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문법으로서의 은유, 환유, 제유

이정우교수의 철학 노트(1)

2016-03-02     이정우
전통, 근대, 탈근대에 대한 전반적인 역사적 탐구를 근간으로 자신의 철학적 사상을 전개해온 철학자 이정우교수가 최근에 치열하게 공부하고 사유한 결과물을 갈무리하여 본지에 연재합니다. 지난해 연재와는 달리 이번 연재는 사회 현실보다는 사유의 문법(Grammar of thought)을 다룹니다. 주로 세계를 인식하는데 동원되는 존재론적-인식론적 틀에 대해 논합니다. 
 
게재 순서와 내용   1. 존재의 문법으로서의 은유, 환유, 제유
                      2.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은 존재하는가
                      3. 세계 평화의 두 모델, 보편성인가 헤게모니인가
                      4. 무한(infinite), 비-한정(indefinite), 무한정(unlimited)의 차이
                      5. 근친상간의 금지가 뜻하는 것
 
 
은유와 환유, 제유는 흔히 ‘수사(Rhétorique)’의 기법으로서 인식된다. 즉, 글쓰기에 있어 구사되는 수사적 기법으로서 이해된다. 그러나 이 개념들은 글쓰기의 기법을 넘어 훨씬 깊은 존재론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은유(隱喩)는 a라고 해야 할 것을 A로 바꿔 말하는 기법이다. 아킬레우스가 자신의 군사들을 ‘사자’라고 말할 때, 그것은 ‘군사’라고 말할 것을 ‘사자’로 바꿔 말한 것이다. 은유를 뜻하는 ‘Metaphor’는 그리스어 ‘Meta-phora’에서 온 것이며, 이는 ‘장소를 바꾸는 것’을 말한다. 아킬레우스의 은유를 통해 영장류의 범주에 존재하는 군사라는 존재가, 포유류로 자리를 옮겨 사자가 된 것이다. 
은유를 통해 그 대상에서 부각시키고 싶은 점이 도드라질 수 있게 된다. 예컨대 하나의 조직을 ‘기계’로 은유하는 경우와 ‘유기체’로 은유하는 경우는 조직이라는 존재에서 도드라지게 만들고 싶은 측면을 달리 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의 회사를 기계로 은유할 때, 이는 그 회사가 톱니바퀴들의 얼개처럼 돼 있어 규칙적이고 효율적으로 돌아간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반면 그것을 유기체로 은유하는 경우, 이는 그 회사가 부분들과 전체의 유기적 연관성을 통해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생성해 감을 부각시킨다. 은유는 이렇게 사물들의 본래 자리를 다른 곳으로 옮겨 말함으로써, 글 쓰는 이가 강조하고자 하는 점을 부각시킨다.
환유(換喩)는 A를 말하기 위해서 그것과 연결돼 있는 B를 말하는 기법이다. 우리 문화에서의 호(號)는 일종의 환유이다. 이황을 가리키기 위해서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퇴계(退溪)를 언급하는 것을 생각하면 되겠다. 누군가가 포도주를 마셨음을 강조하고자 할 때, 잔 아래에 포도주가 엷게 남아 있는 와인 잔을 보여준다면 이는 환유이다. 환유는 흔히 ‘인과관계’와도 연계돼 이해되는데, “저 산에 불이 났다”고 말하는 대신 “저 산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말하는 경우가 이런 경우다. 
제유(提喩)는 A를 가리키기 위해서 A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 기법이다.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대학 관련 뉴스가 방송될 때, 사각모가 아이콘으로서 뜨는 것이 이 경우다. 제유는 “부분 속에 전체가 들어 있다”는 논리를 함축한다. 사각모라는 부분에는 대학사회 전체가 온축돼 있다고 하겠다.
은유와 환유, 제유는 이렇게 각각 글쓰기에서의 상이한 기법들을 뜻하지만, 사실 이 개념들의 역할 범위는 훨씬 넓다. 우리는 특히 은유와 환유에 관련해 정신분석학, 뇌과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들에서 은유와 환유를 발견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에서의 은유와 환유
 
