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너머의 종교, 르낭이 꿈꾼 근대의 풍경
엘리트적 귀족주의 유럽 정교분리에 큰 영향
자유주의와 공화주의 결합 이해에도 시사점
에르네스트 르낭의 엘리트적 귀족주의는 유럽문화의 정교(政敎)분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항상 논쟁의 한복판에 있었던 모순에 찬 도덕가 르낭. 이 위대한 사상가의 저서들은 현대의 독자들에게도 흥미롭게 다가온다. 특히 최근 슐로모 산드가 새로 편집해서 내놓은 <르낭이 본 민족과 유대인> 같은 책들은 당시 상황을 고려해서 읽는다면 현재에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에르네스트 르낭(Ernest Renan)은 19세기, 기독교에 대한 ‘역사적’ 비판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학자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둘러싼 논쟁이나 토론은 잊혀진 채 팡테옹에 그의 묘지를 이장시켜서는 안 된다는 가톨릭 교도들의 반대 목소리만 들려온다. “배교자이자 신성모독자인 그를 팡테옹에 들인다고 해서 그가 배반했던 신으로부터 은총을 받을 수는 없을 것이다.”(1) 자유사상가들도 그에 대해 찬사를 보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에도 르낭은 항상 종교의 사회적 역할과 종교인들의 공덕을 강조했으며, 자신도 그들 중 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조르주 상드의 표현을 빌리면 “르낭은 자신의 한 손으로 파괴한 것을 다른 손으로 복구하려고 애쓰던 사람이었다”.
오늘날 르낭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가 ‘종교화’라고 명명한 개념의 기원과 그 개념에 대한 탐구 속에서 인종차별주의와 식민주의를 읽어낸다. “이 개념 속에서 우리는 민족·인종·유대주의에 대해 르낭이 내린 정의가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고 비교·분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2)
1823년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르낭은 가족의 도움과 장학생의 신분으로 학업을 계속해나갈 수 있었으며, 생쉴피스 신학교에도 다닐 수 있었다. 르낭은 원래 사제 서품을 받기로 돼 있었지만, 내적 갈등 때문에 차츰 가톨릭과 거리를 두게 된다. 그는 종교를 인간 감정의 산물이라고 보고 과학이 정립한 진리를 종교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르낭은 신학교를 그만두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다.
르낭은 종교에 대한 탐구가 철학적일 뿐 아니라 역사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역사적이라 함은 ‘종교화’ 과정, 다시 말해 종교가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졌는지를 연구한다는 의미이다. 르낭은 1847년 8월 28일, 그의 친구 마르셀랭 베르텔로에게 보내는 편지(3)에서, 당시의 공화주의자들이 어떻게 프랑스혁명을 신성화하고 있는지에 대해 썼다.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미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사회주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르낭은 1848년 혁명을 목도하고 사회주의를 좀더 우호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4) “인류를 과학적으로 조직한다는 것은 현대과학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이다. 대담하지만 정당한 요구다.”
그러나 제2공화정의 갑작스런 도래는 그로 하여금 진보주의로부터 한걸음 물러서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르낭은 제2제정의 도래를 무지한 대중에 의해 지지받는 성직자 독재로 해석했다. 자유주의자가 된 르낭은 소수의 엘리트 지식인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종교적 광신주의로부터 박해받는 지식인들만이 사상의 자유를 수호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이 시기 르낭의 작업은 셈어와 그 지적 파생물들에 대한 기술에 집중된다. 그는 이어 기독교의 기원에 대한 일반 역사와 기독교의 발생으로 이어지는 유대인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다. 1862년 콜레주 드 프랑스의 첫 강의에서 르낭은 예수를 탁월한 인간으로 묘사해 물의를 일으키고 교수직을 박탈당한다. 대신 그의 저서 <예수의 생애>는 이듬해 엄청난 베스트셀러가 된다.
한편, 그의 이슬람에 대한 가혹한 비판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슬람은 유럽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며 광신주의에 불과하다. 펠리페 2세의 스페인도 교황 비오 5세의 이탈리아도 이슬람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셈어족의 사상을 끔찍하게 단순화한 것에 불과한 이슬람은 ‘신은 신이다’라는 영원한 동어반복 속에 스스로를 가둠으로써 인간의 사고를 모든 종류의 심오한 사상, 예민한 감수성, 이성적 탐구로부터 차단한다.”
