아르세니 야체뉴크 우크라이나 총리는 “IMF 원조를 받으려면 어쩔 수 없는 예산안이었다”고 변명했다.
페레히넷츠 차관은 IMF가 “보건 예산을 10% 감축하라고 요구한 것은 사실이지만, 병원경영과 같은 운영경비를 줄이라는 말이었다”며, “IMF와 재무부는 약품예산을 유지하려 했지만, ‘라다’의 예산위원회는 문자 그대로 면전에서 우리를 비웃었다”고 말했다. 카자츠킨 UN특사의 말처럼 “예산구조상 감축할 부분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의원들의 무관심은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무엇보다 카자츠킨 UN특사는 두 가지 걱정거리가 있다. 첫째는 2016년 8월이면 분리주의 반군의 영역에서 항HIV제, 항결핵제 및 기타 질병 치료제가 고갈된다는 것이다.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전염병이 창궐한 진짜 재앙”의 전조가 될 것이다. 둘째는 2017~2018년에 중단 예정인 IMF 재정지원인데, 4월에 있을 IMF 이사회 모임에서 승인을 받아야 한다. 스테파니치나 총장은 “아무도 이 결정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특히 이런 상황일수록 타격은 클 수밖에 없다. IMF의 지원이 있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책임지려하지 않는데, 지원조차 없이 우리만 남는다면 전염병 확산이 어떻게 될 지 생각조차 하기 싫다”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글·세바스티앙 고베르 Sébastien Gobert
프랑스에서 학업을 마친 뒤, 우크라이나 키예프에 거주하면서 독립언론인으로서 ‘또 다른 유럽’에 관한 글을 주로 쓰고 있다.
번역·이보미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업
(1)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는 면역세포를 파괴해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으로 발전될 수 있다.
(2) UN난민최고대표사무소는 이동인구를 110만 명으로 밝혔지만, 300만 명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3) 프랑스 공중보건감시연구소(Institut de veille sanitaire), 2015년
(4) 1987년, 전염병 발발 초기에 HIV보균자로 진단받은 사람은 277,500명에 가까웠다. UCDC(http://ucdc.gov.ua)에 따르면, HIV 발병으로 37,500명 이상이 사망했다.
(5) Alexander Kvitachvili 이외에도 리투아니아 출신 Aivaras Abromavicius 경제부 장관(지난 2월 3일 사직)과 미국 출신 Nathalie Jaresko 재무부 장관이 국적을 바꿔 우크라이나 정부에 합류했다. 이밖에도 많은 외국인 전문가가 각기 다른 행정부 직위에 임명됐다.
(6) Tobias Hauschild, Esmé Berkhout, ‘La réforme du système de santé en Géorgie(조지아 보건시스템 개혁)’, <Oxfam International>, Oxford, 2009년 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