프로이트는 꿈에 대한 연구야말로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라고 보았다. 꿈이란 “억압된 소망의 위장된 충족”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는 곧 직접적으로는 노출하기 힘든 소망이 왜곡돼 분출되는 것이 꿈이라는 것을 뜻한다. 
프로이트가 분석한 꿈은 매우 복잡한 과정을 거쳐 나타난다. 가장 아래쪽에 나타난 잠재몽(潛在夢)은 멀리로는 유년기에 가졌던 무의식적 소망에 연원하며 가까이로는 가까운 과거의 기억들과 꿈꾸는 이에게 주어지는 감각자극 등이 조합돼 형성된다. 그런데 꿈은 이 잠재몽을 그대로 현시하지 않는다. 그것에 이른바 ‘꿈작업’을 가해 가공한 형태로 현시하는 것이다. 이 꿈작업은 검열, 압축과 전치, 그리고 상징표상의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우선 꿈에는 명시적으로 나타내기 힘든 욕구와 욕망이 포함돼 있고, 때문에 무의식은 이것들을 ‘검열’하게 된다. 예컨대 성적 욕망은 사회적으로 노출하기 힘든 욕망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현시되기 힘들다. 이때 검열이 작용해 그것을 다른 형태로 바꾸기를 요청한다. 그 다음 단계는 매우 중요한데, 이런 바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이런 바꿈은 곧 ‘압축(Condensation)’과 ‘전치(Déplacement)’에 의해 이루어진다. 압축이란 하나의 기표에 여러 의미들이 중첩됨을 뜻하고, 전치란 하나의 기표를 그것과 연관된 다른 기표로 대체함을 뜻한다. 
압축은 직접적으로 노출하기 꺼려지는 것을 다른 것들과 섞어서 현시한다. 통속적인 예를 든다면, 성적인 욕망을 불로 현시하고 돈에 대한 욕망을 돼지로 현시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적 욕망과 돈에 대한 욕구에서 핵심적인 것을 불과 돼지가 가지고 있는 여러 다른 측면들에 숨겨서(마치 뒤팽이 편지를 사소한 것들과 섞어 놓음으로서 잘 숨기듯이) 드러나지 않게 현시하는 것이다. 물론 뒤팽의 경우와는 달리, 꿈의 경우 불이나 돼지는 성적 욕망이나 돈에 대한 욕구와 잘 연계돼야 한다. 아킬레우스의 군사와 사자가 그 핵심에서 연계돼야 하듯이. 라캉이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돼 있다”는 테제를 제시하면서 압축이 바로 은유라고 했듯, 꿈에서의 압축은 일종의 은유이다. 우리말 ‘은유’는 서구어 ‘Meta-phora’와 달리 장소의 옮김보다는 ‘隱’=‘숨김’을 부각시킨다. 이렇게 보면, 프로이트의 압축은 묘하게도 ‘隱喩’라는 우리말 표현에 꼭 들어맞는다 하겠다. 
전치는 직접적으로 노출하기가 꺼려지는 것을 그것과 넓은 의미에서의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대체해서 현시한다. 누군가를 증오해서 그를 죽이고 싶은 사람이 그의 주검을 담은 관의 이미지를 꿈꾸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가 실제 원하는 것은 칼로 그를 찌르는 것이지만,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이 욕구가 상대의 무덤에 들어갈 관이라는 이미지로 대체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경우는 바로 환유에 해당한다. 환유를 뜻하는 ‘Metonymy’는 그리스어로 ‘Meta-nomos’로 풀어볼 수 있는데, 이는 ‘뒤의 이름’을 뜻한다. A를 가리키기 위해 그것과 맞닿아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경우이다. 우리말 ‘換喩’의 ‘환’은 ‘바꿈’을 뜻하며 ‘Metonymy’보다 넓은 범위를 함축한다. ‘Meta-nomos’는 바로 다음의 이름을 뜻하지만, ‘환유’에서의 바꿈은 꼭 옆의 것이 아니어도 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도 프로이트의 전치 개념을 서구어보다 오히려 더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하겠다.
전통적으로 언어와 글쓰기의 문제라고 여겼던 은유와 환유가 정신분석학이라는 새로운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매우 시사적이다. 이는 은유와 환유가 언어적 기법이라는 차원을 넘어 보다 존재론적인(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역할을 담고 있음을 시사한다.