르낭의 ‘문헌학’적 민족학은 그 후 아리안어족과 셈어족의 이분법적 체계를 지향하게 된다. 그 외의 민족에 대해서는 다소 경멸 섞인 언급만을 했을 뿐이다. 르낭의 관심은 오로지 일신론의 기원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가 세운 체계에 반하는 요소들은 배제됐다. 르낭이 자주 사용한 ‘인종’이라는 개념은 오늘날로 보면 ‘문화’의 개념에 가까웠다. 한편 독일 문화에 깊이 경도돼 있던 르낭은 폭력적인 인종차별주의의 도래를 우려했다. 르낭은 1856년 <인종 간 우열에 대한 소고> 1권을 출간한 고비노에게 그 점을 설명한다.(5) “인종은 그것이 발생할 당시에는 큰 외연을 가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의미를 잃게 된다. 때로는 프랑스의 예에서 보듯이 인종의 의미가 완전히 사라지기도 한다. 이것은 인종의 완전한 쇠퇴를 의미하는 것일까? (…) 나라 전체가 평민계급의 손에 장악된 프랑스는 전세계에 귀족의 현실적인 역할을 보여준다. 위대한 인종들의 삶을 방해함으로써 인류 전체에 해악을 미치는 일부 열등 인종들을 제외한다면 미래에 도래할 단일 인종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 단일 인종이라는 거대한 물줄기에 다양한 기원에 대한 기억들이 녹아들어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870~71년 전쟁은 르낭에게는 엄청난 도덕적 충격이었다. 이 전쟁에 대한 르낭의 반응은 프랑스 사회의 민주주의적 발전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었다(1940년 비시 정권이 취한 방향과 동일했다). 이러한 전환을 계기로, 르낭은 오귀스트 콩트와 함께 보수적인(때로는 반동적인) 전통이 즐겨 인용하는 사상가가 되었으며 모라스(6)의 사상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르낭은 20세기의 미래를 비관했다. “인류의 절멸을 향해 다가가는 전쟁은 육식동물과 설치류들의 약육강식을 닮았다. 다양하고 필수적인 요소들의 생산적인 혼합물로서 인류는 이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7) 르낭의 사상은 알자스로렌 지방의 문제를 계기로 더욱 멀리 나아간다. 알자스 사람들은 게르만 민족에 속했지만 프랑스인으로 남고 싶어했다. 르낭은 민족을 인종과 달리 역사적 산물이자 일상적인 자발적 행위의 결과물로 보았다. 문명화 과정은 원래의 인종적 기원을 불가역적으로 파괴하며 그 결과로 형성되는 민족 구성원들은 더 이상 혈통적인 근거를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슐로모 산드 같은 이들은 이러한 르낭의 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1882년 3월 11일, 르낭은 ‘민족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개최된 한 학회 세미나에서 두 가지의 분명한 구분을 제시했다. 첫째는 인종과 민족의 구분이고, 둘째는 ‘민족적인 혹은 언어학적인 인간집단’과 ‘실제로 현존하는 집단’ 간의 구분이다. 르낭은 근대 민족이 ‘동일한 방향으로 진행된 사건들의 역사적 결과로서 형성됐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 속에 등장했던 큰 정치적 결집체들을 예로 제시했다. 인종 간의 구별이 사라질수록 민족 형성이 촉진된다는 게 르낭의 생각이었다. 르낭은 32년 전 고비노에게 보낸 편지에 쓴 것과 똑같은 말을 한다. “처음엔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인종이라는 개념은 시간 속에서 필연적으로 쇠퇴하게 된다.”
르낭은 이런 개념들로부터 민족에 대한 탁월한 정의를 이끌어낸다. “민족은 하나의 영혼이며 정신적 원칙이다. 이 영혼과 정신적 원칙은 사실상 민족이라는 개념 속에서 하나가 된다. 영혼은 과거 속에 있고 정신적 원칙은 현재에 속한다. 영혼은 과거의 기억에서 물려받은 풍부한 유산이며 정신적 원칙은 현재의 상호 간 동의, 상생 의지, 공동의 유산을 계승하려는 의지다.”
이전에는 일부 학자들에게만 사용되던 ‘셈어족’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된 건 르낭의 대중적 인기에 힘입은 바가 크다. 르낭은 1883년 1월 27일 반유대주의가 확산되는 상황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혈통과 종교로서의 유대주의’라는 제목으로 학회를 개최한다. 르낭은 개방적으로 정의된 보편적 종교(힌두-불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특정 사람들만을 위한 지역적 종교의 구분에서 논의를 시작했다. 유대교가 처음엔 인접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지역적 종교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유대교의 예언자들은 세계의 창조주로서 유일신, 선을 독려하고 악을 벌하는 신을 섬기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를 고안해냈다. “이러한 개념의 종교는 더 이상 민족적 제약에 구속될 수 없다.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인간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기 예언자들이 나자렛 예수와 기독교를 주창한 것도 이러한 개념 속에서였다. 유대교의 메시아주의는 인류 전체의 운명과 관련된 것이었다.