뇌과학에서의 은유와 환유
 
뇌에서의 언어 장애를 발견한 중요한 한 예는 ‘브로카 영역’의 발견이다. 프랑스의 생리학자 폴 브로카(1824~1880)는 자신의 환자들 중 한 명에게서 독특한 언어 장애를 발견했다. 그는 상대가 자신에게 하는 말은 거의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탕”이라고만 답했다. 이윽고 “탕”은 그의 별명이 됐다. 탕이 죽은 직후 브로카는 그의 뇌를 해부했는데, 좌반구의 한 부분에 큰 구멍이 나 있었다. 오늘날 ‘브로카 영역’이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탕의 경우보다 약하게 브로카 영역에 손상이 생긴 환자들은 대개 어휘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들은 문장의 구성에는 비교적 문제가 없지만, 어휘의 선택에 약하기 때문에 결국 이상한 문장을 말하게 된다. “푸른 관념들이 광폭하게 잠잔다”는 문장은 문장 자체로서는 문제가 없다. 이 문장 구조로서 “빨간 사과들이 먹음직하게 차려져 있다”든가 “하얀 스카프가 격렬하게 펄럭인다”고 말할 때 아무 문제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푸른 + 관념들이 + 광폭하게 + 잠잔다”에 있어 각 항의 장소에 어떤 것을 넣느냐의 문제이다. 이 점에서 브로카 영역에서의 언어 손상은 은유와 관계가 있다. 위 문장을 구성하는 네 장소에는 그 장소에 들어갈 수 있는 수많은 어휘들이 잠재해 있다. 의미 있는 문장을 구성하려면 그 잠재성으로부터 적절한 것을 끄집어내어 그 장소에 현실화해야 한다. 브로카적 장애는 이런 현실화에서의 장애이다. 은유란 하나의 어휘를 다른 어휘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군사들이 너희들의 성을 무너뜨릴 것이다”라고 하는 대신 “나의 사자들이 너희들의 가죽을 먹어치울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군사→사자, 성→가죽의 대체는 은유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본다면 브로카 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은 은유의 능력이 지나치게/대책 없이 발달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브로카 이후에 독일의 신경학자 베르니케(1848~1905)는 브로카의 경우와는 다른 언어 장애를 발견했다. 브로카 영역에서의 언어 장애와는 달리 베르니케 영역에서의 언어 장애는 단어 하나하나는 문제가 없지만, 문장 구성이 되지 않는 경우이다. 보다 최근의 예를 든다면, 미국의 물리학자 윌슨 텔리는 1998년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그의 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베르니케 영역에서의 문제가 발견됐다. 텔리는 단어 하나하나는 또렷하게 그리고 맥락에 맞게 발음한다. 그러나 문장 구성이 되지 않아 “목욕탕 (…) 10분 (…) 추워요 (…) 학생들이 (…)” 같은 식으로 ‘횡설수설’을 늘어놓게 된다. “푸른 관념들이 광폭하게 잠잔다”는 문장이 어휘 선택에서의 문제를 드러내는 반면, “하얀 펄럭인다 스카프가 격렬하게”는 문장 구성에서의 문제를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이 베르니케 유형의 언어 장애는 환유와 연관된다. 환유는 서로 연계돼 있는 항들에 있어 말하려는 바와 근접한 다른 것을 말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영희가 새로 산 차”를 가리키기 위해 그 차의 열쇠를 부각시키는 것이 이런 경우이다. 때문에 환유는 항과 항 사이의 넓은 의미에서의 인과관계, 이웃관계(Contiguity)와 관련을 가진다. 문장의 구성이란 바로 이런 이웃관계의 구성이다. 만일 “하얀 스카프가 펄럭인다 격렬하게”라고 말했다면, 이 문장은 적절하게 멋을 부린 문장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렇게 본다면, “하얀 펄럭인다 스카프가 격렬하게”라고 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면에서 보면 환유의 능력이 지나치게/대책 없이 발달해 있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20세기에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뇌와 언어의 관계는 사실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이 발견되고 있다. 대뇌피질이 언어 사용에 큰 관련성을 가진다는 것, 단어 하나만 발음해도 대뇌피질에서의 잔물결이 확인된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 또, 최근에는 언어 사용에 있어 좌반구는 분석적 기능을, 우반구는 감정적 기능을 담당한다는, 구조주의 언어학으로 말한다면 좌반구는 ‘랑그’를, 우반구는 ‘파롤’을 담당한다는 가설도 제출돼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실체적인 언어 중추는 없으며, 뇌의 많은 부위가 협력해 언어 사용을 가능케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각 부위가 주로 맡고 있는 기능이 다르다는 점은 사실이며, 브로카 영역에서의 언어 장애와 베르니케 영역에서의 언어 장애에서 나타나는 차이와 그것이 가지는 은유·환유와의 관계는 여전히 흥미롭다.
정신분석학의 경우와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이렇게 은유와 환유는 뇌과학에서도 등장하는 논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유와 환유가 존재론적 가치를 지니는 개념들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언어학에서의 은유와 환유
 
은유와 환유는 본래 언어의 문제다. 따라서 현대 언어학에서 은유와 환유가 새로운 방식으로 조명되고 있다는 사실은 특히나 흥미롭다.
구조주의 언어학에서 ‘통합체(Syntagme)’와 ‘계열체(Paradigme)’ 개념 쌍은 기초적인 개념 쌍이다. 통합체는 문장 구성과 관련된다. “푸른 + 관념들이 + 광폭하게 + 잠잔다”에서처럼 문장을 구성하는 것이 통합체다. 반면 계열체는 같은 범주에 속하는 어휘들에 관련된다. 예컨대 ‘푸른’은 ‘붉은’, ‘노란’, …과 함께 하나의 계열체를 형성하며, ‘잠잔다’는 ‘먹는다’, ‘걷는다’, …과 함께 하나의 계열체를 형성한다. 문장의 작성은 계열체에서의 어휘 선택과 선택된 (다른 범주의) 어휘들을 결합하는 것으로써 가능하다.
그런데 지금까지의 논의로부터 알 수 있듯, 통합체는 바로 환유와 관계되고 계열체는 은유와 관계된다. 현대 언어학자 로만 야콥슨(1896~1982)은 이 점에 착안해 뇌과학에서의 브로카적 장애와 베르니케적 장애를 계열체와 통합체에 연관시켜 설명했다. 
야콥슨은 계열체를 ‘은유적 과정’이라 불렀고, 통합체를 ‘환유적 과정’이라 불렀다. 그는 병리적 현상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정상적 현상들을 파악하는 프랑스 과학의 전통에 입각해, 은유적 과정과 환유적 과정에 있어 장애를 겪는 환자들을 연구해 언어학과 뇌과학을 연결시켰다. 은유적 과정 즉 계열체에 있어 곤란을 겪는 사람들은 한 계열체의 잠재성에서 어떤 어휘를 끄집어내 현실화할 것인가에 관련해 장애를 가졌고, 환유적 과정 즉 통합체에 있어 곤란을 겪는 사람들은, 어휘들을 어떻게 결합해 문장을 구성할 것인가에 관련해 장애를 가졌다. 이것은 곧 계열체에서의 장애가 브로카 영역에서의 장애에 상응하고, 통합체에서의 장애가 베르니케 영역에서의 장애에 상응함을 말해 준다. 
언어학적 탐구를 통해 은유와 환유는 수사의 기법이라는 좁은 맥락을 넘어서 언어라는 것이 작동되는 기초적인 방식이라는 점이 밝혀지고, 언어 장애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언어학적 연구와 뇌과학적 연구가 서로 밀접한 연관성을 띤다는 것이 밝혀졌다. 물론 앞에서 말했듯이 뇌과학의 발달은 뇌의 작동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들을 속속 밝혀 주었지만, 여전히 이런 연관성은 흥미롭다. 이에 앞에서 논했던 정신분석학에서의 은유와 환유를 함께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은유와 환유가 존재론적 가치를 가지는 개념 쌍이라는 사실을 보다 확신할 수 있게 된다.

제유의 논리
 
은유와 환유가 여러 분야에서 다각도로 연구된데 비해, 제유는 그다지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제유 역시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존재론적 개념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제유의 논리는 ‘프락탈(Fractal)’의 논리이다. 프락탈은 부분이 전체를 함축하고 있는, 다시 말해 부분 속에 전체가 접혀 있는 구조이다. 가장 간단한 프락탈 구조인 ‘코프의 눈송이’를 보자.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눈송이의 각 부분(육각형의 각 꼭짓점들에 해당하는 부분)은 전체를 다시 반복하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이 코흐의 눈송이가 그려지는 과정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브누아 만델브로(1924~2010)가 프락탈 이론을 전개한 후, 코흐의 눈송이를 비롯한 많은 프락탈 구조가 만들어졌고 실제 자연과학적 탐구에 응용되기도 했다. 제유의 논리는 프락탈 이론 이전에도 사실 세포의 개념 등 많은 영역들에서 이미 작동하고 있던 논리이다. 멀리로는 인간을 소우주로 본 퓌타고라스학파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그럼에도 정신분석학, 언어학을 비롯한 인간과학의 영역에서는 오히려 제유의 논리가 그다지 적극적으로 연구되고 있지 않은 듯하다. 은유, 환유만이 아니라 제유 역시 활발히 연구돼야 할 것이다. 은유·환유·제유는 존재론적 가치를 지니는, 아니면 적어도 세계를 해석하는 인간의 사유문법(Grammar of thought)의 가치를 가지는 개념들이기 때문이다.  
 
 
 
 
 
 
 
 
 
 
 
 
 
 
 
 
글·이정우
1959년에 영동에서 태어나 서울대에서 공학, 미학, 철학을 공부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석사학위를, 미셸 푸코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최초의 대안철학학교인 철학아카데미를 창설해 시민들을 위한 철학, 인문학 강좌를 열었다. 소운서원을 열어 연구와 후학 양성을 해오고 있으며, 최근에는 경희사이버대학교 교양학부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최초의 대학 내 대안공간인 파이데이아 홍릉을 창설해 대학의 시민교육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다. 저서로는 <소운 이정우 저작집(전5권)>, <천 하나의 고원>,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 <세계철학사 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