따라서 유대교는 그 보편성으로 인해 더 이상 한 민족만의 종교로 기능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고대 말기에는 유대교 포교 활동이 왕성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리스·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민족적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현재의 유대교는 매우 폐쇄적이고 개종에 엄격한 반면 과거에는 수세기 동안 모두에게 개방된 종교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현재의 유대인을 하나로 묶는 힘은 그들의 공통적인 교육 방식과 사회적 박해에서 비롯됐다. 르낭에 따르면 이것은 민족이나 인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르낭에게 그 당시 유대주의는 자유주의의 위대한 힘을 형성하는 한 부분이었다. “모든 종류의 유대인 분리 시도(게토)에 반대하는 것이 19세기의 소명이다. 나는 그러한 종류의 모든 분리 시도를 반대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인류에 큰 이바지를 했다. 다양한 민족 속에 동화되고, 다양한 민족적 연합체 속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유대인은 과거의 업적들을 미래에 계승해나갈 것이다. 유대인은 유럽의 모든 자유주의적 운동에 협조함으로써 인류의 사회적 진보에 이바지할 것이다.”
오늘날 독자들 중에는 그의 거친 묘사에 당황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저서 속에 반영된 당시의 시대 상황과 그의 사상이 가지는 풍부한 잠재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르낭은 제3공화정하에서 인민들이 성직자와 교회의 모든 위협에 대항해 공화정을 수호하려고 투쟁하는 모습을 보고, 소수의 자유주의 엘리트 지식인들과 교육을 통해 문명화된 일반 대중이 힘을 합칠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1870~71년 이후 반동적인 태도를 취한 르낭은 다시금 공화주의자가 된다. 1880년대에 쓰인 그의 철학적 연극은 그러한 새로운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르낭은 셰익스피어의 <폭풍>에서 영감을 받아 칼리반(민중)과 프로스페로(자유 사상가)의 연합에 대해 묘사한다.(8) “해방된 흑인 노예들 같은 열등 인종들은 문명의 전파자들에 대해 배은망덕한 무례함을 드러낸다. 속박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 그들은 문명인들을 압제자나 착취자, 사기꾼으로 취급한다. 엄격한 보수주의자들은 그들이 상실한 권력을 다시 회복하기를 꿈꾸며 계몽된 사람들은 새로운 체제를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그들에게 남은 건 단지 의미 없는 농담을 던질 권리뿐이다.” 칼리반은 단지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만을 상징하지 않는다. 프로스페로가 식민주의자를 상징한다면 칼리반은 분명하게 식민화된 민중을 대표한다. 에메 세제르(프랑스령 마르티니크의 반식민주의 시인이자 정치가-역주)는 이러한 점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사상에 응용했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탁월한 동양학자라고 칭송했던 르낭은 1892년 생을 마감할 당시에는 이미 과거의 인물이 돼 있었으며 (그의 순수한 철학적 작업들을 제외한다면) 그의 역사학적 작업들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사상의 변화 과정은 제3공화정의 근본적 요소였던, 철학적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결합을 이해하는 데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글·앙리 로랑스 Henry Laurens
저서로 <팔레스타인 문제>(Fayard, 파리, 전 3권, 1999·2003·2007)가 있다.
번역·정기헌 guyheony@ilemonde.com
파리8대학 철학과 석사 수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 졸.
<각주>
(1) www.infobretagne.com/renan-ernest.htm.
(2) 슐로모 산드(Shlomo Sand)는 그의 저서 <르낭이 본 민족과 유대주의>에서 에르네스트 르낭이 개최한 두 학회, ‘민족이란 무엇인가’와 ‘민족과 종교로서의 유대주의’를 자세한 설명과 함께 소개한다. 르낭이 생각한 민족의 본질과 유대인이라는 개념은 산드의 <유대인은 어떻게 발명되었는가>(Fayard·파리·2008)에도 계속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3) 에르네스트 르낭, <일반 서간문>, Honor? Champion, 파리, T.II, p.437.
(4) 다음 인용문들은 르낭이 1848~49년에 집필하고 1890년에 출판한 <과학의 미래>에서 따왔다.
(5) 에르네스트 르낭, <서간문>, 1권, Calmann-L?vy, 파리, 1926, p.119부터.
(6) 샤를 모라스(1868~1952), 프랑스의 극우·반유대주의 사상가.
(7) 에르네스트 르낭, ‘스트로스에게 보내는 편지’, <민족이란 무엇인가>, Presses Pocket, 파리, 1992.
(8) Caliban in OEuvres Compl?tes, Calmann-L?vy, 파리, 1949, p.413.
에르네스트 르낭은 누구인가